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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트란스옥시아나, 셀주크, 티무르 제국

Jobs 9 2025. 4. 2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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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아랄해에서 파미르고원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는 이중내륙국에 해당하는 공화국. 수도는 '돌의 도시(또는 보석의 도시)'라는 의미의 타슈켄트(Toshkent, Tashkent).

 

국호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호는 러시아어 표기인 우즈베키스탄(Узбекиста́н)에서 유래하며 우즈베크어로는 오즈베키스톤(Oʻzbekiston‍)으로 표기한다.7어원적으로는 고대 튀르크어의 외즈(*ȫŕ → 𐰇𐰔‎, '자신의')와 베그(*bǟg → 𐰋𐰏, '지도자·태수'), 페르시아어의 스탄(ستان / stân, '땅·나라')이 합쳐진 표현이다. 이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세운 나라', 즉 다른 민족에게 지배받지 않는 독립된 나라임을 뜻한다. 튀르크계 유목민족/씨족이었던 오구즈의 민족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백년간 이 집단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구소련 시기 구성국을 설립할 때 국호로 정해짐으로서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다.

 

 

 

우즈베키스탄의 국기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1월 18일에 제정되었다. 파랑은 밤하늘과 물을, 빨강은 생명력과 단결을, 초록색은 자연을 상징하고 초승달과 12개의 별은 우즈베키스탄의 전통문화와 나라의 희망을 상징한다. 12개의 별의 배치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게 아니라 알라의 아랍 문자 표기(الله)와 비슷하도록 배치된 것이다.

 

 

민족 구성

중앙아시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고, 구소련 구성국 중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국가이면서 유럽이 아니고 아시아 국가중에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국가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다. 다만 아프가니스탄을 중앙아시아로 포함하면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나 아프가니스탄은 남아시아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으므로 순전히 중앙아시아로 간주되는 국가 중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이 가장 인구가 많다.

 

우즈베키스탄에는 130가지가 넘는 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공식 통계상으로는 80% 이상이 우즈베크인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은 타지크인이다. 또한 전체 인구는 2022년 기준 약 3,400만 명으로 소련의 구성국이던 중앙아시아 5개국 중 인구가 가장 많다.

 

통계상 타지크인 비율은 공식적으로는 약 5% 내외다. 단 여러 학자들이 비공식적으로 약 25-35% 정도로 추정한다. 학자들마다 추정하는 비율은 구체적으로 조금씩 다르다. 소련 성립 이전 부하라 칸국 시절에는 우즈베크인과 타지크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며 섞여 살았다. 20세기 초까지 쓴 '사르트(Sart)'라는 용어는 이 지역의 타지크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즈베크인을 뜻했다. 이후 민족주의로 두 집단의 민족정체성이 강화된다. 과거 소련의 역사학자는 우즈베크 민족인 튀르크계와 타지크 민족을 인종적으로 옛부터 상호 밀접하다고 인식했다. 민족을 바탕으로 한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1924년부터 1929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기는 했으나 소비에트 정부가 타지크 ASSR를 우즈베크 SSR 내부의 자치공화국으로 편성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 비공식적인 주장을 하는 학자는 우즈베키스탄 내의 타지크인은 여러 이유로 우즈베크인으로 많이 등록한다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의 민족주의 정책 때문에 타지크인 일부가 차별을 받았다.11 다만 차별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타지크어 금지 정책에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계 타지크인이 많이 살던 도시였고12 현재에도 타지크인이 다수인 곳에서는 여전히 타지크어를 일상생활에 널리 쓴다. 사마르칸트의 주민의 약 70%, 부하라의 약 90%정도가 타지크어를 모어로 쓴다. 물론 소련 시절 우즈벡 내에 거주하던 타지크인이 우즈베키스탄인과 동화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외에도 카자흐인, 러시아인, 카라칼파크인, 타타르인, 투르크멘인이 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과 크림타타르인도 있다. 심지어는 극소수의 우크라이나인과 독일인, 흑해 그리스인15까지 살정도로 CIS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모여 산다. 그러나 우즈베크인이 전 인구의 81%라 러시아인 인구가 많은 인접국 카자흐스탄만큼 인종이 다채롭지 않다. 우즈벡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다. 고려인이 많아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다. 하지만 우즈벡의 우즈벡인 우대정책으로 많은 고려인이 한국으로 간다.

 

한국에서 '우즈벡인'은 튀르크 민족의 '우즈베크인(Oʻzbeklar, Узбеки)'과 '우즈베키스탄 국적 사람'의 줄인말로서의 '우즈벡인'이라는 뜻이 있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러시아인(Oʻzbekistondagi ruslar, Русские в Узбекистане)'을 우즈벡 국민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우즈벡인'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이를 모르는 사람은 민족으로서의 우즈벡인과 매우 헷갈린다. 대체로 민족으로서의 우즈벡인은 우즈벡이 있던 지역이 청동기부터 유럽에 영향을 준 안드로노보 문화권에 있어 코카소이드의 영향을 받으며 서구적/동양적인 느낌이 공존한다. 다양한 코카소이드 및 튀르크 집단이 이 지역에 살아 여러 형질이 나타난다. 피부가 하얀 사람도 많지만 어두운 사람도 있으며 사막에 살아 햇빛을 많이 받아서 후천적으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도 많다. 고대 인도유럽인의 원류는 피부 색깔이 어두운 집단도 있어 피부가 어두워도 코카소이드다.16 반면 이웃한 카자흐인은 우즈벡인에 비해 동양인의 느낌이 더 강하다. 물론 중앙아시아 특성상 서구적으로 생긴 사람도 전반적으로 꽤 있으며 카자흐스탄의 경우 우즈벡과 달리 러시아인이 워낙 많이 살아 외형적으로 우즈벡보다 더 다양하다.

 

 

미수다로 알려진 구잘 투르수노바. 2011년에 한국으로 귀화했다. 하지만 이쪽은 러시아계 우즈베키스탄인으로, 본인이 밝히기로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즈벡인은 동서양이 조화된 느낌이 있어 꽤 넷상에서 미인의 나라로 알려졌다. 한가인이 밭을 갈고 김태희가 소를 몬다고 하는 농담도 있다. 웰스(Wells)의 조사에 의하면 우즈벡인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중앙아시아에서 흔한 C(11.5%), 중동에서 흔한 J(13.4%), 유럽에서 흔한 R1a(25.1%)와 R1b(9.8%), 동아시아에서 흔한 O3(4.1%), 남아시아에서 흔한 F(7.9%)가 모두 있다. 코카소이드 같은 느낌도 있고 동시에 동양적인 느낌도 있다. 동양인같이 생긴 사람도 서구적인 느낌이 강하다. 또 하플로그룹의 비율에서 추측할 수 있듯 유럽계 하플로그룹이 나타난다. 왜냐면 이란 사람이 옛부터 우즈벡에서 살아왔는데 우즈벡은 예전엔 페르시아의 영토였고 그리스인이 살던 박트리아 왕국과 이란계 유목기마민족인 스키타이가 살던 땅이어서다. 즉 같은 튀르크지만 동양인으로 보이는(하지만 동아시아인보다는 어느 정도 서구적이다.) 키르기스인이나 카자흐스탄인이 사는 키르기스와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인이 워낙 많이 살아도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스탄인이 워낙 몽골로이드의 특징이 많이 보여서 동양인과 비슷한 사람도 많지만 우즈벡인은 키르기스인이나 카자흐스탄인에 비해 코카소이드와 투라니드 인종인 튀르크의 특징이 더 있다. 우즈베키스탄인과 달리 키르기스인이나 카자흐스탄인은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나중에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이동해 정착해 좀 더 동양적이다. 물론 러시아계 우즈베키스탄인도 있고 러시아도 한국 남성에게 "미인의 나라"로 유명하니까 우즈벡도 그러한 것은 자연스럽다. 인구 전체의 3.7%인 러시아인이 아니어도 우즈벡에 미인이 많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반쯤 농담으로 '장모님의 나라'라고 한다.

 

또 우즈벡은 다인종 사회다.18 우즈벡인은 코카서스 투란 인종의 튀르크가 동서를 오가며 교류해 만들어졌으며 중앙아시아에 옛부터 있던 튀르크는 투란 인종(Turanid race)으로 이 코카소이드는 서구 유럽보다 동양적인 백인이다.19. 민족은 생물학적보다 사회적 개념이다. 민족 참조. 사실상 지구 대부분 민족은 혼혈이며 몽골로이드와 코카소이드의 구분 또한 편의상 큰 틀의 분류고 유전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우즈벡 전체 인구의 81%가 우즈벡인인데 한국인이 모두 생김새가 각자 다른 것처럼 우즈베크인도 다 다르게 생겼다. 보통 한국에서 "혼혈"하면 떠올리는 유럽계 백인과 혼혈은 드물다. (러시아인 및 기타 슬라브인은 20세기 이후에 오고 이들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혼혈은 상당히 적다.) 다만 이란계인 타지크인과 문화적으로 상당히 가까워 이들과 통혼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이 있다. 사실 우즈베크/타지크와 같은 언어로 구분되는 현재의 "민족"은 종교 또는 지역등이 더 중요한 잣대다. 우즈베크인과 타지크인은 언어는 다르지만 종교와 문화가 대개 같아 섞여 살았고 현재까지도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이는 오스만 제국 등 근대 이전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개인차가 크지만 우즈베키스탄 사람은 대체로 서구적인 느낌과 동양적인 느낌이 공존한다.

 

한국 사람이 대한민국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에 대해 오해하는데 우즈베키스탄은 세속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국민 대부분이 무슬림이라 결혼 전에 처녀를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한국인과 결혼해도 돼지 고기와 술을 하지않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이며, 중앙아시아 치고는 이슬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꽤 있는 나라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3.7%인 러시아인은 무슬림이 아니며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인이나 고려인과 다르게 개방적이며 유럽식 자유 연애를 한다. 그래서 사실 술집 등을 다니는 우즈벡 여성은 러시아계인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우즈벡어는 잘 못 한다. 다만 수도 타슈켄트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은 우즈벡어도 꽤 할 줄 안다. 우즈베키스탄 여성은 우즈벡어와 러시아어 둘다 쓴다. 타슈켄트에선 러시아어를 더 많이 쓰지만 우즈벡인은 우즈벡어가 거의 다 가능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구잘은 우즈벡어를 거의 못한다. 구잘은 러시아계 우즈베키스탄인이다.

 

미수다에서 유독 우즈벡 출신 미녀가 많은 영향도 약간 있다. 우즈벡 말고도 중앙아시아에 미인이 많다는 이미지다. 왜냐면 서구적으로 생긴 사람이 많아서다. 이것은 동아시아와 비교하면 당연하다. 하지만 우즈벡에서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의 여성들이 미녀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기회의 땅"이라는 막연한 꿈과 환상을 갖고 출장갔다 미녀는 죄다 한국에 가서 여기엔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 만약 피부가 완전히 하얀 유럽인만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늘씬하고 이쁜 사람도 많다. 백인 유럽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러시아인을 보고 실망한다. 하지만 우즈벡 여자도 상당히 이쁜 여자가 많으며, 이는 취향 문제다. 

 

사실 한국에서 "우즈벡 미녀"라고 나도는 사진은 대부분 유럽 백인이며 전혀 우즈벡과 관련없는 사람이 많다. 한국 남자가 생각하는 우즈벡 미녀는 우즈벡인이 아니라 우즈벡에 사는 러시아인 즉 우즈벡에 사는 유럽인이다. 많은 남자가 우즈벡을 유럽 백인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우즈벡에 와서 우즈벡은 유럽인이 사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는 우즈벡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등 다른 중앙아시아 나라도 같다. 코카소이드의 특징이 꽤 보이지만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인과 같은 외모의 사람이 사는 나라는 절대 아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러시아계 백인이 아닌 우즈벡인, 특히 몽골로이드 형질이 강한 키르기스계나 타타르 우즈벡인을 보고 고려인으로 짐작하는 한국인이 상당히 많다. 키르기스와 타타르는 고려인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많다.

 

우즈벡에서 이들이 좋아하는 유럽 백인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모두 합쳐 10%도 안 된다. 우즈벡은 일부 한국 남자가 상상하는 것처럼 러시아 등 유럽 백인이 다수가 아니라 우즈벡인이 다수다.(약 81%) 서구적인데 동양적이고 동양적인데 서구적이다. 오히려 카자흐스탄에 유럽계 민족이 많이 산다. 카자흐스탄은 한때 러시아인이 50%였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선 우즈벡과 다르게 카자흐족이 키르기스와 같이 더 동양인처럼 생겼다.

 

실제로 유독 우즈벡에 환상을 가진 한국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우즈벡보다 민족 구성이 다양한 카자흐스탄에 미녀가 많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가깝고 러시아의 카잔과 같은 도시에서 카자흐스탄에 가 사는 러시아인이 많아서다. 카자흐스탄에 우즈벡보다 러시아인이 훨씬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인 루슬라나 코슈노바도 카자흐스탄인이다. 유럽 백인을 좋아하는 남자는 그냥 러시아, 동유럽, 서유럽의 백인 여성을 좋아하는 거다.

 

한국 인터넷에서 우즈벡 미녀 사진이라면서 나도는 것 중 상당수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여성의 사진이다. 심지어 핀란드나 리투아니아 여성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우즈벡 여성 사진이라고 우긴다. 이런 눈속임이 딱 드러나는게 "우즈벡 학생"으로 올라온 사진 속 배경이 우즈벡 학교라고 하기에 시설이 너무 좋다. 전형적인 북유럽 교실 사진 올리고 우즈벡이라고 거짓말한다.

 

중앙아시아는 유럽이 아니다. 구소련 시절이 있었고 사람들 이름도 러시아 이름처럼 끝에 ~프와 ~바가 있어서 자꾸 러시아인으로 오해하는데 이름과 성도 러시아와 다르고 이름과 성에 이슬람 종교나 튀르크에 관한 이름이 많고 원래 이 지역 사람의 조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아리안, 서돌궐, 카라한 왕조, 차가타이 한국, 티무르 제국 등의 중앙아시아인이다. 우즈벡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같다.

  

우즈벡 미녀(우즈벡 아니어도 다른 주변 국가도 포함)하면 러시아계가 아닌 우즈벡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동양적인 외모와 서양적인 외모가 있기 때문에 이란, 그리스, 터키 여성처럼 아름다운 미인으로 본다. 다만 대중에게 하필이면 동유럽인이나 유럽인으로 오해됐다. 하지만 언급했듯 미녀는 어디에든 다 있다. 그러므로 그냥 "그런 소문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한다.

 

 

 

 

 

 

우즈베키스탄, 역사

 

실크로드의 중심부 트란스옥시아나의 역사가 사실상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로, 고대부터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로 번영했다. 일찍부터 낙타를 길들여 사육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등의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고도로 유명하다.

 

*트란스옥시아나

중앙아시아 서쪽의 아무다리야 강(Amu Dar'ya) 강과 시르다리야 강(Syr Dar'ya) 사이에 있는 땅. 메소포타미아처럼 두 개의 큰 강들 사이에 평원이 있으며, 이곳에 적은 규모의 문명과 중앙아시아(또는 투르키스탄)의 독자적 문화들이 나타났다.

 

 

고대

 

기원전 3300년부터 우크라이나의 얌나야 문화와 흡사한 아파나시에보 문화권이 나타나서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벨라루스 일대부터 동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일대까지 유사한 양식의 청동기 문화가 전파된다. 아파나시에보 문화는 보르세미스 문화와 접촉하면서 몽골 서부지역에 기원전 20세기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더불어 인도유럽계 문화가 알타이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역사 기록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권 하에 들게 되는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을 "옥수3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의 트란스옥시아나라고 불렀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멸망하면서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이 되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행정력이 잘 닿지 못했다고 한다. 향수병 때문에 그리스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 그리스계 이주민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대신 기원전 256년경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우며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했다. 이들 박트리아 그리스인들은 인도와 활발한 교역을 벌이며 그리스어로 고대 인도의 문화와 역사, 종교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 서북부 영토에 살던 토하라, 스키타이계 부족들이 흉노에게 밀리면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비옥한 박트리아를 침공하여 기원전 125년경 멸망시키면서 트란스옥시아나의 그리스인들은 보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우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박트리아에 정착한 토하라인들은 쿠샨 왕조를 세우고 북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웃한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 문자가 그대로 도입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아프라시압(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는 아람 문자를 차용한 카로슈티 문자 등이 사용되었다. 카로슈티 문자는 중앙아시아와 오늘날 파키스탄, 인도 북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는데 이는 인도 문화권과 중앙아시아가 서로 밀접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 왕조 때부터 인도와의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경제는 토하라인들의 지배 하에서 계속 발전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흉노족이 팽창하고 오리엔트에서는 파르티아가 지중해에서는 로마가 번영하는 사이에 트란스옥시아나의 도시들은 중국과 인도의 물산을 로마로 수출하는 중개무역 거점이 되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남부 일대와 타지키스탄에 대규모 관개 시설이 건설되면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쿠샨 왕조의 유산이 하나 더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들어온 인도-그리스인, 인도-스키타이인, 토하라계 쿠샨인들은 당시 인도에 주류 종교였던 브라만교로 입교할 경우,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브라만교 대신에 인도의 상인들이 많이 믿던 종교 중 하나였던 불교로 개종하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 불교가 유행하게 되었다. 간다라 미술은 우즈베키스탄 일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중세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학문 도시 티르미드(테르메즈) 근처 북동쪽의 달베르진 테페(Dalverzin Tepe) 유적에서는 간다라 양식의 미술품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한나라의 장건이 페르가나(대완), 소그디아나(강거), 박트리아(대하)를 탐사한 후 흉노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통상을 하며 부를 축적한다는 정보를 전하자, 한나라는 6만 군대로 무력 시위를 벌이며 여러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에게 흉노 대신 한나라와 직접 통상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영향력은 트란속시아나의 동부의 타림 분지 일대에만 매우 약하게 국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중앙아시아에서 번영하던 불교는 중국에서 한나라가 쇠퇴하고 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고대 말

 

동서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 지역에는 설일체유부 대승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유행했으며, 많은 불교 대학이 건립되었다. 신라의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당나라의 고승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등장한다. 테르메즈의 불교 사찰에서는 그리스-박트리아 문자, 카로슈티 문자, 브라흐미 문자 이렇게 3가지 어문으로 쓰인 명문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당시 승려들이 번역에 능통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가 5~7세기부터 점점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으며,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의 상권을 장악한 소그드인들을 중심으로 마니교가 널리 유행했다. 마니교 교리를 배운 소그드인들은 유럽에 가서는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중국이나 인도에 가서는 불교 신자 행세를 하면서 어려움 없이 통상을 할 수 있었다. 고대 말 이 지역의 역사는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소그드인들이 여러 유목제국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동서 교역을 주도하는 역사이기도 했다.

 

 

파르티아 왕국이 붕괴된 후 서기 5세기 무렵 백흉노 이른바 에프탈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이 득세하였다.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를 근거지로 둔 이들은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토하라계 혈통의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트란스옥시아나부터 인더스 강 일대까지 장악했던 에프탈인들은 이전의 유목 왕조들과 다르게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고 소그드인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등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458년 페로즈 1세가 사산 왕조의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후에 484년 헤라트 전투에서 페로즈 1세를 전사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부 호라산 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서기 557년 돌궐과 페르시아 연합군이 부하라 근교에서 에프탈족 대군을 포위 공격해 섬멸하면서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에프탈족은 서기 600년경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 중심부의 이스파한을 습격하면서 페르시아와 전면전을 선포했고,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는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에프탈 카간을 죽이고 호라산 일대를 전부 탈환하였다 한다. 에프탈족이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에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에 서돌궐 제국이 에프탈족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국은 여러 소국으로 쪼개지며 멸망하였다.

 

오늘날의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지역으로 이동한 에프탈인들은 인도에서 "후나스Hunas"나 "투르슈카스Turushkas"라고 칭해졌으며,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 승려들은 이들의 왕 미히라쿨라8가 불교 승려들을 학살하고 여러 사찰을 파괴하여 불교의 교세가 많이 꺾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트라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미히라쿨라 왕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에 해당하는 사갈라를 근거지로 하여, 520년 신드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의 불교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한다. 중국인 승려 현장은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정복하고 승승장구하던 미히라쿨라 왕은 굽타 왕조의 저항에 막히면서 인도 아대륙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히라쿨라 사후 신드, 간다라, 카슈미르에 있던 에프탈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인들과 동화되었다.

 

에프탈족을 이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흥한 서돌궐 제국은 소그드 무역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동아시아 물산을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수출하는 무역을 장악했다. 소그드인들은 자신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지켜주고 도시의 성벽을 보호해주는 튀르크인 전사들과 대개 평화적으로 교류하며 서로간의 통혼도 잦았다. 유목 제국은 전사 집단에게 사치품을 주어 위신을 세워주어야 전사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데, 서돌궐 제국은 소그드인들의 동서 무역을 통한 무역 수입만으로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소그드인들은 에프탈족과 서돌궐 제국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해 준 것 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생산되는 여러 공산품을 직접 공급하고 외교관으로 봉사하는 등 이들 유목민들이 단순한 전사집단에서 국가로 성장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서돌궐 제국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서돌궐 항목 참조 바람.

 

고고학을 통해 트란스옥시아나의 문서 상당수를 발굴하고 해독한 결과 고대 말 소그드인과 돌궐 제국의 튀르크인 사이의 통혼은 광범위하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소그드인과 튀르크인 간의 혼혈은 유목민에 대한 고정관념대로 전시 강간이나 노예화에 의한 것이 아닌, 상호 공존 관계에서 사실상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통혼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의 결혼 관련 문서에는 이혼 시 위자료 관련한 조항이 세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상호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경우였다. 당시 발견된 유골 중 상당수는 이미 동아시아계와 서아시아계 유전자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7세기 중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르칸드 구도심 아프라시압의 궁중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을 차고 있는 고구려 사신들로 추정되는 사신들의 모습도 그려져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과 영향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세

 

7세기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이 지역은 8세기부터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지역을 "그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의 "마와라아 안 나흐르(ما وراء النهر)"라고 칭했다. 이슬람 세력 외에도 당나라가 이 "마와라아 안 나흐르"(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토번 제국에게 번번히 막히고 결정적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에게 패배하면서 저지당했다.

 

이슬람의 도래 이전 불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와 유목민 특유의 천신 신앙 텡그리 신앙의 각축장이던 이곳에는 이슬람 수피들이 선교를 하거나 불교 대학이 이슬람 학교로 개조되면서 점차 이슬람화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수피들은 고행을 강조하는 중앙아시아 설일체유부 불교 교리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는데, 불교 지역에 이슬람을 선교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 토착 이슬람이 불교적 성격을 띄게 된 것.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발흐, 타지키스탄의 후잔트는 고대의 불교 대학 시설과 시스템을 물려받은 덕분에 페르시아의 니샤푸르, 메르브와 함께 중세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하디스를 신뢰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부하라의 무함마드 알 부하리(810년 ~ 870년), 페르가나의 천문학자로 유럽에 알프라가누스(Alfraganus)로 알려진 알 파르가니(861년 사망), 부하라 근교에서 태어난 이븐 시나,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베루니 시 출신인 역사학자 알 비루니, 테르메즈 출신의 하디스 가 앗 티르미디 등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 도시 출신이다. 알 비루니는 한 편으로는 역사학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호라즘 시에서 4.8미터 높이의 지구본을 제작했으며 동시에 <고대국가들의 연표>라는 책에서 이집트와 칼데아(바빌론), 그리스와 페르시아, 유대와 아랍 역법을 서로 체계적으로 비교하는 기록을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알 비루니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인도의 역사와 문화, 종교에 대해 광범위한 기록을 담은 명저 <키탑 알-힌드>를 저술했다. 이전 아랍인들이 쓴 인도 견문록들은 인도인들에 대한 간략하고 피상적인 기록으로서 힌두교나 힌두철학 및 인도 역사 자체에 대한 설명이 부실했다면 알 비루니의 키탑 알 힌드는 인도의 종교와 철학, 과학과 역사 전반에 대해 상당히 폭넓은 기록을 담는데 성공하였다.

 

730년대 아랍인들은 이 지역에서 많은 수의 에프탈족과 튀르크족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튀르크족 노예들이 군인 노예나 집사로 각광받으면서 이 지역에서 포로로 잡힌 튀르크인 노예들이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스 왕조에 꾸준히 공급되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가 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사후 분열되고 힘이 약해지자 정교한 관료제가 흔들리게 되고, 이를 틈타 페르시아인들이 호라산과 마와라아 안 나흐르 일대에 반독립적인 나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타지크계 타히르 왕조가 그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압바스 칼리프조의 제 8대 칼리파 알 무타심은 중앙아시아에서 잡혀온 튀르크인 노예 병사들에게 기대기 시작했고, 아랍인 군인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튀르크인 노예 병사들과 유혈 충돌을 벌였다. 알 무타심이 아랍인 군영과 튀르크인 군영을 분리시키고 튀르크계 군인들을 편애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아랍인들은 점점 병권에서 밀려나고, 이는 튀르크계 노예 군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구매자였던 아랍인들을 점점 찍어누르는 계기가 되었다. 타히르 왕조를 간신히 제압하는데 성공하나 했더니 오늘날 이란 남부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사파르 왕조라는 이름으로 봉기하였다.

 

 

압바스 칼리파들은 사만 가문에게 사파르 반란군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고, 사파르 군대를 제압한 사만 가문은 명목상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하되 세금을 보내지 않는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한다.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 문화를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완전히 뿌리내리는데 성공했으며, 행정 용어에서 소그드어와 아랍어가 밀려나고 페르시아어가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만 왕조는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던 나라였는데, 사만 왕조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금화와 은화가 신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중세 초 북유럽에서 사용되는 모든 화폐 중 1/3 이상이 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트, 발흐의 조폐창에서 발행된 것이라 한다. 사만 왕조에서 주조한 화폐는 다시 바그다드 등 중동으로 흘러간 후 모피와 노예 수입 대금으로 북유럽으로 흘러갔다. 또는 스웨덴/러시아계 바이킹들이 볼가 강을 따라 카스피해로 직접 내려오기도 했다. 또한 사만 왕조는 상인들과 장인들을 우대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마다 숙소를 세웠는데 이는 후대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의 정책으로 계승되었다.

 

사만 왕조는 이웃한 튀르크족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이들을 노예로 잡아 서쪽에 군인 노예로 판매하거나 아니면 자국 영토 내 광산에서 노동을 시켰다. 사만 왕조와 이웃한 카라한 칸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한 쪽은 아르슬란 칸(사자 칸), 다른 한쪽은 부그라 칸(숫낙타 칸)이라 불리며 전쟁을 벌였다. 사만 왕조의 지원을 받아 다른 카라한 부족들을 공격하던 사투크 부그라 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숙부를 처치한 뒤, 아르슬란 칸들을 제압하면서 카라한 칸국을 통일하였다. 텡그리 신앙, 불교, 마니교를 믿던 튀르크인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고, 사투크 부그라 칸의 손자는 사만 왕조를 역으로 점령하면서 튀르크인의 중동 진출이 가속화되었다. 카라한 칸국은 사만 왕조의 영토를 정복한 것을 계기로 많은 타지크계 신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오히려 문화적으로 동화되는데,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문화적으로 급속히 페르시아-순니 이슬람 문화와 동화되었다.

 

부하라의 왕립 도서관이 997년 불에 탄 이후 상당수의 학자들은 호라즘의 구르간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호라즘의 마문 가문들은 대규모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학자들을 후원하였으며 정기적으로 학회를 개최하였다. 서기 11세기 호라즘은 무타질라 학파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12 서기 12세기 인물인 마흐무드 알 자마크샤리는 무타질라 철학을 바탕으로 쿠란 주해서를 저술하였는데, 그의 저작은 당시 신학자들 기준으로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라서 이단시되었으나 그의 주해서에 서술된 아랍어 문법 해석 및 주해서의 문장력이 매우 출중하여 후대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 쿠란 주석학자들은 자마크샤리의 주석서에서 무타질라 교리 내용만 자르고 인용하는 경우가 흔했다.13 10~12세기 구르간지는 무타질라파와 비무타질라파, 플라톤주의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경건한 정통주의자와 세속주의 성향의 자유 사상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학회에 참여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구르겐지 학회의 주요 참여자였던 아부 사흘 마시히와 아부 하이르 함마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도였다. 무타질라 학파는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 호라즘 학계의 주류 학파를 구성하고 있었다.

 

 

 

셀주크 제국의 발흥

 

10세기 말부터 셀주크가 이끄는 오우즈 튀르크족이 시르다리야 강 삼각주 근처로 이주해들어왔다. 셀주크의 아버지는 과거 하자르 왕의 신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후 셀주크는 하자르 왕궁에서 자랐다고 한다. 셀주크의 아들들은 이름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물로 추정된다. 트란스옥시아나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어 셀주크와 그가 이끄는 오우즈 튀르크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인근 지역의 다른 비무슬림 오우즈 튀르크족들을 공격했다.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삼은 셀주크 제국은 가즈나 왕조의 지배를 받던 호라산 지역의 도시들의 비자발적인 복종을 받아냈다. 위협을 느낀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스우드는 셀주크를 공격하지만 1040년 메르브 근처에서 참패하였다.

 

셀주크의 후계자 알프 아르슬란과 그의 아들 말릭 샤의 재위 기간에 셀주크 튀르크는 카라한 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동부 영토를 안정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쪽으로 팽창을 지속할 수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을 보좌하는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사마르칸드 - 부하라 - 메르브 - 니샤푸르를 잇는 도로망을 개선하고 숙박 시설을 설치하며 경찰을 주둔시켜 세금 수입을 증대시켰다.

 

페르시아계 명재상 니잠 알 물크가 내치를 책임지고 셀주크 왕들은 전쟁을 전담하다시피하는 이러한 구조는, 소그드인들은 도시에서 장사하고 튀르크인들은 도시 성벽과 무역상들을 보호하며 약탈한 물건을 소그드인에게 처분하던 과거 서돌궐 제국의 시스템을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니잠 알 물크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국가는 “안전한 상태에서 농민과 상인이 부를 창출하고” - “부유해진 농민과 상인들이 세금을 납부하면” - “세금은 군대와 경찰에 투자되어 안정을 보장하고” - “농민과 상인이 지속적인 안정을 누리며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선순환을 가진 사회였다.

 

셀주크 투르크는 페르시아를 너머 1055년 바그다드에서 칼리프들을 농락하던 쉬아파 부와이 왕조 군벌 세력을 축출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마저 격파하면서 튀르크인들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진출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는 튀르크어가 주요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카라한 칸국의 카슈가르 출신 학자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튀르크어의 위상 상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카슈가르에서 공부한 그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궁정으로 들어간 후에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사전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고, 1070년대 그곳에서 여러 가지 튀르크 방언들을 정밀하면서도 상세하게 비교분석한 정보를 담은 아랍어-튀르크어 사전을 집필했다. 카슈가리의 목적은 칼리파와 그 외 모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그들이 튀르크 문화를 인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튀르크어가 초원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의 완성도 낮은 언어라고 무시당하는 형편이었으나, 동시에 칼리프조는 이미 셀주크 제국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기도 했다.

 

카슈가리는 독자들에게 튀르크 우월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튀르크어를 배우고 튀르크 문화와 친숙해질 수 있는 실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단어와 문구 뿐만 아니라 튀르크 세계 곳곳에서 유래한 속담, 격언, 시를 예문으로 담은 일종의 튀르크-아랍어 사전을 편찬한 것이다. 사전은 각 항목들을 아랍 문자로 표기된 튀르크 원어로 제시한 후에 이해 가능한 아랍어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더불어 카슈가리는 다양한 튀르크 부족과 그들의 관습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각 집단이 거주하는 곳을 독자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지도로 표현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고향인 카슈가르의 격언과 시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카슈가르 방언이 페르시아어 차용어가 적은 순수한 튀르크어이므로 여러 튀르크 방언 중에서도 여러모로 가장 훌륭한 튀르크어라고 결론지었다.15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의 사전 지도에 쓰여진 문구에는 이슬람-페르시아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중세 튀르크 민족주의의 태동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튀르크인들이 누구인지 또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수 있지만, 사람들은 튀르크인들이 오래전부터 대양을 둘러싼 세계로 정의되는 땅의 거대한 일부분을 지배했다고 장담했다.

 

다른 한편으로 카슈가리는 쿠란에 근거해, 튀르크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산 너머의 신비의 땅에 거주한다는 야주즈와 마주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야주즈(يَأْجُوجُ)와 마주즈(مَأْجُوجُ)는 방벽이 뚫리면 인간 세상으로 우르르 쏟아져나와 세상을 황폐화시킨다는 괴물들의 이름이었다. 후대 무슬림 학자들은 그가 언급한 야주즈와 마주즈를 몽골족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카라 키타이, 호라즘 제국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략

 

거란족들이 중국을 정복하여 세운 요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하자 남은 거란족 난민들은 야율대석의 지휘 아래 타림 분지 일대로 도망쳐 카라 키타이16를 세웠다. 1120년대 타림 분지를 장악한 야율대석과 거란족 난민들은 카라한 칸국에 용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배신하고 타림 분지를 장악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군사 귀족들에게 봉토를 주는 대신에 돈으로 봉급을 주었고, 중동의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중국을 정복한 지배자라고 자랑하길 좋아했는데, 카라 키타이 지도자는 스스로를 타그바치 칸17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중국의 지배자라는 칭호 외에도 이들이 즐겨쓰던 칭호로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구르 칸(Gūr Khān)이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 중국인들을 카타이,키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좀 있다.18 요즘도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종종 중국인들을 몰래 뒤에서 험담할 때 "까따이", "끼따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끼따이가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의 지배자라고 자랑하던 끼따이가 현대에 중국인 명칭으로 불려지게 된 것.

 

야율대석이 1134년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이후 카라 키타이는 고토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대신 서쪽으로 팽창을 거듭하였다. 이들은 1137년 5월 서부 카라한 칸국이 멸망하고 여새를 몰아 1141년 사마르칸드 근처에서 펼쳐진 카트완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산자르를 무찌른다. 1142년에는 호라즘까지 세력을 끼친다.

 

이들 카라 키타이는 불교를 숭상하고 이슬람을 배척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19가 유럽에서 와전되어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결국 카라 키타이는 서쪽 영토 대부분을 무슬림 주민들의 반란에 힘입어 호라즘 제국에 빼앗겼다. 가즈니 왕조의 공격으로 몰락했던 구르간지는 호라즘의 수도가 되어 다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카라 키타이 때문에 중국산 도자기 수입로가 막힌 것을 계기로 호라즘의 장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중국산 청화백자 짝퉁들을 생산하여 중동 각지에서 수출하였다. 다른 한편 중동에서 몰락한 이슬람 사변철학 학파 무타질라 학파가 호라즘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 알라웃딘 무함마드20가 트란스옥시아나의 무슬림 주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이 지역의 카라 키타이 세력을 몰아내고 수도를 사마르칸드로 옮겼다. 호라즘 제국은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인도 서북부에서 이란의 서쪽 국경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1215년 호라즘 샤가 압바스 칼리파에게 사절을 보냈을 당시 호라즘 제국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다스린 왕조였다. 그러나 호라즘의 신생 제국은 급속한 팽창 과정에서 아직 기반을 다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카라 키타이 동부 영토에 살던 무슬림들은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1216년 카라 키타이를 무찌르자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카라 키타이에서 호라즘 제국 영토가 된 지역들은 이와 정 반대되는 아니 엄청난 대재앙을 겪게 되었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호라즘 제국을 침략하는 와중에 애꿎게도 우즈베키스탄의 유서깊은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특히 토하라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중앙아시아 사회는 튀르크계 황인들은 주로 군인으로 활동하고 소그드계, 토하라계 백인들은 주로 도회지를 중심으로 상인으로 활동하는 분업 체제였는데 몽골인들이 도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면서 소그드계 백인 주민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

 

칭기스 칸의 침략 이전에는 중앙아시아의 웬만한 중소도시에도 도서관이 빠짐없이 들어서 있었고, 특히 부하라, 테르메즈 도서관은 엄청난 양의 보유 장서로 유명했으나, 몽골과의 침략 와중에 대부분 전소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중앙아시아의 인구 손실은 유럽의 흑사병에 맞먹거나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21

 

몽골 제국이 나타나면서 호라즘 제국이 멸망하였고 튀르크인들이 군인과 귀족으로 편입되면서 몽골-튀르크 제국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엔 차가타이 칸국이 위치하게 된다. 차가타이 칸국의 위구르인 다루가치들은 파괴되었던 몽골군의 정복 와중에 저수지와 관개 시설을 복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불타버린 도서관이나 장서들, 중앙아시아의 체계적인 과학 교육 시스템은 온전히 복구할 수 없었다.

 

 

 

티무르 제국 시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1세기 이후 부하라를 방문했던 이븐 바투타에 따르면 아직 부하라는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주변에 폐허가 널러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몽골 제국 시대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의 엄청난 수의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원나라나 일 칸국으로 이동되었고 이 지역은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1369년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사마르칸드의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고 수도로 삼은 후에 이후 다른 이슬람-튀르크계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며 약탈한 부로 사마르칸드를 아름답게 꾸몄다. 티무르의 군대는 원정 나간 곳에서 금은보화 뿐만 아니라 기술자들도 붙잡아왔다. 이란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나톨리아, 인도, 이라크 각지에서 타일업자, 벽돌공 등등이 잡혀왔다. 사마르칸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그가 벌이는 전쟁 와중에 티무르 제국의 영토 또한 크게 확장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라이벌 킵차크 칸국이 티무르가 노리던 중동으로 확장을 시도하자, 티무르는 아예 킵차크 칸국의 본거지들을 꾸준히 공격해서 교역로들을 교란시키고 킵차크 칸국을 의 주요 도시들을 정기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해서 킵차크 칸국을 복구 불가능 수준으로 파탄내버렸다.

 

티무르는 같은 무슬림인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가해 비잔틴 제국의 생명선을 연장해준 것도 모자라, 인도의 이슬람 왕조들을 공격해서 약탈을 감행하며 힌두교 왕조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등 이슬람 정체성은 약했다. 그는 약탈한 사치품들을 전공에 맞게 부하들에게 분배해서 전사들의 충성을 얻는 튀르크 유목민 전통에 충실했을 뿐이다.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둘로 쪼개졌다.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오랜 전쟁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을 이어가지 않고 내치에 주력하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티무르의 후계자 중 천재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철학과 과학의 중심지로 부흥하였다. 울루그 벡는 음악가, 시인들을 후원하였으며 거대한 천문대를 건설하고 직접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사마르칸드에는 반지름 40미터의 3층짜리 육분의가 설치되었다. 당시 또한 부하라에서 수피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마드라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울루그 벡이 설립한 마드라사의 교육 과정은 종교 교육보다는 과학, 그 중에서도 수학과 천문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침체되었던 중앙아시아의 마드라사들은 울루그 벡이 직접 강의장에 나타나서 강의와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슬람 황금기 시대의 마드라사 문화 즉 학생이든 교수이든 상관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주고 받는 문화가 부활하였다.

 

오늘날에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티무르 제국의 남부 영토는 헤라트가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울루그 벡과는 다르게 엄격한 무슬림이었던 통치자 샤 루흐(Shah Rukh 제위 1405~1447)의 영향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피즘에 입각한 상당히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가 확립되어갔다고 한다. 인도의 수피들이 힌두교와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파슈툰족 수피들은 근본주의를 추구하게 되면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주류화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샤 루흐의 뒤를 이은 술탄 후세인은 헤라트를 튀르크어 문학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술탄 후세인의 지원을 받는 문학가들은 페르시아어 문학작품을 오늘날의 우즈베크어의 직계 기원이 되는 중세 차가타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니자뭇딘 알리셔르 하라위는 단순히 번역을 넘어 튀르크계 차가타이어로 된 문학 작품들을 써냈다. 우즈베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은 일명 "나와이"로 불리는 니자뭇딘 알리셔르 하라위가 고전 우즈베크어를 페르시아어 못지 않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극찬했다. 번역 작업 그리고 나와이의 출현은 여타 투르크 문화권에도 상당한 자극을 주었고 저 멀리 보스포루스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튀르크어 창작 활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449년 울루그 벡이 사망하자마자 보수 율법학자들은 그동안 과학과 수학 위주로 치우쳐 있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기즈다반의 마드라사 교수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고 천문 관측소 파괴에 나섰다. 보수 율법학자들은 천문학이 이단 점성술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지 과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9년부터 1967년까지 울루그 벡의 천문관측소 현장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관측소가 그 주춧돌까지 완전피 파괴되고 건축자재 대부분도 반달당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과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던 쿠쉬지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쿠쉬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울루그 벡 시절 마드라사를 본 떠 만든 마드라사를 새로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 우즈베크인의 형성에 영향을 준 샤이바니 왕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킵차크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우즈베크인들은 우즈베크 칸국을 세운 후, 자신들이 칭기스 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천명하였다. 창건자 샤이바니 칸은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16세기 초 발흐와 헤라트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점령하였고, 티무르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차가타이어파 튀르크족은 우즈베크 부족 연맹에 합류하였다. 우즈베크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 정도를 구성하며 해외에서 우즈베크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나라도 바로 우즈베크인 380만여 명이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이다.

 

 

티무르 제국은 새로이 급부상한 튀르크 연맹체인 우즈베크인들에 의해 멸망했지만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티무르가 우즈베키스탄의 사실상의 시조나 다름없다고 가르친다. 티무르 제국을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로 때려맞출 경우 티무르 제국 역사가 우즈베키스탄 역사의 최고 전성기가 되기 때문. 티무르 왕가의 자손으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역시 원래는 페르가나 일대를 다스리던 소군주였으나 우즈베크인들에 의해 그의 모든 영지를 잃고 쫓겨나고 북인도에 정착했으니 무굴 제국의 역사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기원을 두는 셈.

 

 

 

우즈베크인들의 발흥

 

우즈베크인들이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시점을 기준으로 수천년간 동질성 있는 문화를 공유하던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는 순니 이슬람을 믿는 투르키스탄과 쉬아 이슬람을 주로 믿는 이란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순니 이슬람을 신봉하던 튀르크계 우즈베크인들이 쉬아 12이맘파를 국교화하며 순니파 무슬림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던 사파비 왕조와 호라산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게 된 것. 처음에는 우즈베크인들이 밀리는 듯 하였으나 사파비 왕조에서 호라산 지역의 튀르크멘 부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면서 이 지역에 쉬아 이슬람의 영역으로 만드는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이란 사이에는 튀르크멘족이 주로 거주하게 되어 투르크메니스탄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즈베크인들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트 칸국 등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으나 무굴 제국에 말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스텝 지대에서 기른 말들은 인도 아대륙에서 키운 말보다 더 크고 영양 상태가 좋았다. 유럽에서 무굴 제국으로 은화가 쏟아져 들어오자 상당 부분은 좋은 말을 사는데 지출되었다. 말 교역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로, 말 수요에 비해 항상 공급이 모자라서 일년에 수천마리를 공급하는 것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18세기 무굴 제국에서는 1년에 약 5만여 마리의 말을 중앙아시아로부터 구입했다. 말 교역에 의한 이문이 증가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인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로와 다리가 정비되고 여행자 숙소가 개선되는 등의 투자가 이루어졌다.24 이러한 투자는 물론 우즈베크 도시들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우즈베크 칸국들은 관개 수로를 추가로 건설하고 유지하는 일도 잊지 않았으며, 농민과 유목민이 유혈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경찰과 관료들을 배치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다. 자체적인 비단 산업을 육성하여 비단을 이웃 국가들로 수출하면서 세입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말 청나라에 의해 준가르칸국이 멸망하면서 중요한 교역 파트너를 잃어버리고, 19세기부터 군마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무굴 제국의 부가 크게 축소되면서 인도로의 말 수출 시장이 붕괴되자 카자흐계 유목민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이 점차 확장되고 우즈베크인들의 몫이 축소되면서 이 지역은 무역업 대신 농업의 비중이 증가했다. 우즈베크 유력자들은 러시아를 모방하여 면방직 공장과 소규모 은행을 세웠지만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무역 소득이 감소하면서 부하라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증가하였다.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러시아 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병합하고 부하라 칸국, 코칸트 칸국, 히바 칸국을 보호국으로 삼는다.

 

 

 

근대사

 

1867년부터 1917년까지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튀르키스탄 영토로 편입되었다. 기존에 거주하던 우즈벡인, 타지크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외에도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러시아 제국 유럽 영토 출신 볼가 타타르인들이 해당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1906년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를 잇는 철도를 설치하면서 타슈켄트는 투르키스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기존 무슬림들이 사는 도회지 근처에 러시아인 이주민들을 위한 신도시 구역이 세워졌다. 철도 건설 이후에는 이 지역의 목화 재배와 수출이 증가했다. 1917년 이전까지 투르키스탄의 산업화는 거의 목화 가공업에 한정되었다.

 

러시아 제국과 중앙아시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우즈베키스탄 일대의 지식인들은 볼가 타타르인, 크림 타타르인들과 우즈베키스탄과의 격차를 느끼고 이슬람 근대화 운동 중 하나인 자디드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디드 운동은 범튀르크주의적 요소 포함 당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민족주의 성향도 포함하고 있었다. 자디드 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우즈벡인들의 독자적인 민족 의식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지식인들은 근세 우즈벡어 문학 작품을 재구성, 재해석하고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아직 자디드 운동가들의 주장은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의 방해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지만, 러시아 제국 붕괴 이후부터는 소련 시대 국가무신론과 이슬람의 충돌 과정에서 대안으로 자디드 운동가들의 온건화, 세속화된 형태의 이슬람 해석이 주류가 되었다.

 

 

 

 

현대사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많은 러시아 인민들과 중앙아시아 인민들은 자유를 찾게 된다. 이 지역에는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억제하였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고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가 덜한 지역이 되었다.

 

1924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USSR(소련)에 가입해 소비에트 연방 내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카자흐스탄은 1930년 가입). 소련이 안정화되면서 1950년대에는 식량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고, 60년대에는 주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문화 부흥이 용인,장려되었다.

 

1991년 9월 1일, 우즈베키스탄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1991년 12월 소련 붕괴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슬롬 카리모프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2001년부터 상하이 협력기구 정회원국으로 가입한 상태.

 

2016년에 카리모프가 사망하고 2016년 12월 4일에 조기대선에서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압승을 거두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미르지요예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사회통제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언론의 자유도 어느 정도 생겨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상술된 바대로 페르가나, 사마르칸드, 부하라, 히바 같은 실크로드의 가장 핵심적인 연결 거점으로 역사적 왕조들의 수도 역할을 했던 유수의 도시 태반이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등 관광자원이 넘쳐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날씨가 환장하게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관계로 관광객을 많이 끌어모으지 못하고 있다. 소련 시절에는 타슈켄트가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로 집중 개발되기도 하였다.

 

대항해시대 시작 이후 실크로드 내륙 무역이 점점 쇠퇴하면서 우즈베크의 부유한 무역 도시들을 점점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한 술 더떠서 소련 붕괴 이후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와 천연 가스 개발로 생활 수준과 경제력이 급속히 높아진 반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같은 경우는 그만한 경제력이 나타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암울하기만 한 건 아니고 우즈베키스탄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높은 독서량을 자랑하며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다양한 역사적 유산들은 우즈베키스탄 미래 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사실 1990년대 우즈베키스탄 경제성장률은 타 소련권 국가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었지만 막상 경제성장률에 비해 소득수준의 증가가 더뎠고,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리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오죽하면 통계상의 경제성장률이 우즈벡보다 더디고 경제정상화도 늦게 이루어진 우크라이나가 동유럽에서 못사는 나라라 해도 우즈베키스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배를 넘을 정도다.

 

2020년 5월 1일에 우즈베키스탄 비상사태부는 시르다리야 주의 사르도바 댐이 붕괴해 주민 11,000명 이상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언어

 

우즈베크어가 공용어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기 때문에 평등을 강조한 러시아와 소련의 영향으로 러시아어를 포함해서 중앙아시아 한국어, 카라칼파크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들이 쓰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엔 민족주의의 영향 때문에 다른 언어들의 사용이 상대적으로 줄고 있다고 한다. 특히 러시아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자 각민족간의 링구아 프랑카로 지정되어 있고 러시아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러시아어는 중요한 외국어이고 아직까지 도시에서는 러시아어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소련시절보다 사용자의 수가 많이 줄었다. 지방쪽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부족한 상황이다.(러시아어) 일단 수도인 타슈켄트에서는 러시아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현재 우즈벡 정부가 공문서를 대부분 우즈벡어로만 하는 등의 영향으로 10~20대 중에는 러시아어를 아예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면 30대 이상부터는 소련의 영향으로 러시아어를 한다. 우즈벡은 비율 상으로 우즈베크어는 74.4%, 러시아어는 14.2%, 기타 언어 4.4%순으로 쓰이고 있다. 2019년 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어를 다시 가르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러시아어) 다만, 우즈베키스탄의 독립 이후, 우즈베크어의 사용 비중을 늘리고 정부 문서도 우즈베크어만으로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서 우즈베키스탄 내 러시아인들도 예전과 달리 우즈베크어를 할 줄 아는 경우가 늘고 있다.

 

타지크어는 타지크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타지크어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혹여 관광을 하게 된다면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수해야 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영어가 통하는 곳은 공항, 호텔, 몇몇 고급 레스토랑 뿐이다. 만일 영어를 쓰면 대뜸 자신의 모어로 '영어 못하니 러시아어나 우즈벡어로 얘기하라'는 답만 돌아오거나, 자신을 무시하거나 빈정거리는 투로 받아들여 화를 낼 수도 있다. 단, 청년층에서는 유학 목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이도 적지 않다.

 

한류 열풍으로 한류가 유행하고 있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타슈켄트에는 한국교육원이 있다. 그리고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심지어는 국정교과서도 영어외에 한국어로도 발행되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온 경우라거나 해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은근히 많은 편이다. 물론 길거리 아무 데서나 한국어로 대뜸 물어봐서 통하는 걸 기대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인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2010년대 후반 쯤에 EBS2를 통해 안녕하세요 코레아21가 방송되었고 현재도 EBS2를 통해 재방송 중이다.

 

 

 

 

지리

동쪽의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국경지대를 제외하면 지형은 전반적으로 평평한 편이다. 다만 그 조금 있는 산맥이 높기로 유명한 톈산 산맥의 끝자락이라 히소르 산맥(Hisor tizmasi, Гиссарский хребет)에 위치한 최고봉인 하즈라티 술톤 봉(Hazrati Sulton choʻqqisi, Пик Хазрет-Султан)의 높이는 4,643m에 달한다.

 

우즈베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아랄해가 과거 소련의 면화 사업으로 인해 강물의 유입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급격히 작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호수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근의 어민들과 주민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카자흐스탄 정부와 협력하여 아랄해 복구에 심혈을 기울여 많은 부분이 복구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즈베키스탄 차원에서 아랄해 수위 회복을 위해 러시아 미경유 흑해(지중해)-카스피해-아랄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이라는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지만 별 다른 진척상황이 보여지질 않고 있다.

 

이웃 나라가 전부 내륙국인 탓에 리히텐슈타인과 더불어 둘 뿐인 이중내륙국이다. 다만 리히텐슈타인이 있는 서유럽은 솅겐 협정으로 주변국을 한 나라처럼 돌아다닐 수 있으며 바다와의 거리도 별로 멀지 않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동부 지역에 농업 산업을 많이 도입하고 있으며 다른 중앙아시아보다 더 농업에 적합한 땅들이 많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인들의 오랜 정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오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는 오아시스가 있는 도시가 몇 군데는 있고 농지에 적합한 땅들이 넓고 많은 편이지만 우즈베키스탄과 접하는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경우는 농사에 적합한 땅들이 많지 않다. 비록 우즈베크에 비해 물이 많이 나오지만 오히려 타지크, 키르기스는 물이 많은 험준한 골짜기들 때문에 많지도 않은 농촌의 수와 더불어 농사짓기 힘든 곳 중 하나이다.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우즈베키스탄 영토 중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기후는 한랭 사막 기후(BWk)이다. 우즈베키스탄 전체면적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강수량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지역이다.

 

도시들이 모여 있는 대륙성 기후 중에는 한랭 반건조기후(BSk)와 지중해성 기후(Csa)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도시들의 강수량이 500mm안팎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막을 제외하고 우즈베키스탄의 생물 군계는 온대 초원 관목지로 나타난다.

 

고지 지중해성 기후(Dsb, Dsc)와 툰드라 기후(ET)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며, 이는 단순히 고도가 높은 산악 지형에서만 나타나는 기후 구분이므로 온대 고산 기후에 해당한다.

 

 

사회

 

분리주의

소련 치하의 행정구역체계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카라칼팍스탄(카라칼파크어: Qaraqalpaqstan, 우즈베크어: Qoraqalpogʻiston) 자치공화국이 존재한다. 영토는 아랄해를 주축으로 우즈베키스탄 영토의 40% 가까이나 차지하지만 대부분이 사막이라 인구는 고작 170만 수준으로 독립을 원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게 억눌리고 있다. 예전엔 이곳의 최고 지도자가 타슈켄트로 소환되어 행방불명되고 허수아비 지도자가 새롭게 앉혀진 적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남서부 사마르칸트, 부하라, 카슈카다리오, 수르한다리오에는 타지크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한때 독립운동을 벌인 적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타지크족이 1989년 기준 100만 명 이상(총 인구의 25-30% 정도로 추정) 살고 있었다. 반면 후잔트를 중심으로 한 타지키스탄 북부에는 우즈베크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00년 기준 101만 명, 다만 타지키스탄의 경제사정이 열악해서 타지키스탄 내 우즈베크인들의 비율은 매년 급속히 줄고 있다. 하기야 현지 타지크인들도 외국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우즈베크인이야 말할 것도 없다. 후잔트 거주 우즈베크인들이 타지키스탄에서 분리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병합되겠다고 시위를 일으켰다가 폭동으로 발전, 타지키스탄 정부군에 의해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력이 워낙 차이가 나서 타지키스탄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지는 못하지만 명백히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이자 독재자였던 카리모프의 고향인 사마르칸트도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다.

 

 

종교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이슬람 카리모프가 적극적으로 세속주의 정치를 펼치며 세속가치를 주입한 것도 한몫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왕정 혹은 군부독재가 무너진 뒤에 '전통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이슬람 세력이 집권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게 1990년 알제리의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정권. 이것은 독재정권의 탄압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세속주의 진영, 노동자 계급에 기반한 좌파그룹은 그 세력이 미약하고 그 가치가 대중들에게 잘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슬람은 종교이자 문화로 사람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깔려있기 때문에, 아무리 독재정권이라도 이슬람 자체를 몰아내는 짓은 감히 할 수 없다. 더구나 이슬람은 그 특유의 계율 때문에 교육과 사회복지까지 담당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민심을 얻기 쉽다. 특히 불평등이 심하고 경제가 낙후된 곳일수록 이슬람의 이런 역할들이 부각된다. 따라서 대중들의 신뢰를 받고 민심이 모이는 이슬람이 반독재 운동의 핵심이 되는 것이 당연지사로 1979년 이란 혁명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이집트에서 수십 년 간 군부독재와 싸워온 무슬림 형제단,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모두 단순한 정치운동을 넘어서 해당 지역에서 교육, 사회복지, 금융기관의 역할까지 하면서 민심을 얻고 있다. 더구나 가말 압델 나세르 이후 중동 이슬람권을 강타했던 세속주의, 아랍민족주의가 결과적으론 정치, 외교, 경제 다방면에서 실패하자 더더욱 이슬람에 민심이 몰리고 있다.

 

문제는 무슬림들이 계속되는 서방의 간섭과 낙후된 경제, 문화적 후진성에 절망하면서 1980년대 이후 급속도로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이 결국 이슬람 시아파 꼴통들의 신정통치로 귀결되는 것을 시작으로 수니파 와하비즘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을 강제로 억눌러오던 독재가 무너지면 이슬람이 정권을 장악하고, 거기서 결국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런 현실을 목격한 서방 국가들은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에서도 결국 이슬람권에 서방식 인권을 존중하는 세속주의 세력은 소수파라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였다. 이것은 아랍권 민주화 운동 이후 자유선거가 실시된 이집트, 알제리 등에서도 비슷했다. 현재는 어설픈 서방식 민주주의보다는 차라리 이슬람 극단주의를 찍어누르면서 강력한 세속주의, 공업화를 추진할 수 있는 독재가 차라리 낫다는 쪽으로 서방 국가들의 외교정책이 바뀌고 있다.

 

다만 음주는 2012년부터 새롭게 제정된 국민건강증진법으로 주류판매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는 중이다. 이건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이 아니라 너무 술을 마셔서 우즈베키스탄 남성 수명과 건강을 심각하게 깎아먹고 있기에 제정된 법이다.

 

그래도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믿는 편이다. 튀르크계 국가 치고는 이 우즈벡이 이슬람을 좀 더 엄격히 믿으며 히잡이나 니캅 같은 것도 가끔 나온다. 왜냐하면 세속적이라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예외적으로 페르가나 계곡 지역은 와하브파가 득세하고 있는데 우즈베키스탄 동부, 키르기스스탄 남부 일부가 해당한다. 다만 이쪽은 지역사회 차원에서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성향이 있지만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가 전체적으로 보면 세속적 성향이므로 실제로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브루나이처럼 꽉 막힌 사회까지는 아니다. 물론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튀르키예인 등은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믿는다. 이슬람 명절 휴일을 며칠로 할지는 그 즈음 되어서 정부가 공식 발표한다. 그래서 달력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그동안 제한되었던 개혁정책을 펼치면서 모스크의 아잔 허용 등 일부 정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한편으로는 이슬람 테러단체 관련해서도 민감한 편인데, IS에 가담한 우즈베크인들이 500명에 달하고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이 IS에 복속을 선언하면서 우즈벡 정부도 테러단체 가담 시에 시민권 박탈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다만 단일 시민권자는 국적 박탈이 국제법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어떻게 할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 출처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들 테러 단체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현재 이들 이슬람 테러조직의 본거지는 우즈베키스탄 밖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서 소탕이 힘든 상황. 아프가니스탄에도 우즈베크인이 300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우즈베크인 인구의 10% 가까이 되는 많은 인구다. 일단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의 외국으로 간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이슬람 과격 단체들은 꽤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정부 자체가 군대 등으로 미국과 긴밀이 협의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억제하고 있고 중앙아시아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확산을 막는 데 많은 기여를 하는 중이다. 또한 테러 목적의 외국 방문은 FBI 등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는데 해외에서 우즈베키스탄인이 FBI에 잡히면 백이면 백 우즈베키스탄과 FBI의 공조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러시아인들은 주로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이슬람을 믿는 대다수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다른 종교가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걸 의도적으로 막고 있어 종교 행사는 상당히 조용히 치르는 편. 특히, 정교회를 넘어 타 종교는 자국민에 대한 전도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이 강세인데도 불구하고 주말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토요일과 일요일이다. 이 동네에서 금요일은 그냥 평일인 셈. 대신 크리스마스가 평일이며 한 해 마지막 공휴일은 12월 8일 제헌절이다.

9.3. 치안

우즈베키스탄 마피아들과 부패한 정관계와의 연루가 깊다. 우즈벡 마피아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아편과 헤로인을 밀수해 러시아와 유럽으로 퍼뜨리는 것으로 악명 높다. 재한 우즈베크인들도 자잘한 갱단을 만들어서 활동 한 바 있다.

 

타슈켄트나 사마르칸트 등 주요 도시 지역의 치안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다. 물론 세계적인으로 유명한 관광지역 국가 주변들도 대부분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의 도시지역에서 소매치기나 자잘한 폭행 등의 잡범은 별로 없다. 놀랍게도 백팩을 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소매치기를 거의 당하지 않는다! 현지인과 대화에서는 워낙 오랫동안 강력한 경찰국가 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한다. 한국인에 대해서 워낙 우호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래도 늦은 밤에 외출하거나 현지인과 무리한 대화를 시도한다던가 하는 것은 자제하자 이나라 역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존재한다. 대부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접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경제

 

 

인구

35,674,678 명28

2022년, 세계 40위

경제 규모(명목 GDP)

$1,126억 5,300만 (2024년 10월)

경제 규모(PPP)

$4,282억 400만 (2024년 10월)

1인당 명목 GDP

$3,468 (2025년)

1인당 PPP

$11,596 (2024년 10월)

GDP 성장률

5.6% (2024년 10월)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37.6% 

2020년

 

면화 생산이 제정 러시아와 소련 치하에서 엄청나게 밀어준 덕에 세계적인 수준의 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밖에 망간, 몰리브데넘, 아연, 구리 같은 광물 자원들도 꽤 많으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도 가지고 있다. 천연가스 역시 일정량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수출량에 자원이 비중을 많이 차지하며 현재는 경제성장률 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실업률도 매우 낮다. 하지만 지정학적인 단점으로는 내륙국가인 터라 바다가 없으므로 항구 역시 없기에 수출에 매우 불리하다. 당장 몽골만 보더라도 인접국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값싸게 넘기고 있다. 우즈벡 역시 국경에 인접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끼리 철도로 국경을 통해 무역을 한다. 항공은 운송비가 비싸고 한정적이어서 효율이 좋지 않다. 석탄, 철도 많이 생산된다.

 

포도와 멜론 같은 농작물 및 과일들도 많이 재배되는 편이며 농업도 발달해 물산이 풍부하다. 단, 밀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옆나라 카자흐스탄에서 많이 수입해오고 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중앙아시아에서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건 수치상으로만 그렇고 아직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정부가 바뀌고 나서야 개방 정책으로 고도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가스와 자원으로 경제성장을 한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보다는 국민소득은 다소 낮은 편인데다가 독재정치로 인한 부정부패로 막대한 돈이 되는 분야를 일부가 독점하던 때가 있어서 빈부격차에 시달렸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식자재 가격을 상당히 낮은 가격으로 유지하고 있다. 전반적인 물가 또한 대한민국의 1980년대 초반 수준으로 싸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물가가 싸다고 생각 할 수 있는데, 사실 평균적인 임금에 비하면 물가가 꽤 비싼 편이다. 2020년 기준 평균 월급이 무려 한화 20만 원대이다. 그렇기에 월세는 싼 곳은 한화 30만원 이상, 숙박업소의 경우 타슈켄트에서 하루에 한화 2~3만원 가량이니 국민 입장에서는 정말 비싼 편. 교육비도 역시 임금에 비해 비싼 편이다. 한 학기에 국립대의 경우 한화 150~300만원 정도 한다. 부자거나 장학금 아니면 다니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 주변 국가인 인도나 파키스탄쪽 돈 있는 유학생이 많다. 드물게 한국인 유학생(우즈벡 의대생)들도 있다. 

 

당연히 이러다보니 전반적인 국민 소득이 아직은 낮은 편으로 인도보다 더 낮다. 하지만 높은 경제성장률로 앞으로의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것을 기대해볼 만하다.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로 농촌으로 갈수록 소득은 낮아지며 당연히 도시 노동자들 역시 월급은 농촌보다 높은 편이다. 식자재 가격을 매우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요를 강제로 찍어누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수요를 강제로 찍어누르기 위해서는 임금을 당연히 매우 짜게 주어서 구매력을 아주 낮추어야 한다. 그래도 가격이 워낙 낮게 유지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이 되는 모양. 물론 이건 발트 3국을 제외한 구소련권 국가들 모두 다 해당된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은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데다 이중내륙국이라는 단점까지 겹쳐서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하는데, 당연히 공산품 가격은 이들 소득에 비해 턱없이 비싼 편이다. 공산품 가격은 일반인들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입품인 프링글스 한 통과 국산에서 생산되는 감자 10kg은 가격이 비슷한 편이다.

 

이런 문제가 너무 심해지다보니 최근에는 경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품질과 가격은 그럭저럭 괜찮은 제품들인데 독립국가연합 국가답게 포장이... 심지어는 같은 제품인데 포장한 것보다 차라리 포장 안 되어 있는 제품의 질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회는 높은 실업률과 그리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해외 취직을 하고있는데, 마치 1980년대 한국 건설노동자들이 중동으로 근무하며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해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한 것처럼 해외에서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며 그 월급을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사람들도 많다. 많은 남성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가까운 해외(주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한다. 러시아가 이래봐도 저임금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다보니 많은 우즈벡인들을 받아들일수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내오는 돈이 우즈베키스탄 현지 시장 재활성화에 큰 역할을 해서 현재 우즈베키스탄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수가 들어와 있다. 

 

또한 2010년대 후반부터 베이비붐이 불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출산율이 3명대 초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과 함께 구 소련권에서 출산율이 높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고, 2022년을 기점으로 우크라이나의 인구수를 넘어섰다. 그래서 당장은 교육시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는 중이기는 한데 러시아,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구소련권에서 저출산과 인구감소 문제에 시달리고있는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인력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재도 러시아에 많은 우즈벡인들이 일을 하고 있고, 상당수 공장에서 우즈벡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동부 전장에서도 중앙아시아인들이 파견보내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재건이 시작될 경우에는 인력 충원을 위해서 많은 우즈벡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중앙은행(Central Bank of Russia)의 2013년 3월 보고서에 의하면, 우즈베키스탄 노동 이주자들이 고국으로 송금하는 돈은 56.7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우즈베키스탄 경제의 16.3%를 차지한다. 공정환율로 환산 시 약 12%에 달한다.

 

2001년 북한의 경수로 사업 당시 북한에 가서 많이 일하면서 수적으로는 중국 노동자를 압도할 정도였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우즈베키스탄 남성 중 3D 분야 노동자들이 2001년부터 꽤 생겼다.

 

윗 나라 카자흐스탄이 가스 등의 자원으로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이라는 점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 지역의 핵심은 우즈베크였고 수도 타슈겐트는 러시아 SFSR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 SSR의 키예프, 아제르바이잔 SSR의 바쿠와 함께 소련의 5개 핵심 도시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카자흐스탄 가는 일은 매우 쉬우며, 실제 친지방문 등의 목적으로 카자흐스탄에 다녀오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아주 별볼일 없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들의 도시들보다 못했던 알마티와 아스타나가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고 꽤 충격을 받은 것. 게다가 역사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은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부하라, 히바 등 실크로드의 부유하고 학자, 예술가들이 넘쳐났던 유라시아 교역의 중심 도시들이 몰려 있었던 중앙아시아 최고의 문화와 역사가 있는 국가였던 반면 현대 카자흐스탄 지방은 근대 이전 카자흐인들이 목축을 하는 지역이였으며 우즈베키스탄에 비해서는 농지도 적고 도시도 적었다.

 

정부에서도 여기에서 오는 불만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였고 최근 개방정책으로 많이 나아지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경우 인천 송도에 무역대표부를 건설해 우즈베키스탄인들이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면서의 환경이나 인권 등도 개선시키고 있다. 최근 국민들의 경제에 대한 불만이 단순히 못 사는 데에서 오는 불만에 더해 이웃 카자흐스탄의 발전에서 오는 것임을 고려하면 이 불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정권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카리모프 집권기 강제노역

 

면화 산업에 아동 등의 노동력 투입은 중단돼야 하며 정치범에 대한 박해를 깊이 우려한다. - 반기문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소련 치하에서부터 목화농장을 직영하면서 매년 가을 수확철에 중·고교 학생들을 동원해 축사 같은 캠프에서 합숙시키며 석 달 가까이 목화 수확 할당량을 채우도록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은 2013년 기준 세계 목화 6대 생산국이자 5대 수출국으로 이 나라에서 목화는 하얀 황금으로 불린다. 그 수익은 연간 10억 달러에 달해 말 그대로 국부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걸 정당한 급료를 주어서 수확시킨 것이 아니라 군대에서 군인들 부려먹듯이 국민들을 착취하면서 수확한 것이다. 중앙 정부가 지방 정부와 농민들에게 할당량을 배정하고 지방 정부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어린이와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주민들의 하루 할당량은 40~120kg으로 보수는 1kg당 150~200숨인데 100숨이 우리나라 돈으로 50원 정도니 100kg의 목화를 따도 고작 5,000원을 받을 뿐이고 그나마도 이런 저런 공제로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조폐공사에서 우즈베키스탄산 목화로 지폐를 만들었던 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우즈베키스탄산 목화가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목화 강제노동이 있었을 때는 해마다 사고가 터져나갔다. 2013년에만 어린이부터 60대 노인까지 11명이 숨졌고 그나마도 정부의 강제적이고 폐쇄적인 운영 탓에 피해자 가족들은 피해보상은커녕 죽은 이유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심지어 살인도 곧잘 일어난다. 대학생 코짐 오모노브(당시 22세)와 사만다 누마토브(당시 23세)는 2013년 9월 16일에 아크람 사다토비치 우로브(24)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는데, 자기 할당량은 다 했다며 남은 일을 서로 미루다가 다툰 것이 문제였다.

 

강제노동을 반대하는 국제 시민단체 코튼캠페인, 워크프리는 우즈벡에서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성인과 아동이 경작기, 수확기에 강제 노동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렇게 생산된 목화는 정부가 독점 매입해 국가 소유의 무역회사를 통해 수출하며 사적으로 목화를 거래하다 걸리면 처벌당하고 목화밭에 다른 작물을 심을 수도 없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정부 최고위 관료만 쓸 수 있는 특별 예산 기금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돈들은 부패한 정치인들과 일부 부패한 기업인들의 재산이 되었을 것이다.

 

샤브카트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목화강제노동은 멈춰졌고 목화수확을 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급료를 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지금 우즈베크인에게 목화 강제노동하냐고 물어보면 언제적 이야기냐 몇년전 얘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면 우즈베키스탄에서 목화 강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도시들이 모여있는 동쪽보다는 농촌이 많은 서쪽의 지역들이며 목화 강제 노동에 투입되는 사람들도 농촌의 정해진 지역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예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우즈오토 모터스

 

공교롭게도 한때 대우그룹과 관계가 깊었다. 과거 93년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이슬롬 카리모프 대통령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동차 공장 설립인가를 받아 95년부터 2002년, 약 7년 동안 대우차의 옛 플랫폼30을 생산, 판매하는 조건으로 우즈-대우(UZ-DAEWOO)를 출범시키며 공장 안정화가 된 96년부터 19년 뒤인 지금까지 부동의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판매율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아직까지도 날개돋힌 듯 팔려나가고 있다. 2010년 8월에 현대 액센트가 러시아 공장에서 현대 솔라리스라는 이름으로 1달 동안 1만 대 판매로 월간 판매량 1위를 했었던 적이 있었지만 9월경에 다시 우즈-대우 젠트라가 뺏어버린다. 실제로 수도인 타슈켄트를 오가는 자동차의 90% 이상은 모두 GM대우, 정확히는 쉐보레 차량이다.

 

그러나 99년, 대우차가 파산선언과 함께 02년을 부로 GM에게 인수가 되어 재계약권은 GM에게 돌아가는데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우즈-대우의 워크아웃을 포기해버린다. 그러자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는 갈 길 잃은 일부 옛날 대우차 고참 연구원들을 고용하여 우즈-대우 회사와 공장 자체를 구입해 GM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에 현지에서의 대우의 느낌을 실감한 GM은 우즈-대우의 약점인 부품 CKD 조달 및 설계 라이센스를 꼬투리 잡아 파트너쉽 관계로 전환하고 일부 생산 차종의 하청 생산을 맡겼다. 대표적으로 GM대우 토스카의 유럽 수출사양 모델인 쉐보레 에피카, 쉐보레 라세티의 유럽 수출사양 모델 전부를 우즈-대우에 맡겨버렸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우즈-대우는 국민차 지위까지 떠올라 엄청난 인기를 아직까지 자랑하고 있으며 현대와 벤츠, BMW와 일본차를 제치고 2004~2005년도 러시아 수입차 시장 판매량 1위라는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2006년부터 러시아 수출차 판매량 게임에서는 현대차의 대형 물량공세에 밀려버려 현재는 10위권까지 추락해버리고 만다.

 

2015년에는 포스코대우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우 브랜드를 사용한 자동차 공장 건설ᆞ판매 프로젝트를 국가와 함께 진행하자, 대우 브랜드의 확산으로 CIS 및 중동 지역에서 쉐보레 브랜드로 판매되는 GM차들의 판매가 저하될 것이라고 우려해 GM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스코대우의 대우차 프로젝트에 대해 반대했다. 이를 빌미로 2015년에는 아예 2008년부터 러시아 일부지역 수출 시 사용하던 라본으로 브랜드 이름을 바꿨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GM이 노골적으로 대우 브랜드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우즈베키스탄 및 동구권 국가들 내부에서도 라본 브랜드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과 격렬한 반대가 많았음에도 그대로 밀어붙여 변경시켰다.

 

대한민국 기업들이 대단히 인식이 좋아서 현재는 현대차가 우즈-대우보다 많이 팔리고 있다는 인식이 있는데,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는 국영기업이라는 프리미엄 덕에 여전히 우즈대우의 판매량이 절대다수이다.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 수출 및 현지 점유율 확대를 위해 현대자동차가 2020년도에 현지 공장을 건설한다는 기획을 추진중에 있다.

 

현재 라본 디비전의 모회사인 GM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GM측 지분 전량 매수로 인해 완전히 국영기업화 되었다. 이름만 GM인 셈. 그래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는 여전히 GM쪽 차량을 선호해서, 추가 계약을 통해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쉐보레 콜로라도 기반의 중형 SUV), 쉐보레 이쿼녹스를 생산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러시아 수출용 쉐보레 트랙커를 2019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부터는 라본에서 쉐보레로 브랜드를 변경했다.

 

실제로 가 보면 길에 있는 자동차의 95% 가량이 쉐보레/GM 자동차이며, 모델명도 라세티, 마티즈 등 매우 익숙하다. 현지인들은 쉐보레/GM 이외의 자동차를 사려면 세금을 100% 물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현대차를 구매하려면 가격이 우리나라의 거의 두 배에 가깝다고 한다.(소나타는 약 6천만원) 쉐보레 자동차는 현지에서 대부분의 부품이 조달 가능하다고 하나 현지인들은 GM 자동차 성능에 대해 불만이 다소 있으며, 현대나 기아는 매우 고급 자동차로 여겨져 유럽 자동차와 거의 비슷한 품격으로 생각된다. 이는 쉐보레 차량의 엔진 성능 문제도 있고 대부분 출시된 지 10~20여년 가까이 지난 오래되고 노후화된 차종들을 길게 생산해서이기도 하다.

 

 

 

 

 

문화

 

중앙아시아는 고대부터 여러 다양한 집단이 거쳐간 곳이다.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인도유럽계의 아파나시에보, 안드로노보 문화 등이 있으며, 토하라인, 스키타이인, 마사게타이 등의 코카소이드 뿐만 아니라 코카소스 투라니드인인 에프탈족과 튀르크족과 몽골족, 훈족 등이 오랫동안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아왔다. 또한 그리스 등지에서 전해진 음식인 "오쉬"를 즐겨먹으며 결혼식 때 그리스어인 "OPA"를 외치는 등 그리스 문화의 흔적 또한 남아있다.

 

고대 인도 대학 문화의 영향으로 중세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도시들은 우수한 대학들이 운영되었다. 특히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유명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고대부터 무역에서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일반인 어린이들도 다섯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교육 받았다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도시들은 이슬람화 이후에도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는데, 문학이나 이슬람 신학 외에도 천문학과 의학, 수학 등이 발달하였다. 그 영향으로 대도시에는 상수도 시스템과 초보적인 수준의 하수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시내의 도로는 석재로 포장되었다 한다.

 

오랫동안 페르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향을 서로 주고 받은 편이다. 현재까지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에는 타지크어 사용자가 다수일 정도로 문화의 큰 부분에 타지크(순니파 페르시아인)의 영향이 남아있다. 언어 또한 같은 튀르크계지만 정착이 늦었던 여타 중앙아시아 민족들에 비해 우즈베크어는 어휘와 문법에서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들의 종교인 이슬람 또한 아랍에서 직접 온 게 아니라 타지크인들을 통해 전해졌다. 한편 튀르크의 유목과 농업의 문화 또한 가지고 있으며 원래부터 종교에 관대한 튀르크 우즈베크인들로서 이슬람 종교와 정교회 등 여러 종교들이 존재한다. 구소련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소수 민족들이 사는 나라로 130개가 넘는 민족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주류민족인 우즈벡인들의 비율이 높다. 또한 우즈베키스탄보다는 민족 비율의 다양성은 카자흐스탄이 훨씬 더 많다.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은 문화도 다양하나 대체로 우즈베크/타지크인의 전통 문화와 러시아인의 정교회 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우즈벡인들의 전통 문화는 지역별로는 타슈켄트부터 안디잔까지의 동부권,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중부권, 히바를 중심으로 한 서부권으로 갈린다. 이는 과거 우즈베키스탄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3개 칸국과도 일치하는 편이다.

 

농촌에서는 아직도 마할라라는 집단을 이루며 거주하는데 차(초이라고 부른다.)를 즐겨마신다. 매우 다양한 차가 존재하며 가족들과 친국들끼리 담소를 나누면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있다. 한때 공산주의국가여서 전혀 어울리지 않겠지만 굉장히 자본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 무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카자흐스탄 속담에는 "우즈벡 사람들은 달나라에 가서도 장사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티무르나 15세기에 활동하던 아프가니스탄 출신32의 문학가 알리셰르 나바이(Ali-sher Navoiy)가 국부로 추앙받는다. 알리셰르 나바이는 영어에서 셰익스피어, 독일어에서 괴테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된다. 당시 거의 유일하자 최초로 차가타이어(우즈베크어의 전신)로 문학 작품들을 집필해서 우즈베크어 형성 및 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 나라의 예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지 않는다. 이는 절교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실내에서 모자를 쓰거나 신발을 신는다. 머리고기는 연장자에게 준다고 한다.

 

한편, 관료주의 사회였던 소련의 영향으로 굉장히 관료주의적이어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서류가 너무 많이 필요하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초등학교가 4년, 중학교가 5년, 고등학교가 2년이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에는 고3이 없고 고2가 곧 고등학교 졸업반이 된다. 이 나라의 대학 1학년생의 나이는 한국에서 고3에 해당한다.

 

 

우즈베키스탄의 대중가요들.

 

2017년에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가치를 왜곡하고 안정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34개의 컴퓨터 게임 금지 목록을 발표했다.

 

 

 

 

 

스포츠

 

열악한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스포츠에서는 꾸준히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종합 순위 21위를 기록했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무려 종합 순위 13위로 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한중일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권투가 매우 강하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동메달 1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 1개 & 동메달 2개,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 1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 은메달 2개 & 동메달 2개를 받아 권투에서 가장 메달을 많이 받은 나라가 되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무려 금메달 5개를 받았다.

 

기계체조 선수 옥사나 추소비티나도 유명한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올림픽에 8번이나 출전했다. 중간에 아들의 백혈병 치료비 때문에 독일로 귀화해서 독일 국가대표로 활동했다가 다시 자국으로 귀화했다.

 

동계올림픽에서는 첫 출전이었던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프리스타일 스키에서 리나 체르야조바가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 역대 동계올림픽에서의 유일한 메달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아니지만 1999 사대륙선수권 &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인 타티야나 말리니나가 이 나라 출신이다.

 

유도가 상당히 강한 국가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대한민국과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밀려 메달 입상에 실패했지만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태권도와 레슬링에서도 꾸준히 메달을 수확해가고있다.

이러한 성과들을 총평해보자면, 투기종목에서 매우 강한 국가임을 알수있다.

 

 

 

 

축구

 

축구 열기가 뜨거운 나라로 손꼽힌다. 특히 U-17~U-23 같은 유스 연령대별 대표팀에서는 아시아 깡패라 불릴정도로 매우 강한 국가이다.33 소련에서 분리된 이후에 성인 국가대표팀은 아시아 대륙에서 상위권에 드는 전력으로 평가받고 대한민국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자주 만나는 상대 중 하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해 아직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는 못하고 있다. 자세한 건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프로리그에서는 한 때 히바우두라는 스타 선수라든지 스콜라리라는 스타 감독이라든지 이런 몸값 높은 네임드들을 영입한 FC 분요드코르가 아시안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2009년에 파리아스가 이끌던 포항 스틸러스에게 덜미를 잡혀 버렸고, 2010년 대회에선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에게 일찌감치 덜미를 잡혀서 금세 퇴장당했다. 2011년 대회에서도 이란 세파한에게 16강에서 덜미를 잡혀 역시나 금세 퇴장당했다.

 

하지만 2012년 대회에선 확 달라져서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2승을 거두며 포항을 16강 탈락시켰고 16강전에서도 성남 일화를 1-0으로 탈락시키고 8강에 오르면서 한 시즌 대회에서 K리그 팀을 2팀이나 탈락시키면서 K리그 킬러가 되나 했지만 4강에선 우승팀 울산 현대에게 완패하면서 또 4강을 넘지 못했다. 분요드코르는 2013년 대회에선 16강에서 타이 부리람 유나이티드에게 덜미를 잡혀 또 일찌감치 탈락해버렸다. 그렇긴 해도 2014년에도 16강 진출을 해냈기에 연이어 16강은 가고 있다. 다만 오로지 분요드코르만이 우즈베키스탄 리그 팀에서 홀로 아시안 클럽대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수준이다.

 

2011년 FIFA U-17 월드컵 대회에서 8강까지 올라왔다. 뉴질랜드에게 4-1로 대패했지만, 체코와 미국을 2-1로 이기고 조 1위로 16강에 올라와 6월 30일에 벌어진 16강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4-0으로 뭉개며 건국 역사상 첫 청소년 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2013년 FIFA U-20 월드컵에서도 8강까지 올라갔다. 거기에 아시아 팀들이 줄초상을 치른 2015년 FIFA U-20 월드컵에서도 아시아팀에서 유일하게 토너먼트로 올라가 또 8강까지 올라갔다. 이렇다 보니 성인 대표팀의 실력 또한 이제는 무시못할 수준인지라 2026년 월드컵 본선에는 진출할수도 있다.

 

다만 선수들의 비매너 논란이 가끔 언급되곤 한다. 아시안컵 결승전의 아쉬움에 취해 있던 다음 날 열린 U-23 킹스컵 한국과의 경기에서 축구장에서 격투기를 했다. 영상.

 

K리그의 FC 서울과 성남 FC를 거쳐 2015년 현재 울산 현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세르베르 제파로프가 분요드코르 출신이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이었다가 2012년 아랍 에미리트 구단으로 이적한 알렉산데르 게인리흐도 분요드코르의 라이벌인 파흐타코르 출신이다.

 

국가대표인 이크롬존 알리바예프가 FC 서울과 대전 하나 시티즌을 거쳐 성남 FC에서 뛰고 있고, 루스탐 아슐마토프가 K리그2 광주 FC에서 뛰었다.

 

비슷하게 J리그에서도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 출신이 꽤 들어가는 편이다. 주빌로 이와타의 포질 무사에프, 레노파 야마구치의 도스톤벡 투르스노프, 도쿠시마 보르티스의 자비킬로 우린보에프 등이 2019년 기준으로 뛰고 있다.

 

2025년 1월 21일, 압두코디르 후사노프의 맨체스터 시티로의 이적으로 프리미어 리그 최초의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가진 축구선수가 되었다. 1월 26일, 프리미어리그 첫경기에 선발 데뷔전을 뛰었다. 

 

 

 

 

아랄해가 소멸하다시피 너무 말라버려 이에 대한 타개점으로 흑해(지중해)-카스피해-아랄해 운하 건설을 통해 아랄해를 살린다는 구상이 있지만, 비용 문제, 잠재적인 환경 문제, 운하가 통과할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진도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만약, 성사될 경우 우즈베키스탄은 카스피해를 거쳐 흑해 등 바다로 진출이 가능해질 것이다. 2021년 말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도 아랄해를 카스피해와 운하 연결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동영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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