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브파(아랍어: وهابية 와하비야, Wahhabism 와하비즘)
아랍인들이 쿠란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교 수니파 안의 운동이다. 그 민족 운동을 와하브 운동(아랍어: ألدعوة ألوهابية 알다와 알와하비야)이라 한다. 이슬람교의 타락과 형식주의를 비판하여 순수 이슬람화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와하브 왕국이 성립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가 리야드로 된 것은 이 운동이 리야드에서 일어난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가 제창하였다.
과격한 이슬람을 표방하는 와하브파의 등장
1801년 3월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압둘아지즈 국왕의 아들이자, 사우디 왕조의 시조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의 손자인 사우드는 네지드 지역 출신의 와하비즘 추종자들로 구성된 1만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시아파의 성지 카르발라를 습격했다. 그들은 2,000~5,000명의 무슬림(대부분 시아파)을 학살하고 시아파의 성지로 여겨지는 후세인 이븐 알리의 무덤을 파훼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가 묻힌 무덤, 즉 시아파와 수니파 모두의 성지를 파괴하는 행위는 곧 술탄이자 칼리프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인 와하비즘이 있었다.
사우디 가문의 수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와하비 운동을 이끌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알와하브는 일종의 정교동맹인 ‘네지드 조약’을 맺어 세력을 확장했으며, 마침내 사우디 왕조를 개창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알와하브는 시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수학했다. 그곳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알리, 후세인,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숭배하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관습은 우상을 숭배하는 ‘쉬르크’였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슬람 초기부터 뿌리 깊 게 이어져 내려온 모든 종교적 관습들을 배격했으며, 무엇보다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나 가족의 무덤, 또는 성인의 무덤에 참배하는 관습을 맹렬히 비판했다.
사우디 왕조는 가장 근본에 충실한 이슬람이라는 와하비즘을 표방하며 다른 이슬람 종파에 한 지하드를 선언했다. 사우드 가문의 시조 이븐 사우드의 아들 압둘아지즈(재위 1765~1803)는 알와하브의 딸과 결혼한 후, 1773년 리야드를 점령하고 아라비아반도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와하브파가 저지른 카르발라 학살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재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이슬람 전통 교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에 와하브파가 얼마나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803년 압둘아지즈와 그의 형은 카르발라 학살을 복수하려 한 암살자의 칼에 살해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우드(재위 1803~1814)는 헤자즈 지역을 공격해 1805년에는 메디나를, 이듬해에는 메카를 점령했다. 그리고 와하브파는 두 성지에 있는 이슬람의 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 그들은 메디나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교우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직접 조성한 묘지라고 알려진 알 바키 공동묘지를 비롯해, 7세기부터 수백만의 순례자들이 찾는 여러 영묘를 훼손했다. 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메카로 옮겨가 무함마드의 첫 번째 부인인 카디자의 무덤과 알 말라 묘지의 무덤들, 카바 신전 근처의 돔 구조물과 건축물들을 파괴했다.
서구가 조장한 이슬람의 갈등
새로운 열강으로 등장한 미국은 아랍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했다. 1945년 2월 14일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독일의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흑해연안 얄타에서 회담을 개최했다. 회담이 끝난 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에 정박한 미국 군함 퀸시호에서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를 만나 비밀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안보협력을,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석유의 개발권과 판매권을 약속했다.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전략적 동맹을 맺고 아랍 정부 중에서 가장 독재적인 사우디아라비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전 세계에 와하비즘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9년 11월 20일 500명의 무장한 와하브 운동 세력은 메카의 대모스크를 습격해 수백 명의 순례자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에 사우디 방위군은 메카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사우디 군소속 메카 보안요원 27명이 사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리드 국왕은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발레리 지스카르 대통령은 프랑스 특수부대의 파견을 승인했다. 사우디 군은 프랑스 군과 12월 4일에 반격을 개시하여 메카를 탈환했다. 그렇게 와하비즘을 지향하는 사우디 왕조는 다시 자신들의 고유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프랑스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독재적이고 독단적인 정권을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과격 와하브파는 지하드를 벌이기에 적합한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이었다.
1979년 12월 24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해 친소련 성향의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와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했다. 이에 1980년 1월 이슬람 협력 기구는 소련에게 즉각 철수를 요구했고, 아프간 반군 무자헤딘은 여러 이슬람 국가들(인접국인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그 외 걸프 군주국 포함)을 비롯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자금과 병참을 지원받았다. 이때 아프간 무자헤딘에 합류한 22세의 한 사우디 청년이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은 무자헤딘은 파키스탄의 후방 기지와 아프가니스탄의 요충지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였다. 사실 전쟁에서 외국군의 역할은 미미했으며, 무자헤딘은 지하드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지하디스트를 꿈꾸는 어린 청년들을 끌어모았다.
이슬람을 개혁하고자 하는 내부적 움직
이슬람 학자 누르콜리시 마지드(1939~2005년)는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이 살라프파의 주장과 달리 훨씬 온건하고 관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양한 종교 및 의견에 대한 수용과 관용이 이슬람 근대화의 원칙이 되어야 하며,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이슬람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란에서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원칙을 발견한 아미나 와두드는 남녀평등의 시각으로 코란 읽기를 제안했다. 그는 무슬림의 모든 세대가 코란을 다시 읽고 자유롭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는 샤리아의 가부장적 시각은 코란이 아닌, 세대를 거치며 오랜 세월 축적된 남성 우월주의 해석과 전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아미나 와두드는 여성이 이맘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법은 이슬람법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뉴욕에서 무슬림 공동체를 위한 금요 예배를 인도했다.
2017년 프랑스 이슬람 신학자 오메로 마론지우 페리아는 ‘이즈티하드의 문(이성의 문)’을 다시 열어 이슬람법을 재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세 시대에 편찬된 ‘피크흐’를 바탕으로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법전을 겨냥해, 오늘날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시행하기에는 타당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슬람법 교본에 포함되어 교육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수니파 종교 지도자들이 동일한 이슬람 법전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위(특히 비무슬림 포로를 노예로 만들고 그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슬람과 이스라엘은 어떻게 격돌하게 되었는가?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는 영국이,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통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기꺼이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로 만들려는 시오니스트들의 열망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대 자본을 전쟁 자금으로 유입시키고, 광대한 식민지를 연결하는수에즈 운하를 불법 점유한다는 비난을 피해갔다.
영국은 1937년부터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방안을 구상했고, UN에 해법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유대 민족만의 국가를 건설하고자했던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 서사를 겪었던 만큼 이 사안은 시급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UN의 분할안을 거부했다. 결국 1948년 유대인들은 일방적으로 독립 국가를 선언했고 이집트, 트란스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일제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의 아랍 군대는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다음날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건국을 막지는 못했다. 요르단의 왕 압둘라 1세는 이스라엘 당국과 회담을 갖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의 77%는 이스라엘에, 22%(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요르단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다. 영토 분할을 원치 않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은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날 당시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이스라엘 건국일 다음 날인 5월 15일을 ‘나크바Nakba의 날(대재앙의 날)’로 지정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켜본 신생 독립 아랍 국가들은 충격에 빠졌다.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와 영국을 몰아내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시점에, 또다시 유럽인들에게 영토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아랍 영토에 새로운 유럽 식민지가 들어선 것으로 간주했다. 팔레스타인과 그 동맹국은 자신들의 실패를 뼈아파 했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분노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라크, 예멘,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들에서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폭력사태가 벌어졌으며 유대인들은 이를 피해 유럽과 미국, 이스라엘로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