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랴오허)
遼河 | liáohé
Liaohe
요하 강
이칭
요하(랴오허), 랴오 강, 요수
국가
중국
유출
발해
황해
길이
1,345km
유역 면적
232,000㎢
요하(중국식 발음 '랴오허')는 중국의 동북지역에 있는 강이다. 중국 7대강 중 하나로 규모가 꽤 크다. 랴오닝 성을 중심으로 내몽골 자치구와 랴오닝성, 지린성등을 지나 발해만으로 흐른다. 하류의 서쪽은 쌍태자하, 동쪽은 대요하 쪽으로 흐른다. 과거에는 대개 혼하, 태자하와 만나는 대요하 쪽으로 흘렀지만, 20세기 들어 대부분의 물이 쌍태자하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지리
요하는 요수(遼水)라고도 불렀으며, 발원지를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자면 동북쪽으로는 동요하, 혼하, 태자하 등의 지류가 요동반도와 지린성 일대를 적시면서 흘러나오고 서쪽으로는 대흥안령 산맥 너머에서 시라무렌강이, 베이징 인근 연산산맥 일대에서는 노합하가 흘러나와 서요하를 이룬다. 요동에 면한 강의 중하류에 이르면 요택(遼澤)이라는 늪 지대를 형성하며 바다로 흘러간다.
이 강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요서라 부르고 동쪽 지역을 요동이라 불렀다. 요하를 경계로 딱 가른 것은 아니고 요동의 범위는 이 일대를 차지한 세력들의 영역 변동에 따라 요하 이서를 포괄하기도 했다.
흔히들 요하를 고구려와 중원세력의 경계 하천으로 인식하곤 하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멀고, 요하를 기점으로 영토를 분점한 적은 없었다. 고구려가 요하 너머 어느정도까지 세력을 미쳤느냐와는 별개로 중원 세력의 거점은 요하 서쪽 200km 정도 떨어진 차오양시(朝陽市) 인근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강폭이 좁기 때문. 대륙에 있으니 큰 강일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하구에서 20km 떨어진 판진시(盤錦市) 부근에서도 강폭이 불과 300m 정도이며, 바다로 합류하기 직전에서야 그나마 강폭이 넓어지긴 하지만 강의 폭으로만 보면 마치 해협을 방불케 하는 압록강 하구나 한강 하구보다 초라한 편이다.
그래도 거대한 규모와 복잡한 지형 덕에 이 강을 장악한 세력은 만주와 동시에 몽골 초원, 중국 대륙까지 동시에 견제하며 영향력을 끼쳤다. 적대적인 중원 세력이 베이징에서 요서회랑으로 빠져나오는 상황이 생기면 요하 상류와 요동에서의 견제를 동시에 받아야 했고 요서회랑을 빠져나오고도 요택이라는 늪지대에서 발목이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중앙집권 왕조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홍산 문화가 발흥했다. 학계에선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요서에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로 세를 확장해나가면서 중심지를 차오양에서 선양으로 옮겼고, 이후 연나라의 침공으로 중심지를 평양으로 이전하기 이전까지 요하 지방이 고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추정한다. 과거 고구려 시절에도 고구려 서부의 주요한 하천이었다.
산업
요하 하류 근교에 석유가 나는지라 석유를 매개체로 한 중화학 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어있다. 물론 중국의 인구가 많기 때문에 요하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내수용이고, 환경오염도 꽤나 심각한 축에 든다.
요택(遼澤)
요녕성 한복판을 세로 지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요하(遼河)강은 옛날 고구려가 차지하던 요동(遼東)을 수호하는 천연적인 해자다. 당시 이 해자 옆에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천험(天險)이 하나 있었다. 왕래를 못할 정도로 험한 이 천험은 적군이 요서(遼西)로 해서 요동으로 쳐들어 갈 때, 마치 저승길처럼 앞을 가로막아 그렇게도 꺼리고 두려워했건만 건너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지역이었다. 바로 역사상 그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요택은 옛날 중원(中原)세력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수많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고장이었으므로 고구려 서부변경 바깥에서부터 오는 침공을 자연적으로 저지해주고 고구려정권의 생존을 연장시켜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 요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요택은 요하와 갈라놓을 수 없으므로 먼저 요하유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의 7대강으로 꼽히는 요하강은 상류가 동요하와 서요하로 갈라져 있다. 동요하는 길림성 요원(遼源)시 합달령(哈達嶺)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점차 서남쪽으로 굽이돌아 요녕성 철령(鐵嶺) 경내 창도현(昌圖縣) 복덕점(福德店)에서 서요화와 합류한다. 서요하는 내몽골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백차산(白叉山)에서 발원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와 하북성 평천현(平泉縣) 칠노도산맥(七老圖山脈)의 광두산(光頭山)에서 발원한 노합하(老哈河)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의 소가포(蘇家鋪)에서 합류해 한 줄기 강물로 형성되어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요녕성 창도현 복덕점에서 동요하와 만난다.
사람들은 이 동요하와 서요하가 합류해 흐르는 물줄기를 요하강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복덕점에서부터 요하로 불리는 이 강은 남쪽으로 철령지역을 지나 심양 경내의 석불사(石佛寺) 저수지와 신민(新民), 요중(遼中)을 거쳐 안산(鞍山)지역의 대안(臺安), 해성(海城)과 반금(盤錦) 지역의 반산(盤山)과 접경지대에 들어선 다음 삼차하(三叉河)란 곳에서 지류인 혼하강과 태자하가 합류된 물줄기와 외요하(外遼河)로 연접되었다. 이리하여 요하강은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진 셈이다.
한 갈래는 반금으로부터 발해(渤海)로 흘러들고, 다른 한 갈래는 영구(營口)에서 발해로 유입한다. 이 두 강줄기 사이에 원래 외요하가 이어져 있어 강물이 서로 통했다. 그런데 1958년, 반산현 육간방(六間房)지역의 외요하를 막아버려(이로 인하여 외요하가 폐기됨) 두 강줄기가 제각기 바다로 흘러들게 되었다. 요하강 원래 물줄기는 반금에서 바다로 흘러드는데 쌍대자하(雙臺子河)라 부르고, 혼하와 태자하가 합류된 물줄기는 영구에서 바다로 흘러드는데 대요하(大遼河)라 부른다. 요하강의 상류는 동요하와 서요하의 발원지에서부터 두 강물이 합쳐지는 복덕점까지고, 복덕점에서 심양 북쪽 석불사저수지까지는 요하강 중류이며, 석불사저수지에서 쌍태자하 입해구까지는 요하강 하류인데 이 구간을 하요하(下遼河)라 일컫는다.
세상만물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요하강과 이와 관계되는 요택도 마찬가지다. 중국 발해대학(渤海大學) 부교수 초충순(肖忠純)은 그의 저서 <요령역사지리(遼寧歷史地理)>에서 각 역사시기 요령지역의 지형, 기후, 산림, 하천, 해안선과 옛날 ‘요택’의 변천을 서술해 놓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수천년 동안 요하강과 그 지류 혼하, 태자하 등 요하수계(遼河水系)는 다른 강과 마찬가지로 그 유역과 상태가 여러 번 변하였으며, 요하가 흘러드는 발해만 꼭대기 해안선도 끊임없이 남진(南進)하여 오늘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지난 역사시기 기후, 홍수의 범람, 강줄기 위치의 움직임 등으로 말미암아 요하연안에 호수와 소택지가 많이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면적이 아주 넓고 큰 것을 보고 ‘요택’이라 일컬었다.
초충순은 ‘요택’이란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자료는 적지 않지만 상세하게 그 지리범위를 밝혀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한다. 그러므로 고대 요하유역의 이런 습지에 대한 전면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요택과 관련된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 발견의 성과, 고대 현지 현과 진(鎭)의 설치, 교통노선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요택의 지리범위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요나라 초기까지 요하의 상류 서요하충적평원에도 호수, 소택지, 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초지로 이루어진 요택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기후변화와 그 지역 토지사막화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말하는 요택은 주로 하요하(下遼河, 심양 북쪽 석불사저수지 남쪽의 요하구간) 평원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부동한 역사시기 그 지리범위도 같지 않다.
먼 옛날부터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요택은 현재 북진(北鎭, 금주 소속 현급 시)~요중(遼中) 사이에 분포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로 현재 북진, 흑산(黑山), 신민, 요중, 대안(안산시 소속 현), 반산(반금시 소속 현)이 둘러싼 구역이다. 현대 지리 상황을 본다면 이 구역은 요하강 서쪽의 움푹 파인 평원으로서 주변지역이 모두 높게 솟아있는데 서쪽은 요서 구릉이고 북쪽은 요북 낮은 구릉지며, 동쪽과 남쪽 지역은 또 상대적으로 좀 높다. 이런 지세는 하천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하고 또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수많은 호수와 소택지를 형성했다.
삼국시기부터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 요하강 서쪽에 있는 요택의 범위가 더 커졌다. 이 시기 동서방향으로 요택은 기본상 변하지 않았지만 남북방향으로는 더 늘어났다. 삼국시기 요하강 동쪽지역은 공손씨(公孫氏)가 할거(割據)하고 있었고, 요하강 서쪽지역은 선비(鮮卑)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지역은 무(無) 관리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이러했다. 때문에 요택 동남부지역에 한나라가 설치했던 험독현(險瀆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 손성자<孫城子>마을)와 방현(房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반금시 대와현 소염탄<盤錦市大窪縣小鹽灘> 부근)은 삼국시기 폐기된 후 청나라 말기에 와서 거기에 대안현을 설립할 때까지 요택지역에는 1천600년이 넘도록 아무런 주(州)와 현(縣)이 없었다.
요택 북부에 있었던 망평현(望平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신민시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도 후연(后燕)시기 폐기되어 수나라 때 와서야 신민 고대자(高臺子)에다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택지역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줄곧 황량하고 쓸쓸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동안 이곳의 하천들이 여러 번 넘쳐나 호수와 늪이 많은 소택지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요택은 남쪽으로는 현재 대안현 전부와 반금 동북부지역까지 퍼져나갔고, 북쪽으로는 현재 신민 남부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때 요택의 동서너비가 200리가량 된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 요하강 동쪽까지 확대된 요택이 또 늘어났다. 이에 앞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때, 전 시대(前時代)에 있었던 요택은 점차적으로 요하강 동쪽으로 번져나갔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 이르러 요하강 동쪽의 이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청나라 대학사(大學士) 고사기 (高士奇)는 북경에서 심양으로 강희황제를 따라 순방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심양에서 요하까지 100여리 사이인데 지세가 낮아 땅이 온통 진흙탕으로 되어 말과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청태조는 심양을 도읍지로 정한 다음 팔기(八旗, 군사성과 행정성을 띤 청나라의 조직)의 일꾼들을 시켜 너비가 3장되는 첩도(疊道, 흙을 퍼 올려 겹쳐 쌓은 길)를 120리나 수축해 심양에서 거류하(巨流河, 심양 서북쪽의 요하강구역의 별칭)까지 평지처럼 오고 갈 수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늘어난 동시에 요양 서쪽에서부터 그 서남쪽으로 해성의 우장(牛莊)까지도 소택지가 형성되었다.
위 두 지역이 소택지로 변하게 된 것은 주로 요하, 태자하·혼하가 범람해 강줄기가 변한 까닭이다. 이 세 갈래 강이 여러 번 넘쳐나고 강줄기가 서쪽으로 몇 번 옮겨져 요하 강변에서 심양서부지역까지 소택지가 넓어지게 되었고, 이 세 갈래 강의 합류점이 그냥 남하(南下)해 요양서쪽에서 그 서남쪽 우장까지의 지역이 소택지가 된 것이다.
요택, 이 두 한자는 원래 아득히 넓은 늪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말하는 요택은 면적이 대단하게 큰 그런 호수나 늪이 아니라 요하평원에 물이 많이 있는 조건아래 형성된 여러 가지 자연지모(自然地貌)의 종합체(綜合體)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요하평원은 예부터 하천이 밀집해 있다. 그 남북을 꿰뚫고 있는 요하강의 서쪽에는 요양하(繞陽河), 유하(柳河), 서사하(西沙河), 양장하(羊腸河) 등 여러 갈래 지류가 있고, 동쪽에는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 사하(沙河) 등 여러 갈래 지류가 있다. 이밖에 또 이런 하천들과 이어져 있는 기타 작은 하천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하천망으로 갈라놓은 소택평원지모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는 갈대와 수초들이 무수히 자라는 진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종횡으로 뻗어나간 하천과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 지역은 하천, 호수, 늪과 수렁 등으로 서로 엇갈려 있는 소택지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요택은 오랜 기간 지속됐을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어마어마하다. 요택의 규모가 제일 컸던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는 동쪽으로 요양과 심양의 서부지역, 서쪽으로는 북진과 흑산의 동부지역, 북쪽으로는 신민 남부지역, 남쪽으로는 반산과 해성의 우장까지인데, 남북길이가 약 300리 되고 동서너비는 200리가량 된다.
옛날에 요택의 소택지범위가 계절 따라 변화했다. 요택의 수원(水源)은 일반적으로 지면에 흐르는 물, 지하수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섞여 보급되는데 그 물이 줄어들어 마르면 습지생태시스템이 육지생태시스템으로 바꾸어지고, 또 물이 불어날 때는 습지생태시스템으로 되돌아간다. 수문(水文,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물의 변화와 운동 상황)이 요택의 시스템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요하평원의 소택지는 강우량 변화에 따르는 계절의 변화성이 뚜렷하다. 이는 비가 많이 오는 여름과 가을철에 요택의 면적이 불어나고, 비가 적게 내리는 계절에는 요택의 면적이 줄어드는 데서 나타난다.
역사기록을 본다면 기원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왔을 때는 마침 5월이어서 ‘진펄 200여리’를 지나서야 요택을 넘게 되었고, 철군하여 되돌아갈 때는 9월 하순인데 요택의 ‘진펄이 80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겨울에는 요택이 얼어붙어 진펄이 사라진다. 때문에 요택 지리범위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데 줄곧 어려움이 있었다.
요수(遼水)와 요택(遼澤) 그리고 마수산(馬首山),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정관貞觀] 19年 봄 2월 경술일 (2월12일),[황]상이 친히 6군을 통솔하고 낙양에서 출발하였다. 을묘일 (2월17일),조서를 내려 황태자가 정주에 머물러 나랏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十九年春二月庚戌,上親統六軍發洛陽。乙卯,詔皇太子留定州監國。
『舊唐書』 권 3 太宗本紀 下
3월 정축일(3월9일)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三月,丁丑,車駕室定州。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임진일(3월24일)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다. [황제는]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손으로 비옷을 안장 뒤에 묶었다. 장손무기를 섭시중에, 양사도를 섭중서령에 각 임명하였다. 壬辰,車駕發定州。親佩弓矢,手結雨衣於鞍後。命長孫無忌攝侍中,楊師道攝中書令。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서기 645년,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태종(唐太宗)은 낙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의 당(唐)측 전방기지라 할 수 있는 정주(定州)에 먼저 도달한 뒤 그곳을 기점으로, 먼저 전장에 이르러 이미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이세적(李世勣)과 이도종(李道宗) 등의 장수들에 합세하여 고구려의 요동성 공략에 돌입하였다. 즉 통상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주는 전쟁 직전 고구려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있던 당(唐)의 변경지역이었는데, 이를테면 당태종이 정주에서 출격하며 손수 활과 화살을 차고 비옷을 묶는 등 당(唐)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개인 전쟁 채비를 갖추며 전의를 다지는 비장한 모습은 전장이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었음을 시사한다.
당초 태종은 태자가 있는 곳(정주定州)에서 [요동遼東]행재소(行在所)1까지 30리 간격으로 봉화(烽火)를 설치하고, 요동이 함락되는대로 봉화를 들기로 약속하였다. 이 날 봉화를 들게 하여 새(塞)안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初, 帝自太子所屬行在, 舍2置一烽, 約下遼東擧烽, 是日傳燎入塞.
『新唐書』 권 220 東夷列傳
당태종은 또한 자신의 태자를 정주(定州)에 남겨두어 전장으로 나가는 자신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게 하였다. 그리고 요동성(遼東城)의 함락 소식을 태자에게 알릴 목적으로 정주에서 [요동성 부근의] 요동행재소까지 봉화대를 30리 간격으로 설치하였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봉화대의 설치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장에서의 임기응변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을 개연성이 짙고, 또한 기대되는 요동성 점령의 드라마틱한 연출 등 당태종의 정치적 의도가 더불어 내재된, 일시적인 용도였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여하튼 요동성은 당에 함락되었고 봉화는 올려져 약속대로 정주(定州)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학계의 통설상 요동성의 비정위치는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랴오양)시 부근으로서 정주로부터는 무려 800km(1,500리)가 넘는 먼 거리이다. 따라서 30리 간격으로 설치했다면 총 50여개의 봉화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면밀한 사전 조사, 계획 없이 전쟁 중에 일시적인 용도로 세워진 그 많은 수의 봉화대가 1,500리의 먼 거리 사이에, 그것도 전쟁의 혼란속에서 과연 제대로 연동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는 설치된 봉화대의 총수가 대여섯곳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관貞觀 19年] 여름 4월 계묘일 (4월6일),유주성 남쪽에서 군사들과 함께 승리를 다짐하고, 이어서 6군에게 잔치를 크게 베풀고 보냈다. 夏四月癸卯, 誓師於幽州城南, 因大饗六軍以遣之.3
『舊唐書』 권 3 太宗本紀 下
정미일(4월10일)에 거가가 유주(幽州)를 출발하였다. 丁未,車駕發幽州。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645년 3월 24일(음) 정주(定州)를 출발한 당태종의 행적은 4월 6일 유주성(幽州城) 남쪽에 다시 보인다. 여기서 유주성은 당(唐) 유주(幽州)의 치소인 계현(薊縣)의 도성, 즉 계성(薊城)을 가리킨다. 계현의 위치는 정주의 정북 방향 25킬로미터 거리의 현 보정시 당현(唐縣) 일대이다.4 학계의 통설에 따른 계현의 비정위치는 지금의 북경(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이고 요동성의 비정위치는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랴오양)시 일대이다. 북경에서 요양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590킬로미터에 달하고 실제 당시의 도보로는 아마도 1,0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였을 것이다. 통설대로라면, 전쟁은 나중 일이고 우선 머나먼 전장까지 장장 1,00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할 일을 앞둔 병사들에게 잔치를 먼저 베풀었다는 것인데,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계현에서의 잔치는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전장으로 곧바로 보내져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병사들을 위한 당태종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 틀림없다. 군사들이 떠난 수일 뒤 당태종 역시 계현을 떠나 북평(北平)으로 향하였다.
정사일(4월20일)에 거가가 북평(北平)에 도착하였다. 丁巳,車駕至北平。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후위가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북제가 [북평]군을 폐하였다. 포음[현]을 없애고 북평현을 설치하였다. 수(隋)와 당(唐)이 그대로 따랐다. 옛성이 지금의 직례 완현(完縣) 동북에 있다. 後魏置北平郡。北齊郡廢。省蒲陰置北平縣。隋唐因之。故城在今直隸完縣東北。
『中國古今地名大辭典』 '北平縣'
당태종이 유주(幽州)를 출발하여 645년 4월 20일(음)에 도달한 북평(北平)은 당(唐) 시기 정주(定州)의 관할하에 있던 북평현(北平縣)5을 가리킨다. 당(唐) 정주(定州) 북평현은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이 있던 곳으로서 그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완현(完縣, 즉 順平縣)이다.6 참고로, 혹자는 당태종 일행이 유주에서 열흘 걸려 북평에 도달한 사실과 고대 보병의 평균 행군속도(하루에 30리)에 착안하여 유주와 북평간 거리의 산출을 꾀하기도 하지만, 그 일대가 행군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는, 고구려와의 국경에 근접한 최전방 지역이라면 평균 행군속도 등의 상수 값은 무의미할 것이다. 당시 고구려와의 전선(戰線)은 대략 요수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던 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어 지겠지만 북평으로부터 요수까지는 25킬로미터 남짓되는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당태종의 거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수는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의 조하(漕河)이다.
경오일(5월3일)에 거가가 요택에 도착하였다. 진흙뻘이 200여 리였고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임신일(5월5일)에 [요]택 동쪽으로 건너갔다. 庚午,車駕至遼澤,泥淖二百餘里,人馬不可通,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軍不留行。 壬申,渡澤東。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정축일(5월10일)에 거가가 요수를 건너고는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문거의 직급을 몇 단계 올려 중랑장으로 삼았으며, 장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신의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丁丑,車駕渡遼水,撤橋,以堅士卒之心,軍於馬首山,勞賜江夏王道宗,超拜馬文舉中郎將,斬張君乂。上自將數百騎至遼東城下,見士卒負土填塹,上分其尤重者,於馬上持之,從官爭負土致城下。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지도 1 -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로 (본 지도 출처 : OpenStreepMap)
당태종의 궁국적인 공격 목표였을 고구려 평양성을 향한 그의 이동경로를 주시해보면 그의 이전 행적이 마지막으로 드러난 북평(北平)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요택(遼澤)과 요수(遼水), 마수산(馬首山), 요동성, 평양성 등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북평의 위치는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이고 평양성은 완현으로부터 직선거리로 동북쪽 59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7 따라서 요택, 요수, 마수산, 요동성 등 고구려-당(唐) 전쟁시 당태종의 침공루트와 관련된 해당 지명들의 위치 추적 범위는 완현과 정흥현의 고성을 잇는 직선에서 좌우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 영역으로 대폭 좁혀진다. (지도1 참조)
우선 요수(遼水)를 찾아보자.
요수는 당태종의 이동경로상 북평(完縣)과 평양성(固城) 사이로 한정되는 구간의 어느 지점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가 분명하다. 지금의 완현(完縣)에서 동북 방향으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까지 이동하면서 건너게 되는 물줄기들로는 계하(界河), 조하(漕河, 즉 서수 徐水),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 계조하(鷄爪河) 등이 차례로 있다. 요수는 이들 물줄기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계조하는 이미 당시의 패수(浿水)로 밝혀졌으므로8 요수가 될 수 없고, 폭하 역시 당시로부터 불과 30여년 전의 고구려-수(隋) 전쟁시 요수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살수(薩水)였으므로9 역시 요수의 후보목록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요수의 실체는 계하와 조하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諸軍乘勝進圍遼東城, 卽漢之襄平城也.
『資治通鑑』 권 181 隋紀 5 煬皇帝 大業8년(612) 2월 癸巳, 上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장성을 쌓기도 하였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주지하다시피 요동성은 고구려-수(隋) 전쟁 당시에도 역시 중원에서 비롯된 침략세력의 주요 공격 목표들 중 하나였다. 위 《資治通鑑(자치통감)》 권 181 '수기(隋紀)'에 밝혀져 있듯이 수(隋) [및 당(唐)]대의 요동성은 곧 한(漢)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의 현성인데, 양평현은 위 《史記(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의 기록대로 전국(戰國) 연(燕)이 쌓은 장성의 동쪽 끝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이다.10 즉, 당(唐)군이 공격한 요동성의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 부근인 것이다.11 (지도1 참조)
당태종은 요수(遼水)를 건넌 뒤 곧바로 마수산(馬首山)에 군영을 세우고 즉시 이어서 요동성 공략에 나섰다. 이로써 요수, 마수산 및 요동성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인근 남쪽 방면에 위치한 하천으로는 그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조하(漕河)가 유일하다. 따라서 조하가 바로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 당태종이 건넜던 요수인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함을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의 계(薊)에 순행하고, 요수와 갈석(碣石)에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비용을 지출함이 없도록 하라. 以髙句麗蓋蘇文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為勞費.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3년(서기 644년) 11월 (음)
'요갈(遼碣)'은 요수와 갈석[산]을 가리킨다. '碣'은 갈(其謁翻)로 발음한다. 遼碣謂遼水碣石 碣其謁翻
『資治通鑑』 권 107 胡三省 注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 조서를 내려 요수(遼水)와 갈석산(碣石山)을 한데 묶은 지명인 '요갈(遼碣)'에서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다고 하였다. 즉 당시의 요수와 갈석산이 서로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글에서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요수로 밝혀진 조하(漕河)는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서북쪽의 낭아산(狼牙山)에서 발원한다. 낭아산은 고대의 갈석산이므로 낭아산에서 발원하는 조하 역시 당태종이 가리킨 '요갈(遼碣)'의 요수(遼水)가 분명한 것이다.12
더구나 당태종은 '유계(幽薊)' 즉 유주(幽州)의 계현(薊縣)에 먼저 들린 다음에 요수(遼水)와 갈석산(碣石山)에서 죄를 묻겠다고 하였는데, 계현은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이므로 당태종의 조서 내용은 정주(定州), 당현, 완현(完縣), 조하(漕河)의 순서에 따라 이동한 것으로 드러나는 전쟁 초기 그의 실제 행적에 일치하여, 역시 요수가 현 만성 북쪽의 조하였음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당태종이 건너간 요택의 올바른 이해
《高驪記(고려기)》에 이르기를 「그 하천은 너비가 백여보(百餘步)로서 밋밋하게 흐르며 물이 맑고 깊다. 또한 굽이진 곳에 늪이 많고 여러 갈래의 지류로 퍼져있다. 양쪽 기슭은 빽빽히 자라는 키 큰 버드나무에 덮혀 있어 병마를 숨기기에 좋다. 양쪽 강변이 고르게 널리 펼쳐져 있어, 통틀어서 요택(遼澤)이라 이름한다. 잔풀과 부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이 많이 산다.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드리워졌다가 곧 걷히곤 하는데, 누각의 담벼락과 같은 형상으로서, 즉 《漢書(한서)》에 이른바 신기[루]이다」 하였다. 高驪記云 其水闊百餘步平流清深 又多灣潭枝派 兩岸生長柳蒙密可藏兵馬 兩畔彌平 總名遼澤 多生細草雈蒲毛群羽族 朝夕相霧須臾卷斂狀若樓雉即漢書所謂蜃氣也
『翰苑』 蕃夷部, 660년경 (唐) 張楚金 편찬
위 《翰苑(한원)》의 요수에 관한 기사에 의하면 요택은 요수의 유로를 따라 주변에 형성되어 있었던 습지였던 것이 분명한데, 당태종군이 통과한 지점 일대에서는 요수의 남변(또는 서변)에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요택을 논함에 있어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資治通鑑》,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등에 기록된 요택의 진흙뻘 200여 리란 요택의 폭이 아닌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진흙뻘 200리를 이틀만에13 통과하기란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당태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군사작전상 위험하기 짝이 없었을 200리 늪지의 수렁길로 자신의 군대를 몰아 넣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 있어서도 공기부양정(hovercraft) 등의 특수 수륙양용 운송 수단 없이, 보병부대가 맨몸으로 200리 늪지에 스스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지도 2 - 645년 당태종이 건넌 요택과 요수 및 진지를 구축한 마수산의 위치 (본 지도 출처 : opentopomap.org / topographic-map.com)
고구려 정벌에 [염입덕이] 따라갔다. 군대가 요택에 이르렀는데, 동서로 200리가 진흙뻘이었다. 인마가 통과할 수 없었는데, 입덕이 길을 메우고 다리를 지어 병마의 지체가 그치니 태종이 몹시 기뻐하였다. 從征高麗, 及師旅至遼澤, 東西二百餘里泥淖, 人馬不通, 立德塡道造橋, 兵馬留礙, 太宗甚悅.
『舊唐書』 권 77 閻立德列傳
택주(澤州) 광제군(廣濟軍), 하등 주(州)로, 자사(刺史)를 두었다. 본래 한(漢) 토은현(土垠縣)의 땅이었다. 澤州,廣濟軍,下,刺史.本漢土垠縣地.
『遼史』 권39 지리지3, 中京道
《資治通鑑》에 드러난 진군 일정으로 미루어 볼 때 당태종군은 지금의 당현(唐縣)에서 동북 방향으로 이동하여 완현(完縣) 및 만성(滿城)을 차례로 경유하고 만성의 북쪽 부근에서 요택 및 요수 즉, 지금의 조하(漕河)를 건넌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필자는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의 위치를 今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에 비정하였는데14, 《遼史(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요(遼)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속한 택주(澤州)는 한(漢) 우북평군 토은현과 동일한 곳으로서, 이는 곧 《武經總要(무경총요)》에 '요택의 땅(遼澤之地)'으로 기록된 '澤州'일 것이다.
실제로 조하는 만성의 북쪽 방면을 동 또는 동남방향으로 흘러 80여 킬로미터 (즉 200여리) 하류 고대 발해만의 내해였던 백양정(白洋淀)에 유입되는데, 요택의 습지가 동서로 200리를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위 《舊唐書》 '염입덕열전(閻立德列傳)'의 기사에서 확인되며, 이는 조하의 실제 길이 및 흐름 방향에 부합한다. (지도1 참조) 특히 조하(漕河) 상류 용문수고(龍門水庫, 저수량 1억1천800만 세제곱미터)의 댐이 조하 유역의 홍수 조절을 주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바이두 백과 '龍門水庫')은 조하 주변에 본래 요택(遼澤)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을 개연성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위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태종군이 요택을 직접 돌파하여 건널 수 밖에 없었던 것는 습지가 더욱 심화되었을 하류쪽으로의 우회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상류쪽 역시 산지(山地)로 가로막혀 있어 대군이 우회하기에는 여건이 여의치 않았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만성 북쪽 조하(漕河) 인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보아 당태종군은 폭 1킬로미터15 남짓한 요택의 습지를 동 또는 동북으로 가로질러 이틀만에 통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2 참조)
이제까지 요택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한결같이 당태종군이 요택의 습지 200리 길을 실제로 헤쳐 나아간 것으로 상정하였는데, 이는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요녕성 요하(遼河)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따라, 「요택이 동서로 200리에 걸쳐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을 현 요하 주변의 지리적 여건에 섣불리 대입하여 잘못 해석한 어처구니없는 오류이자 학술적 참사이다.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앞서 살펴본대로 당태종군은 만성(滿城) 북쪽 부근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요수(遼水) 즉, 지금의 조하(漕河)를 건넌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마수산(馬首山)은 만성을 기준으로 동북방면 조하 건너편의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사진 1 - 상산(마수산) 전경 1 (사진 출처 : 구글어스)
사진 2 - 상산(마수산) 전경 2 (사진 출처 : 구글지도)
상산이 [서수]현 서쪽 43리에 있다. 그 모양이 코끼리와 비슷하다. 象山在縣西四十三里 其形類象
『徐水縣新志』 권 2 地理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맹촌(孟村) 인근에 해발 370미터 높이의 상산(象山)이 있다. 멀리서 보면 누워있는 코끼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십수년전의 광산 개발로 인해 현재는 무참히 훼손된 상태이다. 상산에 대하여 나름 알아보던 중 「이제는 어릴적 보았던 코끼리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등 많이 안타까워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위성사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상산의 모습은, 코끼리라기 보다는 몸집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과하게 커보이는, 영락없는 '말대가리'의 형상이다. (사진1, 2 참조) 만성 부근의 조하(漕河)로부터 동북쪽으로 불과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상산의 위치가, 요수에서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사서에 기록된 마수산(馬首山)의 위치에 절묘히 부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산의 '말대가리(馬首)' 형상은 절대로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
또한 상산(象山)의 동쪽으로는 멀지 않은 거리에 연장성(燕長城)이 동남방향으로 지나는데, 그 부근이 한(漢)대의 양평성(襄平縣) 즉 요동성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으로서 마수산(馬首山)의 군영으로부터 곧바로 출격한 당태종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었다. (지도1 참조) 이에 더하여 상산(象山) 동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수양제의 동정(東征)과 관련이 있는 반희산(班姬山)16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상산(象山) 일대가 고구려-수(隋) 및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에 수(隋), 당(唐)군의 최전방 기지였을 개연성을 더해주는 동시에 상산(象山)이 바로 마수산(馬首山)이었음을 뒷바침한다.
결어
서기 645년 고구려-당(唐) 전쟁시 낙양을 출발한 당태종은 정주(定州)에 도달한 뒤 이어서 유주성(幽州城, 지금의 唐縣)과 북평(北平, 지금의 完縣)을 차례로 경유하여 지금의 만성(滿城) 북쪽에 있었던 요택의 습지를 가로질러 통과하고, 잇달아 요수(遼水, 지금의 漕河)를 건넜다. 곧바로 요수에서 가까운 마수산(馬首山, 지금의 象山)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서수구(徐水區) 서부 어딘가에 있었을 요동성으로 출격하여 전쟁에 돌입하였다.
고구려-당(唐) 전쟁시 요수(遼水)는 지금의 보정시 서북쪽의 낭아산(狼牙山)에서 발원하여 만성구(滿城區) 및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동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조하(漕河)이다.
마수산(馬首山)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맹촌(孟村) 부근에 위치한 상산(象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