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끝없이 바뀌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이 진여眞如(본래부터 있었던 것, 에너지)의 성품(작용)입니다. 고전물리학은 거시세계(3차원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원인에 의한 결과가 분명하므로(인과율 因果律에 의한 결정론) 새로운 학설이 발표되고 증명되면 논쟁할 일이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시비가 분명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미시세계(고차원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누구도 직접 경험할 수 없으며 인과율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은 가능성만 있을 뿐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모든 물리학자들의 소망인 `대통일장 이론(초끈이론, 평행우주, M이론)’도 거시세계의 과학적인 논리와 미시세계의 과학적인 논리를 하나로 통일시켜 자연계(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논리(학설)로 완벽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은 아마도 대통일장 이론이 완성되면 끝이 나리라 봅니다.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그것은 모두가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진여의 작용은 주어지는 조건(인연생 因緣生 인연멸因緣滅 )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정해진 모양(상相)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마다(인연 따라)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진여의 작용은 인연 따라 스스로 일어나며, 일어날 때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성품 즉, 원리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공空(중도中道)’이라는 말입니다. 과학은 지금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공空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알음알이(학문)로 무엇이든 더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진여眞如는 인간의 모든 개념을 벋어나 있기 때문에 내 생각(지식, 고정관념, 알음알이, 아상我相, 무명無明, 망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여의 성품인 공空 즉, 원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잘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내 생각(망념, 학설)으로 분별하지 않고 그냥 본다는 말인데 이것을 `여실如實(실답게)하게 본다(여실지견 如實知見).’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쉽기로 말하면 이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지만 어렵기로 말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과학(학문)의 특성은 지난날의 학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고 동시에 실증實證을 하는데 있기 때문에 지식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생각, 망념)이기 때문에 이것을 버려야 공空(진실,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가설이든 정설이든 헤아리고 내 새워야 하나 공사상(중도사상)은 공(중도)에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공空도 공空해짐) 어떠한 것도 “이것은 그것이다.”하면서 법法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정해진 법이 따로 없으므로 법을 법이라 하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법은 될 수 없습니다. 정해진 법이 없는 것(무자성無自性, 법공法空)이 진여(법)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슈뢰딩거의 고양이(양자물리학)에서 파동함수(ψ)는 관찰하든 관찰하지 않던 이미 미시세계의 법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적인 대상이 관찰자의 관찰행위로 말미암아 중첩의 상태(가능태,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현실적(현실태)으로는 어떻게 바뀌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중도적인 관점)에서는 관찰하기 전의 중첩된 상태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첩된 상태와 동일한 개념인 파동함수(ψ)도 부정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찰하기 전의 고양이의 상태는 파동함수 속에서 죽음과 삶이 중첩상태에 있다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해석도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찰하기 전의 파동함수는 추상적인 수학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양자역학, 미시세계)을 현실(뉴턴역학, 거시세계)과 결부시켜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파동함수(ψ)라는 개념은 인간의 개념일 뿐 다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도 우주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중도라는 말은 `완성된 지혜’를 의미하므로 쓰이는 곳에 따라 그 생각을 달리하기 때문에 과학(학문, 논리,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말입니다. 중도는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논리를 떠나 있는 묘법妙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다면 아무것도 몰라야 공空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바보나 멍청이가 되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몰라서 텅 비어있는 것과 앎으로 가득 채운 다음 비워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의 원리’입니다. 중도를 체득體得(증득證; 깨달음)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공부)을 하지만 중도를 얻고 나면 중도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무거운 뗏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학문)을 연구하고 익히고 있되 내가 익히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무주無住, 무집착無執着)입니다. 중도가 중도에도 머무르지 않는 까닭은 모든 것과 하나 되어 서로 융합함으로써 상생相生을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종교)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오랜 세월 논쟁만 있고 그 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득 채운 것을 비우면 그 비운 자리에서 끝없는 지혜가 솟아나는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이 강의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도 `완성된 중도의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삶을 운영하여 영원한 행복인 해탈, 열반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계발’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해답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미 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밝혀져 있습니다. 그 답은 “있는 그대로 보라.”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일체의 망념(학설, 내 생각, 개념)을 내려놓고 침묵(무심) 속에서 그냥 보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거시의 세계에서는 뉴턴역학에 따르고 미시의 세계에서는 양자역학에 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이 `있다(유有)’고 하는 `상견常見’과 `없다(무無)’고 하는 `단견斷見’의 양극단兩極端을 떠나 중도적인 관점(단상중도 斷常中道)에서 바라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중도에서 `융합한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면서(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때에 따라 가장 알맞게(지혜롭게)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중도에는 고정된 법이 없습니다.
해탈, 열반이라는 것도 삶과 죽음을 없애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그대로 있는 가운데 해탈, 열반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두로 참구하면 좋습니다.
모든 과학자들의 희망인 ‘대통일장이론’도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습니다. 미시세계의 상호작용과 거시세계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기본 힘(상호작용) 중에서 강한 핵력(강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약력)은 미시세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양자화 할 수 있으나 중력은 거시세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양자화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로 통일된 이론(대통일장이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과 과학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중도는 깨달음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과학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둘 다 초월하기 때문에 둘을 하나로 융합(화합, 불이不二)하여 둘을 함께 성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과학은 새로운 학설로 논쟁을 하고 발전시켜 반도체, 양자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것을 발명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을 보다 더 편리하게 하고, 깨달음은 분별하고 차별하던 내 생각을 버림으로써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영원한 행복(구원, 해탈, 열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이 있는 그대로 보고 있으면 과학의 발전이 없을 것이고, 깨달음이 과학적으로 되면 깨치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다.”라고 말하는 양자물리학은 깨달음의 핵심사상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과학으로 잘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과 의식(정신세계, 마음)이 만나야 된다는 것에 대해, 아밋 고스와미(Amit Goswami, 오레곤 대학 이론 물리학교수), 피터 러셀(Peter Russell),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 애리조나 의식 연구소 소장)와 같은 과학 사상가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만일 의식의 존재를 물질 법칙에서 끌어낼 수 없다면 물리학 이론은 모든 것에 응용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닉 허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마음이 자연에 널리 퍼져있는 빛이나 전기처럼 그 자체로 어떤 근본적인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피터 러셀은 “대부분 과학자는 의식이 물질세계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많은 영적인 전통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세계관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즉 의식은 현실-시간, 공간,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요소이며 어쩌면 그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의식(consciousness, 당신이라는 존재)'을 뇌 활동의 부수적인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의식'이 존재의 기반이며, 뇌가 그것의 부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본래의 마음(의식)을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의 의미를 `일심一心(한마음)’이라 하고,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일미一味’라 하고,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중생의 본래 마음이 진여며, 일체 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며, 해심밀경에서는 “(진여는)인간의 모든 사유와 개념을 떠나있고, 물건이나 관념이 아니므로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관련되어 한결같은 맛(일미一味)을 지닌다.”고 하였으며, 원각경에서는 “모든 것은 원각(진여, 몸과 마음을 떠난 청정한 본래의 성품)으로부터 나오고 원각으로 되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가르침을 대변하는 근본적인 경전은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입니다. 화엄사상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일체 모든 것이 다 나지도 않고)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일체 모든 것이 다 멸하지도 않으니)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느니라)”이라는 뜻입니다. 한두 가지만 불생불멸이 아니라 존재하는 전체가 다 있는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뜻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라는 뜻으로서 생멸이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대대待對(상대적인 것)가 완전히 끊어진 절대(완전한)세계를 말합니다. 생멸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것으로 유한有限의 세계(세간世間)고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 진실은 대대가 완전히 끊어진 영원한 세계(출세간出世間), 즉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무한無限의 절대세계입니다. 이러한 절대세계를 `일진법계一眞法界’라 하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한 덩어리라는 말이고,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하야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니라” 즉, “불생불멸하는 이 법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간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세간 이대로가 불생불멸하는 절대법입니다.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합니다. 이러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원리를 깨치지 못해 눈이 어두워 착각을 함으로써 진리가 본래 생멸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름에 가려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광명세계가 암흑세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생불멸을 바로 알면 언제든지 진실(진리, 진여, 부처)이 눈앞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일체만법一切萬法)이 불생불멸이고, 부처며 이것이 극락(천국)세계고, 절대세계(완전한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양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 소립자는 모든 것의 최소 구성 물질(체體, 본질)이며, 우주는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이며, 소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생불멸(진여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을 과학이 너무나 확실하게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과학과 깨달음은 진여眞如(진실, 진리, 현상)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자하는 것은 같으나 가는 길은 상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깊게 사유(생각)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으나 사유하는 방식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기 위해 망념(학문, 지식)을 끝없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깨닫기 위해 망념을 끊는 것(무학無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얻어지는 중도는 끊고 이어감을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립자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과학과 깨달음의 특징을 포도나무와 얼룩말의 예로 본다면, 하루 종일 음악을 들려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는 그 맛도 좋을 뿐 아니라 포도주의 맛도 좋아진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체體)은 소립자이므로 포도나무(상相, 용用)의 소립자와 음파(상相, 용用)의 소립자가 서로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악의 장르에 따라 그 효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의 직관력(통찰력)으로 확신하는 것이 깨달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 반드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실하게 증명해 내고 이것을 많은 것에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는 것이 과학의 특징입니다.
얼룩말의 줄무늬가 흰색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인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하게 밝혀내야 합니다. 줄무늬는 말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그렇게 진화한 것이며, 보호색이라는 사실과 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렇게 분석하고 해명하고 증명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깨달음을 중도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과학의 특징과 깨달음의 특징을 융합함으로써 과학을 대변하는 물질과 깨달음을 대변하는 정신을 골고루 발달시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면서도 편리함을 누리게 하고, 정신적으로는 고통이 소멸된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세상입니다.
중도에는 어떠한 분별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한 곳으로 치우치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잡스9급 PDF 교재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