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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띄어쓰기가 어려운 이유, 통시적인 변화, 띄어쓰기 규범성 비판, 띄어쓰기 폐지론

Jobs9 2022. 4.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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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는 한국어에서 어려운 문법 요소를 꼽을 때 거의 반드시 거론될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평범한 한국인은 물론 국어 규범을 어느 정도 학습하는 공시생들과 공무원들도 띄어쓰기에 걸핏하면 애를 먹으며, 심지어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라 할 만한 출판사 편집·교정원들조차 사전 없이는 띄어쓰기를 100% 맞힌다고 장담할 수 없다. 외국인 학습자들이 느낄 어려움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국어 띄어쓰기가 어려운 이유-통시적인 변화


한국어 띄어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형태소의 자립성'이라는 계속 변하는 것을 띄어쓰기의 기준으로 삼는 큰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복합 명사는 언제든지 합성어로 인정될 수 있으며, 의존명사 역시 시간이 지나면 문법화의 과정을 통해 어미로 변할 수 있다. 즉, 띄어 쓰던 단어도 언제든지 시간이 흐르면 붙여 쓰게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띄어쓰기 규정을 언중의 언어습관에 맞추려면 기관에서 이를 규범/사회적으로 계속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첫째로, 국립국어원이 한정된 예산과 시간, 인력 하에서 항상 공정하게 사회적 규범을 확인한다는 보장이 없다. 아래 [사전 반영의 문제]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사전에서 사회적 경향을 따라가기는 하는데 이게 어떤 기준인지 알기 어렵고, 까놓고 말해서 혹시 마음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 한국어의 경우 국립국어원이라는 단일 정부기관에 어문 규정에 대한 모든 권위와 권한을 몰아넣었기에 더더욱 무소불위의 문제가 크다.  

둘째로, 귀찮게도 한국어 사용자는 사전과 국립국어원 공고를 통해서 계속 새로운 띄어쓰기 규정을 확인해야만 한다. 형태소의 자립성은 사회적 변화이므로 내적 법칙을 통해 추측해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전을 외우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 포인트에서 대부분은 자기가 맞춤법을 완벽히 통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편하게 쓰고 읽기 위해서 만들어진 띄어쓰기 규정이 본말전도되어 한국어 이용자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셋째로, 형태소의 자립성은 모든 화자에게 균등한 것이 이나라 화자가 소속된 집단에 따라서 다르므로, 새로운 띄어쓰기 규정은 항상 모두에게 어색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자주 쓰는 단어는 띄어쓰라고 하고, 쓰지도 않는 단어는 붙여쓰라는 느낌을 모든 화자가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래 원어민이 문법을 틀리지 않는 이유는 원리를 알아서가 아니라 익숙해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띄어쓰기만큼은 익숙함이 작동하지 않기에 원어민들도 무더기로 틀리게 되는 것이다.

이 세가지 문제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게 되면 항상 규정이 바뀌어야 하는데, 전혀 직관적이지 않아서 화가 나서 찾아봤더니, 딱히 똑바로 정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 않고, 그걸 절대로 체화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문 규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덤이다.

 

사전 반영의 문제

복합명사에 관해서는 자주 사용되는 것을 사전에 등재하고 붙여쓰기를 인정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위의 예시처럼 뒷좌석은 붙여써도 되는데 앞 좌석은 띄어써야 하고, 이등분하다, 삼등분하다 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어서 쓸 수 있지만 사 등분, 오 등분부터는 사전에 등재되지 못하였으므로 띄어 써야 한다던지 하는 땜질식 규정의 한계를 노출하는 사례들이 발굴되어 언중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 

자주 사용되는 것이 인정된다는 원칙을 적용함에 있어서도 어떤 기준을 적용해서 사전에 실었는 지 모르겠으나 언중의 상식을 뒤집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누룽지 튀각(X) - 누룽지튀각(O)
데려다 주다(X) - 데려다주다(O)
모셔다 드리다(X) - 모셔다드리다(O)
다시 한 번(X) - 다시 한번(O)
너 나 없이(X) - 너나없이(O)
한 시 바삐(X) - 한시바삐(O)

규범적으로 어미화를 인정받지 못한 것 중에서 실제로는 어미화가 진행된 것도 많다. 가령 '-ㄹ 텐데' 와 같은 것은 대다수가 '터'의 의미를 고려해서 사용하기보다는 '-ㄹ 텐데'를 하나의 어미로 받아들인다. 그 증거로 '할 터인데'는 오늘날 장년들의 말투로 느껴진다. '할 텐데'가 '할 터인데'의 준말일 뿐이라면 이런 뉘앙스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음성이 전형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것은 문법화의 경향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ㄹ텐데'라고 붙여 쓰는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ㄹ 텐데'가 어미처럼 굳어지는 것은 '-ㄹ 것을'이 '-ㄹ걸'로 굳어지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현상인데, 전자는 현대에 일어나고 있고 후자는 20세기에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후자만 붙여 쓰고 있을 뿐이다. 문법화가 되고 있다는 현상 자체는 막기도 어렵고 막을 이유도 없으니 이러한 경우에는 사전이 바뀌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의존명사의 경우 같은 형태소인데도 어느 한 표현만 문법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어미화가 인정되기도 한다. 가령 '그런데'의 '데'와 '하는 데에 있어'의 '데'는 기원적으로 같은 의존명사이나 전자가 더 많이 문법화되었기 때문에 전자만 어미화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문법화 중 어느 정도까지를 규범적으로 인정해 주는지는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우는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인 1988년에 한글 맞춤법이 개정되면서 띄어쓰기 규정도 변경되었기 때문에 혼란이 더한 면도 있다. 개정 전 규정으로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직 살아 있고, 이분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원로 역할을 하기 때문. 그러다 보니 띄어쓰기 규정이 바뀐 것을 모르고 아직도 개정 전 규정을 따르는 언중이 많아서 개정 전 방식과 현행 방식이 뒤섞여 버렸다. 더군다나 나이 지긋한 학자들의 저서일 경우 후학들인 젊은 세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니, 아직도 개정 전 띄어쓰기 규정의 영향력이 살아 있다

 

규범적인 문제
그러한 통시적 변화의 애매함 외에도 규범적인 문제도 있다. 보조용언의 경우 '-어/아'에서는 붙여 쓰는 것도 언제나 허용하고 있어 틀리는 일은 적으나, '-어/아' 보조용언에 한한다는 점이 다소 직관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 사실 문법화의 정도로만 치자면 '갖고 오다' - '가져 오다'와 같은 것은 둘 다 비슷하게 문법화가 진행되어 한 단어처럼 쓰이지만 '갖고 오다'는 단지 연결어미가 '-고'이기 때문에 여태 한 단어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고 있다'처럼 너무 문법화된 나머지 '있다'라는 동사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미가 특수화된 표현도 하나의 형태소로 인정받지 못하며, 붙여쓸 수도 없다. 오히려 '-고 있다'보다도 더 뒤에 출현한 '-어하다'는 무난히 붙여쓸 수 있게 규범상 인정을 받았다.

서술성 어근에 '하다', '받다', '되다'가 결합하는 것들은 대개 한 단어로 인정받고 이들 동사를 접사로까지 분류할 정도이지만, '공부하다'일 때는 붙여 쓰다가도 '수학 공부 하다'처럼 서술성 어근 앞에 복합 명사 구성의 수식을 받으면 도로 띄어서 쓰는 것도 묘한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들은 학습을 시키면 어찌저찌 외워서 익숙해지긴 해도 언어 화자가 내적으로 규칙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명사에 붙는 것은 언제나 조사여야 하며 동사에 붙는 것은 어미나 의존명사여야 한다는 것도 띄어쓰기를 어렵게 만든다. 사실 조사나 어미를 합친 굴절접사라는 것들이 언제나 품사를 봐가면서 붙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만큼'과 같은 단어를 보면 '나만큼'의 '만큼', '하는 만큼', '지나치리만큼'의 '만큼'은 앞에 결합된 형식만 다를 뿐 의미가 거의 유사하며, 의미상에서 조금 차이를 보이더라도 이 3개의 '만큼'이 다른 형태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명사와 동사 뒤에 모두 결합할 수 있는 형태소 범주는 보조사밖에 없기 때문에 '나만큼'의 '만큼'은 조사로 취급해 붙이고, '-ㄴ' 뒤의 것은 수식 구조로 해석할 수 있으니 의존명사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지나치리만큼'은 '-리만큼'을 통째로 어미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단지 범주 문제 때문에 그렇게 띄어쓰기를 정했기에 학습자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명사면 붙이고, 동사면 띄어 쓰고' 식으로 외울 수밖에 없다. 기껏 그렇게 범주를 나눠놨더니 명사나 동사가 없는 형식이 나타나버리면 또 해석이 꼬인다. 가령 '밖에'는 동사와 함께 쓰일 땐 거의 언제나 의존명사 '수' 뒤에서 나타나기에 조사로 두었지만, '할밖에'처럼 '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처리가 곤란하다. 의미야 거의 비슷하지만 동사 뒤에는 조사가 쓰일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마침 관형형 '-ㄹ'과 유사한 형식으로 나타나니 이 경우의 '밖에'를 의존명사로 두고 '할 밖에'로 띄어 쓰게 할 수도 있고 '-ㄹ밖에'를 통째로 어미로 취급해 붙여 쓰게 할 수도 있다. 규범은 후자를 택했으므로 '-ㄹ밖에'는 붙여써야 하지만, '할밖에'를 의존명사 구성으로 분석할지 어미로 분석할지는 자의적인 것이라서 규범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사실 어쩌면 일본어 'するしか'처럼 그냥 동일한 형태소 '밖에'가 동사에도 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조사/어미/의존명사의 틀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다.

현행 띄어쓰기 규정에서는 조사와 어미는 붙이고, 의존 명사는 띄우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국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나만큼', '하는 만큼', '지나치리만큼'의 '만큼'이 국어학적으로 다른 형태소임을 알아야 띄어쓰기를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합성어 설정의 문제에서 특정 단어와 그 단어의 파생형이 함께 단어로 인정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가령 '띄어쓰기'가 한 단어라면 '띄어 쓰다'도 한 단어인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 같다'에서 활용되는 '○같이', '○ 같은'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가 드러난다. 대개 언중들이 파생형은 같은 어근으로 생각하며 표기도 동일하게 맞춘다는 점에서, 파생형도 되도록 띄어쓰기를 동일하게 설정한다는 원칙이 필요하다.

합성어 인정에서 의미 변화라는 기준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가령 합성어가 아닌 본래의 구성으로 이해해도 충분히 의미가 통하는 것들은 사전에서 합성어로 인정한다 해도, 본래의 구성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띄어 쓰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때', '이때', '그곳', '이곳'과 같은 것이 그렇다. '그 때'가 자주 쓰여 '그때'가 된다고 하여 의미상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그 때'와 같이 평범하게 구 구성으로 쓴 것을 틀렸다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합성어 인정과 붙여쓰기 필수 규정은 '큰집'과 '큰 집'과 같이 명백히 의미상의 변화가 나타날 때에만 강제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주 쓰이는 것을 붙여 쓰는 편의성을 고려해 붙여 쓸 수 있도록 하되 띄어 쓰는 것도 허용해야만 한다. 실제로 복합 명사를 합성어로 인정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하고 있다. 오히려 이 기준을 이상하게 적용해 의미가 변했을 땐 붙여 쓰는데 본래의 의미일 땐 띄어야만 하는 '핥아먹다' 같은 단어도 있다. 이런 경우 의미가 변한 것은 붙여 써야만 하겠지만, 본래 의미대로 쓰이는 것도 (그 때>그때'와 같이 본래 의미대로 쓰이는 것도 합성어로 인정했으니만큼)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

 

대안: 가이드라인화
완벽히 지키는 게 힘든 현재의 규정을 폐기, 핵심적인 철칙을 서너 줄 정도로 요약하여 남고 나머지는 언중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대안이며 띄어쓰기의 본래 도입 취지에 부합한다는 주장도 있다.

출판물 교정업자 같은 경우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긴 하므로 그들이 참고하는 수준의 규정의 필요성은 존재하고, 다만 이 규정을 틀렸다고 '넌 문법 틀렸다!'라느니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맞다/틀리다' 개념이기보다는 '띄어쓰기 권장 사항' 수준의 가이드라인으로 '가급적 지키면 좋지만 반드시 지키지는 않아도 된다'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특별시'라고 썼다고 '당신은 틀렸다!'가 아니고, 가급적 '서울특별시'로 붙여서 쓰라고 '권장'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본래부터 한국에 띄어쓰기가 존재했던 게 아니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보너스 개념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읽는 데 별 지장 없는 정도의 띄어쓰기라면 OK인 것이지, 읽는 데 별 지장이 없었음에도 아주 사소한 부분을 태클 걸어 '넌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목적이 전도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엉뚱하게 오독되지 않을 정도로만 띄어쓰기를 해 주면 OK인 게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는 띄어쓰기 시각이고, 띄어쓰기 규정을 100% 준수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을 갖춘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다. 실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출판업계 교정업자들조차 자기들끼리도 맞네 틀리네 하고 싸울 정도니까.

2002년 새국어생활 12권 1호에 실린 기고문 《명사 연결체의 띄어쓰기 실상과 처리 방향》에서 기고자 시정곤 교수는 이 문제에 관하여 띄어쓰기에 관한 현행 원칙 자체가 일관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가급적 붙여 쓰는 방향으로 교통 정리를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띄어쓰기의 중요성과 띄어쓰기의 규범성을 헷갈려 해서는 안 된다. 강행 규범으로서 띄어쓰기 규정을 비판하면 '그러면 다 붙여 쓰자는 거냐! 아버지가방에...'라고, 규범성에 대한 비판을 띄어쓰기 폐지론 혹은 금지론으로 비약시켜서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띄어쓰기 규범성 비판은 띄어쓰기 폐지론이나 금지론이 아니고,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반드시 강행 규범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이다.

2020년, 언론에서 '300만 원'식으로 철저하게 띄어쓰기 시작한 것에도 오히려 띄어쓰니 가독성이 저해된다며, 원래 띄어쓰기란 읽는 사람이 편하도록 하는 것인데, 목적이 전도되어 오히려 지나치게 문법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만원'식으로 사람들은 한 의미 단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언론에서 밀어붙여 정착되면 그게 표준이 되므로 '10만원'처럼 쓰는 사람은 문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되어버리니 울며 겨자 먹기로 '10만 원'처럼 써야 한다. 특히 띄어쓰기로 심지어 사람의 '교양'까지 판단하는 사람도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나마 짧은 글이라면 모를까, 돈 액수가 들어가는 장문의 글을 쓸 때 모든 액수마다 '원'을 일일이 띄어 쓰는 것은 은근 귀찮고, 트윗이나 댓글처럼 글자 수 제한까지 있으면 한 글자 날려먹는 셈이니 좋을 게 없다. 또 장문의 문서를 작성했는데, 나름 '원'을 일일이 띄어 썼다고 해도 그 많은 단어 중에 실수로 붙여 쓴 게 있다면 한 문서에 '10만원' '10만 원'처럼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게 되어 더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심하지 않은 것은 그냥 깔끔하게 붙여 쓰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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