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정변
申酉政變
1861년 11월 2일 (기상 원년)
북경순천부 자금성
원인
보정대신에게 집중된 권력구도
교전 세력
재경대신 파벌 승
보정대신 파벌 패
지휘관
공충친왕 혁흔
순군왕 혁현
서태후
동태후
결과
재경대신 세력의 승리
서태후의 집권
영향
양무운동의 토대 마련
1861년 청나라의 서태후가 공충친왕 혁흔과 합작하여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친위 쿠데타이다.
신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유정변'이라고 하며,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이 동치제가 즉위한 직후 올린 연호인 기상(祺祥)을 쓸 때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기상정변'이라 하기도 한다.
배경
1861년 8월 22일, 제2차 아편전쟁을 피하여 열하로 몽진했던 함풍제가 붕어했다. 함풍제는 죽기 직전에 군기처의 이혁정친왕 단화, 이혁이친왕 재원, 협판대학사 겸 호부상서 이혁보국군왕 숙순, 부마도위(駙馬都尉) 부찰경수, 군기대신 겸 병부상서 탁화락목음, 이부좌시랑 광원, 예부시랑(문부대신) 두한, 태부사소경 초우영을 비롯한 8명의 고명대신들을 보정대신으로 지정하여 아들 동치제를 부탁했고, 동태후와 서태후에게 각각 옥새를 이분화하여 어상과 동도당을 주었다.
한편 함풍제와 함께 가지 못하고 경사인 북경에 남은 재경(在京)대신들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못하여 불만을 가졌고, 특히 그들의 필두에는 도광제 시절 차기 유력 황제 후보로 고려되었던 공친왕 혁흔이 있었다.
전개
공친왕 혁흔은 9월 5일에 열하로 와서 조문을 했고, 이때 자신을 견제하려는 고명대신들을 증오하여 서태후와 만나 정변 모의를 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붕어 이전부터 황족인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9월 14일에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궁(兩宮)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보정 8대신은 이를 거부하여 태후들과 대립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공친왕을 이용하여 자신이 증오하는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결정한 후 본심을 숨긴 채 혁흔과 협력하는 척했으며, 북경에 있는 재경대신들을 매수했다. 10월 26일에 단화, 재원, 양궁 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북경으로 출발했고, 숙순은 함풍제의 운구를 호종하여 하루 늦게 출발했다. 11월 2일에 선발대 중 양궁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자금성에 입궁했고, 단화와 재원은 뒤늦게 입궁했는데, 태후들의 지시로 보군통령에 막 부임했던 순군왕 혁현의 칼 같은 지시로 입궁하자마자 체포되었으며, 숙순은 북경 북동쪽 밀운에서 체포되었다.
서태후는 11월 3일에 공친왕을 사실상의 섭정왕인 의정왕에 임명했다. 그 다음 11월 8일, 재원과 단화에게는 자결을 명령했고 숙순을 참수했다. 이들 셋을 제외한 다른 5명은 함풍제와 공친왕 형제, 그리고 양궁 태후들과도 사적으로 엮인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이나 다름없는 머나먼 방계 철모자왕 가문의 3인과는 달리 관직에서만 물러나는 선에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11월 11일에, 애신각라 재순이 즉위식을 올리고 보정대신들이 올렸던 기상(祺祥)이라는 연호를 폐지한 후 이듬해를 동치(同治) 원년으로 선포했다.
결과
함풍제가 본래 의도한 바가 아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새로운 연호인 동치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같이(同) 통치한다(治)'라는 의미로 황제와 황태후, 공친왕 등이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태후가 정변에 동조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숙순을 비롯한 보정 8대신이 황태후와 황제를 업신여긴다며 그들보다 공친왕을 신뢰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스스로는 정사에 어두워 일부 사안만 충돌하고, 나머지는 서태후에 일임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머지않아 공친왕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보수파와 결탁함으로써 공친왕을 '수석 군기대신'으로서 조정에 건의를 할 수 있을 뿐 절대권력은 갖추지 못한 '권신 1'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고,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독식했다. 그 와중에도 공친왕은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한족 신사층을 중용하고 유학생을 뽑아 해외에 보내면서도 서태후의 입김으로 동치제가 원명원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재를 헌납하면서까지 국고 낭비를 막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으나, 양무운동은 결과적으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유구한 역사를 반복했다. 공친왕은 아들을 인질로 뺏기며 서태후의 예스맨으로 전락한 순친왕 혁현에게 조금씩 밀려나다가 청불전쟁에서 패배하고 복건함대가 궤멸하자 실각했고, 서태후의 천하가 열리고야 말았다.
서태후, 궁정쿠데타 성공하다
청조 9대 함풍제(咸豊帝)는 무기력한 황제였다. 19살에 황제에 올랐을 때 강남지방에선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그를 괴롭혔고, 말년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을 내주어야 했다. 재위 기간(1850~1861) 내내 그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그는 무기력감을 해소하기 위해 황음과 마약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1850년대 중반부터 몸이 쇠약해 졌다.
함풍제는 1860년 여름에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진격을 피해 여름궁전이 있는 열하(熱河)로 대피했다. 황제의 병색이 깊어지면서 황실과 고관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황제의 형제인 이친왕(怡親王)과 정친왕(鄭親王), 대신 쑤순(肅順)이 황제를 에워싸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함풍제의 또다른 동생인 공친왕(恭親王)은 베이징에 남겨져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함풍제에게는 자희왕후(慈禧王后)에게서 낳은 6살짜리 아들 짜이춘(載淳)이 있었다. 황제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희는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해 성사시켰다.
문제는 누가 섭정을 맡을지 여부였다. 차기 황제가 어리기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고, 섭정이 되면 황제가 성년이 될 때 까지 10년정도 권력을 좌지우지할수 있었다. 청조에서 태후가 섭정을 맡은 전례는 없었다. 이에 이친왕, 정친왕, 쑤순은 자신들을 포함해 8명으로 섭정단을 구성하겠다고 죽어가는 황제에게 요구했다. 정비 자안왕후, 황태자의 생모 자희왕후, 공친왕은 쑤순 일파의 제지로 황제 알현이 배제되었다.
자희왕후는 영악했다. 남편인 함풍제가 임종을 맞았을 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녀는 섭정 자리를 반대파에 내주면 죽임을 당할 것을 직감했다. 자희는 베이징에 남아 있던 공친왕에게 연락을 취했다. 연락은 내시를 총괄하는 태감 안덕해(安德海)가 맡았다. 안덕해가 보낸 밀사가 공친왕에게 접근해 차기 정권을 공유하자는 자희의 뜻을 전했고, 공친왕은 동의했다.
자희는 또 정실왕후이자 사촌언니인 자안왕후(慈安王后)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던 자안왕후는 자칫 반대파에 권력이 넘어갈 경우 가문이 공멸 위기에 처할 것임을 깨닫고 자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함풍제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 자희는 어린 아들을 안고 황제의 침소로 들이 닥쳐 자신과 자안왕후 두명을 섭정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황제는 자희왕후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황제의 유언은 옥새를 찍어야 효력을 발생한다. 1861년 8월 22일 함풍제가 사망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자희왕후의 측근 무장 영록(榮祿)은 재빨리 함풍제 시신이 놓인 침상 밑에서 옥새를 찾아 빼돌렸다. 뒤늦게 쑤순 일행이 옥새를 찾아 나섰으나 허탕을 쳤다. 당황한 쑤순 일파는 자안과 자희 두 왕후를 태후로 모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쑤순과 두 친왕은 선수를 쳤다. 그들은 황태자 짜이순의 섭정이 되었다고 황실과 고관들에게 발표했다. 열하는 쑤순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베이징은 공친왕의 지지세력이 많았다. 자희왕후는 열하에서 쑤순 일파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베이징에 가서 반대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황제의 장례식은 수도 베이징에서 열렸다. 황제가 객지에서 죽으면 왕후가 궁궐에서 기다리다가 시신을 맞이하는 것이 중국의 관례였다. 자희는 이 관행을 이용했다. 자희는 자안왕후. 황태자와 함께 먼저 베이징에 도착했다. 쑤순과 두 친왕은 황제 시신을 따라 왔다. 운구 대열이 길었기 때문에 시신과 쑤순 일행의 베이징 도착은 자안왕후보다 닷새 늦었다. 그 사이에 자안왕후는 공친왕과 궁정구데타를 도모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공친왕을 지지했다. 영국과 프랑스에게 이친왕은 트러블메이커였다. 이친왕은 공친왕보다 먼저 협상대표로 나갔는데, 협상 도중에 영국 대표 해리 파크스를 비롯해 영국인 26명과 프랑스인 13명을 체포하고, 대표단 일행을 고문한 일이 있었다. 이에 비해 공친왕은 서양세력의 위력을 알고 순순히 협상에 임해 베이징조약을 체결한 인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공친왕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향후 조약 이행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영국 공사 프레데릭 브루스는 런던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2개월 동안 우호적인 교제를 할 가능성이 있는 한 파벌을 양성하고, 이 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주었는데, 이는 작은 성공은 아니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만족스런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에서 군대를 철수했지만 수도에서 160km 떨어진 텐진에 5,000~6,0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공친왕은 쿠데타에 실패할 경우 텐진의 외국군을 동원할 것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공친왕 세력은 외국군의 도움 없이도 쑤순과 두 친왕 일파를 손쉽게 제거했다.
공친왕은 베이징의 유명한 유학자들에게 황제가 어릴 때 태후가 섭정하는 것에 대한 유교적 해석을 의뢰했다. 유교적 타당성은 정치적 명분을 얻는다. 저주페이(周祖培)·리츠밍(李慈銘) 등 당대의 내로라는 유학자가 두 태후에게 섭정을 맡기고 종실 친왕이 정무를 보좌하도록 상소문을 냈다. 이에 대해 쑤순 일행은 만주족 출신의 청조에서는 태후가 섭정한 사례가 없다고 주장했다. 순치제(1644~1661)의 어린 시절에는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을 맡았고, 강희제(1662~1722)도 어린 시절에 오보이를 수반으로 하는 4명의 섭정에 의존했다.
역대 한족 정권에서는 태후가 섭정을 한 경우는 있어도 만주족 정권인 청조에서 태후가 섭정을 맡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관례가 없던 일을 추진하려면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
베이징은 공친왕의 무대였다. 베이징에 도착한 두 태후는 유학자와 호부상서, 형부 상서가 연명한 상소문을 받았다. 상소문은 두 태후의 섭정을 요구했다. 공친왕이 사주한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후 이친왕·정친왕과 쑤순 일행이 도착했다. 자안·자희태후는 그들을 불렀다. 그리곤 태후의 섭정을 밝히고, 측근 무장을 시켜 반대파를 체포했다. 궁정쿠데타는 순식간에 성공했다. 이를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고 한다.
두 친왕은 황족이므로 자살이 허용되었고, 쑤순은 참수되었다. 다른 5명의 섭정은 관직에서 해임되어 귀양을 갔다.
이어 여섯 살 황태자 자이춘은 황제에 올랐다. 새 황제의 연호는 동치제(同治帝)인데, 동치(同治)는 두 태후의 공동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자희태후는 서쪽의 궁궐(西宮)에 거주해 서태후라 불렸고, 자안태후는 동궁(東宮)에 기거했으므로 동태후라고 불렀다. 두 태후가 공동섭정이 되었지만 서태후보다 두 살 많은 동태후는 정치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서태후는 상소문을 읽고 황제를 대리해 수렴청정에 나섰다. 서태후의 섭정 시대가 온 것이다.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 군기대신, 내무부총관대신, 총리아문대신이라는 여러 직책을 부여받아 막강한 권한을 갖고 정무를 집행했다. 하지만 공친왕의 권력은 두 태후, 정밀하게는 서태후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서태후도 공친왕의 내각 장악에 의지했다. 권력의 공생관계가 당분간 유지되었다.
서태후는 신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말은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녀는 승부욕이 강하고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지혜가 탁월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권력욕이 강해 나라를 혁신시키거나 왕조를 부흥시키는데 실패했다.
서태후의 초기 통치는 합리적이고, 난세를 평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서태후가 정권을 잡았을 때, 중국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남쪽엔 태평천국 반란자들은 10년째 준동하고 있었고, 서북 신장, 서남의 윈난 지방엔 이슬람 세력이 청조에 저항하며 봉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도에까지 군대를 진주시켰고, 러시아는 북동쪽 외만주 지역을 집어삼켰다. 이런 난세에 남성 중심의 봉건질서에 젖어있던 중국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장악하고 지휘했다는 점에서 서태후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