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지리 Geography

용산, 용산 대통령실, 이태원, 일제시대 공동묘지

Jobs9 2022. 10. 3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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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서울특별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자치구. 북쪽으로는 중구, 동쪽은 성동구, 남쪽은 한강을 마주보고 영등포구와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와 인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마포구와 접한다. 한때 서초구 반포동의 이름을 딴 반포로가 있었지만, 용산구 구간은 녹사평대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효로의 경우엔 남영역에서 출발하여 원효대교까지 뻗어있고, 이후 꺾어져 마포대교 방향으로 이어진다.  

신분당선 연장선이 관통될 지역으로도 물망에 올라서 강남으로의 접근성도 기존보다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름이 용산(龍山)인지라 우스갯소리로 드래곤 마운틴 (Dragon Mountain)이라고 부르면서 드립을 하는데, 사실, 용산의 어원은 정말로 '높은 언덕' 을 의미하는 '산(山)' 에서 따온 이름이며, 실제로 용산구는 서울 시내에서 높은 언덕이 많은 고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2022년 수도권 폭우 사태에서도 강남구 지역에서는 침수 피해가 심했던 것과는 다르게 용산은 고지대라서 그렇게 큰 피해가 없었을 정도였다. 

주한미군에서는 용산을 영어로 드래곤 힐(Dragon Hill)이라고 부르며 용산기지에 있는 주한미군 전용 호텔 이름도 Dragon Hill Lodge이다. 

이는 龍山의 이름의 뜻은 용산역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바로 옆 "드래곤힐스파"에서도 잘 드러난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이 지역의 언덕을 가리켜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의 아들 중에서 용산원자가 있는데, 바로 이 용산에서 낳았다 하여 용산원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시대 후기에는 이 지명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용산구의 경부선 및 한강대로 연선 지역은 1914년 성저십리 폐지 당시 유일하게 경성부에서 이탈하지 않았던 사대문 밖 지역이다. 

또한 백곡 김득신이 해저무는 용산 한강변에서 급히 배를 돌리는 어부를 보며 쓴 <용산>이라는 5언절구의 한시도 전해져 온다.

서울시 법정도시계획인 2030서울도시기본계획(서울플랜)에 따라 용산구는 3도심을 매개하는 7광역중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용산역 인근이 중심지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용산구는 한남동 위주로 일본인 인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 이후 대통령실과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가 용산구에 위치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 등에서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실 측을 용산이라고 돌려 표현하기도 한다.

 

 

용산 대통령실

 

 

 

 

이태원, 일제강점기 공동묘지 터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법정동. 행정동으로는 이태원1동과 이태원2동에 편제되어 있다. 용산구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외국인, 외국 상품, 외국 문화의 집결지로 유명하다.

서쪽은 용산동2가와 용산동4가, 남쪽은 동빙고동과 보광동, 동쪽은 한남동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남산을 넘어 장충동2가와 접한다.

 

고려시대 초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이태원동 일대는 용산구 서부와는 다른 행정구역이었고, 성동구와 역사를 함께했다.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에 양주(楊州)에 편제되어 있다가, 곧 남경 한양부(南京 漢陽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성부 성저오리에 예속되었고, 영조 대에 성저십리로 바뀌어 행정구역의 변동이 있을 때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芝坊)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옛 역원(驛院)의 명칭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대개 역원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는데 자연스럽게 유동 인구가 많이 오가다 보니 역원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 이름도 원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국내에 끝 글자가 '원(院)'으로 끝나는 세 글자 지명(○○원)은 대부분 옛 역원이 있던 마을인데, 장호원(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 조치원(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일대), 인덕원(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2동 일대), 사리원(황해북도 사리원시 일대), 퇴계원(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일대) 등이 이태원과 비슷한 작명 원리로 지어진 지명들이다. 용산구청에서 이태원을 소개할 때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옛 기록에는 이태원(梨泰院) 외에도 한자가 다른 이태원(李泰院), 이태원(異胎院) 등의 다른 이름도 있었다. 

또 다른 설로는 당시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전용 거주지가 조성되었던 곳으로, 그 이름에서 마을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역원이었던 이태원의 터는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으며, 배나무가 많아서 이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에 경성부를 축소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경성대확장 때에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이태원정(梨泰院町)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태원 일대는 공동묘지가 들어선 곳이었는데, 현재의 한남동, 서빙고동 등과 함께 새로운 택지지구로 계획되어 개발되면서 공동묘지가 모두 헐리고, 1938년에는 삼각지에서 장충동으로 가는 남산주회도로(현재의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 때에 용산구에 편제되었다가, 해방 이후인 1947년 6월에 서울특별시령 제2호에 의해 동회제도가 실시되며 이태원북부동(梨泰院北部洞)과 이태원중부동(梨泰院中部洞), 이태원남부동(梨泰院南部洞)으로 나뉘었고,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해 이태원북부동과 이태원중부동이 이태원제2동으로, 이태원남부동이 이태원제1동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옛 일본군 병영이었던 자리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용산기지 인근의 이태원동과 한남동은 미8군의 배후지가 되었고, 6.25 전쟁 직후부터 이 일대는 서울의 외국인들이 몰려사는 지역으로 발전한다. 6.25 직후에 인근의 해방촌부터 이태원까지 피란민들과 상경민들이 몰리면서 주택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세운 이태원시장은 미군 PX에서 나온 물자로 상업을 이어가며 번영하게 되었고, 용산기지 바로 옆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위치가 맞물리면서 외국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다수의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이태원과 한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1970년대부터는 이태원로 이북으로 조금씩 부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 용산구 일대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서현 삼성 부회장도 자택 공사 중 쏟아진 유골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고. 사실 신도시, 유원지, 공원 등을 짓다가 무덤이나 시신이 발견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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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위에 우뚝 선 '부촌' 이태원·한남동

 

1930년대 일본인 조선 이주 본격화 주거 공간 확보 필요성이 제기

이태원 공동묘지를 주택가로 탈바꿈. 묘지 이장 과정 없이 그 위에 개발 강행

1930년대 용산구 일대 공동 묘지 /서울역사박물관

 

이 일대가 공동묘지로 사용됐던 건 1900년대 초반, 조선 왕조 수도인 한양의 행정구역인 한성부에서는 당시 관내에 묘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국립미술박물관 조사 자료를 보면, 조선 후기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대문 내 개인 묘지 설치를 허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성들은 사대문 바깥에 위치한 이태원·보광동부터 서쪽으로는 아현동 근처에 시신을 매장했다. 당시 주인 없던 묘지로 사용하던 지대가 지금은 부촌이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점령이 시작됐고 1912년, 일본은 정식으로 이태원 일대를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면적은 약 169만2000㎡(51만1830평) 규모다. 서울에서 가장 넓었다. 아현동과 장충동 일대도 일부 공동묘지로 쓰였다. 
1913년 경성부에서 설치한 공동묘지는 미아리·이태원·이문동·만리동·연희동 등 모두 19개소였다. 그중 만리동 공동묘지는 일본인 전용이었다. 이들 공동묘지는 현재 모두 주택지로 변했다. 서울의 관영 공동묘지로는 망우리 공동묘지가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도 서울 곳곳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현동 서소문 근처에 위치한 아현동의 동명은 '아이고개'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서소문 일대에서 아이의 시신이 많이 발굴됐는데 그 일대가 언덕이 있는 고개라서 '아이고개'가 된 것이다. 지금의 서울 5호선 애오개역이 아이고개를 뜻한다. 
유관순 열사도 이태원 일대 공동묘지터에 묻혔다. 현재까지도 유 열사의 추모비가 '이태원 부군당'에 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4월 1일 일본군에 체포됐고, 고문을 당하다 1920년 9월 28일 순국한다. 이후 유 열사 시신은 당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치됐다. 
그런데 유 열사 유해는 유실됐다. 1930년대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주거 공간 확보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태원 공동묘지를 주택가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묘지 이장 과정 없이 그 위에 개발을 강행했다. 
용산구청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실이 있는 국방부 부지와 용산 미군 부대 일대가 원래 일본군의 주둔지로 파악된다. 6·25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공동묘지 터였던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는 1960~80년대 각국 대사관이 자리 잡았고 이후 부촌으로 발전했다.
피란민들과 상경민들도 몰리면서 개발 속도는 급물살을 탔다. 이때 생긴 이태원시장은 미군 PX에서 나온 물자로 상업을 이어가며 번영하게 됐고, 용산기지 바로 옆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위치가 맞물리면서 외국 문화가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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