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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텐신, 게이오대 강연, 일본의 아시아 지배 정당

Jobs 9 2023. 3. 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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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덴신, 岡倉 天心, 오카쿠라 텐신

 

1863년 2월 14일 ~ 1913년 9월 2일)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사상가, 문인, 철학자이다. 미학과 관련된 글을 여러개 썼으며, 미술사, 미술 평론, 미술가 양성 활동도 했다. 본명은 가쿠조 (覚三かくぞう 카쿠조)이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후쿠이 번 출신의 무가 (일본사) 집안으로 1871년에 도쿄로 이주했다. 도쿄 예술대학의 전신인 도쿄 미술학교의 설립에 큰 공헌을 했으며 일본 미술원의 창설자이다.

일본 근대화시기 미술사연구의 개척자로 미술 평론을 하며 영어로 저작을 남겼다. 미술가 양성에 힘쓰면서, 보스턴 미술관의 중국, 일본미술부장 등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일본 미술 개념의 성립에 일조했다. 텐신「天心」은 시를 쓴다거나 할 때의 호여서 생전에 오카쿠라 텐신으로 불린 적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는 본명인 오카쿠라 카쿠조로 알려져있다.

후쿠이번의 하급 번사였던 아버지 岡倉勘右衛門은 불안한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요코하마로 와서 무역상이 된다. 이시카와야「石川屋」에서 상점을 열었다. 여기서 태어난 카쿠조(覚三)는 원래 「角蔵」이라는 이름이었다. 9세 때 여동생을 낳던 어머니가 산욕으로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長延寺에 맡겨져 한학을 공부하다가 요코하마에 거주중이던 선교사 제임스 발라(James Hamilton Ballagh)의 영어기숙사에서 영어를 배웠다. 동생 岡倉由三郎은 영어학자가 되었다. 도쿄 가이세이 학교에 입학해 정치학과 재무 등을 배웠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강사로 일하던 어네스트 페노로사의 조수가 되어 그의 미술품 수집을 도왔다. 16세때 오오카 다다스케의 먼 자손인 基子와 결혼했다. 

1886년 도쿄 예술대학 설립을 돕기위해 페노로사와 함께 유럽을 여행했고 아르누보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1890년부터 3년간 도쿄 예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882년 센슈 학교의 강사가 되어 학교 활성화에 기여했다. 이후 연이 넓어져서 문부성 전문학무국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당시 제자인 우라 케이이치(浦敬一)는 텐신과 만나 강하게 영향받았다고 한다. 

1888년 오카쿠라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쿠키 류이치(九鬼隆一)의 부인 하츠코(波津子)와 사랑에 빠졌고 하츠코는 쿠키와 별거 후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에 낳은 아들이 철학자 쿠키 슈조(九鬼周造)로 쿠키 슈조는 어린시절 오카쿠라 텐신을 아버지로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1890년(메이지 23년)부터 3년간 도쿄 미술 학교에서 행한 강의 "일본 미술사"는 일본인의 관점으로 일본 미술을 서술한 최초의 것으로 간주된다. 1890년 도쿄 예술 학교 초대 교장에 오카쿠라 덴신이, 부교장은 페노로사가 되었는데 당시 27세였다.[3] 福田眉仙、横山大観、下村観山、菱田春草、西郷孤月 등이 당시의 제자들이다. 1897년, 『 일본 제국 미술사 』의 편찬 주임이 되었다.

1901년 인도에 방문해 타고르, 비베카난다 등과 교류한다. 1902년 일본을 방문한 비글로우(William Sturgis Bigelow)와 교류했고 비글로우의 소개로 보스턴 미술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후 양쪽을 왕복하면서 일하게 된다.

도쿄도 다이토구에는 그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이바라키현 기타이바라키시에는 텐신 기념 오포 미술관이 1997년에 설립되었다. 또 뉴욕에서 영어로 "차의 책"을 출판한지 백주년인 2006년 10월 9일, 오카쿠라가 마음의 고장으로서 각별히 사랑한 후쿠이현의 대본산 에이헤이지(永平寺)에서 "차의 책" 출판 100주년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 후쿠이 현립 미술관에서는 2013년 11월 "전무 후무한 오카쿠라 덴신전"「空前絶後の岡倉天心展」을 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일본 게이오대에서 열린 ‘한·일 미래 세대 강연회’에서 한일 양국 청년 세대의 적극적인 협력과 교류를 당부하는 연설에서 일본의 사상가 오카쿠라 텐신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또 메이지 시대 사상가 오카쿠라 텐신의 ‘용기는 생명의 열쇠’라는 발언을 언급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조금 더 용기를 내자”면서 한일 관계 개선을 언급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권 일각에서는 오카쿠라 텐신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상을 만든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오카쿠라 텐신은

오카쿠라 텐신은 미술사가이면서 미술교육자이다. 무엇보다 국수주의 사상가였다.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를 익혔다. 도쿄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미국인 동양미술사가 페놀로사의 감화를 받아 일본 미술에 빠졌다.

그러면서 러일전쟁 전후로 자신의 저서를 영어로 출간하면서 해외에 일본 문화를 알린 인물이다. 1904년 출간한 일본의 각성에서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적혀있다.

조선반도는 아마도 원래는 선사시대 동안에 우리의 식민지였을 것이다. 조선에 남아 있는 고고학적 유물은 우리의 원시시대 고인돌에서 발견된 것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유형이다. 조선의 언어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아시아의 언어들 가운데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게통에 속한다. (...)3세기에는 우리의 진구(神功) 황후가 조선반도를 침략하는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수많은 독립된 소국들이 일어나면서 위협받게 된 우리의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연대기들에는 8세기까지 우리가 식민주를 보호했다는 기사들이 가득하다. 

일본의 각성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조선과 만주의 독립은 우리의 종족 보존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필요하다. 경작지가 빈약한 이들 나라에서 만약 합법적인 출구를 빼앗겨버린다면, 계속 증가하고 있는 우리 인구를 기다리는 것은 굶주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이 이 영토들에 손을 뻗치고 있는데, 우리 외에는 누구도 이에 저항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고대에 우리의 영역 안에 있었던 조선을 우리 국민의 합법적인 방어선 안에 둘 것을 고려하고 있다. 1894년에 중국이 조선반도의 독립을 위협했을 때, 우리는 중국과 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에 우리가 러시아와 싸웠던 것도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였다. 

일본의 각성은 위기의식에서 발현  

오카쿠라 텐신은 일본의 각성을 통해 일본의 문화를 미국에게 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임나일본부의 경우 '허황된 이론'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사장된 이론이라는 것을 들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그것은 일본의 위기에서 드러난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로 인해 일본의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타파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각성'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아시아 지배의 정당성을 외치는 논리가 됐다. 일본만이 동양 고전사상을 고수할 수 있고, 전통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아시아 중심국가로 거듭날 수 있으며, 서양으로부터 동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는 정당하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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