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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사원의 도시’ 의미

Jobs 9 2022. 5. 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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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Angkor Wat)는 앙코르 유적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예술적으로 위대한 캄보디아의 기념비적 유적이다. 캄보디아 국기에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앙코르 와트 1층 회랑을 따라 힌두 신화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큰 돌에 새겨져 있는 것 같은 부조는 꼭 봐야 할 스팟이다. 하나의 사원이지만 다른 몇 개의 사원을 합한 만큼 크다. 단일 사원으로서는 앙코르에서 최대 규모이다.

12세기 초 수리야 바르만 2세(Suryavarman II, 1113~1150년) 때에 만들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원들이 시바 신을 위해 만든 것과는 달리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비슈누 신을 위한 사원이었다. 혼란한 정국을 통일한 자신의 왕국이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또한 강력한 왕권 정치를 실현한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만들었다. 

앙코르 와트는 다른 사원과 달리 서향이다. 사원의 출입구가 서쪽이고, 인도에서는 서쪽이 죽음을 의미하므로,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앙코르 순례의 첫 대상지는 프놈바켕이어야 한다. 갑자기 툭 트이는 시야-. 밝디밝은 강물과 그 건너로 길게 띠를 이룬 숲지대가 펼쳐진다. 강이 아니라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垓字) 곧 방호 수로(水路)라고 한다. 숲의 띠 속에는 앙코르와트 남벽이 서 있다. 이 앙코르와트는 프놈바켕 이후 120여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서야 축조된 것이다.

 

시엠립 시가지에서 앙코르와트까지는 북쪽으로 약 5km다. 거기서 다시 7~8km 북방까지, 그리고 동서로 8km쯤 되는 지역 안에 앙코르와트, 앙코르톰과 같은 앙코르 유적지의 핵심부가 위치해 있다.

아이들이 수영하며 놀고 있기도 하는 해자를 따라 빙 돌아 앙코르와트의 정문인 서문 앞을 그대로 지나쳐 숲길을 조금 더 가자 왼쪽으로 긴 계단이 설치된 프놈바켕 사원 오르는 길이 보인다. 왕국에서의 그 의미는 각별하지만, 프놈바켕 사원은 오래된 만큼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큰 볼거리는 못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캄보디아는 인도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힌두 전통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메루(Meru)산, 곧 수미산(須彌山)이고, 그 곳에 신들의 거주지가 있다. 프놈은 둔덕이란 뜻으로, 해발 60m에 불과하지만 프놈바켕은 이 지역에선 유일한 산이었으므로 신성을 부여하기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야소 바르만 왕에 이어 후대 왕들도 다투어 신성의 ‘사원 산’들을 세우며 앙코르는 크메르왕국의 수도로서 오랜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수리야 바르만 2세-. 우리 역사로 치면 고려 중기쯤 되는 1113년 왕위에 오른 그는 참족의 영토인 베트남 남부까지 영역을 넓혀 중국 황제가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가 세운 대사원이 앙코르와트다. 와트(wat)는 사원이란 뜻이니 ‘사원의 도시’란 의미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창조신 브라흐마, 파괴신 시바와 함께 힌두교 3대 최고신에 드는 비슈누신을 숭배했다. 그는 비슈누신의 영광을 위해 앙코르와트를 지었다. 그 이전에 이처럼 비슈누신을 중요시했던 사원은 없었다. 물론 이는 12세기 들어 인도에서 시작된 철학적 흐름의 영향이다. 저 멀리 푸른 하늘 속에 솟은 메루산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하는 높이 60m의 다섯 개 탑이 뵌다.

서문 입구의 부조물들, 춤추는 무희의 부조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천상의 요정 압사라다. 손바닥을 뒤로 꺾고 다리는 마름모꼴로 벌려 춤추고 있는 압사라, 압사라들-. 이곳 앙코르와트에는 모두 2,000개의 압사라상이 새겨져 있는데,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압사라의 넓적다리를 감싼 얇은 천의 무늬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 넓은 벽면 어디든, 심지어는 문틀의 네 겹 주름의 속까지도 무늬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은 없다.


앙코르와트 회랑벽에 부조, 온갖 형상의 정교한 부조물들이 80m 저쪽 끝까지의 벽체에 가득 새겨져 있다. 앙코르와트에는 모두 8개의 회랑이 있는데, 대부분은 고대 인도의 2만4천송(頌)의 시구로 이루어진 대 서사시이자 설화인 라마야나(Ramayana), 즉 라마왕 행전(行傳)을 형상화한 것이다. 코살라국의 왕자 라마와 그의 정숙한 왕비 시타, 동생 파라타, 원숭이신 하누만, 마왕 라바나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흥미진진함 만큼 부조의 형상도 다양하다. 
제2회랑은 주인공이 수리야 바르만 2세 그 자신이다. 왕은 장식된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그 뒤에 양산을 펴고 부채를 부치는 자 양편에는 궁정의 요인과 브라흐민(성직자)도 보인다. 화려한 옷을 입은 브라흐민은 길쭉한 얼굴과 오똑한 코로 보아 인도 혈통임이 드러난다. 왕 앞에는 무릎을 꿇은 군중들, 또한 공물을 바치는 군중들이 있다. 주위의 궁정 여자들은 귀금속의 관과 목걸이로 장식했다.

이 회랑의 부조물은 한 마디로 그의 업적과 위엄이 주제로서, 특히 상징적인 장면으로 염라대왕 옆에 수리야 바르만 왕이 앉아 있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이는 천국이나 지옥행을 결정짓는 조언자로서 왕을 신격화한 것이다.

긴 회랑들을 거쳐 중앙탑 아래의 널찍한 뜰로 올라선 뒤 우리는 띵한 머리를 식힐 겸 휘이 한숨 돌리며 앉아 쉬었다. 저 위에 장대하게 솟은 첫번째 회랑으로 오르려면 가파르기 그지없는 계단을 기어야 한다. 성스러운 곳이므로 업드려 올라야 한다는 뜻이 거기 담겨 있다고 한다.

높이 60m의 저 탑 다섯 개를 조성하는 데만도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총면적이 동서 1.5km, 남북 1.3km로 200ha, 건물 면적만 따지면 332m×258m로 85,656m2이니 약 26,000평이다. 이 대사원의 축조엔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까. 앙코르에 반해 몇 년씩, 심지어는 20여 년간 여기 머물며 연구해온 ‘앙코르 마니아’들은 35년간 매일 20만 명이 이 사원의 축조에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프놈바켕 사원 입구 북쪽으로 숲지대가 끝나는 곳, 거기는 천도 200년쯤 뒤, 그리고 왕코르와트 건립 60년쯤 뒤에 새로이 건설된 왕도인 앙코르톰의 남문이다. 코끼리를 타기도 한 수많은 관광객들이 양쪽으로 54개 신상이 도열한 진입로를 지나 남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안쪽 1.5km 지점의 바욘 사원은 1180년 등극한 자야 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의 핵심으로 건설한 것이다.

 

자야 바르만 7세, 그는 우리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반반 합친 것 같은 걸출한 왕이다. 그는 등극 이전 4년 간 앙코르왕국을 침입 지배했던 원수 나라인 베트남 지방의 참족 왕국을 멸망시킨 뒤 불멸의 요새이자 새 왕도로서 앙코르톰을 건설했고, 그 가운데에 바욘 사원을 세웠다. 80여 년 전 수리야 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서 앙코르와트를 세운 반면 자야 바르만 7세는 불교 사원으로서 바욘 사원을 건축했다. 
그의 선왕이 바로 ‘부처의 발에 영광을 주는 자’였다. 자야 바르만 7세는 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부처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크메르족의 앙코르왕국과 베트남 남부의 참족 왕국은 이를테면 과거 한국과 일본처럼 원수지간이었다. 바욘 사원의 부조에는 자야 바르만 7세가 승리로 이끈, ‘길고도 고통스럽고도 무자비했던 참족과의 전투’ 상황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코끼리를 탄 장수, 군수물자를 나르는 노예들, 떨어져 죽는 참족 군사, 그들을 잡아먹는 악어 등등 참족과의 전쟁 이외 시장 풍경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병나발 부는 술꾼, 투계 놀음하는 중국인들, 저울 다는 상인, 돼지를 통째로 삶는 장면 등등….

 

자야 바르만 7세는 이외에도 10개의 대형 사원을 앙코르에 더 세웠다. 하나마다 8~12년 걸린 대작들로, 그 중 하나가 어머니를 위해 세운 타프롬 사원이다. 비록 앙코르와트가 있긴 하지만, 타프롬을 “영화 인디애나 존스적인 분위기로, 가장 인상적이고 볼만했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 사원은 사원을 뒤덮은 수목들을 제거하지 않고 100년 여 전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원의 18명 고승과 2,740명의 사제 등을 위해 12,640명이 종사하고 있었다고 하니 사원이 거의 하나의 도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 수도원은 또한 3,140개의 주위 마을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고 한다.


고푸라(성이나 사원 입구의 부조로 장식된 구조물)를 지나 어두컴컴한 타프롬 사원 회랑 안쪽의 뜰로 들어선 순간 멈칫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듯 고요하고 깊었다. 그저 나무들뿐인 숲속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앙코르의 모든 사원은 일단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뒤 돋우었던 흙을 거두어내리며 상층부부터 조형해 내려왔다. 그 틈새를 강한 생명력의 열대 식물들이 놓칠 리 없었다. 앙코르의 모든 사원들은 이렇듯 타프롬 사원처럼 나무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뒤덮였다가 근대 들어 복원된 것이다.


앙코르의 사원들은 왕의 신앙에 따라 불교사원, 혹은 시바신을 모신 힌두사원으로 세워졌다. 또한 불교사원 안에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가, 힌두사원 안에 불상들이 모셔지기도 했다. 우리에게서 무불이 습합했듯 이곳 앙코르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습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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