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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웜 전술, Swarm Tactics, 무장 기병 히트 앤 런 전술, 스웜(Swarm), 벌떼, 유목민 스웜 전술, 카르헤 전투

Jobs 9 2024. 8. 2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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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가 보편화 되기전 냉병기 시대의 전장에서 궁기병을 주로 운용하던 군대가 주로 사용하던 전술. 영단어 Swarm은 벌같은 곤충들이 떼지어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

유목민족이 은근히 전투종족 취급 받는 이유가 그들의 장기인 기병을 이용한 스웜 전술의 막강함과 기동성에 있다.

 

전술 개념
스웜 전술은 활, 투창 등 투사병기로 무장한 기병의 히트 앤 런 전술을 말한다.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해 빠르게 접근과 후퇴를 반복하고, 접근 시 투사무기를 이용해서 공격한다.

기병은 정밀한 진형 구성이 어렵고 신속한 이탈이 중요한데 스웜 전술에서는 정밀한 움직임 대신에 무리지어 움직여서 치고 빠지는게 중요하며, 이 때 기병 무리의 움직임이 벌레떼가 뭉쳐서 움직이는 것과도 같아 이것이 곧 전술의 어원이 된다.
말을 타고 화살의 공격 범위까지 접근한다. → 쏜다. → 상대가 추격해오면 기수를 돌려 내뺀다. → 승마술이 된다면 추격당하여 도망가는 도중에도 쏜다. → 추격을 포기하면, 다시 접근하여 쏜다. → 반복. 

 

 

유목민과 스웜 전술


"말에 올라 탄 튀르크족 병사 1천 명이 나란히 달리면서 한꺼번에 화살을 쏘면, 반드시 1천 명의 적들을 죽이고 말 것이다. 어느 군대도 그들의 공격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말에 탄 채로 화살을 쏘는 실력으로는 튀르크족 병사가 아랍인 병사보다 더 뛰어나다. 튀르크족 병사들은 말에 탄 채로 전후좌우 사방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화살을 쏘면 사람과 동물들을 반드시 맞춘다. 아랍인 병사가 화살을 한 번 쏠 동안, 튀르크족 병사는 화살을 무려 10번이나 쏠 수 있다."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37쪽
"(투르크인들은) 자신들이 프랑크인과 한 뿌리에서 나온 종족이라고 하면서 프랑크인과 투르크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사로 태어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어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기독교권에 대한 믿음이 강력했더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보다 더 강하고 용감하고 기술이 좋은 병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말을 빠르게 달리면서 활을 사용해야 하는 궁기병이 필요하고 개별 집단으로 무리 지어 움직이는데 익숙해야 한다. 그래서 궁기병을 대량으로 육성하고 훈련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궁술 자체가 꽤나 연마가 필요한 기술이고, 마상 궁술은 훨씬 더 고급 기술이다. 말을 세우고 쏘고 빠지는 수준은 일반적인 기병으로도 가능하지만, 스웜 전술은 빠르게 말을 달리면서 조준, 장전을 해야 하고 거기다 필수적으로 고삐를 놓고 달리기 때문에 양다리로 몸을 지탱해야 한다. 양다리만으로 몸을 말에 지탱하면서 균형을 잡는 건 어지간히 말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보통 유목민이 환경상 스웜 전술을 적용하기 적당하고 많이 쓴다. 

유목민은 구성원 대부분이 말을 소유하고 말에 익숙한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 말이 필수적이어서 말에 익숙하고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기 때문에 마상 기술을 빠르게 습득한다. 또한 유목민은 수렵 생활도 병행하기 때문에 수렵으로 마상 궁술에도 익숙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냥 같은 관습으로 다수의 인원이 스웜 전술에 필수적인 유기적인 움직임과 말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걸 자연스럽게 배운다.  

각 생활단위인 가족과 씨족, 부족은 사냥, 이동 때도 함께하고 이것이 전투할 때도 부대단위로 변하게 된다. 수렵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은 곧 전투기술이 되고 이미 익숙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복잡한 전술을 쓸 여력이 안 되는 유목민의 부족한 훈련도와 전술을 보충할 수 있다. 

궁기병을 양성할 수 있다면 정주민도 못쓸 것은 없지만 비용과 효율면에서 유목민과 비교가 안 된다. 농경, 목축을 막론하고 정주민 사회에서 말은 사치품이자 군수품이며, 생산면에서 일부 농경이나 짐 수송용으로 쓰일 뿐이고 유목민처럼 생존과 직결되는 경우는 없다. 설사 말을 소유하더라도 목축민이나 돼야 그나마 말을 좀 타는 수준이고 통상 생산에 투입하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루 웬 종일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말을 탈 시간이 날 수가 없다. 설사 말을 타더라도 잠깐 시간이 날 때 타거나 이동수단으로 타는 것일 뿐이고 마상 기술을 전문적으로 습득하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말을 타는 정주민은 부유층이나 고위 군사 집단으로 제한된다. 이렇게 정주민 입장에서는 기병 양성을 하고 싶다면 유목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마상 궁술이 필요한 궁기병 양성은 기병 양성보다 더 어렵다. 유목민과 같은 수준으로 키워내려면 비용이나 효율성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 

이래서 정주민 국가들은 기병 육성은 후순위로 미루거나 기병을 육성하더라도 보통 적대 정주민의 보병을 격파할 충격 기병 위주로 육성하고 특히나 중장기병 육성을 더 선호하며, 궁기병은 유목민이나 기타 민족에서 용병으로 고용하는 걸로 충당했다.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부유하고 국력이 막강했던 나라들도 직접 농민들을 경기병으로 양성하기보다 자국 영토 내에 사는 튀르크, 타타르, 카자크같은 유목민 공동체들에게 대충 국경 통과증이나 자치 혜택 같은 걸 주고 대신 필요할 때 기병들을 징발하는 것을 선호했다. 기병 양성에 열심히였던 동로마 제국도 궁기병은 이민족 용병을 고용하는 걸로 충당했다. 단, 조선은 정주민이면서 궁기병 비율이 높지만 이건 조선 쪽이 예외.

 

 

스웜 전술 장점


1.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이론상 상대에게 공격하고 상대방이 반격하기 전에 빠지기 때문에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나지만 일반적인 충격 기병이나 보병을 상대로 한다면 무기를 맞대지 않고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적은 피해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 
2. 기동력을 극대화 한다.
충격 기병은 그 특유의 속도를 바탕으로 돌격하는데 강력하지만 적에게 집단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전술적 제약상 전술적으로 의외로 기동에 제약이 걸린다. 기병 돌격이 멈추면 수적으로 우세한 보병에게 역으로 둘러싸이기도 하고, 돌격 후 통제가 안 돼서 진영이 와해되기도 한다. 스웜 전술에서는 돌격은 최후반에 끝장날 때 쓰고 치고 빠지기만 반복하면 되기 때문에 속도를 바탕으로 상대방이 접근을 쉽게 예상하지 못하거나 빈틈을 빠르게 찌르기 쉽다. 
3. 소수로 전장의 주도권을 잡기 유리하다.
기동력을 극대화 하면서 전장을 넓게 쓰고 공격 선택에 우선권을 가지지 때문에 수적 열세에도 공세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숫자가 곧 전투력인 시대에 수적 열세를 전술적으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다. 유목민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정주민과 싸울 경우 수적으로 항상 열세인데 이런 약점을 보완해준다. 
4. 패배 시 퇴각이 유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적이 밀고 들어오면 후퇴하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고 그에 맞춰서 견고한 진형은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압박을 당해서 진형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이 공격하는만큼 빠지면서 반격을 하고 적의 공세가 심하면 공격은 접고 그냥 후퇴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밀집대형을 이루지 않고 느슨한 대형을 이루기 때문에 일부가 격파되더라도 진형 자체에 영향도 적고, 후퇴로 인한 사기 저하나 도주 심리 형성도 적다. 추격전 상황에서도 구성원 대부분이 기병이다 보니 그냥 냅다 튀면 되기 때문에 큰 손실도 적다. 그러다가 무리하게 추격하느라고 흩어지면 우월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재집결해서 각개격파하거나 몰아붙이면 된다. 

 

스웜 전술 단점
1. 경무장 뿐이라 근접 전투력이 떨어진다.
경기병인 궁기병 자체가 가볍게 입기도 하고 스웜 전술을 위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활도 쏴야 하기 때문에 갑옷은 아무래도 가볍게 입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스웜 전술을 주로 쓰는 유목민 사회는 생산력이 떨어지다 보니 무장이 훨씬 빈약해서 우월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정주민 기병보다 훨씬 무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무장해도 말은 속도와 지구력, 그리고 무엇보다 돈 문제 때문에 마갑은 포기할 수 밖에 없어서 생존성에 한계가 있다. 이 문제는 후술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다. 거기다 화살 가격도 절대 싼 것이 아니다. 화살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현대에도 화살 가격이 한 발에 수천원을 호가한다. 이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화살을 계속 소모하면 현대 미군이 한 발당 가격이 몇 억원을 넘어서는 토마호크 미사일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적을 돈으로 깔아죽이는 전술을 유목민이 쓴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2. 충격력이 없어서 적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다.
치명적인 단점이자 유목민 궁기병이 그토록 강력했음에도 정주민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없었던 이유다. 스웜 전술의 요점은 경기병으로 투사무기로 적을 공격해서 이쪽 피해는 최소화 하면서 빈틈을 만들고, 전투는 못한 채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당해서 사기가 떨어지고 진형이 무너진 적에게 직접 공격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해서 끝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돌격에 필요한 돌격 부대가 없거나 적을 충분히 상대하기에 충격 기병의 전투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적이 이 악물고 버티면 궁기병만으로 끝을 못낸다. 궁기병이라고 돌격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전문적인 돌격부대도 아니고 상술했다시피 유목민은 아무래도 무장이 훨씬 빈약해서 돌격할 때 입을 피해도 더 크다. 그래서 유목민도 어느 정도 돌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충격 기병을 보유하려고 했고, 유목 제국은 약탈과 정복으로 충분한 생산력을 갖추면 정주민 같이 중무장 기병을 육성했다. 
3. 대기병 전투력이 떨어진다.
스웜 전술의 핵심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거리를 두고 싸운다는 것인데 같은 기병에게 이런 장점을 살리기 어렵다. 말을 달리면서 뒤로 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상대가 기병이어서는 치고 빠진다는 전제가 성립이 안 된다. 결국은 그냥 맞서 싸우거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운다면 당연히 일단적인 스웜 전술은 살릴 길이 없이 보통의 기병전이 되기 때문에 유목민 특유의 마상 전투술을 살리기도 어렵다. 정주민도 일반적인 마상 전투술은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습득 가능하다. 정주민 국가가 작정하고 기병을 키우면 경제력이 훨씬 좋기 때문에 무장이 좋고 덕분에 중장 기병 육성과 유지도 수월하다. 이래서 스웜 전술을 쓰려고 했다가 기병 돌격을 당해서 무너지기도 하고 공격 마지막 단계에서 돌격을 하는 시점에 중장 기병으로 맞돌격 걸어버리면 답이 없다. 여기다 그 우월한 경제력으로 중장 기병도 육성하면서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면 정주민이 고용한 궁기병이 맞 스웜으로 상대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거나 돌격 단계로 이행할 때 정주민의 자랑거리인 돈 쳐발라서 육성한 마갑까지 입힌 중장 기병이 창과 칼을 세우고 돌격해버린다. 
4. 적절한 공간과 넓은 전장이 필요하다.
기병 자체가 넓은 기동공간과 평탄한 지형을 필요로 하지만 스웜 전술의 궁기병은 적을 최대한 공격하기 위해서 더 넓은 기동공간이 필요하고 치고 빠지기 위해서 속도 유지를 위해서 지형지물도 최대한 제약이 없어야 한다. 궁기병이라고 무한정 치고 빠질 수 없고 유목민이라고 진지가 없는 건 아니다. 궁기병도 말이 지치면 갈아타야하고 중간에 쉬기도 하고 화살이 떨어지면 재보급도 받아야 한다. 이런 재보급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걸 노리고 공간을 장악해서 밀어붙이면 보급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밀리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후방에 있는 거점부터 공격해서 전투 지속 능력을 차단해버리는 방법도 있다. 당연히 이런 적의 우회 기동의 위협이 있는 언덕, 산악, 숲 등의 지형은 전장을 제한하고 기동성을 약화시키는 등 스웜 전술을 약화시킨다. 이를테면 온 나라에 산과 계곡 밖에 없는 한반도
5. 일반 궁병에 비해 사정거리가 짧다.
궁기병의 실제 전투거리는 1m~20m 내외로 일반 궁병에 비해 매우 짧았다. 말을 타면서 활을 당기려면 지상보다 2배는 많은 힘과 허릿심이 필요한 데다가, 말의 흔들림으로 조준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에게 잘 훈련된 궁병이 있다면 더 멀리서 활을 쏴 대응하므로 스웜전술의 의미가 없어진다. 특히 화기가 보편화된 이후에는 이 문제점이 극대화되어 궁기병이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경향은 총이 활을 대체한 시대 이후에도 여전한데 기병용으로 제작되어 현대에도 휴대 편의성이 중시되는 병종에서 사용되는 사용하는 카빈 소총은 동시대의 보병용 소총을 사거리나 정확도 측면에서 근처에라도 따라가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예 들고 움직이는걸 반 쯤 포기하다시피 한 저격총이나 기관총을 상대로 정면에서 카빈 들고 돌격을 하는건 그냥 자살행위가 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보병에게 보호받는 궁병이 궁기병과 ''전투'하는데 가장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맞기병 전략을 통해서 기동성마저 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매우 악랄한 명성을 떨치게 된 전술이라 넷상에서는 일종의 무적의 필살전술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사실 전술적으로는 그다지 특이하거나 괴상한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원사무기를 활용한 소모전에서의 우위 개념이 정주민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무지막지한 기병의 규모와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강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멀리서 쏘는 활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용한 병기라는 것을 모르는 군대는 없다. 이론적으로는 상대방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원거리 무기를 동원하여 사격전을 강요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형국으로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정주민족의 군지휘관들도 개나 소나 다 알고 있었고, 특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궁기병이 유리하다는 것 또한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제반 경제적, 사회적 여건 상 대병력을 전부 기병화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병이 큰 부분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고, 발로 뛰는 보병들을 궁병화 해봤자 스웜전술 같은 일방적 소모전의 강요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중심 꽉 잡힌 전열을 이루고 회전을 치루는 형식으로 발전한 것 뿐이다. 

따라서, 정주민족 군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의 스웜전술 위주 유목민 기병전력과 맞붙게 되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 당하는 형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기마민족 기병이라고 해서 스펙 자체가 넘사벽이라 이기기 힘들었던 게 아니라, 앞서 거론한 이유 등으로 인해 정주민족의 군대는 기병만으로 대병력을 편성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동수의 군대가 대치하는 경우 적의 후퇴를 추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병전력이 보병전력과 분리되어 고립 및 각개격파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고립→기병격파→보병소모의 패배를 보여준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카르헤 전투(53 BCE).

그러한 각개격파를 우려하는 경우 당연히 원거리에서 사격전을 유지하는 궁기병 집단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대가 전체적으로 일방적 소모를 강요받게 되고, 그렇게 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 빈사의 먹이감을 노리며 주변에서 맴도는 하이에나나 머리 위를 도는 독수리떼처럼 퇴각도 제대로 못하게 괴롭히는 방해전술(harass tactic)이 이어지면서 소모의 악순환이 거듭된다. 

즉, 여러모로 유목민의 궁기병 위주 스웜전술은 야전(野戰)에서 매우 효율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웜전술이 무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던 지역의 정 반대편의 "변경"도 마찬가지라, 유럽에서도 대체로 유목민의 진출은 정주민족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여기지 않았던 스텝 지역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스웜 전술이 상대하기 불가능한 무적의 전술이었으면 진작에 온 세계를 다 정복을 했을 것이다. 단, 중국의 경우는 정주민족 대 유목민족으로 보면 안 되고, 근본적으로 체급차이에서 오는 지구력 문제가 컸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야전에서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형태의 군대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유목민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그 이상 더 큰 결과를 이룩하기는 불가능하도록 제약을 가하는 족쇄의 역할도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즉, 스웜전술의 강점은 곧 스웜전술의 약점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사격전을 통한 소모전" + "기병을 활용한 그러한 소모전 효율의 어마어마한 뻥튀기"의 형식을 취하는만큼 스웜전술이 노리는 방식의 소모전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에는 전무했다. 

즉, 몇 가지 핵심을 정리한다면:
(1)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 그 스웜을 무리하게 추적하지 않는 것
(2) 추격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사격전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
(3) 나아가, "피해를 당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 사격전에서 오히려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면 스웜전술은 무력해지기 마련이었으며, 실제로 유목민과 수 천년을 싸우면서 자기 영역을 지킨 정주민족들은 동방이건 서방이건 모두 이 기본을 지켜가며 성공적으로 자기 영역을 방어하고 유목민 진출을 막아냈던 것이다. 

가장 좁은 형태로는, 전술적으로 다수의 궁병이나 총병을 배치하고 대기병 방어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상궁은 좁고 흔들리는 말 위에서 쓰기 위해 작고, 그만큼 사정거리도 짧다. 정확도도 낮으며 때문에 지상에서 활을 쏠 때보다 훨씬 가까이 접근해야 유효타를 날릴 수 있다. 당연히 연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반대로 궁병은 활을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으니 사정거리가 길고, 더 밀집할 수 있으니 같은 면적을 점유한다면 기병에 비해 더 많은 화살을 날릴 수 있다. 훈련도가 높다면 사격통제를 통한 일제사격과 장전이 교대로 이루어지니 연사를 통해서 공격횟수는 더 늘어난다.  

즉, 순수한 사격전의 능력에서는 궁기병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궁병이나 총병전력을 갖추고, 상대방 사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기병의 급습에 대항할 수단을 갖추면 되는데, 즉, 일반적인 야전 형태의 싸움을 거부하고 진지구축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그러한 전술을 전략적 단위로 업그레이드하면 변경 요새들을 중심으로 하는 요새망의 구축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거점을 막을 수는 있어도 약탈은 막지 못한다"라면서 스웜전술이 본질적으로는 대처 불가능하다는 방향의 서술이 있었으나, 그것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은 조(趙) 최후의 명장 이목이 진(秦)에 압박당하는 암울한 국가적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변경에 부임하여 제대로 거점방어를 수행하다 연합부족들 10만명을 탈탈 털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늘 그런 식으로 유목민들을 성공적으로 막아왔다. 또한 약탈을 한다는건 정규군이 거점을 지키는 동안 농민들의 재산은 속절없이 털린다는걸 가정해야 하는데 기병 털어먹는 보병으로 유명했던 스위스 용병의 원래 직업은 다름아닌 농민이었다. 변경의 농민이 순한 양 같았을거라 생각하면 매우 오산이다. 

즉, 동양이든 서양이든 유목민을 상대로 한 싸움은 종례의 선형방어(line defense)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야만족을 상대로한 로마군의 방어전략의 발전과정에서 점점 선형방어 개념인 "벽(limes)" 개념이 퇴색된 것도 이러한 예시의 하나. 물론 그 선이 명나라시대의 만리장성 수준으로 상상과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지면 좀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앞서 언급한 유목민의 근본적 한계로 인하여, 야전에서는 매우 강한 형태의 군대를 운용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군대가 사시사철을 작전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이러한 부족제적 세력에서 군대는 해마다 정례적으로 약탈에 동원되는 것이기에 ('약탈경제'라는 말이 있는 것을 상기해보라), 약탈은 정치적이거나 신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존과 생활상의 문제였기 때문에 강력한 방어선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압한다"라는 의지를 애초에 기대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약탈 캠페인(campaign)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면 부족장 권위의 실추가 따라오기 마련이다.(먹고 살기 위한 약탈인지라, 리턴이 크면 부족장이 가지 말라 해도 가고, 리스크가 크면 부족장이 뭐라 해도 안 가는 형태다.) 

또, "창칼을 부딛히는 것만이 싸움"이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면, 이미 손자도 모공편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했듯, 싸우지 않고 전력을 보존하면서 상대방의 전략적 목표달성을 완전히 어그러뜨려놓는 정주민족들의 강력한 거점방어 전략은 정주민족이 유목민을 야전에서 상대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유목민들에게는 무지막지하게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야전에서 스웜전술에 정면으로 맞서서 격파하기 힘들다면, 야전을 거부하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 지연전으로 맞상대하는 것. 

그러한 효율성에 비한다면, 소규모 경작지가 자잘하게 약탈당하는 정도는 정주민족의 입장에서는 피해라고 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애초에 유목하지 않고 안정된 기반을 이룩하여 산출 가능한 경작물과 잉여생산물로 막대한 경제적 산물, 여력, 인구를 자랑하는 것은 정주민족의 전략적 이점이다. 평생을 말 위에서 사는 덕분에 강한 기병전력을 갖게 된 것이 유목민들의 전략적 이점인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잘한 피해 따위 금새 회복하는 막강한 경제적 여력을 100% 발휘하여 약탈하러 쳐들어온 놈들에게 솥바닥이나 긁으라고 내주고, 철통같이 방어하여 아무런 소득이 없도록 한 결과, 그 침략자들이 그 해의 약탈이 매우 부실해지고, 이득도 없는데 수고만 하고, 부족장 권위는 실추되고, 내분과 불만으로 허송세월하도록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면 그거야말로 효율 100%의 스웜전술 상대법이며, 실제로 역사상 유목민과 맞붙은 민족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대처를 해 온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정주민이 유목민에 비해 부유하다지만, 변경의 소규모 정착지를 약탈하는 수준으로는 대규모 약탈대를 구성할만한 동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약탈로는 대규모 약탈대 코에 붙이기에도 모자라며, 따라서 소집단 단위의 약탈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물론, 정주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규모 약탈대는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고 그 피해가 크지도 않다. 당하는 정착지 주민 입장에서야 피눈물이 날지도 모르지만... 아니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처럼 수시로 예방전쟁의 개념으로 먼저 쳐들어가서(….) 아예 마적떼 같은건 만들 궁리도 못하게 유목민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수시로 박살을 내버리고 유목민을 알거지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결국 대규모 약탈대를 만족시킬만한 약탈물을 얻기 위해서는 재화와 물자가 집중된 성읍이나 도시를 터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런 성읍과 도시는 당연히 요새화 우선도가 높은 거점이 된다. 그리고 유목민과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생산력을 가진 정주민족의 요새화는 많은 경우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튀르크족에게 시달리던 비잔티움 제국의 축성술은 왠만한 도시의 성벽은 두겹씩 둘러쳐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이 튀르크족에게 석권된 이후에도 이런 요새화된 도시들은 수십년 이상이나 제국의 기치를 올리며 버텨냈다고 할 정도이고, 중국같은 경우 만리장성 처럼 역사에 위업으로 남을 정도로 엄청난 성벽을 건설하기까지 했을 정도인 것이다. 또한, 유목민족보다 훨씬 인구가 많은 정주민의 경우 기병의 숫자에서는 유목민보다 밀리더라도 보병을 포함한 총 병력의 숫자에서는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기병이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는 평야에서의 야전과는 달리 요새를 거점으로 한 방어전에서는 보병도 충분히 기병을 위협할 수 있는 전력이 될 수 있다. 물론 평야에서도 보병이 팔랑크스 같은걸 들고 나오거나 테르시오와 유사하게 창병으로 궁병을 보호하는 방진을 구성한다면 이 경우에도 기병의 절대적 우세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유목민의 경우 야전에서는 아주 강하지만 생산력과 공학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공성전에서는 그렇게까지 강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런 요새화된 거점을 들이받는 것은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약탈도 사업인데 빨리 한탕 크게 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공성전 한다고 죽치고 앉아있는다거나, 짜잘한 마을이나 털자고 한도끝도없이 돌아다니고 싶겠는가? 자칫하면 약탈대가 고향을 비운 사이에 남겨둔 가족이나 소중한 목초지를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또한 주변 마을들을 철저히 털고 돌아다닌다 치더라도 원래 도시는 교통의 요지에 형성되기 마련이니 정주민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가능한 한 주변 영역을 통제하기 쉬운 곳에 거점을 건절했을 것이고, 여력이 있는 상태라면 이 거점을 기반으로 약탈대를 역습하여 타격을 입히려고 시도할 것이다. 재수없으면 지리를 잘 파악한 정주제국의 군대에 몰려 스웜전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험지같은 곳으로 외통수에 몰려 섬멸당할지도 모르는 것. 이렇게 되면 고향에 남겨둔 자식들이 "우리 아부진 남족나라가셔써! 옷이랑 음식이랑 뺏어오신다고 해써!" 를 외치며 노예로 끌려가는 신세가 될 지 누가 알겠는가.(...) 결국 정주민족에게 유목민의 약탈을 막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던 것처럼 유목민에게도 정주민을 약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세상엔 쉬운 일이 없다. 

즉, 요약한다면, "유목민이 침입했는데 바로 격퇴 못시키고, 지방을 털고 다니도록 냅둘 수 밖에 없으니 대처가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선형방어 개념으로 "이 방어선 안에 침입을 허용하면 패배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새화한 원숭환의 영원성 하나로 청의 만주팔기를 수성전으로 도륙내버린 것이 이 전략의 전형이다. 면 형태의 영토를 지배하는 국가, 즉 <정주민 국가>에서는 각각의 국가가 지배하는 면과 면이 만나는 선이 발생하게 되고, 이 선이 바로 국경선으로써 선형 방어를 위한 방어선이 된다. 따라서 정주민 국가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빼앗으려는 전쟁, 즉 상대가 지배하는 면을 빼앗아 내가 지배하는 면에 포함시키려는 전쟁이며, 이는 다르게 말하면 상대의 지배영역과 내 지배영역을 나누는 경계선을 상대 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내 영역에 상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선형방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
하지만 이런 정주민 국가들과는 달리, 유목민들의 사회상은 '면 위를 떠돌아다니는 점'의 형태이고, 유목민의 영역이란 그들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이다. 물론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란 십중팔구는 결국 약탈이므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예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싶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무리 농경정주민의 인구와 경제력이 유목민에 비해 우세하다 해도 하나의 점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유목민에 대해 자신들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전체에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배치해둘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설령 유목민들이 자국의 영역 내를 들락거린다고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면 자체를 지배하려 드는 다른 정주민 국가와는 달리 유목민들은 약탈이나 한 뒤 다시 나갈 뿐, 그 영역 자체를 빼앗아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려 들지는 않기 때문. 정주민 입장에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주민의 영역에 대한 유목민의 침범이 너무 심해지고 일부 유목민들이 아예 그 자리에 눌러앉기 시작하여 정주 국가가 해당 영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데 이르거나, 유목민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이 영토의 중심부(심장부)에 이르는 경우, 또는 본 문단에서 여러번 언급된 것처럼 유목민 사이에서 원대한 시야를 가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유목민을 규합하고 이전까지의 약탈 켐페인을 정복 켐페인으로 전환한 경우(=정주민의 영역 자체를 빼앗아 배타적으로 지배하려 드는 시도를 시도한 경우)이다.

결국, 유목민 대 정주민의 관계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의 영역을 가르는 선 내로 침입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목민과 정주민의 역학구도 내에서 이런 침입-약탈은 일상적인 상황의 일부일 뿐, 정주민 국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요약하자면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 변경 정착지의 약탈은 상시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의 일부였을 뿐이고, '영역에 대한 지배력 상실'을 겪지 않으면 진짜 패배를 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통상적인 상황에서, 영역 자체의 상실은 거점 방어-요격 전술로 심하게 선을 넘은 유목민들을 털어주는 정도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유목민-정주민 관계에서 "유목민이 침입했는데 바로 격퇴 못시키고, 지방을 털고 다니게 냅둿으니 정주민의 패배" 라는 식의 관점은 '양측의 교전중에 한 쪽의 병사가 하나라도 죽었으니 그 쪽의 패배" 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관점이라는 것.

즉, 전술적 영역에서 무적처럼 보이지만, 스웜전술은 전술단계에서의 싸움을 거부하고 전략단계의 상위의 싸움으로 끌어올려버리는 것으로 무력화되는 것이 역사적 상례라고 할 수 있다. 스웜전술에 맞서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만큼,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도 스웜전술을 파해하기 위한 정주민족의 전략적 포진은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례"가 깨지는 것은 사실 정주민족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유목민족들의 문제였다. 유목민족들은 다행히도 거의 항상 폭력적이고 강력하며 잔인하지만 근시안적이고 전략적 안목은 떨어지는 족장들을 선택해왔지만 그들의 일반적인 족장선출방식과 다르게 무식하지 않은 족장이 약탈 캠페인을 장기적으로 이끌 수 있는 견고한 지구력을 가진 정치체제를 단 한세대만에 이룩해내버린 족장들이 극소수나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정주민족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게 된다.

운빨 주사위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것은 약탈 캠페인을 장기적으로 끌 수 없는 유목민족의 정치적 약점을 이용한 지연전이다. 분명 전투에서도 지고 있고 피해는 가중되고 있지만 유목민족의 약탈 캠페인의 내구력은 한계가 있고 한정된 시간안에 막대한 약탈이익을 얻지 못하면 지리멸렬하고 족장의 권위도 실추되어 내전이 발생한다는 점을 노린 방어전략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유목민족 내부에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뛰어난 지략을 가진 족장이 갑자기 튀어나와 유목민 답지않은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캠페인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추게되면 재앙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그게 바로 묵돌, 야율아보기, 완안아골타, 테무진, 누르하치, 오스만 1세 등의 유목 제국의 창시자들이다.

단, "상례"가 깨지고 약탈 캠페인이 정복 캠페인으로 전환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목민 내부에서 강력하고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날 때 이루어지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정주민들로써는 전혀 손쓸 방법이 없고, 오직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정주 제국들은 충분한 여력이 있을 때에는 유목 부족들 사이에서 이런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유목민들을 관리 해왔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이이제이로써,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시적 분열 상태인 유목 부족들 중에서 한 부족을 선택하여 작위나 관직등을 통해 권위를 부여하고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다른 유목민들을 억누르고 관리하게 한 것. 물론 이 과정에서 이이제이의 대행자 역할을 담당한 부족은 계속 세력이 성장하게 되지만, 그 세력이 정주 제국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기 전에 후원 대상을 바꿔서 이전까지 후원대상이던 부족을 역으로 억누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유목민족 특유의 상시적 분열 및 대립상태를 고착시켜 강력한 통일체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캠페인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 란 결국 '유목민족의 상시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한 통일적 정치체제'이고, 이것을 이뤄내야 정주 제국을 휩쓰는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날 수 있다면, 정주제국의 통치자는 이 약점을 조장하고 고착시킴으로써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나 제국을 위협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강력한 유목 제국 창시자들은 주로 인접한 정주 제국이 혼란이나 쇠락상황에 빠져 유목민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강력한 정주 제국이 유목민들에게 계속 통제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그 견제를 극복하고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난 상황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유목민들 역시 바보가 아니므로 이런 '이이제이'가 자신들을 견제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모를 리야 없었겠지만, 안정기의 정주 제국은 유목민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강력한 문화적 권위까지 가지고 단기적이지만 확실한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 '잘하면 정주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잘하면 세력을 규합하여 잘하면 유목민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고 잘하면 정주 제국을 정복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는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확실한 이익을 가지고 주변의 경쟁세력들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게다가 설령 원대한 시야를 가진 위대한 유목민 지도자가 나타나 정주 제국에 억눌려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이제이의 떡밥을 받아먹지 않고 유목민의 규합을 시도하더라도, 유목민에 대한 정주 제국의 견제력이 유지된다면 손을 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덜 원대한 시야를 가진 덜 위대한 다른 유목민 지도자와 유목 세력을 후원하여 윈대하고 위대한 꿈을 주저앉히려 시도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정주민과 유목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며 서로의 빈틈을 엿보는 관계였지 결코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 명확하고 압도적인 우세를 가진 관계가 아니었으며, 이러한 양자간의 관계에서 '상시적으로' 우세한 입장에 있던 것은 오히려 정주 제국이었다는 것(=유목민의 약탈 캠페인은 정주제국의 변방에 머무르고, 제국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역학 관계가 '일시적으로' 뒤집혔을 때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유목민들의 힘이 주변의 정주 제국을 휩쓸고 역사를 바꿔버렸던 것이다. 이 점에서 유목 제국의 탄생이 역사의 큰 흐름 구비구비마다 그 방향을 바꿔버릴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런 '특별한 사건' 에만 너무 시선을 빼앗겨 정주민과 정주 제국이 유목민과 유목 제국을 도저히 막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짓밟혀 온 입장이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특별한 사건' 은 말 그대로 특별한 사건이니까 가끔씩만 일어나는 것이고, 가끔 특별한 일이 일어난 순간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인 것도 맞지만 그 못지 않게 역사의 많은 부분은 '상례적인 상황' 들로 채워져 있는 것.

결국 앞서 말한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역사상 이걸 해낸 유목민족 족장이 얼마나 드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유목민족들은 안정된 정치체제가 없으며 갈등 원인은 엄청나게 산재되어 있다. 유목민족은 씨족 이외에 집단을 아예 이루지 않는데 그 때문에 갈등을 해결할 방법 자체가 전쟁밖에 없다. 유목민족의 사회와 가장 비슷한 사례가 바로 소말리아다. 소말리아의 목동들은 소를 키우기 위해 요새화한 보루에 기관총까지 두고 소를 키우는데 이렇게하지 않으면 다 빼았겨버리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 칸과 자무카의 연합이 말 몇마리 도둑질 때문에 결정적으로 틀어진 이유도 유목민족들이 갈등해결을 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 한정된 초지를 둘러싸고 씨족단위로 끊임없이 전쟁은 자신의 아들들의 유목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체로 농경민족을 털러갈 수도 있겠지만 농경민족은 저 멀리에 있고 바로 옆 부족은 말 달려서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에 있다. 누구와 싸우게 되겠는가? 현재 아프리카에서 유목을 하는 유목민들도 집단적으로 자기들끼리 혹은 농경민족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게 유목사회가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내전의 근본원인이다. 가축들은 어마어마한 물을 소모하고 잠깐만 있어도 목초지를 거덜내버린다. 애초에 이동하는 것 자체가 가축들을 한지역에서 키우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이다. 중앙아시아건 사우디아라비아건 아프리카건 이들이 사는 지역은 그렇지않아도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다. 농사가 안돼서 유목을 하는 것인데 농사도 못할만큼 척박하고 물이 적은 땅에서 가축을 키우는데 이들이 물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겠는가?

즉, 이웃 부족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로 한정된 자원(물, 풀, 사냥감 등)을 축낸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적대적인 눈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무작정 원정을 떠나면 내 재산과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다. 오로지 족장의 권위만 믿고 장기 원정을 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약탈이 별 재미없어지면 끌고나온 족장의 권위가 실추되고 그 권위가 실추돼서 모두가 족장을 더이상 겁내지 않게되면 고향에 놔둔 내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다. 한명이라도 돌아간다면, 그놈이 내 가축과 가족을 털지도 모르니 내 집을 지키기위해서라도 돌아가야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주민족들은 유목민들이 우르르 몰려와도 버티기만 하면 대충 지나가리라 하면서 버티는 전략을 채택하지만 이 역사상 거대 유목 제국들을 건설했던 족장과 그 후계자들은 일반적인 약탈 캠페인과 다르게 이러한 거점을 고립시키고 차츰차츰 함락시켜나가는 점령 캠페인으로 바꾸어버릴만큼 강력한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말해 권위만으로 소말리아를 딱히 경찰도 동원하지 않는데 범죄가 일어나지않는 강력한 통제국가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몇백년에 한번쯤 이런걸 해내는 초인이 등장하는데 이런 족장이 탄생하게되면 유목민족의 국가가 발생하는 세계사적 대형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유목 제국이 탄생하면 이전과 같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거점을 막는 상황은 국토 전체가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거점 속에서 굶어죽기만을 기다리는 형세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거점들은 주변의 농지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장기간의 정복 캠페인이 가능해진 유목민족들을 상대로 더 이상의 보급과 식량공급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이전의 유목민족에 대처했던 거점방어전략은 오히려 손쉽게 각개격파를 당하는 자살행위로 돌변해버린다. 이런 점 때문에 역사상 손꼽게 남은 유목 제국은 일단 건립에 성공하면 믿을 수 없는 속도의 정복전을 펼치며 정주민족의 국가들을 단체로 갈아버리며 거대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에 대한 정주민족의 방어적 대처법은 어디까지나 핵심지역을 일정시간동안 지켜내면서 유목민들의 정치적 취약함을 노리는 대처법이지 유목민족의 병력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스웜 전술의 핵심은 이탈이고. 이런 전투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스웜 전술을 펼치는 경기병들의 패퇴 후 재집결을 막을 수 없고 본진에 대한 깊숙한 진공은 자살행위에 가깝기에 시도할 수도 없다. 결국 일방적으로 약탈당하는 변방을 막으러 뛰어다니다가 국력이 차츰 쇠퇴하고 정벌군을 편성해서 나가도 정면에서 상대해주지 않고 집요하게 보급선만을 노리고 병력과 맞닥뜨려도 스웜 전술을 통해 피해를 강요하다 불리해지면 퇴각해버리는 이 유목민족들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스웜 전술은 분명 전장에서의 전술이지만 교전이 발생해도 압도적인 기동력을 바탕으로 불리한 전투는 회피하고 유리한 전투만 해가면서 전력보존과 상대국가의 국력소모를 강요한다는 전략적 측면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는 전술이었다. 

결국 유목민족이 정주민에 대해 가지는 우위는 이렇게 전술적인 측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 입장에서) 적이 우리 영역으로 쳐들어오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쪽은 조금만 정주민 세력의 방어가 허술해져도 바로 치고 들어가 털어먹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전략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전근대 국가가 포괄적으로 방어할 방법은 결국 하나가 무너져도 나머지는 버틸 수 있는 여러겹의 방어선을 깔아두고, 봉화 체계를 비롯한 다른 연락 수단을 촘촘히 깔아둔 다음 유목민이 쳐들어와 털어먹어도 피해를 한정시키고 즉각 반응할 수 있는 대규모 단계적 방어 체계를 평소에 유지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도 정주민 국가가 해당 유목민들의 근거지로 쳐들어 가 아예 박살내지 못하는 한 원천봉쇄라 하긴 힘들지만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기적인 해결책이다. 근세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확장할 무렵 남쪽의 크림 칸국과 이반 뇌제의 정복 이전 카잔, 아스트라한, 그리고 노가이 한국 같은 남쪽 변경 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타타르계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현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모스크바 일대 까지 깔아 놓은 대 목책 방어선(Большая засечная черта)이 이런 전략적 방어 체계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통한다. 

이런 소규모 전진 방어 기지들의 네트워크 시스템은 일단 기지 하나 하나는 다시 만들고 복구하는데 큰 자원을 소모하지 않으니 유목 세력에게 함락당해도 피해가 크지 않으며, 나아가 이반 뇌제의 현대 타타르스탄 정복도 그렇고, 훗날 크림 칸국 정복 때도 그랬듯이 이를 갈고 있던 정주민 국가가 훗날 국력을 끌어모아 아예 유목민들의 근거지로 쳐들어가 참교육을 시켜줄 대규모 한타 원정을 벌일 때 중간 병참 기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의 다중 방어선은 짓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그 필요성을 주민들에게 설득하는 것도, 실재로 저런 타격 흡수→피해 상황 보고→대응반 소집→역습이란 근대 군대와 정부 입장에서도 큰 부담인 대규모 병략 체계를 유지할 만한 국력이 있을 때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 러시아 만큼의 대국이 아닌 한 저런 방어선 짓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미 예산이 파탄나기 일쑤다(...). 괜히 화약무기와 근대적 병참 체계 이전 그 많은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한 정주민들의 국가들이 유목 세력의 침략에 치를 떨며 갈려나간게 아니다. 


결국 위에 서술한 방법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지 피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동로마는 끝내 투르크에 의해 멸망했으며 십자군 국가들도 해안에서 내륙 방향으로 끝내 깊숙히 침투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약탈에 시달리다 멸망했다. 러시아와 중국도 수천년간에 걸쳐 유목민족에 의해 고통받았는데, 이들이 이들을 괴롭히던 유목민족을 끝장낸 방법은 결국 같은 경기병이었다. 기병은 기병으로밖에 대항할 수 없다. 흔히 떠올리는 수레로 바리케이트를 두르고 목책을 세우거나 장창으로 방진을 만든다는 대기병 전술은 전술적인 차원에서의 해법이지, 머나먼 유목민족의 땅으로 쳐들어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한 채 이러한 기동력 떨어지는 보병으로 기병들을 상대한다는 건 전략적 차원에서는 자살행위다. 한무제 당시 이릉은 보병 5천으로 8만에 이르는 기병을 상대로 매우 훌륭히 싸우기는 했으나 끝내는 패배했다. 물론 훌륭히 싸울 수 있었던 원인은 기병들이 이릉의 보병을 얕보았기 때문이지 보병이 10만이었다면 애초에 싸워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같은 한무제 시기 위청과 곽거병에게 주어진 기병 10만은 오르콘 강 상류의 바이칼 호까지 침투하여 흉노의 배후지였던 목초지를 점거하고 부락들을 불사지르고 학살하여 흉노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결단내어 버렸고 이후 흉노의 국력은 크게 저하하여 한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하게 된다. 

농경민족의 기병으로 더 우세한 유목민족의 기병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물량과 전투의지의 문제가 있다. 일단 아무리 유목민 기병이라도 같은 기병을 대상으로는 일격 이탈을 할 수 없다는 점. 개별 병사의 속도는 더 빠를지는 몰라도 군대의 움직임은 둔중해질 수 밖에 없고 또 싸우기전에 병력을 퇴로에 배치해두는 방법으로 충분히 유목민족 기병의 병력을 섬멸시킬 수 있다. 스웜 전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전선에서의 병력유지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적의 병력을 소모시킬 수 없었다. 

전략적으로도 보병 병력의 진군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속도다. 따라서 진군의 소식이 들려오면 유목민족의 게르가 이탈하는데 별 문제가 없지만 경기병 대군의 진군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노약자도 섞여있는 사람들이 가축을 몰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정도의 속도로 밖에 움직이지 못하듯 유목민족의 본거지는 기병에게는 결국 따라잡힌다. 실제로 곽거병은 한나라로부터 전혀 보급을 받지 못하고 현지조달로 막북원정을 성공시켰으며 러시아 카자크의 현장약탈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점 때문에 현장보급품을 약탈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없어서 보급을 꺾는다는 방법도 효력이 떨어진다. 결국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이 작정하고 모은 대군과 결전이 강요된다는게 핵심.

그리고 물량은 작정하고 쏟아내면 곡물을 사람 먹이는 대신에 말을 먹인다는 방법으로 생산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농경민족이 훨씬 더 많은 경기병을 쏟아낼 수 있었다. 곽거병의 흉노 원정 당시 동원한 기병이 10만, 소모한 군마가 14만필이었고 크림 칸국을 박살낼 때 러시아가 동원한 카쟈크와 제후국들의 합계 병력은 15만에 달했다. 유목민족이 동원할 수 있는 기병보다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면 전략적으로 유목민족의 일격이탈 전술을 봉쇄할 수 있고, 전술적으로도 스웜 전술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위해서 백병전으로 섬멸할 수 있다. 이를 수행한 러시아와 한나라는 십자군과 동로마의 운명과 다르게 유목제국을 제압해내는데 성공했다.

재미있는 점은 농경민족이 강요하는 이런 결전에서는 유목민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물량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유목민족은 정치체제가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대규모 병력을 자주 모을 수 있었던 원인은 약탈의 기대감이었다. 종군할 경우 많은 재보와 가축을 얻을 것으로 보고 많은 유목민들이 유력한 족장의 소집령에 응했지만 대규모 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칠 목적으로 병력을 소집할 경우 자신의 가축과 가족들도 위험한 상황에서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는 압도적 기병 대군들 상대로 절망적인 전투를 하러 유목민들은 모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쉽게 집과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은 각개격파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유목민들은 땅에 대한 집착이 정주민들보다 월등히 약했고 이것이 결국 최후의 유목제국인 준가르처럼 정주민으로 변신하지 못했던 유목 제국이 최종적으로 모두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현대적인 스웜 전술은 흩어진 소규모 부대를 적재적소에 적절히 집합시켜 지역적 우월성을 얻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예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은 레이더와 각종 관측 정보를 활용해서 적재적소에 편대를 잘 배치해 선방했다.

 

 

스웜 전술 사례


카르헤 전투는 가히 스웜 전술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보병 위주의 로마군이 아득바득 버텨냈으나 수레를 통해 화살을 보급받아가며 결국 로마군의 전의를 꺾어냈다. 다만 여기서도 궁기병만으로 로마군을 격멸하지 못했고 충격 기병과의 조화로 로마군 전열을 붕괴시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반대로 필로멜리온 전투는 스웜전술에 대한 수비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잘 훈련된 동로마 중보병들과 장궁병들이 수비와 반격을 완벽히 해내었고, 궁기병들이 가장 취약한 화살이 떨어지고 재보급을 받아야 하는 타이밍을 핀포인트로 노려 카타프락토이 예비대를 투입해 궤멸시킨 대승이었다.

의외로 동로마의 대패로 유명한 만지케르트 전투도 스웜 전술의 장점과 한계를 잘 보여주는 전투다. 동로마군은 굳건한 대열을 짜고 튀르크군의 진영을 향해 전진했고, 반대로 투르크군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스웜 전술로 동로마군을 괴롭혔다. 튀르크군은 동로마군의 전열을 무너트리는데는 실패하고 진영도 점령당했지만 동로마군도 양익에 큰 피해를 입고 더이상 전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승패가 명백히 가려지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후퇴하긴 했지만 아직 예비대가 멀쩡했으므로 튀르크군도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전술적으로는 튀르크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동로마군을 상대로 피해를 누적시켜 물러나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본진이 점령당했을 뿐만 아니라 충격력의 부재로 적의 전열을 무너트릴 능력은 없었다. 다만 이 때 동로마군 내부에서 배신이 벌어져 황제 로마누스 4세가 튀르크군에게 붙잡히는 참사가 벌어졌으며, 동로마군의 피해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후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아나톨리아 내륙지대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튀르크 기병들은 서유럽 기사들을 맞이하여 스웜 전술로 압도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중무장한 전투기계인 기사를 상대할 중무장 기병이 없어서 계속 화살비만 날려댔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도 십자군은 피해를 입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응원군이 달려오는 바람에 오히려 역포위된 튀르크군이 격파된 사례가 있다.

이미 제정 시기부터 궁기병에게 당해와서 이골이 난 동로마 제국은 유목세력들을 막기 위한 노하우가 뛰어났는데, 위에서 궁기병의 대처법으로 등장했던 장궁병 양성, 중보병 우주방어 이후 돌파, 카운터 궁기병, 요새화와 봉화 설치 등이 모두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한 해법이었다.

동로마는 보통 궁기병은 페체네그, 알란, 쿠만족 등 정교회 내지 가톨릭 신자비율이 많은 기마민족이나, 모태신앙이 정교회인 튀르크인들을 징집하여 부대를 만들었고, 궁기병과 돌파용 경기병의 병종구별이 확실했다. 동로마인 토박이 기병대는 보통 카타프락토이같은 중기병이였지만, 이들도 최소한 콤니노스 왕조 시기까지는 궁술을 필수적으로 교육받았었다.

또한 동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스웜 전술의 힛 앤 런을 막기 위해 종심을 따라 역참, 요새, 봉화를 완비했고, 마누일 1세 때 완공된 아드라미티온-니케아 요새 라인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전부 삼키기 전까지 뚫리지 않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이런 요새들은 보통 그리스의 불을 담은 수류탄이나, 거대한 요새포 형식의 트레뷰셋 혹은 노포를 장착했으며, 이들은 이슬람 군주들의 최우선 공격목표였다.

좀 예가 다르지만 3차 십자군 때 리처드 1세와 살라흐 앗 딘의 아르수프 전투.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왕조 군대는 유목민의 후예였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했다. 반대로 리처드의 십자군은 유럽식의 중무장한 군대. 아이유브 군은 일제히 접근해서 해안가를 행군하는 십자군을 공격했는데, 창, 화살, 다트 등 투사병기를 수도 없이 날렸다. 아이유브 군은 십자군보다 숫자도 많아서 거의 반포위하면서 압박을 높여갔고 행군중인 십자군은 반격을 위해서 이렇다 할 진형을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실로 놀라운 응집력을 발휘해서 계속 행군하며 아이유브 군의 압박이 거세짐에도 전열을 흐트려뜨리거나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아이유브 군의 공격은 직접적인 타격을 못주었는데, 십자군 중에는 몸에 화살을 11개나 달고 행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압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십자군은 한순간에 반격으로 돌아섰고 이 한 번의 공세로 아이유브 군은 와해되었다.

보다 직접적인 사례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벌어진 도릴레움 전투가 있다. 당시 이슬람 궁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펼치며 둘로 나누어 행군하던 일단의 십자군을 기습했지만 지휘관인 타란토의 보에몽과 노르망디의 로베르는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사상자가 꽤 나오기는 했지만 중세 유럽 군대의 특유의 중무장과 지휘관들의 적절한 대처로 다른 그룹의 십자군들이 지원을 올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이후 스웜 전술을 펼치던 이슬람 궁기병들은 유럽 기사들의 중기병 돌격에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사실 버티던 십자군들의 대형 일부가 뚫리기도 했는데 이슬람 기병들은 스웜 전술에 집착하느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소수가 돌입해서 십자군이 보호하던 비무장 순례자 일부와 약간의 병사들을 살상하는 데에 그치고 만다.

도릴라이온의 전투가 지휘관들의 즉흥적 전략이었다고 한다면, 필로밀리온 전투와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마이엔데르 강의 동로마 군은 궁기병에 대한 FM을 보여주었다. 일부러 궁기병이 스웜전술을 쓰기 쉬운 평야나 기동력을 보여주기 좋은 아나톨리아의 고지대를 피해서 먼저 평탄한 언덕들을 선택해 포진하고, 제 1진의 보병대에게 중갑을 둘러 화살에 대한 방어를 확실히 한데다, 1차 십자군에서는 보호하지 못했던 경보병과 비무장 인원 보급물자들을 방진 안으로 넣어 보호했으며, 궁기병이 스웜 전술을 계속하면서 지치고, 화살이 떨어지려 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 경기병과의 회전에서 절대우위인 중갑기병들을 투입, 궤멸시켰다.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패배 이후 설욕전을 펼쳤던 동로마 제국이 룸 술탄국을 개박살냈던 마이안데르 강 전투에서는 궁기병이 기동하지 못하게 일부러 강과 협곡 사이로 밀어넣고 카타프락토이와 궁기병, 장궁병으로 쌈싸먹는 완벽한 전략이었고, 수만이 넘는 룸 술탄국의 정예 투르코만 궁기병들이 박살나, 오히려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유럽 세계에서는 무시무시한 콘스탄티노플의 돈치트로 모병한 유목부족들의 궁기병을 외인부대로 가지고 있을수 있었고 수천 정도의 상비군으로 장궁병대를 보유할 수 있던 동로마였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무제 때의 한나라 장군 이릉은 잘 훈련된 보병들로 흉노족 기병들을 여러차례나 격파했다. 비록 이릉은 초원에 고립되어 결국 항복하기는 했지만 규율과 훈련을 갖추고 궁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투사병기를 갖춘 보병대열은 궁기병만으로는 격파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상대방이 중무장하고 감투정신이 높다면 멀리서 긁어대는 걸로는 효과가 미미하다.

바투의 유럽 원정군이 헝가리 왕국군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연합군과 붙은 모히 전투 역시 비교적 최근 연구로는 스웜전술은 오히려 실패로 돌아갔고 유럽식의 중무장 기병과 기사에 고전을 하고 바투 자신도 크게 위험했지만 수부타이의 기습 공격이 성공하므로서 헝가리 군을 붕괴시키고 승리를 했다 스웜전술은 절대 무적은 아니고 방어력이 튼튼한 중무장 기병과 보병은 절대 스웜전술로 상대하기 쉽지 않다.

 

 

 

 

 

 

 

고대 스웜 전술: 궁기병(Horse Archer)
알렉산더의 중앙아시아 작전

 

스웜전술(Swarm Tactics) ; 특정지역에 있는 타겟이 되는 적부대에 다수의 준독립적인 또는 독립적인 부대의 집중포위공격을 뜻하는말

적을 포위하는것은 언제나 탐나는 목표입니다. 포위공격은 적의 수송선을 끊고 적의 사기를 분쇄하고 퇴로를 차단합니다. 일반적인 포위공격과 스웜전술의 차이는 스웜전술/전략은 전투나 전쟁중 시작부터 집중포위공격을 목표로 삼고 전략및 전술기동을 하여 적을 포위섬멸하는것을 말하며 의도된바와 상관없는 기동에의해 고립된 적을 집중포위해서 공격을하는것을 말하는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독일의 전격전은 스웜전략/전술과 무관합니다. 기동전은 결과적으로 포위공격을 동반하지만 전격전의 주체가 되는 기갑부대의 초기기동및 주기동행동은 포위집중(Convergent Attack)이 아니라 전선돌파(Breackthough)후 핀서기동(Pincer moves)의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스웜전술과 측면공격을 동반하는 일반전술과는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부대가 적과의 교전을 위해 정면을 친 상태에서 기동부대가 적의 측면을 공격하면 일측면포위(Single Envelopments)를 한겁니다. 만약 정면과 적의 양측을 동시에 공격할수 있다면 양측면포위(Double Envelopments)를 한것이며 이는 스웜전술과는 무관합니다.


스웜전술/전략은 4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될수 있습니다.

분산 스웜전술 게릴라 전술 케이스
집단 스웜전술 고대 궁기병 케이스

분산 스웜 전략 ??
집단 스웜 전략 Ulm Campaign(나폴레옹 시대)


고대 스웜 전술: 궁기병(Horse Archer)

전술적 레벨에서 쓰여진 스웜전술의 예는 고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스웜 전술의 예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들이 사용한 궁기병 운용 에서 찾아볼 수 습니다. 이때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의 전투는 주로 유목민의 경기병군대와 정주문명국가의 보병주축의 군대의 대결구도로 나타납니다. 

스키타이족, 훈족, 아바족, 불가족, 마자르족, 투르크족, 몽골족, 코사크족 등 잘 알려진 기마궁수들을 거의 다 유라시아 스텝에서 배출해냈습니다.(그 당시 매우 소수의 군대만이 다양한 병종을 조합해서 사용하였고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이 또 다른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무장집단를 전투에서 만나는 예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텝 기마궁수의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함은 화약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유지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적이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 로마인, 프랭크인 또는 아랍인이던 스텝 기마궁수들은 대체적으로 잘싸웠습니다. 

불행하게도 고대시대에 사용된 스웜전술은 자료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하여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웜 전술은 주로 유목민들이 사용한 전술이기 때문에 양측 다 스웜전술을 사용한측 끼리의 전투에 대한 자료는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끼리의 대결은 몽고군의 화레즘 정벌(1219-1221) 그리고 몽고군의 13세기의 중동지역침입에서 살펴볼 수 있고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1260년 Ayn Jalut 전투에서 마멜루크들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몽고군을 저지한 예입니다.) 

매우 소수의 집단만이 다양한 병종을 조합해서 사용하였고 단일병종으로 구성집단이 또 다른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집단를 전투에서 만나는 예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중앙아시아 작전(329-327 BC)

알렉산더는 스웜 전술을 쓰는적과 싸우게 되는 최초의 서양측 지휘관입니다.

스키타이 유목민은 대체적으로 기마궁수를 사용한 스워밍 전술을 사용했고 헬스폰트를 도하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부대를 최초로 격파하기도 하는 장본인 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스웜전술에 대항할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 냈고 스키타이 기마궁수를 결국에는 물리쳤습니다.

알렉산더는 Gaugamela 전투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를 격파하고 나서 옛 페르시아 제국의 북동쪽 변방을 장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스피타메네스의 지휘하에 반란이 난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두개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알렉산더가 자자테스(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쯤)
강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을 때 강건너 북쪽에 거주하는 한 무리의 아시아계 스키타이인들이 나타나 알렉산더와 마케도니아병사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겪은 수많은 전투로 인해 얻은 상처로 뼈가 부서져 다릿살 사이로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고 있던 알렉산더의 그때 기분은 매우 좋지 않은 상태 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강을 건너 스키타이 인들을 공격하기로 했고 스키타이인들은 우리가 현재 “파르티아 전술”로 알고 있는 방법으로 이에 대응하여 더욱 빠른 기동력으로 적을 포위하고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화살로 공격하는 잇점을 활용합니다.

포위공격은 기마궁수에게 한번에 공격할 수 있는 목표물의 증가라는 잇점을 가져다 줍니다. 일반적인 스웜 전술을 사용하는 집단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포위망을 좁힌후 개개인의 기마궁수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면서 부대전체가 물흐르듯 천천히 교대하며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과 후퇴의 한 사이클을 펄스(pulse)
라고 합니다. 펄스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효과적인 스웜 공격이 가능합니다.

개개인의 기마궁수는 돌격해서 포위선 안에서는 화살을 직사(공격시 거리 좁힘으로 인한 목표물 근접)로 퍼붙고 후퇴하면서 어깨너머의 곡사(후퇴시 목표물과의 거리차로 인한 필요 사거리 증가)로 퍼붙고 짧은 펄스를 마칩니다. 이러한 방식의 공격을 가리켜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이라고도 합니다.

알렉산더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동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스키타이인들의 기동력을 제한할 지형적 장애물, 강이나 요새가 필요함을 간파합니다. 자연지형적인 장애물이 주위에 없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기병대를 미끼로 사용합니다.

미끼로 던져진 소수의 기병대는 알렉산더의 본대 앞에서 떨어져나와 스키타이인들을 유인햇습니다. 예상대로 스키타이인들이 즉시 그 미끼부대를 포위하자 알렉산더는 경보병을 미리 뿌려서 주력기병대의 전진을 가리고(Light Infantry Screening) 경보병 뒤에 숨어서 전진하던 주력기병대는 미끼부대와 경보병사이에 낀 스키타이 기마궁수들을 향해 돌격합니다. 스키타이인들은 여기서 1000여명이 전사하고 150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얼마 안돼 스키타이인들은 알렉산더에게 화평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곧 마케도니아군대는 알렉산더 부재시 스키타이 기마궁수에게 매우 취약함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알렉산더가 Alexandria Eschate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무렵 150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부대는 기마궁수들에게 박살이 나고 있었습니다.

소그디안 반란군의 수장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후에 사마르칸드)
근처의 마케도니아군 전진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600명의 스키타이 기마궁수를 휘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피타메네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알렉산더는 860기의 기병과 1500의 용병보병으로 구성된 구원군을 급파합니다.

스피타메네스는 마케도니아군대를 사막으로 유인했고 사막지형에서 스키타이 기마궁수의 스웜전술은 매우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으며 혹시라도 본대에서 고립되는 부대는 가차없이 포위섬멸 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측 기록

"적군은 아군을 포위하고 엄청난 양의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저는 하늘이 화살로 이렇게까지 새 까맡게 뒤 덮여 하늘이 어두워지는걸 본적이 없습니다. 아군 측 병사와 마필은 속속 부상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공격을 가하던 무리들의 전통이 비워지자 그들은 후퇴하였고 또 다른 무리의 기마궁수들이 곧 나타나 화살을 쏘아대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더욱 많은 화살로 뒤 덮였습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부대는 사각형의 방어대형을 짜고 후위부대 역할로 방어하며 포위당하지 않기위해 싸우면서 대형을 갖춘체 천천히 숲이있는 있는 협곡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전지대가 가까워오자 병사들은 겁을 먹고 살기위해 협곡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부대진형은 붕괴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여기서 전멸당합니다.

알렉산더는 이 비보를 듣고 자신이 직접 대응하기로 맘을 먹은후 일단 보병과 궁수 그리고 기병을 혼합한 연합부대(Combined Arms Force)를 이끌고 스피타메네스의 군대를 135마일 72시간을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기마궁수부대는 잡힐듯하면 손쉽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알렉산더는 목표를 기마궁수부대의 섬멸(Unit Destruction)에서 기마궁수부대의 보급거점(Logistical Base Destruction)으로 바꿉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부대를 5대의 별동대(Mobile Units)
로 나누어서 기마궁수들이 보급지로 활용하는 지역에 전진기지, 요새등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곳 시골마을주민들은 성벽이 둘러진 큰 도시들로 강제이주시켰습니다. 이들 기지와 요새들은 모두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계되어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도 반응할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이 전략으로 스피타메네스 반란군은 식량과 마필을 더 이상 유지할수 없게 되었고 계속 써먹어온 도피/은닉작전(Elusive Tactics)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스피타메네스는 알렉산더의 한 부장이 이끄는 부대와 일전을 벌이고 패배합니다. 그후 스피타메네스는 배신을 당하고 목이잘린채 알렉산더 앞으로 보내집니다.

알렉산더가 23세기전에 사용한 반 스웜(Anti-swarm)전술은 현대 미육군 필드 매뉴얼 FM 90-8 에 나오는 대 게릴라전술 독트린과 흡사합니다. 이 교본에서는 Locate(위치파악), Fix(고정) 그리고 접전(Engage)를 병사들에게 가르칩니다.

현대의 게릴라들은 고대의 기마궁수들이 마케도니아 중보병과 접전을 피하려 하였던 것 과 같이 전력이 우세한 대규모 적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합니다.

스웜전술에게 있어 우수한 기동력은 필수요소이며 기동력의 상대적 우위는 역사적으로 기병이 보병을 상대로 가지는 확실한 잇점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기원전 5세기로부터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서기 378년까지

그렇게 느린 기동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병(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로마군단병)이 주력병종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되어져 왔는지 흥미로와 합니다. 하지만 스웜전술을 쓰는 기병군대가 보병군대를 패배시키는 예는 이 기간중 에도 몇몇 있습니다.

아드리아노폴 전투(서기 378년)
이후로는 보병의 주력병종으로 누려온 우세함이 쇠퇴하며 기병우세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 보는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로마기병은 고트족 기병에게 박살이나고 후퇴하여 중앙의 로마보병은 기병지원이 끊긴체그대로 포위되고 맙니다. 비지고트족 보병은 로마보병의 정면을 공격했고 고트족 기병은 로마군의 양측면과 후면을 공격하고 전투는 대학살로 변해갑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스웜전술의 케이스는 아닙니다.)



고대 스웜 전술: Carrhae 전투 & Manzikert 전투 케이스

파르티아 대 로마의 Carrhae 전투(기원전 53년)

지중해와 근동에서의 보병우세시대에서 몇몇 예외적인 케이스중 Carrhae 전투의 로마군단병과 파르티아 기마궁수간의 대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르티아 정복을 위해 마커스 크라수스휘하의 39000명의 로마군대는 파르티아로 진격해들어갓습니다. 로마군대의 대부분은 군단병들이었고 약간의 경보병과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크라수스는 보급의 원할함과 적에게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해나갔습니다. 아랍인 정찰병에 의한 첩보로 파르티아의 수레나의 부대를 상대하기로 맘을먹은 로마군은 평원으로 깊숙히 진입하고 정확하게 수를 알수없는 수레나의 기병부대와 Carrhae 마을 근처(현재 시리아 근방)
에 조우합니다.

기병부대와 조우한 로마군은 속이 빈 사각형 대형을 형성했고 곧 포위당했습니다. 처음에는 탐색전과 약간의 접전만을 벌이던 파르티아 기마궁수들은 곧 대규모로 스웜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군 진형을 완전히 포위하고 일정거리를 두면서 화살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로마군측 기록

"파르티아군은 사방에서 거리를 두고 화살공격을 하기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특정 목표를 상대를 겨냥하고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방향만 아군대형쪽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의 대형은 매우 촘촘해서 대충 겨냥하고 쏘아도 누군가가 항상 화살에 맞았습니다. 그 덕에 적들은 목표겨냥에 들이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화살을 더욱 빨리 쏘아댔으며 화살을 빨리 쏘고 활을 더욱 세게 당기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아군의 위치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아군이 대형을 유지하면 부상자가 속출했고 적에게 돌격을 감행하면 적은 거리를 두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적은 우리를 계속 죽이는데 우리는 적을 죽일수가 없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파르티아인들이 후퇴하면서 화살을 날리는 수법은 후퇴하면서도 싸우는 방식으로 패주의 불명예를 피해가며 싸우는 매우 교활한 수법이었습니다."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계속 낙타등에서 공급되고 있음을 깨달은 로마군은 자신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고 크라수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6000명의 별동대(군단병, 기병, 궁병으로 구성)를 이끌게 하여 기마궁수부대에 공격을 명했습니다. 파르티아 기마궁수는 후퇴하는 척하며 로마군 별동대를 본대로 멀리 떨어뜨렸고 포위 후 섬멸합니다.

별동대를 섬멸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본대를 다시 포위하고 밤이 되도록 계속 괴롭힙니다. 밤이되자 공격은 멈추었고 야음을 틈타 대부분의 로마군은 Carrhae 마을로 도망쳤습니다. 도망을 치지 못한 체 뒤에 남겨진 로마군 부상병들은 전부 학살당합니다. 다음날 로마군은 기마궁수들이 활동하기 불편한 아르메니아의 구릉지대로 도망을 쳤습니다.

수레나의 파르티아군은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따라잡았고 협상을 제의합니다.

크라수스는 협상에 응할 마음이 없었지만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로마군병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어쩔수 없이 화평제의를 받아들입니다.

로마군 진영에서는 화평교섭을 위해 사절을 보내는 문제로 시비가 붙고 난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크라수스는 성난병사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사건 후 대부분의 로마군은 항복하거나 도망쳤으며 10000명의 로마군이 붙잡히고 나머지는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 후 결국 사로잡힌 로마군은 5000명만이 살아서 돌아갑니다.

로마군단병은 글라디우스라는 짧은검과 필럼이라는 투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넓은 야지에서 기마궁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기원후 4세기초 기병은 로마군의 2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페르시아와 아랍군대는 더욱 많은 비율의 기병을 보유하게 됩니다. 등자의 발명과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스텝에서 나타나는 신종의 덩치 크고 힘쎈말의 등장과 함께 기병우세의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동방에서는 중국, 파르티아, 중앙아시아에서 사용해온 경기병과 기마궁수들과 함께 중장갑 철기들의 활약이 시작되었고 기마궁수와 함께 사용되어 그 효용을 증명합니다. 긴창으로 적보병에게 밀집대형을 강요하는 중장기병부대의 등장으로 기마궁수가 적을 공격할 때 내는 화력의 효과가 증대되었습니다.


비잔틴의 Manzikert 전투(1071년)

6세기에 도달하면서 동로마의 군단병(Legionaries)은 중장기병(Cataphracts)에게 주력병종 으로써 의 자리를 내어주고 맙니다. 카타프락트 중장기병은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장창과 검 방패 그리고 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이는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충격력을 효과적으로 혼합한 무장으로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양에서 프랭크족이나 롬바드출신의 기사집단외에는 동로마의 카타프락트 중장기병에 대항할 자가 없었습니다. 또 비잔틴 중장기병은 동양의 아시아계 또는 아랍계의 기마궁수와도 대등한 싸움을 벌일수 도 있었습니다.

비잔틴 군대 시스템은 제병협동을 사용하여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경기병군대를 상대로 1000년간 많은 승리를 거두어들여 언급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론 전술적인 부대운용은 비잔틴제국의 성공에 있어 한가지 이유에 불과합니다. 실제 비잔틴은 매수, 외교, 책략, 속임수 등의 사용을 군사력의 투사보다 즐겨사용하였습니다.

비잔틴 전술의 유연함과 조직력은 기병전투에서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충격력의 연속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비잔틴 군대는 자신들이 누리는 모멘텀이 사라지기 전에 최대 5번의 공격을 적에게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스키타이 매복(Scythian Ambush)을 포함한 매복공격을 즐겨하였습니다.

보병궁수와 중장기병의 조합은 기마궁수부대가 누려온 원거리 공격의 잇점을 어느정도 상쇄시켜줍니다. 비잔틴제국은 아바족, 투르크족, 불가족, 슬라브족, 마자르족등 스웜전술을 쓰는 군대를 상대로 영토를 지켜왔습니다.

10세기경, 마자르족은 비잔틴 영토내의 헝가리 평원에 공격을 가해옵니다.

여기서 마자르족 기마궁수들은 비잔틴 제국군을 상대로 원거리공격(Standoff-fire capability)
의 잇점을 가지고 있질 못했습니다. 비잔틴 군대는 중장기병과 경기병 그리고 중장보병과 경보병으로 구성되어있었고 비잔틴 보병궁수들은 마자르족의 기마궁수보다 사거리에 잇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자르족 기마궁수는 파르티아인들이 로마군대를 상대로 사용한 전법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투창과 Scimitar(근동의 굽은검) 그리고 궁으로 무장한 마자르족 기마궁수 부대는 그들이 보유한 기동력의 잇점을 활용하면서 원거리 공격으로 천천히 적의숫자를 줄이는 방법을 채택 하였고 고립되는 적부대나 적 부대의 대형이 무너지길 기다렸습니다.

원거리 사격에 유리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군대는 적과 화살을 주고 받기 보다는 접전을 원했습니다. 마자르족 기마궁수는 비잔틴 군대의 단단한 보병방진대형(전면에 장창과 긴방패로 무장한 부대배치)
앞에 돌격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자르족 군대는 자기들보다 중무장한 적을 상대로 철저히 접전을 회피하였고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서 화살공격으로 적을 천천히 죽여나가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자르족의 전술 때문에 양측은 결정적인 회전이 불가능했고 마자르족도 습격이나 약탈에만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은 그들을 둘러싼 적들의 약점에 대해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들 중 기마궁수를 주력으로 하는 스키타이인들의 전술에 대한 연구도 되어있었습니다.

서기 600년경 비잔틴 군대 매뉴얼인 모리스의 스트라테지콘(Maurice’s Strategikon)을 살펴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추운 날씨, 우천시 그리고 습한 남풍은 기마궁수의 복합합성궁의 활줄을 느슨하게 만든다” 또한 스타라테지콘의 스텝인들에대한 대응법(Dealing with the Scythians, That Is, Avars, Turks, and Others Whose Way of Life Resembles That of the Hunnish People)의 몇몇구절을 읽어보면 “적들은 기습과 매복 그리고 보급선 차단을 즐겨한다”, “그들은 적을 포위해서 원거리 공격하기를 좋아하며 쐐기대형의 여러 단독부대들이 후퇴하는척하다가 갑자기 반격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대규모의 말들에게 먹일 사료나 마초의 부족에 의외로 쉽게 굴복한다” 

스트라테지콘 매뉴얼은 또 비잔틴 군대의 지휘관들에 이러한 충고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이끄는 부대가 포위당하지 않을려면 적이 도하할수 없는 강을 뒤에 끼고 전투를 벌여라”

이런 비잔틴의 철저한 대응과 대부분의 역사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군은 셀주크 투르크의 군대에 의해 1071년 Manzikert 에서 패배합니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까지는 버텼지만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Manzikert 전투이후를 비잔틴의 군사적 쇠퇴와 결과적 종말의 시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Manzikert 전투 패배후 비잔틴은 제국 내 경제력과 군사력유지에 필수였던 소아시아의 풍요로운 지역들을 빼앗기고 쇠락합니다. 이때의 전투 후 비잔틴의 방어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외부로 활동을 개시한 셀주크 투르크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로마너스 디오게네스는 1071년 3만명의 군대로 출정하였고 비슷한 규모의 투르크 군대와 동부 아르메니아의 Manzikert에서 맞닥뜨립니다.

Manzikert의 지형은 궁기병에게는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기마궁수부대는 전형적인 스웜전술을 개시 하였고 포위망에서 화살을 날려대며 비잔틴군대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비잔틴 기마궁수부대도 화살을 날려대며 응사하였으나 비잔틴측이 보유한 기마궁수는 너무 소수였고 점차 소모되어집니다. 비잔틴 중장기병은 기마궁수의 지원없이 단독으로 적을 추격할수 없었고 날이저물면서 황제 로마너스는 야영지로의 퇴각을 명합니다.

야영지로 퇴각하는 비잔틴군을 투르크군이 계속 쫓아오며 화살공격으로 괴롭히자 황제는 그의 지칠대로 지친군대에게 다시돌아 적을 향해 싸울 것을 명하였고 후미에 있던 비잔틴 예비대는 이 명령에 불복종하고 야영지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후미의 예비대가 빠져버린 비잔틴 본대는 사방이 포위당해버렸고 사기가 떨어진 비잔틴 군대는 포위당한 채 섬멸됩니다.

비잔틴 후위부대의 이탈로 비잔틴군대의 정연한 후퇴는 패주로 변해버렸습니다.

Manzikert는 망구다이 패턴(후퇴하는척하다가 추격자를 매복후 사방에서 포위공격하는 전법)의 또 다른 케이스입니다. 망구다이 패턴은 수세대를 걸쳐 기마궁수들이 즐겨사용하는 전술이 되었습니다.

Manzikert에서의 비잔틴군대의 패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투르크족의 기마궁수부대의 활약, 황제로마너스의 무능한 지휘력 그리고 후위부대의 반역). 또한 당시 비잔틴 군대의 군기는 비잔틴 군대가 최상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군대의 군기와 비교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당시정황을 다룬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투르크측의 매우 숙련된 기마궁수 운용과 망구다이 전술의 효과적인 사용이 비잔틴군 패배의 주요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스웜 전술: 셀주크 투르크 케이스 & 궁극의 스워머 몽고군 케이스

십자군 vs. 셀주크 투르크 케이스: Dorylaeum 전투(1097년)

십자군 전쟁은 스웜머(Swarmer:스웜전술을 사용하는자)와 비 스워머(Non-Swarmer: 스웜전술을 사용하지 않는자)간의 또다른 역사적 대결입니다. 이번에 기마궁수들이 상대하는적은 중장갑의 서양기사들입니다. 서양측 기사들은 긴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시리아와 성지(팔레스타인)의 셀주크 투르크 기마궁수들과 대등하게 싸웁니다.

첫번째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들에게 있어서는 단 한번의 유일한 군사적 성공입니다.(당시 기사들이 기마궁수를 상대로는 조악한 기동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위업입니다.)
몇몇 소규모 전투와 공성전을 제외하고는 Dorylaeum 전투는 십자군이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로 거두는 주요 승리입니다.

1097년 Dorylaeum(현재 터키에 위치)
에서 두개의 중기병 십자군부대는 스웜전술은 쓰는 투르크 경기병군대를 붙잡고 패배시킵니다. 앞으로 묘사될 전투설명을 보면 투르크측은 일대일로 전술적 기동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군대는 전술작전 레벨에 있어 허를 찔리고 맙니다.

Dorylaeum 캠페인에서 십자군측은 영주 보히몬드가 이끄는 이태리 노르만부대가 본대로부터 떨어져 나간후 부대가 두개로 쪼개어져서 3일간 따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보히몬드의 군대는 10000명의 십자군으로 되어있었고 주력은 보병이었으며 비전투원도 다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1097년 6월30일 저녁 보히몬드의 군대는 Thymbres 강 북쪽 강둑에 위치한 Dorylaeum 이라는 버려진 도시 근처에 풀이 무성한 초원위에 주 숙영지를 세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을 기하여 보히몬드의 병사들은 킬리즈 아스란 이 이끄는 대략 삼만명의 투르크 기마궁수부대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십자군은 기마궁수 스웜전술을 본적도 경험한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군측 기록


"투르크족들은 사방에서 나타나 포위해오기 시작했고 아군주위를 빙빙돌면서 화살을 엄청난 거리에서 날리면서 공격을 했습니다."

프랭크인들은 투르크병사 전원이 말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 숙영지를 돌며 약간 느슨하게 포위하면서 공격했습니다. 수많은 기사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었고 보히몬드의 군대는 더 이상 견딜수 가 없어서 강둑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크군대는 십자군 숙영지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고립된 십자군 부대를 학살했습니다. 보히몬드는 그의 기사들에게 위치사수를 명했고 투르크군은 십자군을 완전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부대를 교대로 공격하게 해서 한쪽은 화살을 공급받고 나머지부대는 공격을하게해서 끊임없이 십자군을 괴롭혔습니다.

소수의 기사들이 참지 못하고 투르크족에게 돌격을 가할때마다 투르크 기마궁수는 기사들이 잡지 못하게 도망을 치며 화살을 계속 쏘아대었습니다.

보히몬드는 자신의 군대가 파공음을 내며 쏟아지는 화살과 투창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투르크인 기마궁수들의 기동력은 극악무도하였습니다. 십자군의 패배는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보히몬드가 전에 구원요청을 위해 보낸 몇몇의 연락병이 다른 십자군 부대를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연락병들은 그 십자군부대를 인도하여 접전지로 행하게 하고 그들은 투르크부대의 측면과 후면에 빠르게 공격을 가했습니다. 후면과 측면에서의 예상치 못한 기사들의 돌격으로 투르크군은 혼란에 빠졌고 전투는 기사들의 장기인 육박전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다죽어가던 보히몬드의 부대도 적의 후면에 나타난 우군의 등장에 힘을 얻고 재결집하여 투르크군에 돌격합니다. 그 후 전투는 기사들의 승리로 쉽게 끝이 났습니다. 기마궁수는 육박전에서 기사들의 적수가 되질 못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기마궁수부대의 피해는 예상만큼 그렇게 크진 않았습니다. 이유는 투르크군은 단지 그들이 완전히 도망을 치기 전 10분 동안만 접전을 통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스워머(Swarmers)는 중무장한 비 스워머(Non-Swarmers)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동력을 반드시 확보하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스워머가 어떤 이유로든지 또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면 스워머는 패배하게 됩니다.

십자군은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를 두가지 이유에 기인하여 패배시킬수 있었습니다.

1.스워머는 또다른 십자군부대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음
(Poor Situational Awareness)

2.스워머 자신들이 충격력을 보유한 중기병을 보유하지 못한관계로 궁지에 몰리고 대형이깨진 십자군부대를 조기에 격멸하지 못하고 구원군이 나타날때까지 시간을 허비함(Lack of Shock Force)

Dorylaeum 에서의 십자군의 승리는 계획되고 실천된 것(Planned and Executed)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By Chance)
그렇게 된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후일 Hattin 전투와 같이 셀주크 투르크군과 십자군과의 전투들을 보면 기마궁수가 프랭크 기사들을 상대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궁극의 스워머 몽고군 & Liegnitz 전투 케이스(1241년)

몽고족은 역사적으로 스웜전술을 쓰는 궁극의 케이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술적 전략적 차원에서 둘 다 스웜 전술/전략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스원전술을 쓰는적이던 쓰지않던 적이던 다 패배시켰습니다.

13세기초 징기스칸은 그의 주위의 부족들을 모두 제압하고 고비사막근처의 몽고를 통일합니다. 결국 몽고의 원정의 스케일은 고려에서 독일에까지 뻗히는 광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몽고제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대륙제국이었습니다.

몽고군의 성공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분산된 지휘시스템(하급지휘관들에게 상당한 결정권을 허락하여 변화무쌍한 전장상황에 잘 적응케하고 적을 상대로 우선권을 갖게함 :Battlefield Initiative)


2.잘 적용된 스웜전술 컨셉(Successful Application of Swarming Concept)

A. 우수한 전장 상황파악/인식:Superior Situational Awareness

B. 우수한 기동력: Superior Mobility

C. 우수한 장거리 공격화력: Superior Standoff Fire)


3. 적절한 비율의 충격력 확보(Retaining the Good Ratio of Shock Force)

몽고군의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은 몽고군이 보유한 경기병의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운용으로 오는 정찰상의 잇점과 관련이 있고 우수한 기동력은 전군을 기병으로 하는 몽고군의 특성에 기인합니다.(40%는 중기병 60%는 경기병)
그들의 우수한 장거리 공격화력은 그들이 보유한 복합합성궁 덕분입니다.

당시 몽고활을 유럽최고의 롱보우에 비교하자면 영국 롱보우는 그 큰 덩지에도 불구하고 75파운드힘과 250야드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훨씬 작은 몸집의 몽고활은 100~160 파운드힘과 350야드의 사거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몽고군은 또한 몽고엄지 발사안전장치(Mongolian thumb lock)라는 기술을 연마 했습니다. 이 기술은 궁수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돌로 만들어진 반지를 사용하여 갑자기 화살을 놓아주는 방법으로 이 기술을 쓰면 화살의 속도가 증가합니다.

몽골 경기병은 화력지원과 정찰에 사용되었고 활을 이용한 경기병 공격이 적 부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에 부족할 때에는 중기병의 충격력을 이용한 공격이 사용되어졌습니다. 적의 대형이 무너지고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몽고중기병은 12피트 길이의 창으로 무장한테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리곤 하였습니다.

전술적인 레벨에서 몽고군 기마궁수는 고대 파르티아나 투르크 기마궁수들이 사용한 스웜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보다 우수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무장하고 신출귀몰하는 몽고군은 거리를 두고 적에게 화살공격을 가했습니다. 만약 몽고군이 적을 포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은 망구다이 전술(Mangudai Tactics)
같은 다른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망구다이 전술은 후퇴하는척하며 적을 일부을 유인하여 본대로부터 떨어뜨린후 집중포위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말합니다.

전략적으로는 몽고군은 몇대의 사단(Toumen)
으로 나누어 일반적으로 넓은 전선을 평행으로 진격하게 하면서 곳곳에 경기병 척후를 보내면서 주력부대의 이동을 은닉합니다. 그러다가 척후들에게 발견되는 적부대가 있으면 이는 근처 모든 평행선상에 있는 몽고군부대의 집중타겟이 됩니다.

군을 몇몇 Toumen으로 나누는 것에는 유리한점이 있습니다. 일단 겁을 먹은 적의 눈에는 여러 방향에서 진입해오는 군대의 규모가 훨씬 커보이고 보급차원에 있어서도 소규모부대는 대규모의 부대보다 훨씬 용이하게 스스로의 보급을 해결할수 있었습니다.

몽고 Toumen 사단들은 여러방향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합니다. 적의 정면을 담당하는 사단은 상황에 맞춰어서 적의 진격을 멈추거나 천천히 뒤로 빠지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단들은 적부대의 측방과 후방으로 접근합니다. 적부대는 병참/연락선을 끊기지 않기 위해 뒤로 후퇴할것이고 몽고군은 이때 일어나는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상황이 몽고군에 불리할 경우에는 몽고 Toumen사단들은 우수한 기동력과 전장상황파악을 이용하여 참패를 모면하곤 하였습니다. 몽고군 부대는 다른 기병부대들과 비교하여 전략적 기동력이 우수하였습니다.

몽고군 병사 개개인은 여분의 말을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타고 있는 말이 지칠듯하면 다른 말로 바꿔 타며 전진했습니다.

Toumen 사단들간의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의 잇점을 유지했습니다. 각 부대간의 연락은 말을 탄 연락병들의 집단이 릴레이 형식으로 말을 달려가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전술적으로는 깃발과 고둥나팔 화전 등을 사용해 신호를 보냈습니다. 전략적으로는 몽고군 부대가 지평선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몽고 스파이들이 상인무리로 가장하여 항상 앞서 작전지역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몽고군의 성공은 종종 그들이 작전하는 지형에 영향을 받곤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면 몽고군은 승리하였고 그렇지 못하고 좁은 길로 움직여야 할경우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기병이 효과적으로 운용되기 힘든 지형은 아래와 같습니다.

1.늪지대: 말이 좁은길을 따라가야하고 그렇지 않은경우 꼼짝못할 때

2.두터운 숲지대: 말이 좁은길을 따라가야 하는경우

3.산악지형: 몇몇 협곡만이 통과가능할 때

13세기초 몽고제국은 서서히 서쪽으로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1240년 몽고의 수중으로 넘어갑니다. 바투칸 휘하의 몽고군은 러시아를 정복하고 헝가리로 눈을 돌립니다. 헝가리로 진입하기전에 바투는 북쪽방면의 폴란드방면을 견제하기 위해 일대의 병력을 Baidar에게 주어 공격케합니다.

헝가리와 폴란드 방면으로 진입한 몽고 Toumen 사단들의 기동력과 유기적인 협조는 흡사 이차대전의 기갑부대들의 그것과 흡사했습니다.

1241년 4월 5일에 Baidar가 이끄는 2개의 몽고 Toumen 사단은 사일레시아의 듀크 헨리2세가 이끄는 2만5천명의 폴란드와 독일병사들과 Liegnitz 에서 조우합니다. 상대적으로 드넓은 평원지역이었던 Liegnitz에서 몽고군은 그들이 애용하는 망구다이 전술을 사용합니다.

몽고군은 유럽의 중장 튜토닉 기사들과 템플라들을 몽골 경기병을 이용하여 몽고군의 중앙으로 유인합니다.

일단 헨리휘하의 엘리트 중기병부대가 공격에 동원되자 일단의 몽골 경기병들은 옆으로 퍼지면서 유럽기사단과 나란히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댔습니다. 몽골 경기병들 사이에서 끼인 기사단은 앞, 좌, 우 삼면에서 몽골 경기병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완전히 노출되었습니다. 몽고군이 연막탄까지 뿌려대자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순간이 다가오자 숨어있던 몽고 중기병들이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립니다.

폴란드 방면을 안전하게 하는 미션을 완료한 Baidar 휘하의 몽고군은 헝가리를 침공하는 본대와 재빨리 합류하여 벨라왕이 이끄는 대규모 유럽기사단을 사조강 전투에서 대패시킵니다. 하지만 헝가리의 운명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겨우 완전파멸을 면합니다. 몽고군은 나타날때와 같이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유럽인들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부족과 전술의 부재로 스텝의 기마궁수들을 상대하기 벅찼습니다. 유럽의 군대는 기사를 주력으로 삼고 의지 하였으나 기사들의 돌격은 주로 적 보병들의 방진을 와해 시키는데 사용되기에 알맞은 전술입니다.

유럽의 보병들은 기사들이 돌격할 때 뒤에서 보조하며 기사들의 후미를 보호해주며 기사들이 미쳐 죽이지 못한 적이나 말에서 낙마한 적을 죽이는데 주로 쓰여져 왔습니다. 서양의 기사들은 우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훈련도는 매우 뛰어났으나 재빠른 몽골 경기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북미 인디안 스웜전술 & 스웜전략: 울름(Ulm) 케이스와 나폴레옹

북미 인디안 스웜전술 St. Clair의 패배(1791년)

스웜전술의 또다른 예는 북미대륙의 인디언들이 사용하였습니다.

18세기말 오하이오 계곡의 숲지대에서 인디언들은 전장상황파악의 잇점(Superior Situational Awareness)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싸웠던 지역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인디언들은 유럽식 군대보다 정찰병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울창한 산림은 인디언들에게 은닉처를 제공하였고 경무장의 인디언들은 미국식민지 정규군보다 기동력이 좋았습니다. 인디언들은 궁기병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스웜전술을 사용합니다.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지만 포위후 궁기병과 같이 사거리의 잇점을 활용한 공격없이 바로 돌격해 들어갑니다. 비록 인디언들에게 사거리를 이용한 무기공격의 잇점은 없었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매복과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은 승리를 쟁취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미군역사상 인디언들에게 당한 가장 최악의 패배는 1791년 오하이오 테리토리에서 일어난 세인트 클레어의 패배(St. Clair’s Deafeat)입니다. 거의 700여명의 미군 병사들이 여기서 죽습니다.(85년 뒤 수(Sioux)족이 리틀빅혼에서 죽이는 수에 3배)


1791년 9월 미군 지휘관 소장 아써 세인트 클레어(Arthur St. Clair)
는 현재 신시내티로 불리는 지역의 부쪽으로 요새들의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방어하기 좋은 높은 위치에 캠프를 세우고 많은 수의 보초병을 세워두었습니다.

세인트 클레어장군은 그가 진입한 지역에 대한 정보와 첩보의 부족으로 그는 그의 캠프 지역 옆에 흐르는 강이 무슨강인지도 몰랐습니다. (원래 전투 후에 역사가들에게 붙혀지는 전투명은 지역을 따서 이름을 붙히지만 이전투는 당시 지휘관이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지역의 위치도 모르고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여서 그냥 세이트 클레어의 패배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항상 그렇듯이 이번 전투의 케이스도 여러가지 생각해보아야할 요소들은 있습니다. 미군은 마필이 부족했고, 지휘관은 무능하였으며 부속 민병대의 자질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단순히 인디언 오합지졸들이 운이 좋아서 세인트 클레어장군을 패배시켰다고 결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미군 지휘관의 무능함만 탓하기 보다는 인디언들의 완벽한 기습과 포위후 사방에서 집중공격 한 사실에 패배의 주원인이 있다고 보는게 보다 설득력 있는 결론입니다.

아무도 인디언부대의 지휘관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한명이 지휘했을 수도 있고 한 무리의 수장들이 카운실 형태로 이끌었을 수도 있습니다.(당시 지휘관을 작은거북(Little Turtle of the Miamis)이나 푸른 재킷(Blue Jacket of Shawness)으로 추정)
이 전투에서 인디언들의 공격패턴은 몇몇으로 통일되어있었습니다.

1.민병대를 향한 과감한 돌격(민병대는 정규군부대보다 돌격에 더 쉽게 붕괴됨)

2.지휘관들을 선택적으로 저격

3.Treeing 기술 사용(무릎을 꿇고 나무뒤에 숨어서 적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사격, 사격 후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사격)

4.적 예봉의 철저한 회피(몇몇 용감한 지휘관에 의해 총검돌격을 하는 미군 분견대와의 접전 회피, 미군이 돌격하면 후퇴하다가 미군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추격하여 포위망 유지)

인디언들은 민병대 보초병들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를 패주시킨후 주 캠프로 난입했습니다. 인디언들은 키가 큰 풀밑으로 숨어서 보이지않게 재빠르게 캠프를 단 몇분 만에 포위해버렸습니다.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회고록에 보면 그의 부대는 앞뒤 좌우 사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공격은 끊김없이 4시간 가까이 유지되었습니다.

인디언의 주공은 미군의 좌측으로 반달모양의 형태로 공격을 가하였고 미군의 좌측은 가장 먼저 무너집니다. 한가지 특이할만한 사항은 각각의 인디언 부대들의 하급 지휘관들은 최고 수장회의로부터 내려진 전투목표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이는 150년후 독일육군의 Mission-Order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당시 인디언들의 부대는 급에 따라 50명단위 또는 100명단위 등등으로 세분화 되어있었습니다.)

완전 포위당한 미군의 전투력은 심리적으로 이미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캠프에 난입한 인디언들과 미군들의 난투극의 대혼란속에 세인트 클레어장군과 소수의 참모들은 부하들을 버려둔체 간신히 포위망의 한 틈을 찾아서 운 좋게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인디언들은 캠프의 각종 보급품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 세인트 클레어의 잔당을 추격 소탕하는데 실패합니다.)



울름(Ulm) 케이스와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1805년 울름에서 보여준 전략적 레벨의 기동은 스웜전략의 정의와 맞아떨어집니다. 몇몇의 독립적이고 분산된 군단들이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 공격을 가하고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였습니다.

이번 케이스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웜 컨셉이 전략적으로만 사용된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울름 작전은 단 한번의 전투가 아닙니다. 울름작전은 전략적 승리이며 이는 부정되기 힘듭니다. 전술적 레벨에서 프랑스군은 당시 스탠다드였던 라인(line):횡대사격대형 과 컬럼(Column) :종대돌격대형의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대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보병과 야전포병 그리고 기병으로 구성되어있었고 그들의 전술적 운용은 다른 유럽의 군대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시스템의 가장 독특한 요소는 corps d’armée 입니다.

corps d’armée는 독립적인 제병협동부대(Combined-Arms Unit)로 4개나 5개의 군단이 다이아몬드꼴로 기동하였습니다. 이론상으로는 각 군단(Corps)이 적의 일개 군(Army)를 24시간동안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24시간은 다른 아군 군단이 구원하러 달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군대는 각각의 부대가 미리 의도한 전장에 전투 직전에 신속히 투입될 수 있는 거리로 진군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여럿으로 쪼개어 진군 시키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한 후 각 교통로의 네트워크와 병력통과 가능 최대치 등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진군케 한 뒤 전투직전에 그의 부대들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전장에 속속 나타날 수 있게 계획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진군하며 대부분의 보급품을 그 지역에서 충당하였기에 다른 유럽의 군대보다 빨리 행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벌어진 혁명 덕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랜드 아미는 프랑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총 집합소나 다름없었고 다른 유럽군대가 용병이나 징집병 또는 사회적 찌꺼기들로 구성된 것에 비해 무척 사기가 높았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대내에서의 탈영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나폴레옹은 각 부대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안심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자유를 얻게 된 것 입니다. 부대간 분산은 보급의 압박을 많이 덜 수 있었고 자체조달의 효과도 커졌으며 대규모 보급부대의 운용의 필요성도 떨어져서 그만큼 더 빠른 속력으로 진군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상황에 따라 각 부대 간 집중도(Concentration)와 분산도(Dispersion)의 밸런스를 탁월하게 맞추는 능력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는 그의 부대가 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하였고 이를 위해 적 본대와 조우 시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한 측면 또는 후면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빠른 강제행군(Fast Forced March)로 적을 놀래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략은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기술(Strategy is the art of making use of time and space)"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수한 기동력과 제대로 된 전장상황파악은 시간과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필수요소 입니다. 일일 주파거리 평균 30킬로라는 기동력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에게 전장에서 적보다 한발 앞서는 우선권을 가질수 있게 하였고 진군지역 앞에는 대규모의 기병의 막(Cavalry Screen)을 쳐서 나폴레옹의 군단들의 움직임을 적으로부터 가렸습니다.


1805년 페리디난드 대공 지휘하의 72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은 남독일을 통해 울름(Ulm)
이라는 지역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목적은

나폴레옹의 보급을 끊고 다가오는 러시아군과 연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참모는 Karl Mack Von Lieberich 였습니다. Mack 장군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잡아두는 모루가 되어주고 다가오는 러시아군이 망치역활을 하여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의 흩어져 있던 그의 부대들이 속속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자 Mack은 나폴레옹의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 프랑스 6군단을 공격합니다.

나폴레옹의 1개 사단을 혼내주며 전진하던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전문을 가로챕니다. 그 전문을 읽어본 Mack은 당장 Regensburg로 진격해야 한다고 설파하였지만 페르디난드 대공은 이를 지체시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10월이 되어서야 결국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Elchingen 전투로 막아버립니다.

Mack의 오스트리아군은 울름으로 탈출구를 뚫고 나갈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울름으로 진입한뒤 전략적으로 포위당해 투항 삼만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울름은 광의적으로 보면 일 측면포위(Single envelopment)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Mack의 주 보급선이 완전히 차단된걸 고려하고 그 보급선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걸 감안하면 완전 포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러시아원정은 전략기동력의 상실이 어떤 결과를 가져 다 주는지 잘 말해줍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모스코바 였습니다. 하지만 병력 및 보급수송의 문제로 그의 군대는 늘 보여줬던 분군행군 후 집중포위공격의 모습을 보여주잘 못합니다. 러시아는 초토 후 후퇴하는 파비안 전략(Fabian Strategy)
으로 결정적 접전을 회피하며 후퇴합니다.  

러시아의 전략으로 프랑스군은 가장 기초적인 보급품도 손에 넣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는 필수 보급품을 보급하기에도 벅찬 정규보급선에 더욱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서유럽에서 원정을 할 때 우수한 도로망의 이득과 풍족한 농장지대의 득을 본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열악한 도로망과 초토화된 점령지는 프랑스군의 전략적 기동력(Operational Maneuverability ) 다시 말해 스웜 능력(Swarming Ability)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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