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루이 14세가 내린 퐁텐블로 칙령으로, 앙리 4세가 낭트칙령(1598)을 통해 인정한 신앙의 자유는 물론 개신교회들이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중 독일,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등으로 가장 많이 흩어졌다.
독일 정착 위그노, 철강산업 발전
1685년 루이 14세는 자신이 내린 퐁텐블로 칙령으로 “약 80-90만 명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으며, 남은 자는 겨우 1000-15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그 결과 프랑스는 심각한 인재와 두뇌탈출로 인한 극심한 경제적인 타격을 겪어야 했다. 반면 독일의 대선재후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은 1685년 11월 8일,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칙령을 폐지한 지 20일 만에 위그노들을 유치하는 법안을 공표했다. “종교의 자유를 잃은 모든 자여, 우리에게 오라. 시민권은 물론 농지와 집, 일자리와 정착에 필요한 자금까지 주겠다. 이곳이 당신들의 새로운 조국이 될 것이다.” 빌헬름은 위그노들이 보잘것없는 난민이 아닌 유럽 최고 상공업의 지식과 기술을 가졌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상공업 기술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부국강병의 꿈을 갖고 있었던 그는 위그노들에게 많은 특혜와 편의시설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특히 프랑스어로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까지 제공함으로 무려 2만 여명의 위그노들이 몰려(전체 3만여 명이 이주)들었다. 빌헬름이 당시 약속한 대표적인 건물로는 베를린 젠다르멘마르크트에 있는 프랑스교회와 베벨플라츠의 성 헤트비히스 성당 등으로 지금도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산업이 뒤떨어져 있었지만 위그노들이 가진 상공업과 화학, 기계공업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간산업을 구축할 수 있었다. 티센 철강과 같은 강력한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이것은 훗날 벤츠, BMW 등 자동차 산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제약회사 바이엘의 창업자 프리드리히 바이엘과 메르세데스 벤츠를 세운 카를 벤츠 또한 위그노의 후손들이다. 독일은 위그노들이 가졌던 상공업과 기계공업의 기술로 인해 유럽최대의 기술공업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독일의 경제부흥과 기계와 상공업의 발전은 독일이 전 세계를 상대로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키는 발판으로 삼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울러 전쟁에서 패한 독일이 다시 경제부흥과 독일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 또한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독일은 위그노들이 손에 쥐어 준 양날의 칼을 유용하게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크게 두 번 잘못 사용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정착 위그노, 해양기술 발전
퐁텐블로 칙령 300주년인 1985년 10월,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대통령은 전 세계에 흩어진 위그노 후손들에게 지난 과거를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한번 떠난 위그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박해를 받아 조국을 떠난 위그노들은 전 세계에서 번영의 역사를 이뤘다. 위그노들이 가장 많이 탈출한 곳은 네덜란드로, 약 65,000여명으로, 이중 200여명의 목사도 포함됐다. 네덜란드 또한 독일과 같이 프랑스어로 예배하는 교회당까지 제공하여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네덜란드는 위그노들을 수용하는 관용의 상징으로 암스테르담에 왈룬교회를 세웠고, 지금도 관용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다. 1700년경 암스테르담 인구의 약 25 퍼센트 정도가 위그노들이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암스테르담과 서프리즐란트의 지역에서 가장 먼저 위그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부여했다. 또한 1687년 위그노들은 집단적으로 네덜란드의 속령인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포도주 산업을 발전시켰다.
네덜란드는 이미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과 함께 추방된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여 무역업, 금융업, 해운업, 보석가공업을 발전시킨 경험이 있었다. 위그노들 대부분은 젊은 지식인들이 주류였으며, 제철, 염료, 화학 분야의 첨단 기술 보유자들이 많았다. 네덜란드는 해양 기술을 가진 위그노들이 몰려들자 날개를 단 듯 무역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제치고 17세기 동방 무역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했다. 토론토 대학, 니콜라스 터프스트라교수는 그의 저서 ‘근세 초기의 종교 난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네덜란드는 절대 군주가 없어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앞세워 전제정치를 추구했던 프랑스와 달리 종교적 관용정신이 강해 위그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을 국가 경영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일대학 임마누엘 윌러스틴 교수 또한 그의 저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 영국에 이어 20세기 후반 미국이 세계체제의 주도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정착 위그노, 산업혁명 발전
2019년 1월, 런던에 있는 유럽의 의약청(EMA) 본부에 게양된 유럽연합 28개 회원국의 국기는 곱게 접혀 상자에 담겨졌다. 영국이 선택한 브렉시트로 인해 유럽 의약청은 1995년 창립된 이후 24년 만에 런던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유럽 본사를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옮기겠다고 발표한 기업만 250여 곳이 넘는다. 영국이 16-18세기 6만 여명을 비롯 아일랜드에 1만여 명의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과는 나무나 대조적이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위그노들은 또다시 영국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그것은 영국의 찰스 2세가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위그노를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어 정착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구 제작자, 의류사업가, 방직업자, 은세공인, 기계제작자, 시계공, 실크디자이너 등 많은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모여들었다. 위그노들이 전수한 직물, 섬유기술과 기계공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었다. 영국은 위그노의 증기기관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다. 런던 박물관은 1700년도에 위그노들이 런던에 세운 교회가 23개 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런던을 비롯 노어위치, 사우드햄턴 등에 정착한 위그노들은 주로 실크 공장을 가동하며 실크 산업을 개척했다. 런던과 에식스는 위그노가 들여온 실크 산업의 중심지가 됐다.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 영란은행)의 초대 총재와 런던 시장을 지낸 금융인 존 허블런(1632-1712)은 위그노의 후손이다. 프랑스 물리학자였던 데니스 파핀은 “17세기 후반 영국에 건너와 초기 형태의 증기 엔진과 증기 압력 요리 기구를 발명한 사람들은 위그노였다.”라고 했다. 영국의 저술가 아푸아 허시는 “런던의 은행을 발전시킨 주역이 위그노들이었다.”라며 “브렉시트로 다른 민족과 국가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영국의 미래에 위험 요소”라고 지적했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대략 25,000여 명으로 주로 정밀기술과 의약품 제조기술자로 오늘의 시계와 은행산업을 이끌었다.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위그노는 1만 여명으로, 탄약기술로 미국이 개척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포함한 8명의 미국의 대통령들도 위그노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공예품 ‘파베르제 달걀’로 명성을 얻은 러시아 보석상 파베르제도 위그노의 후손이다. 프랑스가 위그노를 추방함으로 주변국가의 국력만 키워준 꼴이 되었고, 프랑스는 경제와 인재 유출로 산업기반이 붕괴되고 말았다. 종교탄압과 경제 기반의 붕괴는 100년 뒤에 일어났던 프랑스 대혁명과 무관치 않다. 절대왕정은 절대왕정에 의해 붕괴된 셈이다. 독일 막스 베버(1864-1920)는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직업의식에 충실했던 위그노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칼뱅의 개혁사상에 내재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의식과 소명이 서구의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