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소현세자, 선조, 광해군은 조선 시대의 왕과 왕세자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광해군의 폐위에는 선조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이 있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이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의문사한 왕세자
이들의 관계는 조선 왕조의 권력 다툼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
인조: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
그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겪으며 청나라에 항복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 의문사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자 왕세자로, 청나라에 볼모
그는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며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지만, 귀국 후 의문사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인조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
선조: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은 왕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광해군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선조는 광해군의 정치적 행보를 견제했으며, 이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선조가 광해군을 견제한 이유가 광해군의 어머니가 정식 왕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의 아들이자 폐위된 왕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전쟁을 수습했지만, 아버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사망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폐위
이들은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조선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만들어냈다. 인조와 소현세자,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는 조선 왕조의 권력 다툼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인조, 소현세자
아버지 인조와의 갈등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이 오랑캐에게 굴복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망신을 당해 권위가 바닥을 쳤고, 수십만 명의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는 청에 대한 반감을 끈덕지게 고수하며, 현실성 없는 복수라도 그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박씨전 에 반영되었듯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적개심으로 대동단결한 민심에 편승하는 것이, 패전이라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 인조 자신의, 조선 내에서의 권위를 부지하는 안전한 길이었다. 실제로도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고 있음을 끊임없이 인조에게 상기시키며 인조를 협박해 오는 마당에, 이런 상황에서 인조가 청에 대해 증오심 외에 다른 감정을 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 역시 환경만 보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반청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목숨에 대한 위협이나 굴욕적인 대우는 조선 구중궁궐에 남은 인조보다,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직접 받은 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조선에서 끌려온 자신의 신하들(삼학사)이 코 앞에서 참수되는 것도 보았으니까. 인조와 소현세자의 결정적 차이는 이를 계기로 소현세자는 좀 더 상황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볼 줄 알게 되었단 것이다. 소현세자는 굴욕감에 이만 갈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장렬히 시들어버리는 대신, 당시 한창 국운이 상승 중이고 영웅이 많던 건강한 청나라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기존의 조선식 사고에서 벗어났기에, 청나라와 조선 양쪽의 팽팽한 갈등을 조율하면서도,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실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오죽하면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세자를 세웠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까.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둘다 자신의 중대한 실정으로 권위에 위협을 느끼고, 그 결과 잘 나가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정적으로 간주해 억압하려 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선조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했을 수 있다. 선조에게, 권위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은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차기 왕으로 지목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 여당 역시 광해군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이런 상황에 폐위될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분조를 이끄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아들 광해군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부풀려 키워, 광해군을 몰아내고 견제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의 사후 아홉 살밖에 안된 어린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 손에 의해 증살 당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아무튼 선조가 받은 위협은 꽤 실질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를 공격한 것은 내부의 정치권력이었고, 이는 달리 말하자면 선조의 내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또 선조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단순 공갈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시 말해 선조는 먼저 광해군을 공격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실제로 자신이 공격당할 것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인조의 상황은 좀 달랐다. 비록 청나라로부터 왕권 교체 위협을 받을지언정, 인조의 조선 내에서의 지지기반은 탄탄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가 인조를 협박한다 해도, 말 뿐이었지, 실제로 청나라의 행보를 보면, 소현세자를 내세워 인조를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무리해서 교체할 의도까지는 없었다. 청나라의 일차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명을 몰아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현세자를 조선왕으로 내세우겠다 협박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조가 행여 뒤에서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견제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청나라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잃지 않은 인조를 굳이 건드려, 조선인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오는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청나라가 원하는 조선에 대한 간섭 수준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가지고 있던 지위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특별히 그 이상의 간섭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에겐 그런 바깥 상황이나 흐름을 정확히 읽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아들을 앞세워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덤으로, 중전이 될 야망을 품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에 대해 끊임없이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는 인조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물론, 만약 청나라가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면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나라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한마디로 청나라 앞잡이 조선 왕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이를 고려말 원 간섭기에 투영해 청나라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며, 그렇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견제를 정당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원간섭기식 통치를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를 제거한다고 막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고, 봉림대군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조에겐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만 없으면 자신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이런 인조의 두려움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통제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만주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조선의 구중궁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힘과 문화, 새로운 철학들을 접하게 된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내심 좋게 말해 안타깝고, 나쁘게 말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왕이 되었을 때 실제로 계몽군주의 행보를 보일지 아닐지를 떠나 적어도 명백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면 이것이 과장되었다고 하는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떠나기 전과 딱히 변한 게 없고, 딱히 뭔가 새로운 사상이나 비전을 대놓고 보여준 적도 없으며, 아담 샬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는 것도 아담 샬의 거짓말이며, 심지어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조선을 몰아낼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한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명하고 냉철한 인조는 부득이하게 아들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본 사료에 명시된 소현세자의 개성이나 장단점에 대한 평가와도 한참 어긋난다.
말로 청나라가 왕족을 내세우는 원 간섭기식 경영을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만 숙청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꼭두각시나 앞잡이가 될 거라는 예측은 그저 인조 시점에서 본 변명이자 허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 정도로 소현세자가 청나라 입장에서 다루기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나라 입장에서야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 목적이, 청나라 황실의 권위도 높일 겸, 조선 왕실의 권위는 찍어 누르며 인조도 자유자재로 부릴 겸,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실 내에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어 지내며 시키는 대로 청나라를 떠받드는 대신, 잡혀간 조선 백성과 그들의 안위를 챙기며, 청나라 황실의 볼모라는 입지를 도리어 활용해, 조선인 포로들을 사비를 털어 사들여 후일에 조선으로 데려갈 방법을 구비했다. 또한 도르곤이나 용골대 같은 청나라 황실 밑의 장군들이나 군인들에게 꿇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청나라 황실의 볼모로서 왔으니 나는 청나라 황제의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그들에게도 대등하거나 우대를 받는 외교적으로 굉장히 현명한 태세를 잘 보여주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덤으로 참으로 든든한 아버지, 즉, 조선을 방어할 힘도 없으면서 가진 거라곤 오랑캐에 대한 혐오심에, 현지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동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일절 드러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아버지, 나중에는 자신을 정적으로 간주하는 과대망상에 빠진,19 아버지이기보단 짐덩어리에 가까운 아버지를 등에 업고도, 청나라의 압박과 등쌀에 어떨 땐 숙이고, 어떨 땐 대항하며, 국본(왕세자)으로서 조선의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하고 자국민을 힘닿는 한 보호해 냈다. 소현세자가 이런 어려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것 자체가 과장이고, 유난히 허약 체질이라, 귀국하자마자 학질로 갑자기 돌연사했다는 시각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현세자 병약자 설은,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방대한 기록 중, 진료 기록만 물량공세해 맥락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확증 편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물론 소현세자가 사가들 앞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조선을 만들겠다고 천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세자가 아버지를 비판하고 다른 노선을 타겠다고 사가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이야말로, 성리학적 질서 하에선 멍청하고 미친 짓이다. 아들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효이고, 국본(왕세자)으로서 절대 말아야 할 반역 행위일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나온 사가의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보면, 소현세자는 영리하지만 내향적인 타입이었다. 또한 <동궁일기>를 보면, 강압적인 시강원 스승들과는 동궁 시절부터 코드가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양일기>나 <동궁일기>처럼 시강원 스승들이나 사관 앞에서 소현세자가 내뱉은 말만으로 소현세자의 내면을 읽긴 어려우며, 대신 그의 행동이나 무의식적 말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던 초기만 해도, 아랫사람들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천성은 가졌을망정, 전형적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 등 신분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심양에 도착한 후에도 서연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볼모생활 후반, 소현세자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경연을 그만두었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선 천대받는 무인이나 노비들과 더 잘 터놓고 지낸다. 거기에 흥미롭게도 김자점이 훗날 강빈을 죽일 이유를 가져다붙이기 위해, 강빈이 소현세자의 암묵적 동의 하에 사관 보고서를 슬쩍 고쳐 쓰는 일을 했다고 까는 내용이 실록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당시 소현세자 혹은 세자빈이, 인조 입맛에 안 맞는 돌출언행을 보이고 뒷수습했다는 정황일 수도 있다. 물론 김자점의 말이 사실일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봉림대군이 훗날 소현세자를 까면서 '자기주장이 없이 아내에게 끌려다녔다'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성리학적 남존여비 철학을 따르자면, 남성만이 판단하고 책임질 권리가 있고 여성은 판단하지 않고 남성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런 질서 속에서 봉림대군에게 저런 식의 까일 구실을 제공했다면, 세자빈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편이고, 소현세자는 '바깥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아녀자에 불과한' 세자빈의 생각을 귀담아듣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심지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에 호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담 샬의 회고록에 나온 소현세자의 개인 서신은 말 그대로 쐐기를 박는다. 후술하겠지만, 선교사 아담 샬의 회고록에 오류나 과장된 측면이 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세자가 아닌 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소현세자가 조선을 떠나기 이전과 비교해 변화하거나,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의 눈에 헛소리 하는 양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며,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기독교에 호감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변화는 소현세자가 사망 직후 쓰인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졸기에도 대놓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관들은 이런 소현세자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까는 논조로' 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허구이기 어렵다.
소현세자는 점차 변하고 있었지만, 대리청정 때와 마찬가지로 소현세자가 아버지인 국왕이 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또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지기 시작한 이런, 어쩌면 조선의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를 변화의 씨앗, 즉, 이런 독립적 행보 자체가 부담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사비를 털어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을 구출해 낸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애민사상에 입각해 한 행동을, 인조는 자신에게 대항할 사병을 모으는 행위 정도로 상상했다.
이렇게 소현세자는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조선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행보를 남기는 과정에서, 인조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은 차곡차곡 적립되었고, 이는 소현세자가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비록 원손은 잠시 부모 얼굴만 보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인평대군 역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나라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뻔했다고 판단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냈으며 환영 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 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는데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1번 보내주겠다."며 일시 귀국시킨 것을 영구 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1번 화살에 상처 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 아버지이고 인조의 사돈이며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은 이듬해,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아버지 묘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賜死)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크게 당황해서 "빈궁(민회빈 강씨)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 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나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지는데 인조반정의 1등 반정공신 심기원이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이다. 심기원이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심기원을 고변한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막상 귀국한 세자를 보니, 그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까지 덧붙였다. 솔직히 황익의 고변은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몰아낼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반대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지 역모 고변 사건에서 소현세자 이름이 지나가듯 잠깐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적 두려움을 더더욱 키우게 되었다.
귀국과 죽음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들이닥치면서 명나라는 276년만에 멸망한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오삼계와 손잡은 청나라에 의해 모조리 쓸려나가고, 청나라는 북경에 무혈입성으로 입관하여 중원을 제패한다.
1645년(인조 23년),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은 소현세자 형제의 영구 귀국을 섭정왕의 자격으로 허락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아내 강빈 및 세 명의 아들들과 함께 고국 조선으로 약 9년 만에 영구 귀국했다.
인조가 돌아온 소현세자 내외의 환영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이때부터 이미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해버릴 마음을 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소현세자는 환후가 중해 귀국도 지체될 정도로 중환자여서 행사고 뭐고 기뻐할 새가 없었다. 만일 부친 인조가 정말로 흑심을 품고 세자 일가를 죽이려 했다면 오히려 크게 잔치를 대대적으로 벌여서 강제로라도 참석시키는 쪽이 더 빨랐다.
이미 오기 전부터 심했던 지병이 악화된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도 못 되어 1645년(인조 23년), 학질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알려져 독살설이 널리 퍼졌으나, 승정원일기, 심양일기를 토대로 한 연구 결과는 지병 악화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도 제기한다. 다만 전근대 기록의 한계로 사망 원인은 여전히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도리어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해서 소현세자가 사망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미음조차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의 이후 행적을 보면 결국엔 남의 자식인 며느리와 그 며느리의 피가 섞인 손자들은 배척해도 아들들만은 오롯이 아꼈다.
소현세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조의 숙청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원손 석철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원손은 10살이었고,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군왕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밀어붙이며, 봉림대군이 장성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했거나 하는 유사시에 나라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설득하기보단 대신 왕의 권위로 신하들의 반발을 찍어 눌렀다.
소현세자 사후 인조 23년 5월 20일, 송준길이 지평의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하여 김상헌을 시켜 원손을 교육하게 하고 의원 이형익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한마디 비답도 내리지 않고 그를 체직해버렸다. 5월 6일과 5월 27일에는 안시현(安時賢)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책봉할 것을 청했으나, 5월 6일 상소에 대해서는 "이 같은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라고 크게 성을 내면서 물리쳤고, 5월 27일의 상소도 읽씹을 해버렸다. 윤 6월 2일, 인조는 기습적으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자신이 늙고 병들어 미약한 원손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겠다고 선포하면서 대군들 중 한 사람으로 새로 세자를 세우겠다고 선포해 버린다. 놀란 김류가 신하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발을 빼자 좌의정 겸 약방도제조 홍서봉이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太子)가 없으면 태손(太孫)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라고 반대했고, 심열도 "홍서봉의 말이 신의 뜻과 정히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때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량이 있었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동조했다. 이경여 역시 홍서봉과 심열에게 동조하면서 "대체로 떳떳한 법을 지키면 비록 어려운 시기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갑자기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서 흔히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원손에게 기대를 건 지 이미 오래인데, 만일 이 말을 듣는다면 중외의 인심이 반드시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반대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고 하였고, 인조는 김류에게 영의정인 당신이 결단하라고 그를 압박하였다. 김류가 "신이 비록 수상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어찌 감히 혼자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종사의 존망이 이 일에서 결판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뭇 신하들 가운데 진실로 감히 다르게 의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이 존망에 관계된다고 반드시 볼 수 없는데도 비상한 도리를 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발을 빼려 하자 인조는 태종조 때는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폐하라고 청했는데 니들은 뭐하냐면서 압박하였다. 그리고 덕종이 죽은 후 월산대군이 아니라 예종이 승계한 전례, 예종이 죽은 후 제안대군이 아니라 잘산군이 승계한 전례를 들면서 나이가 찬 임금이 있어야 종사를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우찬성 이덕형과 이시백은 홍서봉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계속 반대했고, 이경석과 이식, 김육, 정태화, 이목, 여이징도 모두 반대했다. 이에 성이 난 인조는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은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버럭 화를 내어서 좌중이 갑분싸 분위기에 빠졌다.
이쯤되자 김자점이 적극적으로 영합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섰고 분위기를 읽은 김류도 슬금슬금 동조하여 "만일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은 원손이 어려서 아직 덕망을 잃은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늘의 하교가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 의혹하고 뭇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은 것입니다."이라고 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인조가 원손의 사부인 김육을 지목해서 원손이 현명한지 불초한 지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아마도 김육에게 알아서 원손 좀 욕해보라는 의도였겠지만 김육은 꿋꿋하게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원손이 띨띨해서 안된다고 욕을 하기 시작했고, 예조판서 이식이 "진강(進講)할 때에 원손의 재기(才氣)가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이경석도 "신도 강서(講書)의 반열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나,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두둔했다. 그러나 답정너 인조는 "한갓 그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또한 말한 것이다."31라고 선포하더니 이덕형 등이 계속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김류와 김자점을 시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남은 아들 둘이 모두 용렬하지만 그중에서 장자를 삼겠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선포하였다. 6월 4일, 봉림대군은 세자 책봉을 사양하는 소를 올리며, 짐짓 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인조는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국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맏형이 죽으면 그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兄亡弟及’는 예를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마치 너의 자식처럼 보살피거라."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친다. 이후 봉림대군을 세자로 한다고 했지 기존의 원손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 없어 조정에서는 경선군을 계속 원손으로 불렀는데 인조는 한동안은 이를 방관하다가 저주 사건이 터진 8월에 비망기를 내려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니, 각사의 해당 관리들을 추고하여 치죄하라."라고 원손의 운명을 관짝에 넣어버린다. 이후 원손은 제손(諸孫)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렇게 효종과 현종의 승계 라인을 자기 독단으로 결정지은 인조는, 그 다음엔 며느리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림으로써, 소현세자 적자들의 정통성을 없애는 그의 기준에선 깔끔하고도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고, 봉림대군 세자 책봉 후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날을 빼 들었다. 다만 인조는 이 와중에도 명분과 형식을 꽤나 중시하는 양반이라, 사실상 윗사람에게 찍힌 거 외엔 전혀 잘못한 게 없는 강빈을 죽어 마땅한 악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애하던 후궁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원손 이석철의 유모를 포함한 궁인 두 사람을 고문하다 죽였다. 또한, 여전히 사용되던 원손의 이름도 모든 공문서에서 삭제했다. 이때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임신 중이었는데, 궁인들이 죽어나간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인조가 머무는 창경궁 양화당 앞으로 달려나가 '제발 헤아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인조는 불쾌해하기만 했으며, 같은 달 강빈의 남자 형제들, 문성(文星)·문명(文明)·문두(文斗)·문벽(文璧)을 각각 제주(濟州)·진도(珍島)·흡곡(歙谷)·평해(平海)로 귀양 보냈다.
다만 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 1월 자신의 수라에 올라온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강빈의 궁녀들을 무고했다. 그냥 무고한 정도가 아니라 세자빈의 지시로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말을 실토할 때까지 고문했다. 하지만 이 과정도 인조 마음대로 순순히 풀리지는 않은 게, 세자빈을 모시던 십 수 명의 궁인들은 고문을 당하다 잔혹하게 죽는 한이 있어도, 강빈을 배반하는 허위 실토는 하지 않았다. 이 무렵,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유산하고 멘탈이 나가있던 상태였다. 설사 멘탈이 정상이었다고 해도 불가능한데 이때 강빈은 인조의 명령으로 유폐되어 있었다. 어거지를 써서 강빈이 궁인을 시켜 독살시도를 할 수 있었지 않나 싶어도 진짜 왕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면 의금부나 형조를 시켜 수사를 하도록 지시하는데 인조는 내시들을 동원했고 또한 어찌되었던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다면 그걸 중간에서 걸러내지 못한 왕의 궁녀들의 잘못임에도 정작 그들은 쏙 빼놓고 고문하지 않았다.
실록에 보면, 인조가 강빈을 죽이기 약 1달 전인 1646년 2월, 김자점과 함께 강빈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 "청나라에서 올 때 비단과 금을 잔뜩 실어왔으니, 그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뭔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인조가 말한다. 그러자 김자점은 "세자가 사냥을 나가거나 하면 사관 보고서를 멋대로 고쳐썼다는데 아녀자가 되어서 바깥일에 이렇게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맞장구쳤으며, 긴 대화 끝에 "강빈과 소현세자의 아들 셋도 그대로 뒀단 화근에 된다"고 언급한다.
결국 강빈은 '성정이 포악해 국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저주한 것도 모자라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타려 했다'는 죄목으로 폐서인 되었다. 폐서인이 된 강빈은 궁에 들어올 때 탔던 꽃가마 대신 검은 휘장이 둘러쳐진 가마를 타고 사가로 쫓겨났으며 바로 그날 사약을 받았다. 유배를 갔던 강빈의 남자 형제들도 강빈이 사사된 후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심지어 강빈의 친정어머니까지 누명을 쓰고 사형당했다.
강빈이 죽은 후에도 인조는 계속해서 며느리에게 누명을 씌웠다.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들어올 창경궁 저승전에 강빈이 흉물을 묻어 봉림대군을 저주했다고 단정했는데, 문제는 당시 강빈이 그 저승전에 거주 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관조차 자기가 자기 거처에 흉물을 묻으면 그 저주가 어디로 가겠냐고, 인조의 주장이 어이없다는 의견을 남겼다. 하지만 그러거나말거나, 인조는 저승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며, 묻혀있는 흉물들을 많이 찾아올수록 포상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의 당초 계획대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경선군, 경완군, 경안군)도 죄인의 아들이 되었으며, 장남 이석철은 열 살, 차남 이석린은 여섯 살, 삼남 이석견은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제주도엔 장독이라는 돌림병이 창궐하고 있었는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이 병에 걸려, 각각 열세 살과 아홉 살에 연이어 병사한다. 유배될 당시 만 두 돌이었던 막내 석견만 혼자 살아남았으며 효종 사후 간신히 '경안군'으로 봉군되고 왕족 신분을 다시 회복했지만, 경안군 역시 오랜 유배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와 스트레스 때문에 병상생활을 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나마 경안군은 혼인을 해서 죽기 전 당시 세 살이었던 장남과 한 살이었던 차남을 낳아둔 덕분에, 소현세자의 혈손들은 절멸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효종의 혈손들보다 번창하게 되었다. 나중에 가면 효종의 가계는 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음에도 소현세자의 가계는 조선 멸망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현재에도 많은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소현세자가 죽고 강빈이 숙청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청나라의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것이 청나라의 공식적 요청이며, 친청파 조선 왕을 육성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소현세자 가계를 통해 조선 왕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요청이 청나라의 공식 요청이 아닌 용골대의 개인적인 요청이며, 소현세자가 적대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간 서로를 존경하고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과 동정심에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다는 소회를 밝혔다는 시각도 있다. 용골대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인조는 셋 중 둘은 이미 죽었다는 거짓말로 변명해 둘러댔다. 인조의 거짓말은 곧 진실이 되어, 석철과 석린은 유배지에서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
효종 역시 아버지 인조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형수인 강빈을 '역강'「逆姜」(반역자 강씨라는 뜻)으로 비하했다. 또한 조금이라도 강빈을 비호하거나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잡아 고문해 죽이는 등, 매우 철저하게 강빈을 모독하고 배척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죽기 직전까지 형 소현세자의 아들과 딸들을 왕족으로 신원회복 시켜주지 않았다.
이래저래 소현세자는 심지어 대한제국 때에도 추존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하였다.
선조,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낳지 못했고 생모 공빈 김씨가 일찍 죽어 의인왕후가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 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하고 악랄한 데다, 무고한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다니는 등 양녕대군마저 울고 갈 정도로 조선 왕조 역사상 최악의 악인이자 희대의 쓰레기였기에 대신들과 대중의 외면과 미움을 받았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이전에 눈여겨 본 인빈 김씨 소생의 이복동생 의안군과 신성군은 모두 전란 이전이나 도중에 일찍 죽어서 경쟁상대가 사라졌다.
여기에 건저(建儲)에 관한 조정의 여론은 서인과 동인 할 거 없이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해군이 우위적으로 대세였고, 임진왜란 시기 분조(分朝) 활동을 거치며 권위가 아버지 선조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서 30살 넘게 차이나는 영창대군을 데리고 의도가 명백한 질투섞인 견제를 매번 받아야 했다. 단, 선조의 정치적 견제는 광해군의 평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상으로 따져봐도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위치였다. 선조의 이런 행보 때문에 광해군 본인이 심리상으로 불안한 마음을 받았을 수는 있을지언정, 정치권력적으로 광해군은 매우 견고한 위치였다. 영창대군은 광해군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 선조가 떨어진 권위로 어떻게든 왕노릇 계속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투쟁 수단이라고 봐야한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조는 깊숙한 실제 속내로는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수 있을지언정 실제 세자를 바꾸려고 하진 않았고, 애초에 바꿀 힘도 없었다. 오히려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야사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가 여러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4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이 이르기를,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생모가 일찍 죽은 것을 가장 아쉽게 여깁니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선조가 갖가지 선물을 준비해 왕자들에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자 다른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들을 가져갔는데, 광해군만 선비가 들고 다니는 붓과 먹을 가져가서 아버지 선조가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자 시절
임진왜란 당시에는 위대한 전쟁 영웅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도성이 위협받자 선조는 파천을 앞둔 1592년(선조 25년) 6월 8일에 광해군을 긴급히 왕세자로 임시 책봉하였으며 이로써 광해군은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세자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은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지휘를 맡기도 한다. 그러나 평양부가 왜군에 의해 점령되자 안주목으로 후퇴한 후, 영변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영변에서 다시 만나게 된 아버지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하여 맡긴게 아니라 조선 조정의 모든 실권을 책임 떠넘기듯 모두 넘겼다. 평안북도 영변대도호부에서 선조가 세자에게 조정을 맡긴다고 했는데 그 조정을 맡긴다는 것이 분조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너에게 다 주고 난 뒤에 요동으로 튀어가겠어!" 수준이었다. 심지어 선조는 아예 아들 광해군에게 양위까지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대소 신료들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튈 생각만 하던 그 순간 18살의 광해군은 조정을 이끌고 곧바로 왜군이 포진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원래 평안북도 강계군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것도 강원도 이천군이라는 그 당시 전국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걸리면 무조건 죽거나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위험한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청년 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훗날 왕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는 별개로 조선 왕조 역사상 외적과의 전면전에 세자가 직접 뛰어들어 전쟁터를 누빈 유일한 사례7로서 뭇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왕의 재목으로도 모두 인정하던 시기였다.
선조는 국외로 망명할 생각으로 도주하려 하고 순왜들이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 광해군은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책임있게 매우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로서 그의 활약에 따른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들은 매우 컸었다. 그 때 광해군의 나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해낸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괜히 신하들과 명나라가 선조를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게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계속되면서 그 와중에 광해군이 엄청난 활약을 하고 명나라가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큰 질투심에 사로잡혀 점점 더 아들 광해군에 대한 의심이 짙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이 더 많아진 선조는 큰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광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다. 다만, 견제하는 이상의 일은 벌이지 않았다. 애초에 대안으로 내세울 패가 아예 없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개념이 너무 없었고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도 한참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년) 광해군의 가장 큰 지원군이었던 의인왕후가 죽고, 선조는 김제남의 차녀를 새로이 계비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당시 선조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 김제남은 41세, 명목상 인목왕후의 아들이 되는 광해군은 9살 많은 28세였다. 어린 인목왕후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곧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그를 우대하였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데(당시 만 1세)다가 광해군(당시 만 30세 이상)이 공이 크고 흠이 없었기 때문에 전례를 고려하면 별 문제가 아닌 명나라의 책봉 문제15를 끌어내 견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류영경의 탁소북은 그런 선조에게 부화뇌동하여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 했으나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고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세자라서 기반이 정말로 불안하지는 않았다.16 다만 궁궐 내에서는 왕이 10년만 더 살면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는지 중궁전 나인들이 동궁전 나인들을 핍박했다고도 하는 등, 여러모로 광해군이 하루하루 가시방석에 앉는 것처럼 더욱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며17 실제로 광해군은 이후 왕이 되자 그간의 일을 들어 소성대비를 핍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선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세자 교체는 당시 성리학적 질서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분조의 활약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정비 의인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자로 책봉된 이상 16세기부터 확립된 판례상 적자가 태어나더라도 먼저 입적된 양자의 파양은 불허하는 것이 당시의 통설이었으며 세자가 됨으로서 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와의 군신 관계가 성립되는데 영창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신하의 지위로 자동적으로 확정되는 것이었고 한 번 세워진 군신 명분은 바꿀 수 없다는게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대의명분론에 근거한 성리학적 질서였기 때문이다.
국왕 시절
즉위 시절의 불안정
선조는 병상에 누워서까지 후계에 대한 확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승하가 임박해서야 "세자를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류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왕위 계승을 교란시켰다. 이에 계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하고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선조의 광해군 견제에 이용된 영창대군 문제는 광해군의 의심병과 얽혀 옥사와 정파간 균형파괴로 이어져버렸다. 기자헌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세력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증폭시키기 시작한다.
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한 임해군 옥사와 봉산옥사, 계축옥사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대부분 과장, 허위성 고변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게 봉산옥사. 광해군 역시 이를 알면서도 왕권 강화 및 확립을 위해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은 조정과 재야, 당파를 막론하고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부왕 선조가 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똑같이 겪었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이를 가차없이 제압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기자헌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에게 권력이 쏠리게 된다.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제법 건강한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그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도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 만했던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바로 허준이었다는 것이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높이 평가된다. 게다가 이 음모론 자체도 인조반정 당시 소성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포함시키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다. 말 그대로 "찹쌀 떡밥".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지나지 않는다.
선조는 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광해군이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게 된 이면에는 우선 선조와 조선의 조정이 그를 왕으로서 적합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선조는 마지막까지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까?
광해군은 선조의 적자가 아니었다
선조 본인도 방계 출신으로 왕위 계승에 많은 어려움 겪어
선조는 조선 왕조 최초의 방계 출신의 왕이었다. 즉, 선대 왕인 명종의 아들이 아닌, 명종의 형제 덕흥대원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덕흥대원군은 중종(명종의 아버지)이 후궁인 창빈 안씨를 통해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명종이 34세의 어린 나이에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선조가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다. 선조 본인이 방계 출신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탓인지 그는 적자 승계에 대한 고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폐가입진. 서자 광해군을 버리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했던 선조. 출처: MBC 화정 화면캡처
폐가입진. 서자 광해군을 버리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했던 선조. 출처: MBC 화정 화면캡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선조는 왕비를 통한 후사를 얻지 못했다. 후궁인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를 통해 낳은 아들인 임해군, 광해군, 신성군 등 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조가 보기에 세자로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조를 통해 국난을 극복해야 했으므로 마지못해 공빈 김씨를 통해 낳은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게 되었다. 첫째인 임해군은 난폭하고 왕으로써의 자질이 부족하였다.
백성의 신임을 얻은 광해군을 시기하다
광해군, 전란을 통해 백성의 신임 얻어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세자로서의 지위가 굳건해지는 듯 했다. 전쟁 발발 후 도망가듯 한양을 버리고 파천한 선조와 대비되게 광해군은 전쟁터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백성들은 광해군을 왕처럼 모시기에 이르렀고 이는 선조의 시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을 세자가 아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다.
정실인 인목왕후를 통해 영창대군이 탄생하다
명나라도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아
전란 후에 선조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고, 드디어 적자인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얻게 된다. 당시 명나라에서도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 이유를 들어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선조는 어린 영창대군을 세자 삼고 싶어한다. 선조가 나이가 많아 갑작스레 승하하게 되면서 결국 왕위는 광해군이 승계하게 되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은 그의 왕위를 지키는데 있어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광해군이 이복형제들을 죽이지 않고 조정을 안정적으로 이끌려고 했던 것은 헛된 꿈이었을지 모른다. 드라마 '화정'에서의 이들의 비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선조, 아들 광해군과 대립하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1552~1608~1567~1608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천을 떠나기 전 둘째 아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을 세자로 세웠다. 첫째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이 모두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광해군은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을 뽐내었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백성들을 위무하는 분조分朝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7년 간의 전쟁이 끝난 뒤, 광해군에게는 뜻밖의 상황이 닥쳐왔다.
그 이유는 선조 자신의 위태로운 권력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선조는 전쟁 초기의 안일한 대응과 제 목숨만 사리려 한 태도 때문에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큰 지탄을 받고 있었는데, 자신과 대응되는 세자 광해군이 분조 활동으로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자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임진왜란 후반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 김덕령 역모 사건 등의 반란으로 인해 선조의 입지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경계하고 불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의 입장을 더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터졌다.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맞아들인, 19살로 선조와 무려 32살 차이가 나는 둘째 왕비 인목왕후1584~1632가 1606년 아들 영창대군1606~1614을 낳은 것이다.
선조의 첫 적자정실 왕비에게서 얻은 자식였기에 선조는 영창대군을 매우 아꼈고, 그와 반비례하여 세자는 서자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출신이었기에 이전보다 더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선조와 세자의 불화는 정치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임진왜란 전후 조정에서의 당쟁붕당끼리의 다툼은 다른 국면을 맞았다. 전쟁 책임을 물어 한때 서인의 세력이 커졌지만 이내 동인, 그 중에서도 북인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서인에 이어 같은 식구였던 남인까지 조정에서 몰아낸 것이다. (이때 《징비록》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남인의 영수 유성룡도 유배 보내졌다)
하지만 안 그래도 세력이 광범위해 자신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북인은 이내 선조와 광해군의 갈등에 겹쳐 두 파로 쪼개졌다.
대북大北은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1535~1623, 세조 어진을 구해 요직에 오른 이이첨 등이 포함된 당파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또 서인,남인 등 다른 당파들에게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소북小北은 유영경1550~1608, 남이공, 유희분 등 현실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포함된 당파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또 서인,남인 등 다른 당파들에게 비교적 온건한 주장을 펼쳤다.
선조는 당시 영창대군 쪽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소북과 유영경이 조정에 득세했다. 선조와 이해관계가 일치한 소북은 최종적으로 광해군의 폐세자와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꿈꾸었는데, 그들 입장에서 안타깝게도 선조가 1608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토록 아들을 미워했던 선조였지만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어쨌든 왕위에 올라야 할 광해군에게 정통성을 세워주기 위해 죽기 직전 세자 광해군을 (당연하지만)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하지만 이것이 전달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던 유영경은 이 교지를 전달하지 않고 숨겼는데,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는 상황을 눈치채고 서둘러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이로써 광해군은 고생 끝에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암군이자 명군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신하들을 견제하는 일에는 천재적이었지만, 전쟁 상황에서 보여준 지도력은 암군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참혹했다.
누구를 전적으로 의심하지도 못해서 이이, 정철, 유성룡, 유영경 등 많은 이들에게 갈아타며 권력을 주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수많은 장군과 백성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의 피난길을 따라 온 신하들의 공이 가장 크다는 이상한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했다.
아들 광해군이 그 특유의 의심병을 갖고 여러 실책들을 저지르게 만든 1차 원인 제공자이니 비판받을 이유는 더욱 명확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