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제9대(재위:1469~1494) 왕.
재위 1469년(성종 즉위년)∼1494년(성종 2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혈(李娎).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주 01)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천품(天禀)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해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성종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성종이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주 02)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해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성종을 왕위에 올렸다.
즉위 할 무렵 나이는 13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그 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고,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다.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誥命)을 받았고, 세조 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을 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다.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뒤의 연산군)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였다. 이에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482년에는 사사(賜死)했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해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 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英陵)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 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다. 수령과 변장의 임명 때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해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 연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
이 밖에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주 03)을 설치,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편찬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문선(東文選)』,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五禮儀)』,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樂學軌範)』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 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다.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 4000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뇌물도 성행하였다. 더욱이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 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게까지 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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