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 안보 체제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리트비노프 해임의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매우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불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 사령관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뭐 일단 서명권을 지니고 있는 만큼 소련보다는 못해도 큰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문제는 영국. 영국 협상단장은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인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이었는데, 그는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거물급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당시 영-프와 동맹국이었던 폴란드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독일과의 갈등이 끝나더라도 자국 내로 진주한 소련군이 절대로 순순히 철군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절대로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참고로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영국-아일랜드 관계나 이란-이라크 관계와 동급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국가적 대혼란 시기를 노리고 침략한 폴란드에 모스크바 입성까지 허락하며 땅을 떼어준 역사가 있다. 여기에 1919년과 1921년 사이 동유럽의 신생국들을 모두 재점령하기 위해 동유럽을 침략한 볼셰비키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재건을 시도하던 폴란드 사이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폴란드와 소련은 1932년 불가침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이러니 당시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야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참고로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했다. 그러나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새로운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 사단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섬나라인 영국이 몇십 개 육군 사단을 유럽 본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섬나라면 당연히 해군의 비중이 클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릴 수 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어쨌거나 영국-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자신들이 계획한 대 독일 4자동맹 안보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독소 불가침조약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1939년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같은 해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분해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나 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히틀러 소련 공격 이유, 독소 불가침 조약 파기 이유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과 싸운 전쟁이다. 그리고 연합국에 결정적 승리를 기여했던 나라가 소련이다. 독소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일부지만 가장 핵심 전쟁으로 독소전쟁을 이해해야 20세기를 이해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군인 사망숫자를 살펴보면 소련 군인의 사망자만 1000만이 넘는다. 이는 당시 한반도 인구의 약 1/3수준이다.
스탈린 성격
동물농장(1945) 영국 작가 조지오웰의 풍자소설로 소설에 나오는 돼지는 스탈린을 상징한다. 스탈린은 원칙주의자적인 모습이 있다. 예를 들어 독소 전쟁에서 스탈린의 장남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지만 포로교환을 거절하고 스탈린의 장남은 사망한다. 스탈린은 대한민국 역사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고 20 세기 냉전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원래 스탈린과 히틀러는 사이가 나쁘지가 않았다.
히틀러는 왜 소련을 공격했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를 제압해야 되는 상황에서 일단 등 뒤가 안전해야 되기 때문에 소련과 협상을 맺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나치즘 확산을 막기 위해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맞지 않는 먼 이념 차이로 인해 이념의 틈을 잘 파고든 히틀러였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 조약은 2년도 유지되지 못한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3시 30분 평화로웠던 소련 국경지대에 독일 전투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히틀러의 이념
히틀러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종주의이다. 인간은 여러 인종으로 구분 되어있고 인종 사이에 유전적 우열이 있다고 믿고 지배-피지배를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그중에 아리아인 독일인이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고 믿었으며 최종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인종은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이 있었는데 소련은 슬라브인으로 많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쟁으로 슬라브인의 땅인 소련을 독일인의 생활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독일의 전쟁 방식은 절멸 전쟁으로 박멸, 절멸, 박멸 을 의미하는 것으로 히틀러에게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사람이 아닌 해충에 가까웠다. 히틀러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해롭다고 생각해 씨를 말려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내내 진행되었던 잔학행위가 계속되었다. 볼셰비키(소련)와의 전투에서 인도주의 원칙이나 국제법 준수는 고려 대선은 안 된다는 1941년 히틀러의 지령으로 소련군 포로 570만 중 330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군 포로 사망자 비율이 약 58% 였다. 소련군 포로를 학살 학대 방치한 독일이었다. 제네바 협정에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 조항이 있었지만 나치 독일에게 소련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독일과 전쟁했던 영국과 미국은 포로 사망률은 3.5~5.1% 였던 것으로 봐도 히틀러의 파시즘이 나라별로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절멸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시스템까지 구축한 히틀러였다. 인종 말살 목적으로 나치 친위대 산하 특수 기동대까지 운영이 되며 보고 체계를 통해 절멸 경쟁까지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양심이 마비가 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게 만드는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독일의 영국침공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자신이 자랑하는 육군 기갑부대를 앞세워 프랑스를 침공한다. 마지노선을 뚫고 6주만에 파리를 함락한다. 직접 파리를 누비며 1차 대전에 한을 푼 히틀러는 내친김에 영국까지 침공한다.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영국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지만 영국의 처칠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이전에 서유럽을 먼저 침공한 히틀러는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즉시 항복, 노르웨이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2달 만에 항복, 네덜란드는 5일 만에 항복, 벨기에는 2주 만에 점령, 프랑스도 6주 만에 항복하며 파죽지세로 유럽을 정복해 나가던 독일이다.
그러나 영국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영국이 소련을 믿고 항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소련을 속전속결로 물리치면 영국도 항복할거라 판단했다.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히틀러는 언젠가는 소련을 침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스탈린도 나름대로 1939년에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1942년까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마친다는 것이 스탈린의 계획이었다. 1941년 독일은 최강의 전력 상태였고 소련은 아직 준비가 덜된 상태였다. 영국과 미국이 정부 기관에서 분석한 것은 지금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 3~4개월 내 승리를 예상했다.
1941년 6월 22일 개전 날짜까지 적시한 첩보가 오기도 했고 또한 치열했던 2차 대전의 암호 전쟁을 위한 독일의 발명품 기계로 암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앨런 튜링(천재 과학자)은 기계로 만든 암호를 기계로 풀겠다고 하며 만든 기계가 바로 콜로서스로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였다.
반면 미국은 나중에 독일군에게 에니그마를 훔쳐 암호를 해독한다.
소련은 정확한 첩보에도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았던 이유
1941년 6월 21일 독소 전쟁 전날 독일 병사가 내일 독일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알려주지만 스탈린은 그 병사를 총살시킨다.
간첩의 뜻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내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본인이 직접 간자와 첩자를 경험해본 인물로 간자와 첩자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전지적 스탈린의 관점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소련
현재 들어오는 정보는 영국 처칠의 농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이런 스탈린의 오판으로 소련 국경지역에는 경계 조치이나 정찰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독일에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소련이었다.
개전 초 소련군 탱크의 90% 가 파괴되고 공중에 떠보지도 못한 800개 이상의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개전 일주일도 안돼 독일군은 소련 영내 400km까지 진출한다. 소련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 물자를 한창 준비하는 와중에 그 틈으로 독일이 침공한 것이다.
브레스트 요새
히틀러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소련 최전방 국경이 위치한 브레스트 요새는 갑작스런 독일의 침공에 무방비 상태였고 무기도 병역도 부족했지만 결사항전으로 한 달 가까이 고립된 채 전투는 계속하지만 결국 요새가 함락되고 항복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병사들은 전멸한다.
소련군이 결사항전을 했던 이유
프랑스는 6주만에 항복해도 생존은 가능했지만 소련이 독일에 항복하면 절멸의 대상이기 때문에 소련인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고 + 애국심,+스탈린의 압박이 더해져 히틀러가 미처 생각 못한 소련인들의 저항의 지를 보여준 것이다.
히틀러가 준비한 작전명 바르바로사
당시 독일인들이 가장 숭상하던 군주였는데 붉은 수염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 군을 북, 중, 남 3개 집단군으로 나눠 각기 다른 루트로 공격해 들어가는 작전을 계획한다.
바르바로사(1152~119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잠들어 있는 황제가 깨어나 동방원정을 떠날 것이다.
*북부집단군-공산주의를 싫어했던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해야 된다고 했고
*중부집단군은- 스탈린이 이는 모스크바가 목표
*남부집단군- 키예프를 공격 후 볼가강까지 진출해 유전확보를 목표였다. 소련의 남부지역 우크라이나 당시 공업지대이자 인구도 많았던 지역
재정 러시아 때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쳤을 때는 조국전쟁이었는데 히틀러 독일과의 전쟁은 대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해마다 5월 9일 되면 승전기념을 하고 독소 전쟁기간이 1418일(러시아 기준)을 기념하여 141.8m 전승 기념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