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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 파시즘, 파쇼(fascio, 묶음), 미시 파시즘, 우르-파시즘, Ur-Fascism

Jobs 9 2025. 1. 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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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떠난 것

 

The worst legacy of fascism is the one it leaves behind in the hearts of those who fought it.

 

 


미성숙 엘리트가 한국사회 지배, '이대남' 현상은 기득권들의 책략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는 누구보다도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2020년)를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지난해에 백 회 이상 강연을 한 대중 강연가이기도 한 그가 최근엔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칼럼집을 출간했는데 표지의 카피가 이렇다.

'왜 우리는 사회적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가. 환멸의 시대를 넘어. 이제 거대한 전환을 감행하자.'

김누리 교수는 그 '사회적 지옥'의 뿌리에 "분단이 만들어낸 불평등"이 있다고 본다. 그 토양에서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들이 국민을 지배"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그 과정에서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실종됐다"고 진단했다. 그 결과 "독재정권은 사라졌지만 완전한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 김누리 교수는 "2022년 대선에서 이대남 이슈가 불거진 것은 불평등 사회를 감추려는 기득권들의 책략"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사회를 개혁하려면 ① 대학입시 ② 대학서열 ③ 대학등록금을 없애야 한다"면서 이번 대선에서 이것들이 전면적인 이슈로 부각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한 대선 캠프에서 영입제안이 왔지만 이 3가지를 들어주지 않으면 못가겠다고 했다"면서 "대학등록금을 없애는 것에 대해서는 일부 후보쪽에서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모든 병의 근원은 분단... 그 뿌리에서 나온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
 
- 한국사회는 좋은 점도 있는데, 왜 그렇게 독하게 '사회적 지옥'이라고 비판하나요?

"저는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많이 인용하는데요. 아도르노의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학자의 기본자세는 Radical Denken(Thinking), Radical Criticism.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해라) 그렇지 않으면 타협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학자가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저는 학자가 정치인이 돼서는 안 된다고 봐요. 학자는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그것을 급진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 그게 학자가 사회에 기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독일에서 8년간 살면서 배운 가장 큰 것은 독일 지식인들이 굉장히 사납다는 거예요. 독일 지식인들이 2시간만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독일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나라예요. 정말 살벌하게 자기비판합니다. 독일을 오늘날 그나마 이 정도로 건강한 나라, 건강한 사회로 만든 것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처절한 비판 의식이에요. 우리도 그런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강연을 많이 하시는데요, 어떤 키워드로 '사회적 지옥'을 말하십니까?

"지금 한국 사회는 총체적으로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 중에서 이런 모든 병의 근원, 그것은 분단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룬 게 많잖아요. 아주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했고 놀라운 민주화를 이루었지요. 이건 사실이고 자랑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동시에 자살률이 너무 높고, 출산율을 너무 낮고, 또 많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죽어가고, 불평등이 너무 심하죠. 훌륭한 민주화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옥으로 가고 있는 이러한 불가사의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특이한 상황, 분단과 냉전 체제가 여전히 유지된다는 거죠. 뿌리가 거기서부터 시작됐지요. 그리고 그 뿌리에서 나온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이지요." 

- 분단이 한국사회 문제들의 핵심적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힘 인사들과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멸공' 퍼퍼먼스는 어떻게 보셨나요. 

"부끄러운 거죠.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하는 곳이 있을까. 우리는 지금 제 3세계 개발도상국이 아니잖아요?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다고 하는 나라에서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정치 이념을 가진 나라가 있을까. 비교적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국가적 수치죠. 부끄럽습니다." 

- 어떤 분들은 대한민국 사회가 굉장히 다이내믹하다고 그래요. 전에 없었던 일들이 막 벌어지고 있는데, 행정부의 검찰총장을 하던 분이 몇 개월만에 제 1야당의 후보로 등장했어요. 이런 게 독일에서는 가능할까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독일에서는 이런 걸) 법으로 금하고 있는지는 제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건 최소한의 정치 도의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죠. 검찰총장을 했던 자가 그 다음에 내가 대통령 후보에 나오겠다, 이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법조계에 있는 분들이 가장 시대에 뒤져 있고, 굉장히 전근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놀랍습니다. 특히 판·검사 이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30~40년 전의 세계에서 그대로 살고 있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 놀랍습니다." 

 


"한국사회 엘리트들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너무 오만" 
 
- 그런 분들이 학력을 보면 서울대 법대가 가장 많습니다. 교수님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더군요. '공부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잘못된 문화가 미성숙한 엘리트를 만들었다. 어찌보면 이 엘리트들도 한국 교육의 피해자다' 이를 좀 부연하자면?

"지금 한국사회의 엘리트들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오만해요. (2021년에 의사정원 충원에 반대하면서 의사협회에서 만든 홍보물을 읽고) 제가 너무 놀라서 외웠어요. '당신 같으면 어떤 의사에게 진료 받고 싶으세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만 매진한 의사 혹은 실력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에 의해서 공공 병원 의사가 된 의사', 이렇게 썼어요. 거기에 흐르는 그 엘리트주의, 그 오만함, 인간에 대한 예의 없음, 이게 과연 소수 의사의 문제일까요?

한국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거의 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양승태 사법부에서 저지른 그 끔찍한 사법농단 사태에서도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재판을 받고 있지만 처벌 받은 판사가 거의 없어요. 고급 향응을 받은 검사들도 일부만 불구속 기소됐어요. 어처구니없는 거죠. 이것은 국민을 깔보고 국민을 우습게 아는, 경시하는 그러한 엘리트들의 나라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저는 사실은 이걸 보면서 한국 교육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쯤되면 한국 교육은 파탄이다 라고 봐요. 그래서 이것은 적당히 빨아서 새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버려야 된다.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된다. 저는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 학교 교육에서 정치 교육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지금 한국의 교실에서 과연 우리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잠재적인 파시스트를 길러내는 건 아닌가' 이런 우려를 늘 가지고 있어요. 저는 한국 교육이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었던 중요한 부분이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기르는 교육의 부재라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 교육은 너무나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 거죠."

- 이번 대선에서는 이른바 '이대남'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요. 왜 대한민국 2022년 대선에서는 이런 키워드들이 등장하는 걸까요?

"시대착오적이어서 그런 거죠. 저는 이걸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68혁명이 없었다는 것이 이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또 몰아치는 구나, 과거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뒷다리를 잡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서구에서는 68혁명을 통해서 대체로 남녀 평등 문제, 사회적 권리의 균등성 등의 문제들이 정리가 됐어요. 이미 50년 전에 다 정리가 된 문제인데 지금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여전히 남아서 이렇게 아주 왜곡된 방식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거죠. 

68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 했잖아요, 당시에. 그 중에서 특히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로부터 여성해방 이것이 아주 들불처럼 유럽 전체로 번져나갔고요. 이것이 그 이후에 사회적, 법적으로 제도화 된 거 아닙니까. 지금은 이런 문제 자체가 나오질 않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경우는 그러지 못한 거죠.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 지배가 있었던 것이고요. 

그런데 이제 이것을 풀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은 사실은 뭔가요.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평등과 정의의 문제로 풀어야 되는데 이것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문제를 때로는 세대갈등으로 때로는 남녀갈등으로 때로는 노동과 노동 사이의 갈등으로 끊임없이 변형시키면서 지배하고 있는 거죠. 그러한 자본의 책략에 더 이상 빠져들어선 안 되는 거죠. 여기서 벗어날 때가 됐습니다." 

 

"3가지 없애야 한국사회 교육 정상화 된다"
 
 
- 강연장에서 만난 한 선생님의 질문을 대신 해드립니다. 학생들을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만들고 싶은데 정작 본인이 학교다닐 때 그걸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교육할지 모르겠다, 이런 선생님에게 뭐라고 말씀해주고 싶습니까?
 
"저는 브레이트의 이 말을 자주 인용을 하는데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통찰력이죠. 우리가 대학 시절에 파시즘과 싸웠는데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상당 부분 파시스트가 돼 있다고 하는 걸 아주 그냥 섬짓하게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일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그 선생님의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용어부터 바꿔야 된다고 봐요. 지금 한국 사회는 엄격하게 보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저는 한국 사회를 정직하게 보면 후기 파시즘 사회예요. 전기 파시즘은 우리가 넘어섰어요. 그건 제도로써의 파시즘이죠. 그런데 한국의 군사 독재 파시즘 30년이 남긴 유산들 청산됐나요? 제도, 의식, 관행, 이게 우리 몸에 그야말로 아비투스로 배어 있어요. 이것이 지금 청산되지 않았다는 거죠. 

한국인의 성격 구조를 보면 굉장히 권위주의적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파시즘의 유산이에요. 예를 들면 경쟁의식, 우열의식, 강자를 동일시하는 태도, 약자를 혐오하는 태도. 그 다음에 폭력성, 공격성, 흑백 논리 이런 것들이 다 파시즘의 전형적인 심리 유형이에요. 이게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배어 있잖아요. 이걸 빼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민주주의 시민이 되는 거죠." 
 

 





미시 파시즘

파시즘이란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이 말은 묶음[束]이라는 뜻이었으나, 결속, 단결의 뜻으로 전용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하게 되는 일반적이고도 보다 광범위한 배경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의 혁명적 기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위기적 양상은 모두 파시즘의 배경이 된다. 

즉,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은 ① 국제적 대립과 전쟁위기의 격화 ② 대량적 실업과 공황 ③ 국내정치의 불안정 ④ 기존 정당 ․의회 및 정부의 부패 ․무능 ․비능률 등 병리현상의 만연 ⑤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⑥ 정치적 ․사회적 집단 간의 충돌의 격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위기요인의 격화에 의해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게다가 기존 정치세력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할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파시즘이 등장한다.


이데올로기 


파시스트들 가운데는 확실한 권위를 가진 파시스트 선언은 없으나, 대개 그 공통적 이데올로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이다. 서구문명의 그리스적인 근원을 부정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이성을 불신하고,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억제하기 곤란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심리적으로 파시즘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신적(狂信的)이며, 편견이 없다기보다는 독단적이다.

② 기본적인 인간평등을 부인한다. 파시스트 사회는 인간불평등의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이상으로서 불평등을 확신한다.

③ 파시즘의 행동규칙은 여러 국민 내의,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폭력과 기만에 중점을 두고 있다. 파시스트의 견해에서는 정치란 우호관계로서 특징져지며, 정치는 적의 존재가능성 및 적의 전면적 섬멸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집단수용소와 가스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④ 엘리트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elite)는 국민들의 자치능력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오류에 반대하는 파시즘의 원리이다.

⑤ 파시즘은 단순한 정치제도보다는 오히려 생활양식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전체주의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즉, 정치적이든 아니든 파시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평생 인간생활의 전국면을 통제하는 것이다.

⑥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2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말한다.

⑦ 국제법과 국제질서에의 반대는 불평등 ․폭력 ․인종주의 ․제국주의 및 전쟁을 신념으로 하는 파시스트들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⑧ 파시즘의 조직 및 관리 원칙은 경제와 관련되는 협동체국가(協同體國家:corporate state)이다. 파시스트 경제는 국가관리의 자본 및 노동연합회로 세분되며, 각 연합회는 상업이나 직업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1당독재는 결국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최종 중재자이다.



범위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입장에서는 유럽 이외의 현상인 일본의 군부 파시즘이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네오파시즘운동이나 네오나치즘운동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대중사회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이탈리아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분명히 전승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푸대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확장된 영토에 있어서도 그것은 이탈리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바의 결과는 아니었다. 게다가 통화가치의 하락 때문에 프티부르주아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계급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더욱 빈곤해졌다. 이러한 형태의 국민적 좌절감은 근대 민족주의와 관계하여 권위주의적 정치형태의 기반을 쉽게 조성시켰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자연자원이 근본적으로 부족하였다. 게다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었으나, 대조적으로 남부에서는 후진농촌으로 방치되어 심각한 지역적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지주와 기업소유자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은 교양을 갖추고 권력을 장악하여, 재산과 교양이 없는 노동자 및 농민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계급적 불균형은 민주화의 기반을 잠식시켜 갔다. 선거권은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21세 이상, 읽고 쓰지 못하는 자는 30세 이상의 이탈리아인으로 제한되었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조직화된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해 가며 갈등을 야기 시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이러한 만성적인 위기상황은 중산계급들에게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게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파시즘이 자리 잡도록 환경을 조성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사회와 정치의 이러한 상황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이러한 분열증식적(fassiparous) 성격 속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무정치적(apolitical)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지적은 특히 지주와 정치가에 의해 가치가 박탈되고 있던 농민들에게 적중하였고, 국민적 좌절감, 심리적 열등감, 경제적 혼란, 정치적 분열중식성 등에 관련되어 파시즘은 발생되었던 것이다. 


1920~1922년 이탈리아 정국은 불안정하여 빈번한 내각교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정치의 분열증식적인 경향은, 국가적 열등감과 불확실성이 심하였던 이 기간 동안에 특히 주목된다.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이 그들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신망과 세력을 잃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성장 때문만이 아니라, 전시에 보였던 그들의 태도로 인하여 비애국적으로 낙인찍힌 여론 때문이었다. 산업체 소유계급들은 이러한 정국의 불안정성에 대한,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확실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가 ․군부 ․귀족이 당의 후원자가 되고, 제대한 군인과 도시 및 농촌의 중산계급이 대중적으로 파시스트운동에 참가하였다.


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고, 1920년 사회주의노동자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 도시의 시의회나 시청을 공격 ․점령하였다. 1921년 군부 ․경찰 ․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고, 1922년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로 변하였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결성된 ꡐ검은 셔츠대ꡑ를 이끌고 이른바 ꡐ로마진군ꡑ을 결행하였다. 10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결국 로마 진군은 정권접수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사였던 것이다. 당시 왕당파나 자유주의자 ․사회당도 안정된 정부를 조직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이탈리아의 권위의 위기와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층계급이 파시스트당에 정권을 물려준 것이었다.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국민들의 확고부동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924년 총선거에서 전투표의 65%를 얻는 성과를 올렸으나, 지역적으로 볼 때에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1924년 6월 파시스트에 의한 마테오티 사회당의원 암살사건은 파시스트 정권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비밀경찰의 확대, 언론 ․출판의 통제, 심지어 법령제출권까지 무솔리니의 동의하에 두게 하여 무솔리니의 정령(政令)은 그대로 법령으로 통용되었다. 1925년 파시스트당 이외의 결사를 금지시켰으며,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무솔리니의 영토확장주의의 야망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가장 열렬히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것은 정교조항(政敎條項:concordat)의 조인을 통한 가톨릭교회의 지지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ꡒ내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ꡓ라고 호언하였고, 국민들은 또한 무솔리니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로 여겼다. 이 때부터 파시즘이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적 패배와 전쟁으로 긴장은 결국 국내에 공황을 야기 시켰으며, 히틀러에 대한 맹종 등으로 국민적 불만은 파시즘체제를 붕괴시켰다. 1943년 무솔리니는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해임되어 왕당파에 의해 체포되고 파시스트당은 해산되었다.


미시 파시즘의 문제

미시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할 때 가장 많이 부딪치게 되는 비판은 한국처럼 거시파시즘이 공고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거시파시즘이 일차적이고 주요한 적이라는 것과, 이 경우 미시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자칫 잘못하면 눈앞의 이 가시적 적에 대한 공격을 뒤로 하고, 재귀적 반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다음과 같은 대화 속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요즘 논의되는 '자기 안의 파시즘', 일상의 파시즘 주장만 해도 그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입론인데, 문제는 이 일상의 파시즘을 온존시키는 것이 거시파시즘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극우 언론이라는 '한국적' 실상을 망각하는 것이에요. 그에 대한 견해도 없이, 좌파도 미시적 파시즘의 그물에 갇혀 있다고만 주장하면 '모든 게 내 탓이오'로 끝나버리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러나 거시파시즘과 극우 파시스트 논객들의 권력이 근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은 어떻게 구축되는가. 파시즘, 국가주의, 군사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는 일상적 관계의 외부에 있는 그저 추상적인 거시 구조들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의 영역 속에 내재하면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구체적 권력이며 일상의 미시권력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미시파시즘이야말로 거시파시즘의 구조를 뒷받침하고 온존시키는 기초가 아닌가. 그러므로 미시파시즘론을 제기하는 것은 거시 파시즘이라는 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거시 권력의 효과를 구체적 행동을 통해 분쇄함으로써 거시 권력의 기초를 침식해 들어가자는 것이다. 요는 문제가 발견되고 제기되는 각 순간마다 이 국소적 권력 관계 속에 체현되어 있는 미시파시즘을 공략하지 않는 한, 거시파시즘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거시 파시즘을 존속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들과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미시 파시스트적 요인들을 발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분자적 수준에서 투쟁할 때 우리는 몰적 수준에서 진정으로 파시스트적인, 거시 파시스트적인 구성체를 막아낼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시파시즘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격파하고자 하는 투쟁은 '내 탓이오'라는 개인적 반성의 문제, 혹은 '좌파에게도 도덕적 오점은 있다'는 집단적 고해성사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유죄냐 순수냐가 아니다." 이 경우, 정치적 행동에 미시파시즘에 대한 발견과 분석을 결합시켜야 하는 이유는, 거시 파시즘에 대항하는 집단조차도 은연중에 일상생활에서 파시스트적 삶의 양식과 어법을 존속시키면서 거시 파시즘이 구조화될 수 있는 기초를 공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활동가 집단 혹은 '진보적' 단체들의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 활동가와 그의 아내의 관계에서, 남성 활동가와 여성 활동가의 관계에서, 역할 분배와 고정의 다양한 양식 속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투쟁의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일상적인 활동양식과 권력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모든 파시스트적 부르주아적 남근지배적 권력형태, 인식, 태도, 욕망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집단적 삶의 양식과 윤리학을 창조하는 문제인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자본 착취와 국가 권력을 철폐하고자 하면서,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 자본과 권력이 보존해온 모든 분리차별과 위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부활시키는 문제를 정면에 제기한다. 가따리에 의하면,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의 계급투쟁은 부르주아 권력을 뒤엎고 나서도 부르주아 권력 형태가 국가, 가족, 그리고 심지어 혁명세력 속에서도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중앙집중적이고 관료제적인 권력이 혁명적 전쟁기계가 포함하는 필수적 조정 역할에 포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체적 수준에서 투쟁은 여러 단계와 중간 시기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미시적 수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먼저 코뮤니즘으로의 일종의 직접적 이행, 즉 관료, 지도자 혹은 활동가가 권력을 구현하는 한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폐지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드러난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에 대한 예속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가 가정에서 아내에게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면서 아내를 예속화한다면, 국가에 맞서 투쟁하는 집단들이 국가의 군대 조직과 동일한 훈육과 위계, 통제를 자신의 조직체에 도입하면서 군사주의를 온전히 작동시키고, 국가의 관료적 조정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활동과 소통 양식 속에 도입하여 대표체나 관료로의 대중 권력의 위임을 고착화하고 대중을 모든 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면, 활동가 집단이 민주적 중앙집중제의 원리를 고수하면서 대중의 혁신 능력을 부정하고 모든 체계를 중앙-전달벨트-대중의 결정 구조 속으로 수직적으로 위계화한다면, 그리고 합의와 조직적 통일, 일사불란한 대응을 이유로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모순과 이견, 차이를 억압, 제거한다면, 남성활동가가 여성활동가를 정복, 지배,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 언어적 성적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집단 속에 기존의 모든 성별 분업을 재생산한다면, 탈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집단이 보스(boss)의 양식과 배제의 양식을 온존시키면서 위계화의 논리를 내부에서 분비시킨다면, 설사 내일 당장 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 권력이 폐지된다고 하더라도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는 변함없이 부르주아 권력이 재생산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의 개념, 천의 고원의 수목형 조직과 리좀형 조직의 개념, 그리고 분자혁명의 여러 페이지를 관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주체성 양식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가따리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전복은 단지 물질적 노예화와 가시적 억압형태에 대항한 투쟁 문제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데서, 기능하는(functionning) 데서 완전히 대안적인 방식을 창조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주체성 양식의 창조>는 선결적인 구조 혁명 이후 점진적으로 개조되어야 할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자 자신이 소속한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로서 "미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즉각 실현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티 오이디푸스적 틀에서 보면, 그것은 주체집단의 배치를 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은 무의식적 욕망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혁명적 전의식은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사회적 종합, 새로운 권력을 겨냥하지만, 무의식적 리비도는 계속 권력의 낡은 형태와 그 코드들을 투여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집단은 설사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를 계속하는 한 예속집단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집단 속에는 초자아화, 집단의 위계질서, 욕망의 억압 메커니즘이 보존되면서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파시스트적 투여가 계속된다. 반대로, 주체집단은 그 리비도의 무의식적 투여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적 장 속에 침투시키고, 집단의 초자아도 위계도 없는 횡단적 네트워크를 실현한다. 천의 고원에서는 이와 같은 주체 집단이 수목형에 대비되는 리좀형 집단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단일한 중앙에서부터 상하 수직적으로 계열화되는 위계화된 구조가 아니라, 횡단적이면서 유연한 접속을 작동시키는 열린 체계이다. 여기서 '횡단적'이라는 것은 수직적이고 경직된 위계구조나 하향평준화된 균일성에 입각한 수평적 공동체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집단은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본과 동일한 방식의 분리차별과 위계화의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적 행동을 모든 형태의 단일화와 전체화로부터 해방시키고, 행동, 사유, 욕망을 피라미드적 하위분할과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식, 병치, 분기에 의해 증대'시키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미시적 수준에서 이러한 코뮤니즘으로 직접 이행하라는 것은, 단번에 유토피아적 기획을 완성하라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가따리는 "기원, 본성, 초월성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적 향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조직적으로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권력의 기호가 아닌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체집단은 하나의 고정된 집단 유형이 아니며, 언제라도 예속집단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이후에는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이라는 집단 범주보다는 배치 개념을 선호한다. 문제는 어떠한 관계를 구성해 나갈 것인가라는 배치의 문제이며, 이 때 배치는 완전한 적대의 소멸이라는 궁극목적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시 권력의 지주(支柱)이자 구체적 효과로서 집단 속에서 발아하는 모든 파시즘적 권력과 투쟁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성과 형식적 합의를 강조하면서 활동가와 대중, 남성과 여성, 장년층과 청년층 등 관계의 다양한 수위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입장들 및 관점들간의 충돌과 모순을 은폐, 억압하고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독특한 상황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다수자의 권력을 분석하고 또 그러한 권력과 투쟁하면서 지배적 전통의 위계나 분리차별을 침식시킬 수 있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권위를 획득하는 미시 파시즘 그리고 '진보진영'내로 끊임없이 이식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권력형태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이 노동으로부터 욕망을 단절시키고 내핍과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의 금욕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자신의 운동과 조직 속에 답습하고 있는 한에서, 활동가 집단이 "금기나 의례를 통해 리더십, 자기 동일시, 암시효과, 거부, 희생양 등 집단을 자기 자신 속으로 폐쇄해버리게 하는 현상들을 작동시키면서 규율과 훈육의 메커니즘에 기초한 예속집단의 배치를 재생산하는 한에서, 변혁 주체를 자임하는 남성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남근지배자로 스스로를 확립하는 한에서, 미시파시즘을 끊임없이 발견, 분석하고 이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매 순간 관계 구성의 매 국면마다 부르주아적 권력의 주체성 양식과 단절하고 새로운 주체성 양식을 창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르파시즘


우르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으며, 때로는 사복을 입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열고 싶어, 검은 셔츠단이 다시 이탈리아 광장을 행진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쉬운 일일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르파시즘은 가장 무해한 가면을 쓰고서 되돌아올 수 있다. 우리의 의무는 날마다 세계 어디서든 새로이 등장하는 파시즘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이다. 


— 움베로토 에코, 우르 파시즘 


움베르토 에코는 파시즘이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몇가지 특징적 요소를 중심으로 응축되는 유기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아래의 모든 특징을 충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에세이 우르파시즘(ur-fascism)은 그 특징을 다음 14가지로 나열한다.  

1. 전통 숭배
파시스트의 전통 문화는 배타적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신비로운 과거의 역사를 파헤치고 경외하기 위해 온갖 이론과 오컬트 등을 이용하는 것엔 관용적인 극도로 모순적이고 혼합주의적인 특징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파시스트들이 원하는 사실은 이미 잠들어 있는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으로 어떠한 지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모호한 해석만이 이어질 뿐이다. 율리우스 에볼라가 이 방면에서 악명이 높다.

2. 근대성의 부정
일반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과학 기술이 전통적 정신을 해친다고 생각해서 부정적으로 보지만, 과거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과학기술을 숭배했다. 이처럼 계몽주의의 유산인 자유주의, 합리주의, 인권 등은 부정하나 그것의 물질적인 산물인 과학과 생산력 등을 긍정하는 것을 반동적 근대주의라고 한다.

3. 행동을 위한 행동 숭배
행동은 지적인 성찰이 있기 전에 이루어져야 하며, 생각은 거세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에코는 이러한 특징이 비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연계되어 있다고 한다.

4. 비동의는 반역이다. 
비판적 사고는 차이를 만들며, 차이는 근대성의 징후이다. 현대 과학계에서 비동의는 지적 분석과 지식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서 존중된다. 파시스트는 비판적 사고가 파시즘의 부조리와 모순을 폭로시킬 것을 두려워 하여 이를 반역죄로 탄압한다. 

5. 다름에 대한 공포
파시스트는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이용하고 악화시켜 포퓰리즘적인 동의를 이끌어낸다. 공동체 내외부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선동이 대표적이다. 

6. 좌절한 계층에 대한 호소 
역사적으로 파시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좌절한 중간 계급을 향한 호소였다. 옛 프롤레타리아가 쁘띠 부르주아가 되고 있는 오늘날, 미래의 파시즘은 새로운 다수로 부터 지지세력을 얻고자 할 것이다.

7. 음모론에 대한 집착 
뚜렷한 사회적 정체성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파시스트는 일종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소속감을 부여한다. 파시스트가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적이다. 따라서 파시스트 사고의 뿌리에는 국제적인 음모에 대한 집착이 있다. 추종자들은 포위당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나치의 유대인 음모론과, 오늘날 온갖 음모론을 혼합시킨 QAnon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8. 적은 강하면서 약하다. 
파시스트는 추종자들의 굴욕감과 원한을 선동하기 위해 강하고 사악한 적을 상정하지만, 그들은 결국 인민의 압도적인 의지에 패배할 것이다. 즉 파시스트 레토릭에서 적들은 강하지만 약하기도 한것이다.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유대인은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초월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유전적 결함을 가진 열등인간이었다.

9. 평화주의는 이적행위다. 
파시즘 논리에선 투쟁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며 삶이 곧 투쟁을 위한 것이다. 여기엔 모순이 존재한다. 파시스트들은 민족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하여 영원한 전쟁을 부르짖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면 적들이 사라짐으로써 영원한 평화가 도래해야 한다. 파시스트들은 이런 모순논리를 해결하지 않는다. 

10. 약함에 대한 경멸
파시즘은 대중적 엘리트주의를 주장한다. 모든 시민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며 당원은 시민들 중에서도 우월하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이 민주적으로 위임된 것이 아닌 대중의 약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며 대중이 지배 받아야 하는 무력한 존재라 생각한다. 집단은 군사적인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상관은 그들의 부하를 멸시한다. 이런식으로 대중적 엘리트주의가 강화된다. 

11. 영웅을 위한 교육 
모든 신화에서 영웅이란 예외적인 존재이지만, 파시스트는 영웅주의를 일반적 규범으로 만든다. 이 영웅주의에 대한 숭배는 죽음에 대한 숭배와 이어진다. 파시스트는 영웅적인 삶에 대한 최고의 보상으로 선전된 영웅적인 죽음(카미카제 같은)을 갈망한다. 

12. 남성성 숭배
영원한 전쟁과 영웅주의는 어려운 일이기에 파시스트는 자신의 권력욕을 성적인 문제로 이전한다. 여성에 대한 업신여김 그리고 동정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비표준적인 성적 특징에 대한 비난과 편협함 등이 있다. 

13. 선택적 포퓰리즘
민주사회에서 시민은 개인의 권리를 갖지만 양적인 수치에 의해서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에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선천적인 권리가 없으며, 민중은 공통의 의지를 가진 단일체로 여겨진다. 대중은 만장일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신이 민중의 의지의 옳은 해석자임을 자처한다. 여기서 민중이라는 표현은 그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파시스트는 이 방식으로 기존 기관이 민중의 의지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민주적 기관의 파괴를 정당화한다. 

14. 신어
파시스트는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기 위해 빈약한 어휘를 사용하고 언어를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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