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 Scythians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현대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북서부 일대 스텝 지역에서 존속했던 인도-유럽 계통의 유목민족.
스키타이족들이 쓰던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에 속했다. 오세트어가 이 언어의 후손 중 하나다.
스키타이 기원과 역사
오늘날 러시아 남부, 캅카스 동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 스스로는 스콜로트라고 불렀으며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부른 말로 고대 그리스어로 '궁수'(Skuthēs)에서 유래했다. 페르시아에선 샤카(Sakā)라고 불렀는데 뜻은 동일했다. 스키타이와 국경을 마주하던 아시리아에선 '유목민'이란 의미의 아스쿠자이(Askuzai)라고 불렀다.
본디 이들은 그저 이란계 유목민족이었지만 기원전 11세기쯤 유입된 다른 이민족들과 섞이며 '스키타이'라는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기마 민족으로 채리엇이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며 싸웠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원전 9세기 즈음에 킴메르족이라 불리는 다른 유목민족이 있었는데, 스키타이인들과 경쟁을 반복하던 중 스키타이의 기술이 좋아지고 수가 많아지자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킴메르인들을 캅카스 지역 너머로 몰아내고, 텅빈 캅카스, 카르파티아 산맥도 넘으며 동서남북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력이 점점 줄어들더니 기원전 4세기에는 서방에서 몰려온 이민족들에게 서방 영토 일부를 빼앗기고, 기원전 4세기에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게타이족의 압박으로 서방의 영토를 영구히 상실했다.
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동쪽에 있던 스키타이 또는 샤카들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동쪽에서 흉노와 오손, 월지가 공격하여 남쪽인 그리스-박트리아와 파르티아로 옮겨가 두 국가를 침략했다. 한편 파르티아는 스키타이인들을 방어했으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했다. 또한 스키타이들은 인도 북부에 있던 인도-그리스 왕국도 쳐들어가 인도-스키타이 왕국이 되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파르티아의 세력 일부분에 멸망해 그 자리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으로 대체되었고, 그들이 페르시아화되었는지 멸망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라지게 되었다.
서쪽에 있었던 스키타이인들은 크림 반도와 그 근역에서 살아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세력이 약해지면서 사르마티아인과 알란인에게 흡수되었다. 그 후손이 오세트인이다.
스키타이, 한민족과의 관계
'바지·저고리차림' 한복 원류는 스키타이 문화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이부식(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 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細袴·가는 바지)'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한족(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KBS의 역사스페셜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편에서 제작진이 아시아 지역 고인골 샘플 2천여 개를 보유 중인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신라인과 흉노의 유전적 근원성 DNA분석을 의뢰했는데, 스키타이인과 신라인의 유전자가 거의 같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신라인과 흉노의 DNA 일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였으나 뜻밖에도 모계 DNA와 부계 DNA 둘 다 흉노보다는 스키타이와 거의 일치하게 나온 것이다. 해당 영상에서 중앙대 이광호 교수는 자신도 뜻밖의 결과라 여러 번 반복 검증했지만 신라인과 스키타이인의 유전자가 같게 나온다는 인터뷰를 한다. (36분 16초)
한민족의 언어, 문화, 정치적 계보는 고조선과 부여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연원을 두고 있다. 건국 신화나 국호도 부여와 연관 지은 고구려와 부여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역시 고조선 유민들이 사로 6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고조선계 문화였음이 확인된다. 이런 만주의 초기 한민족 문화는 북방 유목민 문화의 동쪽 끝자락에 닿아있었고 최소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거나 아예 그러한 유목민 문화의 일파로 여겨진다. 이 때 그 '초기 북방 유목민 문화'가 바로 문헌상 나타나는 제일 오래된 유목민 문화인 스키타이로 비정된다.
신라의 무덤 양식이라든가 신라의 금관, 황금 보검 등은 실제로 굉장히 유사하다. 특히 신라 금관에서 나타나는 장식들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에서 나타나는 사슴, 나무,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를 위시한 고대 한복의 모태가 스키타이였다는 것이 국내 복식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흉노족 신라왕족설 등 신라를 흉노족과 연관 짓는 설이 있으나, 유목문화와의 연관성은 신라 이전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부여에서 파생된 국가(고구려,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신라 문화가 흉노와의 유사성이 보여지는 것은 신라가 흉노에서 파생되었기보다는 흉노와 신라가 같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파생된 흔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생활상
그리스의 역사가에 따르면 이들은 네 가지로 구별되는 집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대로 남아 농사하며 먹고 살자던 농경 스키타이, 그에 찬동하는 상공 스키타이, 그 외의 기타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이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로열 스키타이였다. 결국 로열 스키타이를 위주로 한 집단이 승리를 거두고 스키타이는 유목제국으로서 발돋음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남긴 자료나 물건, 외부의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금발에 튀어나온 광대뼈와 장신에 큰 체구를 지니고 털이 많았던 편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국가들과 인접하여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무역을 하며 동쪽 알타이 지방의 황금이나 모피들을 헬레니즘 국가의 금 세공 물건들과 교환했다. 그래서 스키타이의 황금 문화는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황금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유럽 흑해 지방 드네르프 강 유역과 중앙아시아 유역에서 이들이 남긴 황금 유물이 출토된다. 사카와 오르도스로 이어지는 황금문화의 원류격이다. 출토되는 황금 유물들의 수준이 무척 높은데, 아마도 이들은 흑해에 기원전 7세기부터 정착한 그리스인들로부터 조형기술을 전수받은 듯하다.
흉노 연맹은 초창기에는 스키타이계 유목민들의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어로 기록된 흉노 인명을 분석해본 결과 기원전 2세기까지는 흉노에서 인도-유럽어에서 기원한 이름을 즐겨 썼다.
호전적인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다소 잔인한 문화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잡은 포로의 가죽으로 망토 등을 만들었다. 승리자가 부자라면 포로의 두개골을 눈썹 윗쪽을 잘라내고 가공해 도금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헤로도토스가 여기에도 방문했었는데 이 물건들을 체험했고 평도 남겼다. 만져보면 매끈거리고 광택이 나더라고... 뜻이 맞는 자들끼리 모여서 우정의 맹세를 할 때는 커다란 질그릇에 자신이 가진 무기를 집어넣고 술을 부어서 거기에 서로의 피를 흘려 넣어 주문을 외우고, 그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자가 그것을 마시는 것이 의식의 절차였다고 한다.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저자 존 워리(John Warry)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은 활시위를 당길 때 다른 유목민족들과 달리 중지와 검지를 이용하는 오늘날의 양궁식 사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도리어 당시 그리스인들이 엄지와 검지로 활을 당겼다고 한다.
수직으로 세 손가락을 줄에 걸고 당기는 지중해 방식(Mediterranean draw), 위력이 약한 활을 쓰는 남미 원주민들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활줄을 꼬집듯이 당기는 핀치 방식(Pinch draw), 그리고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쓰는 방식인 엄지에 깍지를 끼고 줄을 잡은 뒤 나머지 손가락으로 엄지를 감싸고 당기는 일명 썸 링 방식(Thumb ring) 등의 세 가지가 있다.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방식이 현대 올림픽 양궁으로까지 발전했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도자기 그림이나 벽화를 보면 그리스 활쏘기 방식은 정말로 핀치 내지는 썸 링 방식이었든 듯하다. 정작 고대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은 썸 링을 안 썼다. 사족으로 이 차이점은 활의 위력과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으로 활이 튼튼하지 않거나 줄 힘이 강하지 않으면 핀치 방식으로, 활을 무조건 강하게 멀리 쏴야 할 때에는 썸 링으로 당긴다. 대표적으로 몽골 활은 활줄에 걸리는 무게가 무려 40킬로대에 달하기 때문에, 썸 링 이외 다른 방법으로는 당기기도 힘들다.
거세마를 처음으로 만든 것도 스키타이인들이었다. 거세마는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니 충동적인 성향이 덜하고, 기수의 통제가 용이하며 다른 말들이 근처에 있어도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거나 울지 않아서 무리를 지어 사육하기 용이했기 때문. 아주 먼 훗날의 스페인에서는 군마로 거세를 안 한 수말만 썼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