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기독교, 이단, 바울, 이단 괴수
‘교회’라는 조직의 이단 판별과 정죄는 항상 정당한가. 자기집단 보호 목적의 이단 정죄도 유효한가. 교회사는 진리성 부재의 이단정죄가 무효임을 알려준다.
기독교 출범기부터 정통신앙은 종종 ‘이단’으로 매도됐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대역병과 같은 이단 운동으로 보았다. ‘나사렛 이단’ 집단이라고 폄하했다.(행 24:5)
유대교 장로들과 변호사들은 기독교라는 이단 무리들을 총독에게 고소했다. 예수의 사도 바울을 ‘이단의 괴수’라고 했다. 바울도 자신이 이단이라고 일컫지는 무리의 사도임을 자인했다.(행 24:14)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이단 집단으로, 바울을 ‘이단의 괴수’로 본 까닭은 유대교의 관점을 이단 판별과 정죄의 주체와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에게 유감을 가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바리새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기독인들이었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율법을 지켰다. 그들은 바울이 디아스포라들에게 두루 다니며 다음 세 가지를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①모세를 배반하라 ②유대인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 ③유대교 관습을 지키지 말라.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들은 것은 소문이며,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유대인 전통을 따른다고 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의 지혜로운 권유를 따라 성전에서 정결례를 드림으로써 자신에 대한 유대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풀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 개종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행 15:19) 이 결정은 율법을 지키고 전통을 따름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유대교 배경을 지닌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를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단 판별의 주체가 기독교 진리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출범 단계에서 유대교 율법주의, 에피쿠로스 철학의 쾌락주의, 스토아 철학의 금욕주의를 경계했다.(행 17:18) 지중해 연안에 편만한 플라톤주의와 이원론 세계관에 기초한 영지주의를 배격했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지니셨음을 부인했다.(요이 1:7) 예수가 육체를 지니지 않았으므로 그의 출생, 수난, 죽음, 부활 이야기는 모두 허구라고 보았다. 영지주의 ‘적그리스도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부인했다.(요일 2:22)
바울은 이단에 대해 단호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 5:20~21)고 했다. 베드로는 교회 안에 이단을 몰래 끌어들여 부활한 주를 부인하고 기독교를 파멸로 몰고 가는 자들을 견책했다.(벧후 2:1) 디도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했다.
사도들의 이단 판별과 정죄의 기준은 기독교 진리성이었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포함한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근거해 있었다.
교회는 진리성이라는 이단 판별의 기준에 따라 마르시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2세기 중반에 등장한 마르시온은 유대교적 요소를 담은 성경들은 제거하고, 복음서 일부만을 편집하여 정경이라고 했다. 유대교가 말하는 창조자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한 악신이라고 했다. 마르시온주의에 대한 응전으로 기독교는 정경 66권을 확인했다.
몬타누스주의는 AD 150~170년 경 소아시아 지역에 성행했다. 성령에 대한 그릇된 사상, 거짓계시 운동, 영적 체험, 시한부 종말론 등을 외쳤다.
몬타누스주의는 일종의 영적인 개혁운동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저명한 라틴 신학자 터툴리아누스는 정통교회의 영적인 무기력함과 도덕적 해이를 탓하면서 몬타누스교회로 전향했다. 몬타누스주의의 이단 여부에 대한 학자들의 시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니케아공의회(AD 325년)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오늘날의 ‘여호와증인회’와 동일한 기독론을 믿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술수, 계략, 정치세력과의 결탁 등으로 정통과 이단의 자리를 바꿨다. 공의회 3년 뒤에 파면당한 아리우스의 감독직 사면운동을 펼쳤다. 교회를 이용하여 맹렬히 정통신앙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안디옥 총회(AD 328~329년)는 아리우스의 감독직 복권 결의를 했고, 이단자를 받아들였다. 황제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성직자들과 평화주의 성향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은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취했다.
교회의 티루스총회(AD 335년)는 정통신앙의 선두주자 아타나시우스를 성토하고, 그의 알렉산드리아교회 대감독직을 해임시켰다. 예루살렘으로 장소를 옮겨 속회한 이 총회는 아타나시우스를 이단자로 몰아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중도파 화평주의자들은 이 모임에서도 대세에 편들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사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정통신앙을 지지하는 새로운 황제 아래서,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으로 복직했다(AD 341년). 뒤바뀐 정통과 이단의 자리는 콘스탄티노플공의회(AD 381년)가 열리는 시점에 이르러 정상화됐다.
교회는 이처럼 정통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이단을 정통으로 뒤바꾼 전례를 지니고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이단판별 기준을 바꾸었다. ‘교회’라는 자기 집단의 이익, 기득권 유지, 구성원의 이탈을 막을 목적으로 행하는 이단 정죄는 호소력을 지닐 수 없다. 대어(大漁)는 놓아주고 피라미만 정죄하는 결과를 보일 수 있다.
초대교회가 겪은 이단정죄의 경험은 진리성 중심의 이단 논의와 판별이 절실함을 일깨워 준다. 정치적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진리에 기초한 정죄만이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갔던 갈림길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였다. 반면 랍비유대교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더욱 발전된 유대교였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전승의 기초에서 다른 권위구조로 믿음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가 “율법”과 “믿음”의 안티테제를 두 종교의 차이로 설정할 때 그 형태를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어떤 절대적인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이 대입을 상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아마 두 종교의 형태는 다른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제안된 바, 기원후 1/2세기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의 상대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대교가 율법 해석적인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 권위구조를 가졌다면 이것으로 독립된 길을 가고 있는 양 종교의 압도적인 “조직원리”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유대교에 카리스마적 인물이, 혹은 기독교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카리스마적 인물은 분명히 토라와 그 해석에 종속된다. 랍비 엘리에젤 벤 히르카노스(R. Eliezer ben Hyrkanos)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그는 할라카적 결정을 지지하기 위하여 세 가지 기적과 이른바 바쓰-콜(Bath-Qol)이라는 하늘의 음성조차 열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서기관 동료들 다수에게 굴복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었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자녀들은 나를 이겼다. 나의 자녀들이 나를 이겼다.”(bBM 59b). 여기서는 기적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비자발적인 율법해석이 가장 높은 권위로 보였다. 반대로 초기 기독교에서 그 카리스마는 곧바로 공동체의 법적인 체제를 배태시켰다. 클레멘스1서와 고대교회의 공동체 규율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의 관계에 있었다.
나의 견해로는 예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는 종교들 사이의, 특히 유대교와의 대화에서 결정적인 장애물은 아니다. 문제는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결의 절대화이다. 카리스마적 관계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속되기 위하여 이 관계는 변형되어야 한다. 이른바 “고기독론”(hohen Christologie)의 발전은 한편으로 강화된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의 발전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의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교의는 영적으로 ‘사로잡힌 상태’(Ergriffensein)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왜 유대인은 사도 바울을 미워하나?
이유는 간단하다. 사도 바울이 평범한 유대인 중 하나인 갈릴리 출신 청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신격화시킨 결과 기독교가 출생했다라고 유대인은 본다. 사도 바울이 구약과 완전히 다른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진보적 자유주의나 현대 신학자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가 역사라면 후자는 신학이다. 바울이 자신의 신학으로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를 왜곡시켰다고 이들은 말한다. 바울이 예수라는 인물을 헬라 식으로 각색했다고 본다. 그 결과 기독교 신학은 히브리 사상과 무관하다고 이들은 본다. 메시아닉 쥬의 신학자와 목회자 중 일부도 이를 지지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히브리 사상을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신약의 기록 언어인 헬라 사상을 각각 좋아한다. 유대인 사도의 시대가 끝난 후 헬라 문화권에서 출생하고 자란 속사도들의 시대가 시작됐다. 기독교 신학은 헬라화 되기 시작했다. 주후 313년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공인된 후 이런 성향은 가속화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속한 당시 제국의 황제에게 잘 보여야 했다. 정치와 종교 사이 결혼 또는 결합은 부활한 예수님이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부활 후 만인의 경배를 요구함이 없이 그냥 승천한 예수님이 이를 잘 증거한다.
이 때부터 앤티세미티즘(antisemitism)의 원조인 반유대주의가 교회에서 출발했다. 이후 유대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란을 천년 넘게 당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학의 창설자로 생각하는 사도 바울을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 찍는다.
사실 사도 바울은 골수 바리세파로서 유대인을 너무나 잘 안다. 그가 구약을 왜곡시킬 수 없다. 다메섹 로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유대교의 잘못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항상 반헬라적이었다 (골2:8, 18, 22-23절). 유대인들은 이런 바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사복음서의 역사적 내용(역사적 예수)과 바울 서신들의 신학적 내용(신학적 예수)은 서로 다를 수 없다. 전자는 역사적 사실이라면 후자는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다. 사복음서의 해설 집이 없다면 신학적 혼란이 발생하고 그 결과 예수님의 사복음서가 오히려 무너진다. 결국 성경의 진리와 기독교 자체가 무너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부활 후 승천한 예수님은 구약과 유대교에 정통한 사도 바울을 불러야 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신약 성경을 옹호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오경 자체도 잘 알지 못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5:39-47절)
구약을 모른다면 구약이 계시하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알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신학을 세운 사도 바울을 그들이 미워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모르기에 예수님을 신격화한 사도 바울을 유대인들은 싫어할 수 밖에 없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바울을 오해할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오경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더욱 선호했다 (마15:2, 막7:3, 5절). 이 점에서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모세오경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더 많이 읽고 토론한다. 장로들의 유전이 유대인들의 신앙 관습과 전통을 만들어 주었다. 원전보다 그 해석을 더 좋아한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막상 원전인 모세오경을 모른다. 예수님이 이를 지적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7:5-13절)
사도 바울은 이들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를 근본적으로 지적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절)
지식이 없는 열심의 원인은 원전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보다 장로들의 유전이 가르치는 인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구약 인용을 싫어한다.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은 원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그 해석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서서히 구약을 모르게 되었다. 알았다면 그들이 날마다 연구하는 구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대로 이스라엘 또는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 버려졌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이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9-13절)
사복음서도 이렇게 증언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21:24절)
이 예언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멸되었다. 유대인들은 나라와 국토를 잃고 온 세상에서 유랑민으로 살았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존재 목적을 상실한다. 이들이 예수님과 바울을 안 믿는 더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성경 기록 방식을 잘 모른다. 신약과 구약 사이 이질성(또는 불연속성)과 동질성(또는 연속성)이 있다. 신약은 한편 구약을 계승하지만 다른 한편 계승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은 신, 구약 사이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구약은 세상 나라 방식으로 그러나 신약은 하늘 나라 방식으로 각각 계시한다. 대상과 내용은 동일하지만 존재 양식과 표현 방법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한편 신, 구약은 같지만(동일성, 연속성) 다른 한편 서로 완전히 다르다(이질성, 불연속성).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이나 다윗 왕국이라는 세상 나라 형태로 계시된다. 당연히 잘 믿으면 형통한다고 구약은 가르친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민만을 위한 특정한 나라가 아니다. 구약식의 번영신학은 신약 시대 의미를 잃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세상의 왕국에서 왕자가 아닌 천한 장소인 마굿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출생한 이유이다.
또한 신약 시대 아들의 나라는 언젠가 망할 세상 나라 중 하나일 수 없다. 이를 잘 안 마태복음은 갑자기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기록했다. 이를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통치를 여전히 지상적 요소로 설명한다. 유대인이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에 매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미래 언젠가 다윗과 같은 영웅이 출현한 후 이스라엘을 구약의 다윗 왕국처럼 다시 세울 것이며 그 때 선민 이스라엘은 일등 국민으로 세계적으로 추앙될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보편적일 것이라고 이미 계시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8:11-12절)
이를 잘 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면 혈육을 초월해서 누구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가르쳤다 (갈3:29절). 유대인의 소원과 소망은 그들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망은 초림주를 구속주로 믿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윤리와 가치관 면에서 세상 나라와 완전히 달라야 한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선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통치한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선 불완전한 인간이 육적 선민으로 구성된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이들은 겉으로 이방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형이었다. 모형은 원형을 위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 당해 사라진 이유이다.
신약 시대 아들의 나라는 그럴 수 없다. 문화 면에서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과 달리 훨씬 우월해야 한다. 구약 시대 모세오경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모세오경은 인간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앞으로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신약 시대 아들의 나라를 이런 식으로 예언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모세오경을 이행득구의 방법과 수단으로 믿는다.
유대인의 인간론이 성경과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인간의 부패성과 타락을 부인한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義)에 달할 수 있다고 유대인은 믿는다. 당연히 유대인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왜 멸망 당했는지를 모른다.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결과였다 (마13:15절 참조).
둘째 구약은 혈육(血肉)에 의존했지만 신약은 혈육을 극복하고 초월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2-1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5-7절)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8-29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0절)
구약 시대 육적 의미와 중요성은 신약 시대 사라졌다. 니고데모에게 말한 예수님의 계시가 이를 잘 증명한다. 사도 요한도 중생한 사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고 계시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사람은 육이라면 하나님은 영이다. 그리고 육은 영원히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 중생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 나라와 인간론에서 신,구약 사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신약 시대 육적 이스라엘은 존재 의미와 목적를 잃었다. 육적 이스라엘은 주후 70년 발생한 성전의 멸망과 함께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이후 육적 이스라엘 또는 유다는 이방인들과 섞이는 과정을 지금도 겪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 구성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믿는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또한 이방화되었다.
예수님 당시 유다는 이미 세속화되었다. 아니 그 이전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재건된 제 2 성전인 스룹바벨은 주전 2세기 경 이미 더럽혀졌다. 귀환 포로들인 유대인은 더 이상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일 수 없었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주전 5세기 스룹바벨 성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말1:10절). 이미 유다는 하나의 세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종교 영역에서만 유다를 다스렸다. 반면 세상의 제국들은 정치 영역에서 유다인들을 다스렸다. 이미 정종이 분리된 유다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였다. 이 덕분에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은 더럽혀짐으로 그 역할을 마쳤다. 그 후 헤롯 대제가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확장시켰다. 그러나 헤롯 대제는 유다 지파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전을 재건했다. 헤롯 성전은 모세오경이 규정한 성전이 아니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헤롯 성전을 제 2 성전으로 기쁘게 인정했다. 신구약 사이 중간사는 선민 유다나 이스라엘이 어떻게 세속화되어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말라기서는 신약의 마태복음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신구약 사이 중간사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배제된다. 예수님의 성전 청소 사건도 좋은 증거이다 (요2장). 모세오경으로부터 벗어난 헤롯 성전을 헐라고 예수님은 과감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새로운 성전을 사흘만에 짓겠다고 예수님은 약속했다 (요2:19절). 그리고 공생애 말기 예수님은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했다 (마24:2절).
제 2 성전을 지은 스룹바벨은 다윗 후손이었지만 세상 제국의 총독으로 일했다. 그 후 다윗 후손이 귀환 포로들을 다스리지 않았다. 구약 시대가 이미 끝났고 유다는 신구약 사이 중간기 철저히 세속화 과정을 거쳤다. 그 후 예수님에 의한 대속 사역 결과 새로운 성전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 성전은 구약 시대처럼 세상에 속할 수 없었다 (마13장). 참 성전의 주인이며 하나님 나라의 왕인 부활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한 이유이다.
예수님이 세운 성전과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처럼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예수님의 행적과 바울의 가르침은 신구약 사이 동질성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을 가르친다. 신, 구약은 신학적으로 항상 동일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시의 성취 방법은 달라져야 한다. 이 결과 신, 구약은 다르면서 동시에 같다.
유대인은 이런 차이를 모른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신학적보다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반면 기독교는 성경을 역사적보다는 신학적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역사 면에서 신구약 사이 차이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신학 면에서 신구약은 동일하다. 신, 구약 성경은 모두 역사와 함께 신학으로 해석해야 한다. 신학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 또는 역사를 신학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학을 버리고 역사만 본다. 그 결과 유다의 역사는 성경적 구속사와 단절된 체 민족주의적 세속사로 변했다. 그리고 헬라 문화에 치우친 카돌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행한 반유대주의는 그 역사적 뿌리가 아주 깊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전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를 위한 논리적 근거를 세우며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근본적으로 공격해야 했다.
이들은 기독교의 헬라화 원인이 사도 바울의 신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에서 헬라 철학의 위험성을 잘 지적하며 교회를 경계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바울은 신, 구약 사이 동질성을 염두에 두고 항상 구약을 인용했다. 자신을 예언하는 구약 성경을 예수님 자신이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잘 아는 사도 바울도 구약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1:3-4절)
수태 고지도 이를 잘 증언한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 신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1:31-33절)
언제 예수님은 다윗의 위에 올라 영원히 야곱 집에서 왕 노릇할 것인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절)
문제는 부활 주 예수님이 누구의 주와 그리스도인가이다. 물론 만인의 주와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의 주와 그리스도만은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준 계시가 이를 잘 증명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절)
유대인들은 유다이즘을 위해 모세오경이라는 원전의 계시와 그 의미를 무시했다. 유대인들이 갈릴리 출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은 주원인이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주장하는 신학을 정리한 사도 바울을 유대인들이 또한 미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바울을 미워함은 바울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함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는 세워질 수 없다. 죄인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초림주인 아들의 구속 사역을 배제시킨 체 구약의 예언들이 최종적 권위를 가진 양 구약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조건 주장함은 비성경적이다.
초림이 빠진 재림은 신학적으로 아주 위험하고 비성경적이다. 결국 초림주를 부인하는 유대주의는 비성경적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1948년 독립 이후 예수님을 구속주로 믿는 메시아닉 쥬가 출현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다.
룻기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새로운 한 몸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선교의 마지막 변방이다. 기독교 교회가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이유이다. 주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