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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잘리어 왕조 시대, 카노사의 굴욕

Jobs9 2021. 5. 19.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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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2세 시대

 

콘라트 2세는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딸인 리우르가르트와 결혼한 로렌 공작 콘라트 적공(Konrad der Rote)의 증손이었지만 아버지인 하인리히가 할아버지 케른텐 공작 오토의 공작 지위를 동생 콘라트에게 빼앗기고 슈파이어 백작에 머물렀고 설상가상으로 콘라트 2세가 2살에 불과한 AD 992년 요절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콘라트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아델하이트도 재혼하였기 때문에 누나 유디트와 함께 삼촌인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에게 양육이 맡겨졌고 보름스 주교 부트하르트의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이에 따라 비록 콘라트 2세는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지니고 있고 신앙심이 깊으며 상냥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콘라트 2세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AD 1016년 26살이 되었을 때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의 딸로서 슈바벤 공작령과 부르군트 왕국령에 대한 상속권을 보유하고 있던 기젤라와 결혼하였다. 이미 기젤라는 AD 1010년 첫번째 남편인 브룬스빅 백작 브룬 1세와 사별한 데 이어 AD 1015년 두번째 남편인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1세와도 사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 2세는 기벨라의 3번째 남편이 되는 길을 선택했고 그 덕분에 기벨라의 광대한 영지를 기반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젤라의 아버지인 헤르만 2세는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아들인 리우돌프의 외손자였고 콘라트 2세는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의 증손자였으므로 둘 사이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고 교회 법학자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콘라트 2세는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로부터 국외로 잠시 추방당해야 했다.

 

 

잘리어 왕조의 성립과 왕권 강화

 

AD 1024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하면서 작센 왕조가 단절되자 독일의 제후들이 왕위계승자를 선출하기 위해 라인 강 연안의 캄바에서 모였다. 콘라트 2세도 오토 1세의 외증손자라는 혈통을 내세워 후보로 참여하였고 독일 제후들의 열띤 토론 끝에 콘라트 2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AD 1024년 9월 8일 마인츠 대주교 집전으로 독일 왕의 대관식을 치뤘고 공식적으로는 '프랑크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듬해 6월 콘스탄츠 2세의 궁정에서 이탈리아 주교들도 봉신의 예를 갖췄지만 이탈리아 귀족들은 독일 왕의 지배를 거부하고 아키텐의 기욤을 대립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고 이에 콘라트 2세가 AD 1026년 북이탈리아로 넘어가서 밀라노 대주교로부터 이탈리아 왕을 상징하는 롬바르디아 철왕관을 받은 데 이어 AD 1027년에는 로마교황 요한네스 19세로부터 황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어렵사리 즉위한 콘라트 2세는 후계 구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를 일찍감치 후계자로 내정하여 AD 1026년 단절된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AD 1028년에는 독일의 공동왕으로 선출시킨 후 AD 1036년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잉글랜드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룬 크누트 2세의 딸 쿠니군데와 하인리히 3세를 결혼시켰다. 다만 결혼 직전 크누트 2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정치적 실익은 없었다. 또한 콘라트 2세의 황후 기젤라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슈바벤 공작 헤르만 4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하인리히 3세에게 슈바벤 공작도 겸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콘라트 2세의 사촌인 동명의 케른텐 공작 콘라트 2세가 AD 1039년 사망하면서 하인리히 3세가 케른텐 공작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인리히 3세가 독일의 5개 거대 공작령 중 3개를 차지하면서 잘리어 왕조는 다른 귀족 세력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강력한 통치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대외정책

 

콘라트 2세는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폴란드에 대한 원정도 시작했다.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와 오랜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형식적인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나 AD 1024년에 하인리히 2세가 죽자 그니에즈노 대주교의 집전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고 AD 1025년 볼레스와프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미에슈코 2세가 왕위를 이어받은 즉위한 상태였다. 이에 콘라트 2세는 AD 1028년 폴란드 침공을 단행하여 3년 간의 전쟁 끝에 볼레스와프 1세가 차지했던 독일 영토를 되찾고 미에슈코 2세가 왕위를 포기한 채 공작의 지위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폴란드와 달리 헝가리에 대한 대외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처음에 콘라트 2세는 마자르족이 세운 헝가리의 초대 왕인 이슈트반 1세와 원만한 관계를 맺었지만 이후 헝가리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AD 1026년 이슈트반 1세의 처남인 오토 오르세올로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자리에서 추방시켰고 AD 1027년에는 이슈트반 1세의 아들이 모계 혈통으로 바이에른 공작 상속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여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AD 1030년에는 콘라트 2세가 전격적으로 헝가리를 침공하였지만 이슈트반 1세의 초토화 전술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콘라트 2세는 헝가리 영토를 점령하기는 커녕 이슈트반 1세와 강화조약을 맺고 독일 영토 일부를 내준 채 물러나야만 했다.

 

동유럽과 달리 서유럽에서는 콘라트 2세가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일찍이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백작령을 하나로 합친 통합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이라고도 함)의 루돌프 3세가 장차 자신의 왕위를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하인리히 2세가 먼저 사망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콘라트 2세가 하인리히 2세의 뒤를 이은 이후 루돌프 3세로부터 부르군트 왕위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고 AD 1032년 루돌프 3세의 임종시 많은 부르군트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르군트 왕위를 넘겨 받았다. 그리고 AD 1034년 8월 취리히에서 부르군트 귀족들이 콘라트 2세에게 공식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면서 콘라트 2세는 공식적으로 부르군트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콘라트 2세는 독일, 이탈리아, 부르군트의 3개국 왕위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하인리히 3세 시대

 

즉위

 

AD 1039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가 모든 지위를 상속받았다. 즉위할 당시 하인리히 3세의 지위는 매우 탄탄했다. 이미 아버지 콘라트 2세가 죽기 전에 독일, 이탈리아, 부르군트의 공동왕으로 임명받았고 독일의 5개 공작령 중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의 공작위도 차지하고 있었으며 프랑켄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통치권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모후인 기젤라 덕분에 수많은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경건한 신앙심도 가지고 있어 즉위 과정에서 아무런 잡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대의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왕권을 지니게 된 하인리히 3세는 콘라트 2세가 사용한 '프랑크인의 왕' 대신에 '로마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유럽에 대한 종주권 구축

 

하인리히 3세가 즉위한 당시 폴란드는 미에슈코 2세가 AD 1034년 죽은 이후 지주에 대한 민중의 반란과 이교도의 반(反) 그리스도교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1세에게 소(小) 폴란드와 대(大) 폴란드 지역을 침략당하며 큰 혼란에 휩싸였다. 급기야는 미에슈코 2세의 아들인 카지미에슈 1세가 왕위를 잃고 헝가리로 망명하였고 다시 하인리히 3세에게 봉신이 되는 대가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3세가 군사와 자금을 지원하였고 카지미에슈 1세가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여동생 도브로네가와 결혼하여 키예프 루시의 도움까지 받아내면서 폴란드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카지미에슈 1세는 재위기간 내내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의 예를 갖춰야 했다.

 

폴란드가 해결되자 다음으로 하인리히 3세가 관심을 가진 곳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였다. 당시 보헤미아 공작 브제티슬라프 1세와 헝가리 왕 된 페테르 1세가 서로 동맹을 맺고 국경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군사행동이 필요로 한 상태였다. 이에 AD 1040년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에 대한 첫번째 원정을 떠났지만 보헤미아 숲을 지나는 브루덱에서 보헤미아와 헝가리 연합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절치부심한 하인리히 3세는 AD 1041년 보헤미아를 2번째로 침공하였고 이번에는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고 프라하 내부에서 귀족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주교들이 배신했기 때문에 브제티슬라프 1세는 어쩔 수 없이 레겐스부르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브제티슬라프 1세는 그 전에 빼앗았던 영토 중 본래 보헤미아 영토였던 실롱스크(슐레지엔)를 제외하고 나머지 폴란드 영토 모두를 되돌려 줘야만 했고 AD 1050년에는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실롱스크마저 폴란드의 카지미에슈 1세에게 돌려주게 된다. 

 

한편 AD 1040년말에 헝가리에서 정변이 일어나 사무엘 아바가 페테르 1세를 몰아내고 헝가리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페테르 1세는 하인리히 3세를 찾아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에 당장 은 군사 행동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하인리히 3세가 AD 1041년 크리스마스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보내고 있을 때 헝가리의 사무엘 아바가 바이에른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여 헝가리군을 막아내도록 하였고 이듬해인 AD 1042년에는 헝가리에 대한 침공을 단행하였다. 사무엘 아바는 패퇴하여 동쪽 숲으로 도망쳤고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 1세를 헝가리 왕으로 복위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일단 독일로 되돌아 왔다. 

 

AD 1044년 다시 한번 헝가리 원정을 감행하여 헝가리군을 물리치고 사무엘 아바를 살해한 후 헝가리 수도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하여 페테르 1세를 복위시켰다. 그리고 콘라트 2세가 헝가리에 양도했던 도나우강 동부지역을 모조리 되찾았고 페테르 1세로부터 헝가리 주권을 상징하는 황금창을 받은 뒤 되돌려 주는 형식으로 헝가리를 공식적인 봉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타국의 힘으로 복위한 페테르 1세는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주교들의 지지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왕위는 불안했고 AD 1046년 바타가 이끄는 이교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위기에 빠졌다. 페테르 1세는 다시 독일로 도망치려 했지만 한 때 왕위를 노렸다가 추방당했던 이슈트반 1세의 사촌 동생 바출의 아들인 언드라시 1세가 주교들의 도움으로 헝가리에 되돌아와 페테르 1세를 붙잡아 살해하였다. 그리고 언드라시 1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고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봉신의 예를 갖춰 공물을 보냈지만 AD 1051년이 되면 이를 거부하고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로렌 문제

 

하인리히 3세는 첫번째 부인이었던 크누트 2세의 딸인 쿠니군데가 AD 1038년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AD 1043년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의 딸인 아그네스와 결혼하였다. 이는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AD 1044년 상(上) 로렌과 하(下) 로렌 공작 지위를 모두 가졌던 고젤로 1세가 사망하자 고젤로 1세의 첫째 아들 고드프루아 3세에게는 상(上) 로렌 공작령만 상속받게 하고 하(下) 로렌 공작령은 둘째 아들 고렐로 2세에게 상속시켰다. 이에 고드프루아 3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3세는 당면한 보헤미아 및 헝가리와의 전쟁 때문에 곧바로 진압하지 못했다. 그 사이 고드프루아 3세는 프랑스왕 앙리 1세와 동맹을 맺었고 AD 1045년 헝가리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하인리히 3세가 로렌을 공격하여 고드프루아 3세를 포위하였다. 이후 하인리히 3세는 고드프루아 3세에게 상(上) 로렌 공작령을 돌려주는 대신에 베르됭은 주교령으로 분리시켰고 하(下) 로렌은 룩셈부르크 백작 가문의 프리드리히에게 넘겨주면서 로렌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AD 1047년 상(上) 로렌의 고드프루아 3세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앙 5세, 홀란드 백작 디르크 4세, 에노 백작 헤르만과 동맹을 맺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하인리히 3세는 상(上) 로렌 공작령을 메츠 백작 제라드의 장남인 아달베르트에게 넘겨줘 고드프루아 3세를 상대하도록 하였고 아달베르트가 AD 1048년 전사하자 그의 동생인 게르하르트를 다시 상(上) 로렌 공작으로 임명하여 고드프루아 3세와 맞서도록 하였다. 홀란드 백작 디르크 4세는 위트레흐트 주교구와 리에주 주교구를 공격하였지만 AD 1049년 1월 매복공격에 당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는 북쪽에서 유입된 노르만족의 침입을 막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고 새로 즉위한 로마교황 레오 9세가 고드프루아 3세와 보두앵 5세를 파문하면서 고드프루아 3세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고드프루아 3세는 이번에도 용서를 받았고 AD 1054년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키우스 3세의 미망인인 베아트리체와 재혼하고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하여 플랑드르로 떠나게 된다.

 

 

로마교황 선출 개입

 

3교황의 대립

 

AD 1046년이 되자 하인리히 3세는 비로소 그동안 미뤄두었던 황제 대관식에 관심을 보일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가 방문할 당시 로마는 AD 1032년 로마교황 요한네스 19세가 선종한 이후 3명의 교황(베네딕투스 9세, 실베스테르 3세, 그레고리우스 6세)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처음에 투스쿨룸 백작인 알베리크의 아들이며 전임 교황 베네딕투스 8세와 요한네스 19세의 조카인 베네딕투스 9세가 차기 로마교황이 되었지만 방탕한 생활 태도와 반대파에 대한 무분별한 파문 때문에 AD 1044년 9월 로마 시민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사비나의 주교였던 크레센티 가문의 조반니가 실베스테르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교황이 되었지만 이듬해 4월에 베네딕투스 9세가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오면서 실베스테르 3세는 로마에서 추방당해 본래 자신의 주교구였던 사비나로 돌아갔다. 그러나 베네딕투스 9세는 가문의 등쌀에 밀려 로마교황이 되었을 뿐 교황 자리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요한네스 그라시아누스에게 거액을 받는 대가로 교황직을 팔아버렸다.

 

비록 요한네스 그라시아누스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로 즉위했지만 베네딕투스 9세가 다시 교황직을 돌려받기를 요구했고 사비아로 물러났던 실베스테르 3세까지 자신만이 합법적인 로마교황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6세가 하인리히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하인리히 3세는 AD 1046년 12월 수트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수트리 공의회는 교황직에 대한 3명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교황직을 강탈한 혐의로 베네딕투스 9세와 실베스테르 3세가 모두 폐위시키기로 결정되었고 그레고리우스 3세도 성직매매 혐의로 교황직을 사임할 것을 권고받고 이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교황직이 공석이 되자 하인리히 3세를 수행하여 수트리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밤베르크 주교인 수이드거가 하인리히 3세의 추천에 의해 로마교황 클레멘스 2세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 3세와 함께 로마로 향하여 하인리히 3세에게 황제 대관식을 치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위된 베네딕투스 9세는 수긍하지 않고 AD 1047년 10월 클레멘스 2세가 갑자기 선종하자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키우스 3세의 후원을 받아 다시 로마를 장악하고 로마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하인리히 3세의 경고에 겁을 집어먹은 보니파키우스 3세가 베네딕투스 9세를 로마에서 축출하였고 베네딕투스 9세는 끝까지 폐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AD 1049년 파문까지 당해야 했다. 이제 다시 공석이 된 로마교황 자리를 두고 로마에서는 리옹 주교 알리나흐를 추천했으나 하인리히 3세의 결정에 따라 브릭슨 주교인 포포에게 돌아가 로마교황 다마수스 2세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가 재확인되었고 교황 선출에 황제(독일왕)가 간섭하는 관례가 유지되었지만 다마수스 2세가 불과 1달만에 선종하였다.

 

 

로마교황 레오 9세의 선출과 노르만족의 대두

 

이제 후임 교황으로 독일 귀족 출신인 브루노 주교가 유력해졌고 하인리히 3세도 브루노 주교를 로마교황으로 임명했지만 브루노 주교는 황제가 교황 선출과정에 간섭하는 관례에 대해 저항하고 나섰다. 오로지 교회법에 따라 로마 시민과 성직자들에 의한 선거를 고집하였고 AD 1049년 2월 12일 정식 선거가 치뤄진 후에야 로마교황 자리에 올라 레오 9세가 되었다. 이후 로마교황 레오 9세는 황제권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청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그 중에서 로마교황 레오 9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남이탈리아에 출몰하기 시작한 노르만족이었다. 먼저 노르만족을 격퇴하기 위해 하인리히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하인리히 3세의 지원이 지지부진하자 동로마 제국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대립하면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로마교황 레오 9세가 이탈리아와 프랑켄 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직접 이끌고 노르만족에게 대항하고자 했지만 AD 1053년 6월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포로가 된 로마교황 레오 9세는 AD 1054년 3월 노르만족의 수장인 로베르 기스카르를 남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와 풀리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겨우 풀려났으나 로마로 귀환한 지 1달 만에 선종하고 말았다. 한편 그 사이 사절단으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던 추기경 훔베르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대립하였고 로마교황직이 공석인 틈을 타고 서로 파문을 주고 받게 되면서 AD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고 만다.

 

 

후계 구도 안정화 노력

 

공작령 배분

 

하인리히 3세는 AD 1042년 바이에른 공작으로 룩셈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7세를 임명하였지만 이는 헝가리의 공격을 막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을 뿐이었고 하인리히 7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작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자신의 개인 공작령을 직접 통치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분배하여 통치를 위임하기 시작하였다. AD 1045년에 슈바벤 공작으로 로렌 팔츠백인 오토 2세를 임명하였고 AD 1047년 마지막 케른텐 공작으로 알트도르프 백작 벨프 3세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AD 1047년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7세와 슈바벤 공작 오토 2세가 나란히 죽고 공작위가 하인리히 3세에게 되돌아 오자 AD 1048년 노르트가우 변경백이었던 오토 3세를 슈바벤 공작에 임명하고 AD 1049년에는 주트펜 백작 쿠노를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바이에른의 쿠노의 반란 진압

 

하인리히 3세로서는 나름대로 충성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개인 영지를 넘긴 것이었으나 하인리히 3세가 AD 1045년부터 중병을 앓기 시작했고 AD 1049년까지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바이에른 공작이 된 쿠노가 차기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3세 스스로도 아들을 얻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AD 1050년 그렇게도 고대하던 아들 하인리히 4세가 태어났다. 하인리히 3세는 매우 기뻤지만 앞으로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죽기 전 후계구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AD 1050년 크리스마스에 독일 제후들에게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도록 만들었고 AD 1053년에는 하인리히 4세를 로마왕(실제로는 독일왕)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바이에른 공작 쿠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사라졌고 이에 하인리히 3세 사후에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하고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인리히 3세는 AD 1053년 바이에른 공작 쿠노를 해임하고 대신하여 어린 하인리히 4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쿠노가 케른텐 공작 벨프 3세 및 헝가리 왕 언드라시 1세와 동맹을 맺고 하인리히 3세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벨프 3세가 사전에 누설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쿠노는 AD 1055년 전염병으로 사망하였고 얼마 뒤 벨프 3세도 사망했기 때문에 반란의 싹이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후계자 문제를 마무리지은 하인리히 3세는 AD 1056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4세 시대

 

섭정 시절의 혼란

 

모후 아그네스의 실정

 

비록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에 단독 왕이 되었으나 이미 하인리히 3세가 왕위 계승을 확실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즉위 과정에서 아무런 반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AD 1054년 쾰린 대주교에 의해 로마왕으로서 정식 대관식도 치른 상태였고 섭정이 될 황후 아그네스를 보좌하기 위해 AD 1055년 로마교황 빅토리우스 2세가 조언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의 사전 준비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황 빅토리우스 2세가 AD 1057년 사망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아그네스에게 맡겨지고 말았다. 섭정이 된 아그네스는 하인리히 4세의 중요한 왕권 기반인 공작령을 다른 귀족에게 넘겨버렸는데 바이에른 공작은 노르트하임 백작 오토가 되었고 슈바벤 공작은 아그네스의 사위이자 라인펠덴 백작인 루돌프가 되었으며 케른텐 공작은 체링겐 백작 베르톨트가 되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훗날 하인리히 4세의 정적이 되어 버린다. 

 

 

로마교황청의 자율권 획득

 

한편 신성로마제국에서 아그네스의 실정이 계속되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도 점점 상실했다. 먼저 로마에서는 AD 1057년 후임 교황을 두고 로마의 성직자들은 신성로마황제의 승인을 따로 받지 않은 채 자체적으로 로마교황 스테파누스 9세를 선출하였다. 이는 AD 817년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1세의 선출 이후 세속적인 힘에 좌우되지 않고 로마 성직자에 의해서만 오로지 선출된 첫 사례였다. 비록 로마교황 스테파누스 9세의 재위 기간은 9개월에 불과했으나 그 사이 화해를 주선하여 하인리히 3세에게 계속해서 반기를 들었던 전 상(上)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3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로마교황 스테파누스 9세가 선종하자 이번에는 투스쿨룸 백작 가문이 베네딕투스 10세를 로마교황으로 내세웠지만 로마 성직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니콜라우스 2세를 로마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투스쿨룸 백작의 세력을 등에 업은 베네딕투스 10세를 몰아내기 위해 AD 1059년 8월 노르만족의 수장인 로베르 기스카르와 멜피 조약을 맺고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풀리아 공작으로 임명하며 신성로마황제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무력 기반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향후 스폴레토 공작 고드프루아는 베네딕투스 10세를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공을 세우면서 향후 AD 1065년 공석이 되는 하(下) 로렌 공작 지위와 본래 자신의 부인이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변경백 지위를 모두 계승하고 로마교황청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AD 1059년 교황 선거권을 가진 7명의 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이들만으로 교황 선거를 치르게 하는 칙서를 발표하여 로마교황 선출에 대한 황제권 간섭을 배제시켰다. 

 

 

섭정 지위를 둘러싼 혼란

 

AD 1061년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선종하자 최초로 추기경단 선거에 의하여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독일 주교들이 이에 반발하여 파르마의 주교 카달루스를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로 선출시켰다. 이 대립은 AD 1062년 쾰른 대주교인 안노가 하인리히 4세를 쾰른으로 납치하면서 무마되었다. 이제 퀼른 대주교 안노의 발언권이 매우 높아졌고 이에 안노는 실정을 거듭하던 아그네스가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수녀원으로 은거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안노 대주교가 섭정이 된 뒤 AD 1064년 마투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호노리우스 2세를 대립교황으로 단죄하고 알렉산데르 2세를 정통 교황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쾰른 대주교 안노가 섭정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독단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성격을 보유했고 하인리히 4세에게 납치라는 정신적인 큰 충격까지 줬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가 매우 불신했다. 대신하여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인 아델베르트가 하인리히 4세의 신임을 얻었고 결국 AD 1064년 안노가 쾰른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아델베르트의 주도로 안노가 섭정 지위에서 축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권력을 장악한 아델베르트도 사리사욕만 채우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샀기 때문에 AD 1066년 하인리히 4세에 의해 궁정출입을 금지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인리히 4세가 직접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하인리히 4세는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귀족들을 제어할 능력도 아직은 부족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 동안 커다란 위기를 연달아 겪게 된다. 

 

 

작센 반란 진압

 

친정에 나선 하인리히 4세가 겪은 첫번째 위기는 작센의 반란이었다. AD 1065년 하인리히 4세는 작센의 영지 중 하르츠 산 주변에 하르츠부르크 성을 건설하며 작센을 자극했다. 그리고 AD 1070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오토가 하인리히 4세 암살 계획을 세웠다는 누명을 쓰고 고발당했는데 이때 작센 공작 오르둘프의 아들인 마그누스가 연루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오토의 바이에른 공작위를 박탈하였고 마그누스는 하르츠부르크 성에 투옥되었으나 AD 1072년 오르둘프가 사망하자 겨우 풀려나 작센 공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에 마그누스는 하인리히 4세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AD 1073년 바이에른 공작에서 쫓겨난 노르트하임 백작 오토 및 할버슈타트 주교 부르카르트 2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는 하르츠부르크 성을 버리고 보름스로 달아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고 자신을 지원해주는 다른 제후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하르츠부르크 성을 허물고 반란군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다만 하인리히 4세는 하르츠부르크 성에는 죽은 아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강화 조건으로 이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였으나 작센 농민들이 성을 무너뜨리면서 무덤까지 훼손하였다. 이에 분노한 하인리히 4세가 강화조약을 파기하였고 작센 농민이 왕가의 무덤을 모욕한 것 때문에 여론도 반전되어 많은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의 편으로 돌아섰다. 하인리히 4세 측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 상(上) 로렌 공작 테오데리크 2세, 오스트리아 변경백 에르네스트, 밤베르크 주교 헤르만 등이 참여하였고 작센측은 노르트하임 백작 오토, 할버슈타트 주교 부르카르트 2세, 노르트마르크 변경백 로타르 우도 2세, 슈필부르크 백작 게브하르트가 가담하였다. 그러나 AD 1075년 6월 벌어진 랑엔잘차 전투에서 하인리히 4세가 대승을 거두면서 같은 해 10월 작센이 항복했다. 이에 따라 하인리히 4세의 권위가 매우 높아졌고 이를 바탕으로 하인리히 4세는 이제 1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 콘라트의 왕위계승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로마교황청과의 서임권 분쟁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대립

 

하인리히 4세가 작센 반란에 묶여 있는 사이에 로마에서는 개혁파 주교인 힐데브란트가 로마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로 즉위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전임 교황들이 선거권을 확보한 것에 이어 자신은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작센 왕조 이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령을 확대하면서 주교가 사실상 임명직 관료가 되었고 점점 성직자로서의 역할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명색이 성직자인 주교들의 임명권을 세속적인 황제가 계속 보유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AD 1075년 작센 반란을 평정하면서 여유가 생긴 하인리히 4세도 본격적으로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밀라노에서 평신도 개혁단체인 파타린파의 지도자 엘렘발드가 암살되어 반개혁당 세력이 우세해지자 이들을 공개적으로 지원하고 밀라노 대주교와 스폴레토 주교, 페르모 주교를 각각 임명했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독일 궁정의 하인리히 4세의 고문 5명을 파문하고 하인리히 4세도 파문할 수 있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우스 7세는 AD 1075년 크리스마스 미사 중 성 마리아 성당에서 로마 귀족 켄키우스에게 납치당했으나 로마 시민들이 합세하여 구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의 배후로 하인리히 4세가 의심되었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는 켄키우스를 용서하고 성 마리아 성당으로 돌아가 미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에게 편지를 보내 협상 가능성을 제시하였지만 오히려 하인리히 4세는 AD 1076년 1월 1일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언하였고 보름스에서 28명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카노사의 굴욕

 

이제 사태는 겉잡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 보름스 회의에 참석했던 주교들을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에게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충성서약이 무효가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파문은 비록 아무런 물리적인 힘이 없었지만 큰 효과를 발휘했다. 보름스 회의에 참석했다가 파문당한 많은 주교들이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편으로 돌아섰고 본래부터 신망이 없던 하인리히 4세였던 만큼 독일 제후들이 AD 1076년 10월 트리브르 회의를 개최하여 새 왕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르고자 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철회시키겠다는 조건으로 선거를 연기시켰고 최종 결정은 AD 1077년 2월 2일에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까지 참석하여 내려지기로 합의되었다. 

 

이렇게 시간적인 여유를 번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철회시키기 위해 나섰고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독일로 들어오기 이전에 만나고자 이탈리아 북부로 몰래 향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찾아 오고 있다는 소식에 놀라서 인근의 지지 세력인 여군주로서 토스카나 변경백이 된 마틸데가 보유한 카노사 성에 피신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으로 향하여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면담을 요청했고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거절당하자 성 밖에서 참회자의 옷을 입고 3일간 추위에 떨며 용서를 비는 카노사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결국 하인리히 4세의 도박이 성공을 거두면서 마음이 약해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토스카나의 마틸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였다. 

 

카노사의 굴욕은 오랫동안 서임권을 두고 대립하던 황제권과 교황권의 분쟁에서 교황권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이 적법했다는 근거가 되었고 로마교황을 포함한 성직자도 제국의 신민일 뿐이므로 황제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상이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장은 하인리히 4세가 허울 뿐린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한 것이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참회를 한 장소가 독일이 아닌 이탈리아였다는 점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고 파문도 철회되면서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기로 한 아우구스부르크 회의가 취소되면서 하인리히 4세의 지위도 그대로 보장되었다. 

 

 

대립왕 루돌프의 반란 

 

비록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이 철회되면서 독일 제후들의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충성서약이 부활했다. 그러나 본래부터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작센은 여전히 하인리히 4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채 AD 1077년 3월 13일 포르흐하임에서 단독으로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하인리히 4세의 퇴위를 선언하고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루돌프는 독일왕이 세습제가 아닌 선거제라는 점과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케른텐 공작 베르톨트,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 작센 공작 마그누스, 노르트하임 백작 오토 등의 제후들과 마인츠, 잘츠부르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대립왕 루돌프는 AD 1077년 5월 마인츠 대주교 지그프리드 1세에 의해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룰 수 있었지만 마인츠 시민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루돌프와 지그프리드 1세를 작센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제 루돌프는 자신의 영지인 슈바벤으로부터 고립되자 하인리히 4세는 슈바벤 공작령을 몰수하였고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의 작위도 박탈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인리히 4세와 대립왕 루돌프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고 비록 지리적인 면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하인리히 4세가 많이 유리했으나 AD 1080년 1월 플라흐하임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던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고 루돌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는 명분이 약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 귀족 사이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고 오히려 하인리히 4세는 별도의 공의회를 개최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결정하고 라벤나 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내세웠다. 더욱이 루돌프가 AD 1080년 10월에 벌어진 엘스터강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때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하면서 룩셈부르크 백작 헤르만이 후계자로 내세워졌지만 이미 반란은 추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축출

 

이제 하인리히 4세의 다음 상대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가 AD 1081년과 AD 1082년에 펼친 로마 공격은 실패했지만 AD 1084년 3월에는 로마 점령에 성공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란을 촉구하는 한편 AD 1083년 11월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하인리히 4세는 그대로 로마 포위를 강행하고 주교들의 참석을 막았기 때문에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결국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공의회를 방해한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파문하는 것에 그치고 성 안젤로의 성으로 피신했다. 로마가 함락되자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성 베드로 성당에서 정식으로 즉위하고 반대로 하인리히 4세에게 정식 황제 대관식을 치뤄주었다. 

 

 

로마에서 쫓겨난 채 이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실의에 빠졌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을 이끌던 로베르 기스카르가 구원군으로 나타났다. 본래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그리고 성 안젤로의 성에 고립되어 있던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구출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유서깊은 도시인 로마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로마에 머물지 못하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거점인 살레르모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시는 로마로 되돌아 가지 못한 채 AD 1085년 5월 살레르모에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위기의 말년

 

계속된 로마교황청과의 불화

 

대립왕 루돌프에 이어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사망하면서 이제 더이상 하인리히 4세에게 맞서는 세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년 간의 공백 끝에 그레고리우스 7세를 지지하던 추기경들이 AD 1086년 5월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인 데시데리우스를 차기 교황 빅토리우스 3세로 선출하였고 AD 1087년 3월 카푸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빅토리우스 3세를 정식 교황으로 인정하면서 같은 해 5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축성까지 이루어졌다. 비록 로마교황 빅토리우스 3세가 하인리히 4세의 압력 때문에 로마에서 몇 주일 밖에 지내지 못했으나 8월에는 베네벤토 공의회를 통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의 파문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황 빅토리우스 3세가 1달 뒤인 9월에 선종하자 오스티아 주교인 오도가 AD 1088년 3월 로마의 남부 테라치나에서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로 선출되었다. 

 

비록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가 건재한 어려운 상태에서 로마에도 입성하지 못한 채 주로 남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주로 머물러야 했으나 신중하면서도 확실하게 전임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 정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AD 1089년 멜피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평신도 성직수여와 성직매매 및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여전히 서임권 분쟁을 벌이던 하인리히 4세에게 맞서기 위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 그레고리우스 7세 시절부터 오랫동안 우호 관계에 있던 43세의 토스카나의 마틸데를 17살에 불과한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의 아들 벨프 2세와 결혼시켰고 이 결혼을 계기로 이탈리아 귀족들과 독일 남부 귀족 사이의 반(反) 하인리히 4세 동맹이 이루어졌다. 

 

이에 AD 1090년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지만 AD 1092년 토스카나의 마틸데가 카노사 근처에서 하인리히 4세에게 큰 승리를 거뒀다. 이에 고무된 북이탈리아 전체가 하인리히 4세에게 맞서서 봉기하였고 마틸데는 하인리히 4세의 장남이자 차기 후계자인 콘라트를 꾀어내어 AD 1093년 이탈리아 왕으로 내세웠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북동부에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지만 AD 1095년 본래부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마틸데와 벨프 2세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결국 마틸데와 벨프 2세의 결혼 생활이 파탄이 일어나자 하인리히 4세는 벨프 2세의 편을 들면서 몰수한 바이에른 공작령을 벨프 2세의 아버지 벨프 1세에게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벨프 1세 부자를 자신의 편으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하고 AD 1097년 독일에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AD 1099년 반란을 일으킨 장남 콘라트를 독일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차남인 하인리히 5세를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출시켰다.

 

 

아들들의 연이은 반란

 

AD 1099년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선종하고 차기 교황으로 파사칼리스 2세가 선출되었고 AD 1100년에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마저 사망하면서 테오도리코, 알베르투스가 계속해서 대립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도 더이상 대립교황들을 지원하지 않은 채 로마교황청과의 화해를 추진하여 만일 자신에 대한 파문이 해제되면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AD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촉발시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AD 1102년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가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철회해 주었지만 여전히 서임권을 둘러싼 분쟁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와의 최종적인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로마교황청과의 화해는 요원하고 하인리히 4세가 십자군 원정 준비를 위해 4년간 신성로마제국 내 모든 귀족 간의 분쟁을 금지시킨 것에 대해서도 독일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제한받고 있다고 불만을 품었다. 독일 제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를 희생시켜 자신의 왕위를 확실하게 보장받고자 AD 1104년 바이에른 및 작센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는 쾰른을 거쳐 마인츠로 달아났지만 하인리히 5세에게 붙잡혔고 AD 1105년 12월 31일 강제로 퇴위당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재기를 노리고 로렌에서 반격에 나서 AD 1106년 3월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같은 해 8월 갑자기 리에주에서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5세 시대

 

로마교황청과의 대립

 

하인리히 4세가 급사하면서 하인리히 5세의 왕위는 안전하게 되었지만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와의 대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서임권 포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약속을 하였지만 막상 반란이 성공을 거두자 다시 서임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AD 1106년, AD 1107년, AD 1110년의 3차례 협상 끝에 로마에 방문한 하인리히 5세에게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만일 하인리히 5세가 서임권을 포기하면 대신에 독일 교회가 신성로마황제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토지와 권리를 모두 반납하겠다는 제안하였다. 

 

비록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의 제안을 하인리히 5세가 수용하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AD 1111년 2월 공포되자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긴 독일 주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로마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하인리히 5세는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를 투옥하며 강제로 서임권을 받아내었고 AD 1111년 4월 황제 대관식까지 치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로마교황청은 파스칼리스 2세의 결정에 반발하여 별도의 공의회를 열고 하인리히 5세에게 부여된 서임권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파문하였기 때문에 결국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도 AD 1112년 자신의 결정을 취소하였다. 

 

AD 1106년 작센 공작 마그누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 과정에서 자신을 지원해준 주플린부르크 백작 로타르를 새로운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세금 문제로 하인리히 5세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에는 AD 1112년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로타르 3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이어진 쾰른 반란에 대해서 하인리히 5세가 AD 1114년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격에 성공하여 AD 1115년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이탈리아 문제 때문에 하인리히 5세는 독일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AD 1115년 토스카나의 마틸데가 사망하였는데 당초 마틸데는 AD 1110년 하인리히 5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녀의 영지를 모두 하인리히 5세에게 넘기기로 합의하였으나 이미 그 전에 로마교황청에도 기증하기로 이중 약속을 해버린 상태였다. 이 때문에 하인리히 5세는 먼저 마틸데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AD 1116년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밀라노의 대주교 지오다노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고 마틸데의 영지를 모두 로마교황청에 넘겨버렸다. 그리고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도 하인리히 5세의 파문을 승인하고 기존의 서임권 철회를 재확인하였다. 그러자 하인리히 5세는 다시 한번 무력으로 서임권을 받아내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면서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서둘러 도망쳐야 했고 브라가 대주교 마우리시오를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로 내세워졌다. 

 

서임권 분쟁의 종식, 보름스 협약 체결

 

AD 1118년 로마교황 파스칼리스 2세가 선종하였고 그 뒤를 이은 로마교황 겔라시우스 2세가 노르만족의 지원을 받아 로마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황제파인 로마 귀족 켄키우스 2세의 공격을 당해 다시 프랑스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AD 1119년 로마교황 겔라시우스 2세가 선종하면서 하인리히 5세와 벌이는 서임권 분쟁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칼릭스투스 2세에게로 넘어갔다. 로마교황 칼릭스투스 2세는 하인리히 5세와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를 모두 파문하고 AD 1120년 로마로 개선하였다. 하인리히 5세도 이제는 서임권을 둘러싼 오랜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협상에 나서서 마침내 AD 1122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성직자에게 종교적 권능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를 수여하는 서임권은 로마교황이 지니는 대신에 교회령을 통치하는 세속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홀의 수봉권은 황제가 지니기로 합의되었다. 또한 교회법에 따른 자유로운 성직자 선출이 허용되는 대신에 황제는 성직자 선거에 참관하고 선거로 결판이 나지 않을 경우 최종 결정권을 갖기로 하였다. 이제 독일의 성직자로 뽑힌 사람에 대한 먼저 황제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한 후 특권과 재산을 부여받고 이후에 상급 성직자로부터 성직자로서 서임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황제가 직접적인 서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성직자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력은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서는 독일과 달리 봉신 서약과 성직자 서임의 순서를 거꾸로했기 때문에 봉신 서약이 형식적이 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된다.

 

 

잘리어 왕조의 단절

 

보름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하인리히 5세에 대한 파문이 최종적으로 철회되고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추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인리히 5세는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AD 1123년 미스니아와 루사티아의 변경백인 하인리히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고 그 계승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하인리히 5세가 자신의 가신 뷔프레흐트 2세를 임명했지만 하인리히 2세의 종숙부인 콘라트는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의 후원을 바탕으로 뷔프레흐트 2세를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 콘라트가 미스니아 변경백 지위를, 발렌슈테츠 백작 알브레히트가 루사티아 변경백 지위를 차지하였다. 

 

비록 황제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지만 하인리히 5세는 아무런 조치를 행하지 못한 채 AD 1125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AD 1024년 콘라트 2세로부터 시작된 신성로마제국의 잘리어 왕조가 하인리히 5세를 마지막으로 총 4대, 101년 만에 단절되었다. 그리고 마인츠에서 열린 왕위계승선거에서 하인리히 5세의 정적이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가 하인리히 4세의 외손자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를 제치고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AD 1137년 로타르 3세가 사망한 뒤 이번에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 3세가 독일 왕이 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새로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유럽의 귀족 작위

 

1. 공작(Duke)

 

공작은 중세 봉건제도에서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5개의 작위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본래 로마제국 시절 군사령관을 부르던 '둑스(Dux)'에서 유래한 말로 로마 제국 안으로 정착한 이민족들이 자신의 군주를 부를 때 사용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 시절에는 큰 공을 세운 가신이나 라인강 동쪽을 정벌하고 정복지를 통치하던 군사령관에게 부여하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카롤루스 1세 시절에는 영지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카롤루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고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반복되면서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점차 공작 지위도 세습이 가능해졌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과 프랑스도 넓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을 공작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영지에 대한 독립적인 통치권을 보장하였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초기 시절에는 노르망디, 아키텐, 부르고뉴 등의 공작들은 사실상 프랑스 왕으로부터 독립된 지위에 있었고 잉글랜드 왕실로 통합된 노르망디 공작과 아키텐 공작의 경우에는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지를 보유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부르고뉴 공작도 거대한 영지를 소유한 채 프랑스 왕권에 도전하며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의 편에 서기도 한다. 

 

한편 독일은 카롤루스 1세 시절에 군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장군들이 정복 이후 기존의 대부족들을 그대로 통치하거나 대부족장의 귀순을 받아들여 그대로 자치권을 승인해주면서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거대한 공작령이 등장하였다. 오토 1세에 의해 탄생한 신성로마제국은 바로 이들 대규모 공작령의 연합체였다. 이후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가 독일로 편입되면서 로렌 공작령이 되었고 신성로마황제 오토 2세 시절 바이에른 공작령이 일부 분할되어 케른텐 공작령이 신설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이탈리아 도시 중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의 군주가 공작으로 임명받았고 스페인도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점령한 후 공작령을 만들었으며 왕호를 인정받기 이전의 폴란드의 군주도 공작으로 불렸다. 다만 잉글랜드의 경우에는 본래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왕이 노르망디 공작을 겸했고 이후 플랜태저넷 왕조에서는 아키텐 공작까지 겸했으므로 잉글랜드 내부에는 공작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왕세자를 제외한 왕위계승 후보자들에게 공작 작위가 부여된다. 

 


2. 후작(Marquess)과 변경백(Markgraf)

후작(Marquess)

후작은 중세 봉건제도에서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5개의 작위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본래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에서 변경을 수비하던 왕실 관리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후작은 백작과 달리 하나 이상의 영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복수의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공작 다음 가는 지위가 되었다. 그러나 시작이 지날 수록 백작의 영지가 후작을 능가하는 경우도 생기면서 단순히 영지 크기만으로 후작과 백작 간의 작위를 구분하는 것이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왕실의 특권을 부여받은 후작만이 백작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변경백(Markgraf)

카롤링거 왕조 시절에 독일의 국경 지역은 변경주(mark)로 만들어졌고 이 지역을 통치하는 영주를 백작 중에서도 '변경백(Markgraf)'이라고 구분하여 불렀다. 변경백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하고 때로는 정복 활동을 해야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기존 백작의 권리 이외에 외적에 대한 군사권이 폭넓게 인정되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동부 국경에 위치한 '오스트마르크(Ostmark)'는 나중에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 승격되어 훗날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 되고 북부 국경에 위치한 '노르트마르크(Nordmark)'는 나중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으로 변경된 뒤에 선제후의 위치까지도 오르며 프로이센 왕국의 초석이 된다.

 


3. 백작(Count)

 

프랑스의 백작(Count)

백작은 중세 봉건제도에서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5개의 작위 중 세번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본래 로마시대 황제의 호위 가신을 이르던 말인 '코메스(comes)'에서 유래하였고 카롤링거 왕조에서는 지방 사령관 및 판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격적으로 봉건 제도가 실시되면서 백작은 공작의 봉신이 되었으나 점차 관직보다는 세습 영주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 대한 군권과 사법권, 화폐주조권을 보유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권을 보유하여 중세 봉건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비록 백작에게는 한 개의 영지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프랑스 플랑드르나 툴루즈, 앙주 같은 지역의 백작들은 그 영지가 왠만한 공작령보다 넓었고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는 프랑스 왕위까지 차지하고 카페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독일의 백작(Graf)과 팔츠백(Pfalzgraf)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독일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점령 지역의 지방 사령관이 작위를 받으면서 '백작(graf)'이 되었다. 독일의 백작도 프랑스의 백작과 마찬가지로 군권 및 사법권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군사 요충지인 변경 지대는 '변경백(Markgraf)'이라는 이름으로 그 권한이 더욱 강화되어 후작과 비슷한 위치가 되었다. 한편 독일 왕(신성로마황제)이 선출제로 변경된 이후 독일은 고정된 수도가 없이 선출된 왕의 영지가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 왕들은 다른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귀족들의 영지를 순회하였는데 이 때 국왕이 머무르는 곳을 팔츠(Pfalz)라고 불렀다. 각 영지 마다 팔츠가 있었고 '팔츠백(Pfalzgraf)'이라는 관리가 그 곳을 관리했다. 

 

팔츠백은 궁중백이라고도 불리는데 국왕이 방문 시에는 숙식을 책임지고 국왕의 업무를 보좌했으며 국왕의 부재 시에는 국왕을 대리하여 인근 제후와 주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팔츠백은 국왕 직속 관리이자 임명직으로 그 권한이 백작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지방 분권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팔츠백이 그 의미를 잃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프랑켄 공작령이 여러 개의 영지로 분열된 이후 라인 팔츠백을 세습하던 비텔스바흐 가문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선제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영국의 백작(earl)

프랑스와 독일의 백작 지위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시작된 것과 달리 영국의 백작 지위는 덴마크의 바이킹 일파인 데인족으로부터 전래되었다. 데인족의 왕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의 3개국 왕위를 겸했던 크누트 1세가 AD 11세기 초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백작을 의미하는 '얼(earl)'이라는 작위를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고대 노르드어로 족장이나 영주를 뜻하는 '야를(Jarl)'로부터 유래되었다. 비록 초기의 잉글랜드 백작들은 1개 이상의 영지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AD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에 의해 노르만 정복이 일어난 후로는 프랑스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1개의 영지만 통치하도록 제한되었다. 

 


4. 자작(viscount)
자작은 중세 봉건제도에서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5개의 작위 중 네번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카롤링거 왕조 초기 시절의 '자작(viscount)'은 백작의 부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백작의 지위가 세습되면서 자작의 지위도 함께 세습되기 시작했고 비록 자작은 별도의 영지를 갖지 못했지만 백작을 대리해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자작이 없는 나라도 있었고 스페인의 경우에는 백작이 되기 위한 중간 단계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5. 남작(baron)
남작은 중세 봉건제도에서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5개의 작위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소규모 봉토를 받은 영주를 지칭하는 말로 AD 13세기에 프랑스에서는 국왕으로부터 직접 봉토를 받은 실력자를 뜻하게 되었다. 처음에 남작이 백작 못지 않은 권세와 영향력을 보여줬지만 칙허장의 난발로 수많은 남작이 만들어지면서 남작의 가치가 점점 떨어져 갔다.

 


6. 기타 작위

준남작(baronet)

준남작은 영국에서 사용한 작위로 남작과 기사의 중간단계로 엄밀히 이야기하면 귀족은 아니었다. 준남작 작위 역시 다른 작위와 마찬가지로 상속이 가능했으나 딸에게는 상속되지 않고 소멸했다.

 

기사(knight) 

기사는 말을 타고 싸우던 전사에게 부여되던 명예 호칭으로 귀족계급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평민인 경우도 많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7살부터 기사 훈련을 받고 14살에는 무기를 옮기거나 기사의 시중을 들었으며 21살에 정식으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기사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세습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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