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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 플라톤 수제자, 서양 세계의 분석적 과학적 정신의 주된 토양

Jobs9 2024. 10. 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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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출생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 왕국 스타게이라
사망
기원전 322년 (향년 62세)
마케도니아 왕국 에우보이아 섬
소요학파
후임자
테오프라스토스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양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모든 이가 통곡했고, 세상의 등불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새벽녘의 별 같았고, 세상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손제자, "철학자들의 신"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그들은 물론 그들 이전 학자들의 학문들까지 섭렵, 비판적 계승하였다. 그 스스로도 특히나 논리학과 자연학, 문예비평 등을 비롯해 무수한 영역에서 독창적인 학적 위업을 남김으로써 고전 그리스 정신사의 대단원을 장식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는 서양 세계의 분석적, 과학적 정신의 주된 토양이 되었다. 어느 학문의 개론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조 격으로 거론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후대에 "만학(萬學)의 아버지", "철학자(The Philosopher)"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의 주석이라면, 올바르게 사고한다는 건 곧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서구 철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플라톤을 철학의 '아이디어 뱅크'라고 칭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철학 '문법서' 혹은 '백과사전'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과는 달리,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원고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입장이 일관되지 않고, 문체가 건조하고 난삽하며, 학술어와 일상어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거기다 내용 자체부터가 원체 고차원적인지라, 해석하기에 몇 중첩의 애로사항이 있다. 게다가 논거나 예시를 소실된 저작을 참고하라든지 하며 비약하는 경우 등도 있다. 

그럼에도 근현대까지도 중요하게 거론되는 학술적 핵심 개념들과 사고방식, 문제의식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연원한 것이 많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다. 2000년 전 미처 정리하지 않은 말들이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도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BCE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에서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의 궁중의 의사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와 어머니 파이스티스 아들로 태어났다. 성씨는 따로 없던 시대라서 이름이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와 어릴 적부터 친구로, 궁정에서 함께 자랐는데 아주 어려서부터 양친을 여의고 프로크세노스가 그의 후견인이었다. 17세 때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이아'에 들어가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을 와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을 그곳에서 수학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부르며 칭찬했다. 한번은 플라톤이 《파이돈》을 낭독하는 중에, 다른 제자들은 다 나갔음에도 아리스토텔레스만 혼자 남아 들었다는 일화에서 그의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영특했고 플라톤이 살아있을 때 아카데미아에서 서로 많은 논쟁을 치렀던 모양이다. 이 시기부터 플라톤의 저작을 본뜬 대화편들부터 기타 여러 글들을 썼던 모양이나 많은 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소중한 벗이다. 하지만 진리는 더 소중한 벗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스승과 학문적으로 결별했으며 누차에 걸쳐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의 저술 중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그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는 문장이 있을 정도. 다만 그가 비판한 것은 주로 중기 이데아론이고, 플라톤의 후기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플라톤이 죽은 직후 아카데미아의 원장이 될 것이라 원생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당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준비 중이었고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팽배했던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장직을 포기하고 소아시아의 도시 아타르네우스로 넘어간다. 그곳의 참주 헤르미아스는 아카데미아에서 함께 수학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친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헤르미아스의 이복동생(또는 조카) 퓌티아스를 첫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딸을 낳고 그 이름으로 부인과 같은 퓌티아스를 붙여주며 잘 살아가다가 참주 헤르미아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붙잡여 죽임을 당하자,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기원전 356년부터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그의 궁전에 머무르면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필리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아주십시오. 실로 저는 신께 감사드리는데, 그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태어난 것이 그의 행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교육과 훈련으로 아들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왕국을 계승하기 걸맞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 필리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청하는 편지. 

2~3년간의 개인교습으로 제자 알렉산더를 충분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자리를 친척에게 물려주고 기원전 335년, 50살의 나이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아폴론 신전 경내의 공공운동장이던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원 초기에 그는 리케이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오가면서 학생들과 함께 철학을 논하곤 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아진 뒤로부터는 그도 앉아서 강의를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 제자들의 강의노트이다. 그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어마무시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지만, 현재는 다 소실되었다.

이렇게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케도니아인이 아테네에서 설치는 것이 보기 싫었던 사제 에우뤼메돈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가 이전에 지었던 헤르미아스의 죽음을 기렸던 찬가가, 아폴론 신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양식의 찬가라는 이유로, 그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이었다. 이 억지스럽고도 한참 뒤늦은 고발에 은퇴를 결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원 리케이온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물려준 뒤, 어머니 쪽 고향인 에우보이아의 칼키스(Χαλκίδα)라는 작은 섬나라로 탈출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탈출하면서, "아테네로 하여금 철학에 두 번 죄 짓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의식한 것. 하지만 1년 뒤 질병을 얻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상
앞에서 말한 듯이 스승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이데아론에 반기를 들어 형이하학적인 자연탐구를 중시하는 현실적 입장을 취한다. 이렇기 때문에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물리학, 생물학, 철학, 윤리학, 미학, 정치학 등 문이과 가리지 않고 전방위에서 모조리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의 학문에서도 물론 연구와 관찰은 있었으나 그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진일보. 최초로 신이 아니라 자연에 원인을 돌리는 거대한 전환을 탈레스가 이루어냈지만,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수준에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를 주장했던 것보다 한 단계 더 거대한 전환을 한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의 관념적 주장 중 상당수를 반박했다. 

현대와 비교해보면 그의 연구와 관찰은 초보적이었고 따라서 결론도 엉성한 부분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과거의 학자들)를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과학적 사실이 정답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현대 기준으로 과학자가 아니냐 맞냐에 대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물론 현대과학에서는 실험을 통해 물리적 증거를 쌓아가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확한 물리적 증거가 없는 우주 탄생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는 모른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 증거를 쌓아가면서 연역적으로 정의하기보다 목적론적 세계관에 따라 결론을 정해놓고 추론했기 때문에 과학자가 아니라고 하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생물학이나 지질학, 기상학 등 과학의 다른 분과에 있어서는 관찰을 바탕으로 한 정밀한 연구를 했다고 여겨진다. 애시당초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로 대표되는 성질을 가진 매질에 대해 깊은 연구를 단행했던 인물로, 당연히 다양한 임상 연구를 토대로 그의 학설들을 정리했다.

심지어는 과학적 방법론 같은 경우 르네상스를 강조하기 위해 데카르트나 베이컨 같은 사람들로부터의 단절이 시작되어서 과학과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는 말이 종래의 정설이었으나 연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역시 중세의 사상으로부터 그렇게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점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에도 번역된 저명한 철학사 책을 쓴 앤서니 케니 같은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을 발명해냈다고 단언하는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의 전체 원칙에 대한 기원이기 때문이며 과학이 물려받고 물려주는 유산이라면 그 시작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같은 단어가 주는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직접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세히 살펴보면 정작 그가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면 목적론적인 얘기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귀찮을 정도로 세세하게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가면서 논지를 전개한다. 단지 그 내려진 결론에 비추어서 그 결론이 목적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의 4원인 가운데에 형상인과 목적인을 구분되는 일은 별로 없고 실질적으로 동일시되며 아리스토텔레스 본인도 그것은 그렇다고 말한다. 즉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이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 났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귀납적 관찰로부터 자연에 대한 공리를 얻고 그 공리로부터 사실을 연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앎을 총 4단계로 나누었는데, 최초의 단계는 신체의 각 기관으로 받아들이는 감각(αἴσθησις), 감각이 머리속에 남은 기억(Μνήμη), 지적 능력으로 기억을 종합하여 다른 대상에 확대 적용하는 경험(ἐμπειρία), 그리고 경험을 통해 자연의 공리를 얻는 지혜(σoφíα)로 나누어 관찰을 통한 지식의 생성을 강조하였다. 관찰이라는 것은 정확한 측정도구가 없으면 오차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공학이 발달하고 통제된 환경에서의 실험, 그리고 통계적 처리가 가능하게 된 현대 이전에는 그 한계로 잘못된 추론에 의한 공리가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공리들은 그러한 상태로 남아서 극복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정 자체를 과학사의 발달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서양 학문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 어느 학문의 개론서를 봐도, 학문의 역사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먼저 나오지 않는 학문은 흔치 않다.  

철학사가 슈퇴리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대한 사설 도서관도 세우고, 세계 각처의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학적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은 각지의 동식물 표본들을 모아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한 비교 연구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려 158종이나 되는 헌법을 수집했다고 한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모든 일이 기원전 300년대에 이루어졌다. 현대의 학자들도 함부로 하기 힘든 일을 고대인이 해낸 것.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술문을 구성하는 방법인 4배열법을 고안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수사학'에서 글을 서론-진술부-논증부-결론의 4문단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 서론은 짧고 인상깊은 표현을 통해 독자의 주목을 끌고, 진술부는 논제를 제시하며, 논증부는 진술부에서 제시한 논제를 논증하고, 결론은 논증부를 요약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서론과 결론은 상대에게 인상을 주는데에, 진술부와 논증부는 상대를 설득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4배열법에서 서론은 글을 읽는 독자들의 흥미를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짧으면서 강렬한 표현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 격언, 속담이나 고사성어로 서론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술적인 글의 경우 개념의 정의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질문으로 시작하거나 도입부에서 관심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진술부는 논제를 제시하는 부분으로 필자의 주장이 여기서 드러나기 때문에 논증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진술부의 글은 미사여구를 되도록 붙이지 않는게 중요하며 최근에는 서론에 포함되기도 한다. 진술부에서 제시된 주장은 논증부에서 증명되는데 논증부는 설득력있는 논증과 적절한 근거자료로 진술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삼단논법을 좋은 논증법의 예시로 들었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보존과 전파에 특히 많은 기여를 한 곳은 서양이 아니라 이슬람권이었다.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수학과 천문학, 의학, 연금술 등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각종 연구들은 이슬람 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알 파라비, 이븐 시나와 이븐 루시드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이를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인과 교류하며 그들이 근대철학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사실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가 증명하듯이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슬람이 기여한 부분이 많다.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는 흔히 오르가논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저작들이다. 하단의 저서 목록에도 있지만 범주론, 분석론, 변증론 등이다. 논리학에 관한 아이디어나 희미한 개념 등은 아리스토텔레스 전에도 이미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희미한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의 체계로 승화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내에서 일종의 예비학문으로 취급받고 있다. 학문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익히고 지나가야만 하는 과목인 셈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에서도 논리학적인 개념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자체는 현대의 논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논리학하면 많은 사람들은 말을 사리분별에 맞게 잘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대학교 등의 강연에서 논리학을 조금 배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비형식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간단한 형식논리를 알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라고 하면 단순히 a=b b=c 따라서 a=c 정도의 수식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수식은 예시를 들면서 풀어 보자면 인간은 포유류이다. 포유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이다와 같은 명제를 a, b, c, 따라서, = 등의 기호를 이용해 보기 좋게 치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언어는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 경우의 발언은 자신의 발언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형식 논리학의 형식을 빌어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보통 우리는 논리학처럼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설령 우리가 논리학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경우의 대부분은 현실 언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형식 논리의 언어가, 역으로 현실의 언어에 영향력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냐면,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a, b, c, = 등의 기호를 통해서 수식으로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고전 형식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형식 논리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은 논리학에서 변항에 해당하고 현대에는 a, b, c 등으로 깔끔하게 표현하는 이것들을 만들었어야만 했다. 이것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이런 변항들이 변항이 될 수 있는지, 어떤 말이나 개념들이 변항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즉 그래도 제법 교양과 상식을 갖춘 사람들 그리고 특히 이공계 쪽에서 논리학하면 흔히 수식을 연상하는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적 탐구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철학적인 탐구를 담고 있으면서,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하고 고안한 것들이며, 이 문서에서도 논의되고 있듯이 대중적인 고려를 하지 않은 일종의 강의록들만 남아 있으니 제법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기체, 안은 기체, 범주, 형상, 실체 등의 영문을 알기 어려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의된 채로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귀납논증
우리 안에 있는 첫 번째 것들은 필연적으로 '귀납'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각은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분석론 후서』 2권 19장 (역자 강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에서 '귀납논증'을 처음으로 명문화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과 다른 개념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전서』 제2권 23~24장에서 실제로 들었던 연역법과 귀납법의 예시를 살펴보자. 

연역법
피가 깨끗한 모든 생명체는 수명이 길다. (B는 A이다.)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피가 깨끗한 생명체이다. (C는 B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수명이 길다. (∴ C는 A이다.)
귀납법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수명이 길다. (C는 A이다.)
모든 인간, 모든 말, 모든 당나귀 등등은 피가 깨끗한 생명체이다. (C는 B이다.)
그러므로 피가 깨끗한 모든 생명체는 수명이 길다. (∴ B는 A이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단 논법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은 그 삼단논법에서 순서를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법과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귀납법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수립한 것으로, 수많은 경험들 a, b, c, d, ... 등등이 계속해서 추가될 때마다, 개념을 계속해서 갱신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의 귀납에서는 새로운 반례가 나오면 그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 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은 전제가 '필연적으로' 참인 것들의 귀납으로, 애초부터 반례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논증은 베이컨의 의도한 근대과학의 방향성과 큰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논증은 이미 '참'인 지식을 가지고 귀납을 하여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를 구분할 수 있겠끔 보편적 개념을 형성하는 것에 불과했던 반면에, 베이컨의 귀납 논증은 '실험'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자료들을 계속해서 추가하여 자연의 법칙을 끊임없이 해석,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지식'을 끊임없이 고쳐 나가자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치학
정치 체제의 종류는 세 가지이며, 각각에서 빠져나온, 말하자면 그것들의 타락한 형태들도 세 가지이다. [기본적인] 정치 체제들은 군주정과 귀족정(ἀ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셋째로 재산의 등급에 기초한 정치 체제인데, 이것은 원래 금권정으로 불러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헌정(πολιτεία)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것들 중 최선은 군주정이며 최악은 금권정(Τιμοκρατία)이다. 참주정은 군주정의 타락한 형태이다. 양자 모두 일인 통치체제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참주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지만 군주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족적이며 모든 좋은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지 않고서는 군주라 할 수 없는데 그러한 사람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그렇지 않은 사람은 제비를 뽑아서 선출된 군주일 것이다.) 반면 참주는 군주의 반대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니까. 참주정의 경우 그것이 최악이라는 사실은 [금권정이 최악이라는 것보다] 더 분명하다. 최선의 것에 반대되는 것은 최악이다. 

참주정은 군주정으로부터 나온다. 참주정은 일인 지배의 타락한 형태로 못된 군주가 참주가 된다. 귀족정으로부터 과두정으로의 이행은 지배자 집단의 악덕에 기인하는데, 그 지배자 집단은 도시의 소유물들을 [사람들의] 가치에 걸맞지 않게 배분하여, 좋은 것들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자기 자신들에게 배분하고, 공직들을 항상 똑같은 사람들에게 배분한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소수만이 다스리게 되고 훌륭한 사람들 대신 못된 사람들이 다스리게 된다. 민주정은 금권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서로 경계를 공유하고 있다. 금권정 역시 다중의 지배를 지향하며, 일정 재산 이상의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치체제 중에서는 민주정이 가장 덜 나쁜 것이다. 제헌정의 기본틀(εἶδος)로부터 약간만 타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체제들은 주로 이러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런 방식의 이행들이 최소한의 변화로 가장 쉽게 이루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체제들과의 유사성, 혹은 이것들을 이른바 범형(παραδειγμα)으로 삼는 것이 가정 안에서도 발견된다.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하는 공통의 교제는 군주정의 형태를 가진다. 아버지는 자식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호메로스도 제우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군주정은 아버지처럼 다스리기를 원하니까. 그런데 페르시아에서는 아버지의 다스림이 참주적이다. 아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리기 때문이다. 주인이 노예와 함께하는 공통의 교제 또한 참주정의 성격을 가진다. 그 공통의 교제에서 주인의 이익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교제 관계는 제대로 된 것으로 보이지만, 페르시아의 [참주적] 교제 관계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교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다르면 다스림(ἀρχή )도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공통의 교제는 귀족정의 성격을 보이는 것 같다. 가치에 따라 남편이 다스리되 다스려야 할 것만 다스리며, 부인에게 합당한 것은 그녀에게 양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면 과두정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이 일을 가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이며, 보다 나은 자로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부인들이 상속녀로서 다스리기도 하는데, 이때의 다스림은 탁월성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재산과 능력의 결과로써 일어난 것이다.

형제들 간의 공통의 교제는 금권정과 비슷하다. 나이에 따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로 동등하기 때문이다.(이것이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을 경우 그들 사이의 친애가 형제적인 우애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민주정은 주인이 없는 가정에서 주로 발생하거나(그곳에서는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혹은 주인이 약하고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8.10,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공역.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학은 그의 실천철학의 최종 목적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을 통해서 무엇이 행복한 혹은 유덕한 삶인지를 논한 다음, 정치학은 공동체의 모두가 그러한 상태에 놓이기 위한 탐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정치학에 대한 언급은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서두에 (1.2) 최고선은 정치학이라는 언급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다룬 선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최대한 많이 가져야 함다고 주장한 다음 이제 정치적 논의를 '시작하자'는 말로 끝난다. 이 다음에는 아마도 논의의 흐름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았다고 하는 158개의 정체에 대한 논의가 나와야 할 것이겠지만, 이는 안타깝게도 아테네 정체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내려오지 않는다.

여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체제를 일인정(一人政), 소수정, 다수정으로 나누고는 앞의 세개를 각각 타락 여부에 따라 군주정(좋은 일인정), 참주정(나쁜 일인정), 귀족정(좋은 소수정), 과두정(나쁜 소수정), 제헌정(좋은 다수정), 민주정(나쁜 다수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군주정>귀족정>제헌정>민주정>과두정>참주정 순으로 나쁘다고 봤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의하면 다수의 통치는 비록 최고의 효율을 낼 수는 없지만, 제아무리 타락해봤자 일인정이나 소수정의 타락보다는 그 해악이 덜하게 된다. 물론 당대 그리스의 제헌정은 실질적으로 금권정이였기에 오늘날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다수의 통치가 비록 영웅적 소수의 활약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언정 '안전하다'는데는 오늘날에도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의 최후기 저서이자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같이 읽어야 하는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분류가 다소 변형된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자가 올바른지(=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혹은 타락하였는지(=통치하는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는 입장은 인정하지만, 통치자의 수에 따른 구분보다 통치자들이 어떠한 정의관을 가졌는지에 따라 체제가 구분된다는 점을 더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서 통치자들의 정의관은, 그러한 사람들이 지향할 법한 정의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즉 1인정에서 통치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참주정,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면 군주정이며 (전부는 아닌) 다수 통치 체제에서 통치자들이 덕, 그러니까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면 귀족정으로, 부를 추구하면 과두정으로 분류하고, 통치자들이 다수이고, 다수가 가질 수 있는 덕(이를테면 군사적 덕)을 발휘하여 모두에게 선이 되는 경우를 추구하는 경우는 혼합정 내지는 시민정(폴리테이아, 위에서는 제헌정. 금권정이란 말은 사라진다), 자유(=자유민, 시민일 조건, 현대의 평등과 유사)를 추구하여 통치하는 다수를 위해 부자를 착취하면 민주정이라 분류한다. 또한 "정치학"에서는 민주정, 과두정, 참주정 순서대로 더 나쁜것은 받아들이지만, 왕정, 귀족정, 폴리테이아 간의 순위는 제시되지 않는다.

여튼 총 8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이러한 분류에 대한 3권에 등장하며, 1권은 가정에서의 다스림의 방식과 국가공동체의 다스림의 차이와 같은 개론적 내용이, 2권은 플라톤과 여타 현실 정체에 대한 (주로 그들의 단점에 치중한) 논의가 나온다. 4권은 이어지는 정체의 성격과 최선 정체에 대한, 혹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의 최선 정체에 대한 논의 및 정치학에서 필요한 앎의 여러 종류가 나오며, 이에 따르면 정치적 앎은 1) 단적인 최선 정체 2) 특정한 시민이 정해 졌을 때의 최선 정체 3) 어떤 가정 하에서의 최선 내지는 각 정체의 최선의 보존 방법 4) 일반적인 경우에 최선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제시된다. 다소 혼란스럽지만 확실한 것은 이 중 2)는 3권에, 4)는 4권에서 지나가면서 언급되며, 이에 따르면 두번째 앎에 대해서는 신과 같은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유덕한 가문이 있는 폴리스에게는 군주정이, 덕을 지닌 다수의 가문이 있는 폴리스에게는 귀족정이, 다수가 다수로서의 덕을 발휘할 수 있는 폴리스에게는 혼합정이 최선이며, 네번째 앎, 대체로 모든 폴리스에게는 최선인 정체는 혼합정으로 제시된다.

5-6권은 정체의 보존과 멸망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나타나며, 7권은 최선 정체에 대한 두 번째 논의 혹은 단적인 최선 정체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지고, 마지막 8권은 최선의 정체 하에서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룬다.
7-8권의 내용을 최종 정체에 대한 그의 최종 입장으로 본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 사회는 모두가 덕을 지향하도록(=훌륭해지도록) 이끌어지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는 덕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이 지배하면서 지배받는 (=일정 나이가 될때까지 덕을 키우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지배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은퇴하는) 사회이고, 어릴때부터 공교육을 통하여 덕을 추구하도록 교육받으며, 덕을 가지기 힘들 정도로 여가가 없는 수공업자와 농부같은 생산 계층들은 시민이 아니게 되고 이러한 통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 사회의 시민들은 모두들 덕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아주 특출한 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 어울리는) 왕정이 아니라 귀족정적으로 돌아가면서 지배하는 것이 어울리고, 모두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파당이 없으며, 모두 통치에 참여하기에 민주정적으로 쇠퇴하지 않고, 또 공교육과 법률을 통해 모두 덕을 추구하도록 이끌리기에 아주 좋은 상태에 있으면서 그러한 상태가 아주 잘 보존되는 사회일 것으로 서술된다. 그리하여 이 사회를 위에서 서술한 정치적 앎에 따라서 보면 1) 이 정체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최선의 목적인 덕을 최대한 많은 수의 시민들이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선의 정체이며 2) 시민의 특성에 따른 통치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이 사회엔 유덕자가 많기에 그들이 번갈아가며 통치하고 통치받는 방식으로 통치되고, 3) 보존에 있어서는 적절한 교육을 통해 모두 그러한 동일한 목적으로 이끌리기에 정치집단들 간의 분열의 가장 원인인 파당, 즉 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이 없어 잘 보존되기도 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입장이 현대의 정치철학과 가장 다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그의 윤리학의 핵심인 '덕', 즉 이성에 따르는 활동과 관조로부터의 행복이라는 하나의 보편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한 이상정체를 목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의 정치철학, 특히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하나의 공통된 목적, 혹은 가치관이 있기 매우 어렵다는 보다 심원한 다원주의적 상황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보기에 이러한 통일적인 가치관 하의 이상국가와는 시작점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체의 공통 가치관을 잘 갈고 닦아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는, 공동체주의로 불리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 정치철학적 후손이 된다. 

다만, 정치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당대 비판자들에게 가장 논란이 되는 어구 중 하나가 바로 아테네의 노예 제도를 인정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노예제에 대한 전반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는 좋은 국가에 있어 필요악이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로 태어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재질이 둔하며 기질이나 심성이 독립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은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노예가 어울린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인데, 사람이란 것이 먹고 살고 하는 일에 심력을 쏟다 보면 제대로 된 정치참여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예는 필수불가결이자 필요악이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어느 정도 완화조치를 취했는데, 노예들은 우정으로 대해주고 좋게 대해주고 사람답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살다 보면 그 기질이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도 문제라고 말했으며, 이에 따라 노예 중 노예답지 않은 재능과 본질을 가진 사람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방법을 통해 그도 노예제에 대한 어느 정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예 제도를 인정했다는 그 자체로 인해 칸트와 같은 다원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반발심을 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본인 역시 그리스 사람들이 타고나길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개인으로 태어났고 타 민족들은 수동적이라 노예에 어울린다고 주장한 적이 있어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본인 조차도 위대한 철학가라고 하지만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목적론적 방법론 또한 후대 여러 사상가들조차도 "이렇게 토의하다가는 결론이 안 나오겠다!"라며 어느 정도 거르게 되었다.

또한 여성에 대한 대우에서 스승인 플라톤보다 더 차별적인 면모가 있다.

 

 

중세의 재수용
오히려 중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라틴어로 번역한 번역 대본들은 상당 부분 아랍어 번역본들이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서구 문화의 업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근거가 있지만, 이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방이 우리 서구 문화의 업적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중세 유럽은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로부터 직접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시리아·페르시아·아랍의 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질송은 말한다. 그럼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이미 9세기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포기타의 작품들이 아일랜드와 프랑켄 지역의fränkisch 수도자들에 의해 변역된 것처럼, 직접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될 수 없었는지 의문이 생길지 모른다. 이에 대해 바로 디오니시우스 번역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을 방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런 답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기원후 첫 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플라톤 정신에 가까웠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현상이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솔즈베리의 요한 같은 인물은 구체적으로 만나는 세상의 실재 현실에 자신을 개방하려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마음 자세가 서구 사유 속에 얼마나 깊이 무르익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그런 마음 자세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하는 기본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이 아랍어라는 우회로를 거쳐 번역되었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랍 사람들에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말해 주지 못한다. 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치적 이주移住라는 데 있다. 그것은 이오니아 철학이 소아시아 연안에서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결국 아테네로 가게 된 것이나, 오늘날 기호논리학이 미국 대학들에 정착하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 사이에는 처음부터 이질성異質性이 있었고, 그런 이질성은 많은 종류의 뿌리에서 양분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질성은 5세기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us이 명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연합하게 되자 명백한 형태로 나타난다.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 태생으로, 그의 이론은 안티오키아Antiochien 신학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체성과 가시성可視性,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를 보는 눈과 어떤 의미에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네스토리아니즘의 중심이면서 독특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은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시리아의 에데사Edessa 학파였다. 그런데 이제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이 에페소Ephesus 공의회(431년)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자, 이 그리스도론은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는 더 이상 공적으로 주장될 수 없게 된다. 당사자들인 많은 수의 "이단자들"과, 이들과 동일시되지 않는 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에데사를 떠나 인접해 있는 페르시아로 이주한다. 이들 대부분은 국경 너머에 직접 이접해 있는 니시비스Nisibis에 머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시에도 곧 이어 약 천 명가량이 다닌 유명한 학교가 생긴다.(이 학교가 바로 100년 후 카시오도르가 그 모범을 따라 로마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그 학교이다.) 말하자면 시리아에 있는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의 학교와 수도원들이 당시에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들, 특별히 이 유산에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적 실타래를 잘 보관하고 전수해 준 보호 구역保護區域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뿐 아니라 유클리드Euklid,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갈레노스Galenos,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학자들의 철학적·수학적·의학적 문헌들은 처음에는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가, 어쩌면 페르시아어라는 중간 단계를 하나 더 거쳐, 아랍어로 확실히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중동 지역 전체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국Sassanid까지 침범해 들어가고, 대부분 시리아인과 페르시아인이던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들이 바그다드Bagdad에 있는 칼리프Kalif의 궁정으로 초빙되었을 때의 일이다. 800년경에는 아랍어가 세계적인 학문 언어나 다름없었다. 아랍어로 한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모든 곳, 다시 말해 동쪽으로는 인더스Indus 강, 서쪽으로는 피레네Pyrenäen 산맥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이런 문화 공간 안에서 이제 훌륭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들도 생겨나는데, 그 저자들의 이름은 13세기 신학적 대전들 안에서 거의 매 쪽마다 등장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아비첸나Avicenna를 들 수 있다. 그는 980년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궁정 주치의이면서 동시에 철학자, 신학자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올바른 통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마흔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그 텍스트를 외우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 전체의 의미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주게 했다고 한다.) 아비첸나에 이어 우리는 아베로에스Averroes를 들 수 있다. 그는 1126년 코르도바Cordoba에서 태어난 법학자요, 의사요, 철학자였다. 13세기에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자라고 하면 "바로 이 아베로에스"를 지칭했다. 라틴 서구에서 그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유럽 르네상스 철학을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볼 때 그가 미친 영향이 어떤 방향의 것이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아랍 사상가들은 진기하게도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같은 것을 전혀 모르며, 오히려 "성전 지상주의적"聖典至上主義的이기 때문에, 코란Koran에만 한정된 신학의 역사는 대체로 철학에 대한 자기 방어의 역사였다.
- 요셉 피퍼Josef Pieper, 김진태 옮김,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 150-154쪽

흔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천 년 동안 인정받아 온듯이 설명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반대다. 성 보에티우스의 죽음 이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틴-게르만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고, 심지어 그리스권에서도 매우 미묘한 대우를 받았다. 때문에 (언어적 접근성에 따른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저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12세기 중반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까지 서유럽에서 접할 수 있었던 라틴어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오직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범주론과 명제론 두개 뿐이었다. 다만, 플라톤이라고 상황이 그리 좋았던 것도 아니라, 서로마 제국에서 번역한 플라톤 저서의 라틴어 번역본 중 중세 서유럽에 보존된 거라곤 고작 <티마이오스> 한개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어려운 저서가 남았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은, 플라톤의 저서를 직접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플라톤 저서를 보고 사상체계를 구축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하에 중세 철학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자였던 에리우게나가 동방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신학 문헌들을 번역한 덕분도 있지만.

심지어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 전해진 과정만 보더라도, 그동안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권에서 미묘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되지 않았으며, 그리스어에서 우선 시리아어와 (어쩌면) 페르시아어를 거쳐 아랍어로 번역된 것을 카스티야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울 다중 번역이 행해졌다. 이는 "정치적 이주"였다한 그나마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어져 왔지만, 후대인들처럼 열광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아베로에스 등은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처음 번역된 것은 11세기 베네치아의 수도자가, 유일하게 아랍어로 번역되지 않은 저작 중 하나인 <분석론 후서>의 그리스어 원문을 직접 비잔티움 제국에서 구해다 번역한 것이 최초이다. 이후 12세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아랍어를 통해 중역이 시작되어, 12세기에는 주로 <혼에 관하여>, <자연학>, <형이상학> 등 자연철학, 형이상학적 저서들과 나머지 논리학 저서들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중 특히 <혼에 관하여>를 비롯한 저서들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하여, 13세기 이후로는 대학들의 철학 교육 및 연구의 필수 저서가 되기까지 했다. 

13세기에는 뫼르베케의 윌리엄의 노력이 독보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던 그는, 아랍어로 번역되지 않은 또다른 저서인 <정치학>을, 이전에는 아랍어 중역이었던 <혼에 대하여>도 원전번역했으며, <수사학>도 최초로 번역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원전번역하려는 노력은 좌절되었고, 이후로는 아랍, 특히 아베로에스의 주석이 달린 번역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 번역들 대부분은 이전에 이미 한번 번역된 적 있는 논리학 저서들과, 이전까지 서유럽에 번역이 없었던 나머지 저서들이었다. 아베에로스의 주석이 들은 이 번역본은 서유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아베에로스는 아랍 세계에서 최초로 신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대로 이슬람 사변철학에 접목한 인물이었던 만큼, 이베리아를 통해 들어온 그의 주석은 서유럽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체계와 내용을 명확히 인식하게 해준 것이다. 이 시기 번역은 주로 이베리아 반도, 특히 톨레도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주도한 톨레도 번역학파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소개되었다. 이후로는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남부를 중심으로 고전을 번역하는 노력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시칠리아 왕국은 여전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였기에, 원전 번역이 활성화되기 꽤나 용이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번역들을 기반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등 핵심적인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다시금 형성해 나갔다. 

아무튼 재수용때의 충격이 너무 강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움직임이 나올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엄연히 이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까지 변화시킬 정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덕분에 물리 천문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화학에서는 라부아지에한테 교정될 때까지 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 유럽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녀였던 플라톤주의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였던 철학이기도 하고, 신의 정체성과 영혼의 존재 가치에 대한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사상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모든 사물을 범주화하고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 본질을 통해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역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안의 사물의 위치변화 또한 에너지나 힘과 같은 역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이 그 자신의 본성에 따른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는 자연적 경향에서 찾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미신적이고 우매해 보이는 물리적 설명이 가끔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무식한 고대인이라고 비웃어서는 안 되는 게, 사실 이 사람이야말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최초의 단계적 분석을 시도했고 논리학만 기초를 놓은 게 아니라 그 분석을 기초로 경험을 통한 일반화라는 과학뿐 아니라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무리한 해석이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시대적 한계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현대인 천재론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생각해 보자) 애당초 이 시대는 자연과학 자체가 분리된 학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한 묶음이었던 시대다.

근대에 와서 흔히 까이는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과학이 바로 그의 방법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앞선 시대의 방법론이라는 '자료'로만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과학의 방법론은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맞서 싸우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문이 유럽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이 바로 근대과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4원소설 + 천상의 제5원소 떡밥 덕택에 연금술의 기반이 되었다. 연금술이 근대 화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의도치 않게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물리, 천문, 화학에서 전방위로 까이는 바람에 마치 과학의 원수인 양 여겨지지만 동물 분류학에서는 뛰어났다. 섬게의 크기가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크고 작아진다고 쓰기도 했고, 그 시절에 이미 고래를 포유류에 가까운 종류로 따로 분류했다(포유류 자체에 포함시킨 것은 아님). 정작 이 부분은 제자들에게 "쯧쯧, 우리 선생님 실수하신 듯. 고래는 어류"하는 바람에 묻혔다.제자란 놈들이 스승님 실수할 때는 못 알아채면서 맞는 말 할때는 틀렸다고 착각하냐

윤리학 부분에서는 자격, 목적, 좋은 삶, 중용 등이 주요 개념이다.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대접이 적절한지는 그 행위나 대상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은 좋은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웰빙인 셈. 중용은 적절하신 그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적절한 행동을 강조한다.

논리학과 삼단논법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닦아놓은 논리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형식논리학'의 틀을 이루게 된다. 이후 프레게, 조지 불, 버트런드 러셀이 등장하여 '기호논리학'으로 불리는 현대 논리학의 새로운 조류가 나타날 때까지는 사실상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문학에서는 시학을 통해 체계적인 문학비평의 효시가 되었다. 시학에서 비극의 작동원리를 카타르시스라고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허나 카타르시스는 전문을 걸쳐 단 한 번 언급되어질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시학 전체에 걸쳐 플롯을 가장 강조하였다. 시학은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제작학적인 성격이 짙으므로 본격문학보다는 대중문학 이론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스승인 플라톤이 예술 곧 '모방'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세계의 2차적 모방이라고 규정하고 천시하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지만 시(서사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므로 시가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문학의 존재가치를 역설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역사는 우연적인 인간의 행위에 크게 좌우되며,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전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물론 최고 수준의 문학이 그 기준이지만 대단히 아름다우며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보다 문학이 더 우월하고 추종할 만하다는 것이다.

 

저서
알렉산드로스 왕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에게 전달했던 자신의 강의와 저서들에 있어 두 가지 형태를 취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부용'(ἐξωτερικά)이라 불렸고, 다른 하나는 '내부용'(ἀκροατικά)이라고 불렸다. '외부용'이라 말해지는 것은 수사학 훈련, 논리적 능력, 정치적 지식으로 이끌었고, 반면 '내부용'이라 불리는 것에서는 자연학적 고찰이나 변증법 논쟁이 속한 보다 깊이 있으면서 정교한 철학이 논의되었다. 내가 언급한 이 '내부용' 교육에 그는 리케이온에서 오전을 보냈고, 재능과 기본적 지식, 배움에 대한 열정과 근면을 시험하기 전까지는 이 시간에 그 누구도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앞서 말한 '외부용' 강의와 말하기 연습은 실제로 저녁에 같은 장소에서 열렸고, 구별 없이 대중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이것을 '저녁 산책'이라 불렀고, 앞서 언급한 다른 하나는 '아침 산책'이라고 불렀다. 두 경우 모두 그는 걸으면서 논의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이 모든 기록이 담긴 자신의 책들을 따로 나누어, 한 부분을 "외부적인 것들", 일부분을 "내부적인 것들"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왕은 그가 '내부적인' 종류의 책들을 출판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시 그는 전쟁으로 거의 모든 아시아를 점령하고 있었고, 공격과 승리로 다리우스 왕 본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지만, 이런 많은 일들 속에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편지를 보내 내부적인 가르침을, 자신이 직접 교육받았던 것을 책으로 출간해 밖으로 발표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저희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들 전부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게 된다면, 도대체 저희가 다른 어떤 일 방법으로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힘과 재산보다 배움에 있어 앞서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이런 말로 답했다. '왕께서 출판되었다고 불평하시는 내부용 책들은 감춰진 듯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출판되거나 출판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직 우리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 『아티카의 밤』 20.5 #

카이사르가 전쟁 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태워먹어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원전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때 불탄 서적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책들이었고 그나마 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20만 권을 선물했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좀 복잡하게 저작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이유는 아리스토텔리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탓이 컸다. 이후 지하 창고 안에서 썩어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책수집 덕후가 사들여서 수집하고 보관한 덕에 지금 남아있는 정도의 저작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남아있는 저작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저작의 반도 안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후에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들이 소실되어서 어려운 강의 노트들만 남았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일단 헬레니즘 철학자들이나 세네카나 키케로 같은 로마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한 경로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내부적' 저작이 아닌, 대화편 같은 '외부적' 저작이었다. 즉 그들이 인용한 구절들이나 감탄하는 문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재 남아있지 않은 저작들에서 나온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출판을 염두에 둔 19편의 대화편을 포함한 '외부적' 저작들은 대부분 소실됐다. 그 이유를 꼽아보자면 첫째로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미 대화편이라는 형식이 이미 크게 쇠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가장 핫한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 또한 대화편보다는 논문 형식으로 저술을 했다. 두 번째로 1세기부터 묻혀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내부적' 저작들이 재발굴되며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대화편같은 '외부적' 저작들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이후 내부적 저작들이 플라톤을 연구하기 위한 신플라톤주의의 커리큘럼에 편입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도 내부적 저작들을 해설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정작 외부용 저작들은 한 두 줄씩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단 시기상으로 외부용 저작들은 최소한 5~6세기까지는 남아있던 것으로 보이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등을 위시한 그리스, 로마의 작가들과 주석가들이 직접, 간접 인용한 단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아있는 저작들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연구자들 나름대로 재구성을 하는 상황이다. 특히 철학으로의 권유(Προτρεπτικός) 같은 경우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자 이암블리코스가 많은 부분을 발췌해 놓아서 상당한 단편이 확보된 상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의 노트와 미출판용 저서들은 살아남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은 플라톤의 것들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은 대화편의 각 권마다 서문을 첨부했으며, 항상 소크라테스만을 화자로 등장시켰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직접 대화편의 등장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주제던 양쪽 입장에서 서로 상반된 연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는 키케로의 증언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은 플라톤적인 짧은 문답보다는 서로 상반된 긴 연설들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단 이는 추정일 뿐 키케로의 이 증언이 아리스토텔레스 대화편의 형식을 가르키는 거라고 볼 증거는 없다.

아카데미아에서 짬이 덜 찬 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 자신의 스승을 모방하여 대화편들을 저술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완성도가 절대적으로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스타일을 바꿔나갔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를 키케로는 '황금의 물결', 테미스티오스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프로디테가 퍼져있고 카리스 여신들이 피어났다', 암모니오스는 '문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라고 격찬하는 등 그의 대화편은 공을 들여서 수려하고 격조높은 문체로 씌였을 것이라 추측하나, 남아있는 직접 단편이 몇 개 없어서 아쉬운 부분. 그 중 하나가 대화편 『철학에 대하여』 단편으로, 키케로의 라틴어 번역으로만 남아있는 이 단편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연상케 하는 비유법과 수사학적 열거법을 사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와 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만약에 항상 땅 아래에 있으면서, 조각상과 그림들로 치장되고, 유복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풍성히 즐기는 저 모든 것들로 꾸며진 아름답고 좋은 집에 거주하며, 땅 위로는 결코 나온 적이 없지만 소문과 풍설에 의해 어떤 신들의 능력과 힘이 있다고 배운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어느 순간 땅의 목구멍이 열려서 그들이 저 숨겨진 처소로부터 나와서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올 수가 있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면, 방대한 구름들과 바람의 힘을 느꼈다면, 태양과 그것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또 그것이 온 하늘에 빛을 흩어 낮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느꼈다면, 그리고 밤이 땅에 어둠을 드리웠을 때 온 하늘이 별들로 수놓아지고 장식되는 것, 때로는 자라나고 때로는 늙어가는 달의 빛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뜨고 지는 것과 온 영원 동안 정해져 변치 않는 궤도들, 이런 것들을 그들이 본다면 확실히 그들은, 신들이 존재하며 이토록 대단한 것들이 신들의 업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철학에 대하여』 단편 13a. 강대진 역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19세기에 독일의 고전학자 임마누엘 베커가 편집해 번호를 붙였고 현재 모든 번역본도 이 베커 번호를 문단 옆에 붙이며 이것을 기준으로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 인용할 때 쓰인다. 물론 베커 번호가 붙고 난 다음에 발견한 저서들이나 부분들만으로 복원된 저서들은 이 번호가 붙어있지 않지만 대부분 연구 중이기 때문에 fragments라고 불리고 밑의 저서 리스트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취소선으로 표시된 저서들은 위작이라고 판명됐거나 의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theoretical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 practical (무언가를 하려는 지식), 그리고 productive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지식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지식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그리스어로 Ὄργανον)가 논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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