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Mossad)
이스라엘의 대외 정보기관
이스라엘 정부의 적대 세력을 감시하고 파괴 및 암살 등 필요한 공작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모사드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내무정보기관으로는 신 베트가 있다.
'모사드'는 히브리어로 '기관', '국(局)', '청(廳)'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이며, 영어의 'institute', 'agency'에 대응된다. 이스라엘 국내에서 모사드를 지칭할 때는 정관사를 사용하여 '하모사드(המוסד)'라고 읽는데, 이는 '그 기관(the Institute)'이라는 암시적 의미로, 정식 명칭인 '정보특수작전국(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Operations, המוסד למודיעין ולתפקידים מיוחדים)'의 이름조차 직접 드러내지 않던 관행에 따라 '거기', '그 쪽' 하고 부르던 것이 통칭으로 정착한 것이다. 한국어 번역명으로는 '정보특수공작국', '정보 및 특수 작전국', '정보특수공작기관' 등이 쓰인다.
모사드의 대표적인 표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란 정부 관계자, 구 이라크, 구 시리아의 핵 개발 관계자 등 중동 아랍 세력들이 있으며 이들과 군사적 교류가 잦은 북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공작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나치 전범에 대한 추적 및 보복도 모사드의 지속적인 목표 중 하나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지상주의적 일처리와 불도저식 공작 능력, 놀라운 정보수집 능력으로 유명하다.
직제
모사드의 직제 현황은 기밀로, 민간에 공개되어 있지 않다. 가장 최근 알려진 것은 CIA가 1977년에 작성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대한 보고서에 수록된 것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점거되었을 때 외부로 유출되어 알려졌다. 이 자료에 의하면 모사드는 8개 부서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작과, 대외연락과, 기술과, 훈련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장투입 및 암살팀인 '키돈'과 통신감청 전문기술팀 '야호로민', 해당 공작 지역에서 모사드를 도와주는 유대인들인 '캇차'와 '사얀/사야님', 그리고 도처에서 운용하고 있는 각국 국적의 모사드 정보원 등을 갖고 있다.
모사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대한 규모인데 메이르 아미트(3대 국장, 1963~1968 재직) 시절에는 1,200명 정도의 조직원을 가지고 있었다. 예산도 많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전직 안기부 제2차장에 따르면 2010년 즈음에는 1,500명 정도의 조직이었다고 한다.
첩보수집과: 해외 공작을 책임지며 모사드 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모사드 요원들은 해외 공관의 외교관 신분과 신분 위장을 통해서 해외에서 활동한다.
암살-납치 부서 '키돈'(Kidon):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60~80년대가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다. 키돈 여성요원의 존재는 2004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키돈의 훈련 과정은 2년인데 각종 무기, 폭발물, 미행 기법, 호텔 객실 침입 방법, 속옷 안에 권총을 은폐하는 방법, 위장 방법, 미인계 등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규모는 50~70명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정치 활동 및 연락과: 세계 각국 정보기관과의 연락.
지역과: 정치활동연락과와 첩보수집과는 공동으로 8개의 지역과를 운영했고 이스라엘 대사관의 모사드 요원들은 이 2개 부서에서 파견나온 요원들로 구성된다. (북미, 중미, 남미 등)
기술과: 첨단 장비 제공
기술공작과
LAP과: Lohamah Psichologit Department의 약어로, 심리전과 정치 선전, 그리고 기만 작전을 담당한다.
분석과
훈련과
작전기획조정과
인력 재정 병참 보안과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6월 초대 국장을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로 하여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하고 1949년 12월 13일에 정치국을 확대개편하여 정보조정연구소(the Institute for Coordination)로 재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에는 총리 직속기구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모사드의 창설연도를 195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53년에 취임한 2대 의장 이세르 하렐(Isser Harel)은 모사드를 전문가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외국에서의 첩보활동·정보수집·비밀정치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쌓은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형 모리스 코헨도 모사드 요원이었지만 아우가 시리아에서 교수형당하는 걸 그저 TV화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모사드는 1979년 이전까지는 베일에 싸여 있던 기관이었으며 일반인들은 모사드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지만 정체가 1979년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좀 골때린다. 1979년에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났는데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로 잡히기 전에 기밀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 모두 파기했지만 대사관 내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할 일이 없던 인질범들은 파쇄기에 갈아넣은 문서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복원해냈는데 여기서 모사드의 존재가 밝혀졌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은 모사드에게 암울한 기간이었는데 벌여 놓은 각종 작전이 실패해 언론에 알려져 망신을 당해 국장이 여러차례 교체되기도 했다. 수뇌부들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정보기관을 휘두르면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러다가 2002년 메이어 다간이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는데 취임사는 '적의 뇌를 삼켜라'다.
나는 레바논에 참전했을 때 가문끼리의 싸움이 초래한 비참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한 족장의 머리가 깨져서 뇌가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족장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한 아이가 족장의 뇌수를 한 움큼 쥐더니 집어삼켰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가문끼리의 싸움에서 하는 행동이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힘의 근원을 취하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다른 자들에게 먹히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어야 한다.
모사드 10대 국장 메이어 다간의 취임사
모사드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스라엘 내 첩보를 주로 맡는 신 베트(Shin bet)는 미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첩보기관이다.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모사드와 신 베트는 은근히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같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땐 돕긴 하지만. 2012년에 만들어진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영화 게이트키퍼즈에 나온 전직 신 베트 국장들의 증언을 봐도 모사드가 마치 자신들이 우위인 양 설쳐댄다고 마구 화를 내며 털어놓는 게 나와서 이를 본 모사드 출신 국장들도 불쾌하게 반론하던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에는 정보기관이 꽤 많은 편이다.
주요 공작
암살
모사드는 암살에 대해 가능한 한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모사드 창설 후 정적들을 납치 혹은 총격으로 주로 암살했지만 21세기 들어 정적들의 철저한 경호를 갖춘 이후로 총격보단 공습 혹은 원격으로 암살을 주로 하는 편이다.
나치 전범을 추적해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데르 라크(Aleksander Laak): 에스토니아 출신 나치 부역자로 나치 수용소 중 하나인 예갈라 강제 수용소(Jägala concentration camp)의 책임자였다. 최소 10,000여명을 수용소에서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전후 캐나다로 도피했다가 1960년 위니펙의 자택 차고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그는 안 그래도 평소에 자신과 같은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들이 전후에 족족 체포되어 처벌받는 것을 보고 심적으로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마이클 엘킨스(Michael Elkins)에 따르면 사망하기 전날 아내가 영화를 보러 나간 사이 집에 모사드 요원들이 침입해 그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몰려있었던 라크는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을 택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것이다.
구스타프 바그너(Gustav Wagner):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브라질에 숨어 살다가 1978년 시몬 비젠탈 센터에 발각되어 한 번 체포되었는데 브라질 정부가 이스라엘, 폴란드 인민공화국, 오스트리아의 인도를 모두 거절함으로써 잔류할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1980년 자택에서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되었다.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이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에 대한 주된 복수 방법이라는 것인지라 모사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있다.
주변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된 사람들을 암살했다.
야하 엘 메스하드(Yahya El Meshad) 암살(1980): 이집트 출신 핵물리학자. 이집트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동결된 후 바트주의 이라크로 옮겨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이라크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이끌다가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제럴드 불(1990.3.22):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로 사담 후세인의 바트주의 이라크에 협력하다가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암살 전부터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다든지, 집에 돌아와보면 가구 배치가 바뀌어 있다든지 등의 반응으로 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을 모사드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하마드 슐레이만 암살(2008.8.1): 시리아군 준장. 시리아 바시르 알 아사드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보좌관, 북한과의 핵 프로그램 협력 연락 담당자, 핵시설 보안 책임자로 있었다. 시리아 연안 도시의 휴양지에서 삼엄한 경호 속에 저녁 파티를 즐기던 중 별장 앞바다에 잠수해 대기하던 암살자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경호원들은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 모사드와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의 공동작전으로 추정된다.
2012년 이란의 핵개발 관련 과학자 4명이 연속으로 암살당했다. 참고 반이란 단체 및 망명 단체들이 모사드에 협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팔레비 왕조 시절 비밀경찰 샤바크가 모사드와 동맹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는데 호메이니 정부에게 샤바크는 철저하게 숙청당했고 일부 샤바크 관계자는 해외로 이민가서 지금까지도 반이란 활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모사드와 은밀히 협력했다는 주장도 많다.
모센 파크리자데(2020): 이란의 핵 과학자이자 아마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센 파크리자데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특히 원격조종기관총이 테러에 동원되었고 테러 직후 이 원격조종기관총 탑재 차량이 곧바로 자폭 처리되었다던가 테러 직전 외부 통신선 까지 차단한 사례들이 모사드로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하산 사이야드 호다에이(2022): 이슬람 혁명 수비대 쿠드스군의 대령으로 테헤란에서 운전 중 괴한에 의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와엘 즈와이테르, 마흐무드 함샤리, 후세인 알 바시르 등 후술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1972)에 대한 보복 암살 작전을 벌였다. 검은 9월단에 의한 뮌헨 올림픽 테러가 발생하자 모사드는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 동안 추적하여 암살하였다. 영화 '뮌헨' 이 '신의 분노 작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와엘 즈와이테르(Wael Zwaiter) 암살(1972.10.16): 이탈리아 로마에 살던 팔레스타인인으로, 야세르 아라파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직업은 번역가이고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즈와이테르의 지지자는 '검은 9월단과 관계없는 죄없는 지식인을 암살'했다고 비난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한다.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1972.12): PLO의 프랑스 대표.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모사드 요원이 이탈리아 언론인으로 위장해 아파트에 폭파팀이 잠입할 수 있게 함샤리를 속였다. 전화기가 있는 책상 밑에 폭탄을 설치한 후 함샤리에게 전화를 걸어 함샤리가 전화를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부비트랩 폭탄을 터뜨렸다. 함샤리는 치명상을 입은 뒤 프랑스 경찰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진술했고 몇 주 후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프랑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후세인 알 바시르 암살(1973.1.24): 요르단인. 키프로스의 파타당 대표. 호텔 방에 들어와서 불을 끄자 원격 폭탄이 폭발해서 폭사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키프로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바시르 알 쿠바이시 암살(1973.4.6):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법학 교수. 파리에서 저녁 먹고 집에 가던 중 2명의 모사드 요원에게 12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무기를 운송했다고 주장한다.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 카말 아드완, 카말 나세르 암살(1973.4.9):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는 검은 9월단의 작전대장, 카말 아드완은 PLO의 작전대장, 카말 나세르는 PLO 최고위원회 위원이자 대변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사리 암살할 수 없었다. 'Spring of Youth' 작전을 통해 특공대를 보내 대규모 습격을 벌여 살해했다. 특공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이스라엘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에서 내린 조디악 모터보트를 통해 레바논 해안에 상륙했다. 모사드 요원들이 차를 렌트해서 특공대를 운송했다. 나자르의 부인, 이탈리아 민간인, 레바논 경찰 2명이 습격에 휘말려 함께 사망했다.
자이아드 무차시 암살(1973.4.11): 키프로스에서 후세인 알 바시르의 후임자. 호텔 방에서 침대 밑의 폭탄으로 인해 폭사했다.
아브델 하미드 시비, 아브델 하디 나카 암살(1973): 로마에서 차량 폭탄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
모하메드 부디아 암살(1973.6.28): 알제리 출신. 프랑스의 검은 9월단 작전대장. 변장과 여장에 능했다. 카시트 밑에 너트와 볼트를 이용한 압력식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1979):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1명인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3년 7월에 모사드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다. 이후 CIA의 보호를 받아 모사드의 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1973년 11월 3일 CIA 부국장 '버넌 월터스'는 수단 주재 미국대사 암살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를 만나 'PLO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다'라는 비밀 약속을 했다. PLO는 중동 지역 테러 정보를 CIA에 제공해서 미국인들이 좀 더 안전하게 중동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라파트는 CIA와의 연락책으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고 그는 미국 CIA 본부 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들었다. 모사드는 CIA에게 알리 하산 살라메와의 연락을 끊으라고 요구했으나 CIA는 정보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베이루트에서 폭탄으로 모사드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모사드의 책임자는 '라피 에이탄'으로, 전설적인 공작 책임자였다고 한다. 레바논 민간인 8명이 주변에서 함께 사망했다. 모사드와 CIA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런저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지도자 암살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칼릴 알 와지르(1988): PLO 군사지도자. '아부 지하드' (성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핵심 인물. 튀니지에서 집에 있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30명의 암살자가 작은 보트에 타고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는데 일부는 관광객으로 가장해 알 와지르의 집을 포위했고 일부는 튀니지군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보잉 707 전자전기를 띄워 모든 통신을 방해했다. 이 작전은 모사드가 실행한 암살 작전 중에서도 대규모로 평가된다.
파트히 샤카키 (1995):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팔레스타인 이슬람 투쟁 운동'의 간부. 몰타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두 달 전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훔친 뒤 그 오토바이를 타고 샤카키의 머리에 3발의 총격을 가했다.
야햐 아이야시(1996): 하마스의 폭탄 제조자. 가자 지구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전화에 장치된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 당시 그의 먼 친척을 자칭하는 19살 청년이 아이야시의 집을 방문한 뒤 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폰을 빌렸는데 이 때 폭탄을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사드의 휴대폰 폭탄을 사용한 최초의 암살이었다.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2004):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간부. 과거에 이스라엘이 체포해서 투옥시켰다가 1997년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당시 협상에 의해 석방하였지만 2004년 이스라엘에 의해 헬리콥터 미사일 공습으로 암살당했다.
이즈 엘 딘 셰이크 "에제딘" 칼릴(2004.9.26.): 하마스 소속. 가자 지구 등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아 왔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SUV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이마드 무그니예(2008.2.12.): 헤즈볼라 소속으로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에 대한 테러 공격 및 외국인 납치 혐의로 미국 정부에 의해 5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리고 25년간 추적당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이란 이슬람 혁명 29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신의 SUV(파제로)에 탑승했는데 운전석 쿠션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마흐무드 마부(2010): 하마스 지도자. 두바이의 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 호텔 객실에 침입해 베개로 질식사시켰다.
‘레바논 삐삐 테러’ 배후 지목, 이스라엘 모사드의 세계
이스라엘이 최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이어가면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모사드는 17, 18일(현지 시간) 레바논 전역에서 발생한 무선호출기(삐삐)와 휴대용 무전기 동시 폭발 테러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관련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모사드가 배후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헤즈볼라가 사용한 무선호출기를 생산한 헝가리 기업 ‘BAC’가 모사드가 설립한 ‘유령회사’라고 보도했다. 모사드는 24일과 26일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헤즈볼라의 로켓부대 지휘관 이브라힘 꾸바이시와 드론부대 지휘관 무함마드 후세인 사루르 관련 정보를 파악하는 데도 역할을 했을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17∼18일(현지 시간) 레바논 전역에서 발생한 무선호출기(삐삐)와 휴대용 무전기(워키토키) 연쇄 폭발 테러는 피해 규모(사망자 37명, 부상자 약 3000명) 못지않게 수천 대의 통신기기에 소규모 폭탄을 설치한 뒤 이를 동시에 폭발시킨 ‘고난도 기술’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이번 테러의 목표였던 레바논의 친이란,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물론이고 서방국들도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특히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가 배후일 것이라는 주장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과 모사드는 현재까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핵심 ‘주적’ 중 하나인 헤즈볼라가 주로 사용하는 무선호출기와 무전기를 대상으로 대규모 동시다발적 폭발이 발생한 것을 놓고 “배후는 이스라엘의 모사드다”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폭발물이 설치된 무선호출기를 직접 생산하기 위해 유럽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다는 의혹이 나올 만큼의 치밀함과 동시다발적 폭발을 일으킬 수 있도록 제어하는 기술력 역시 세계를 놀랜 이전의 모사드 공작과 닮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1960년대 적국 시리아의 국방차관까지 올라 군사 기밀을 빼돌리다 발각돼 사형당한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1924∼1965년)을 배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 중 하나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 다수의 이란 핵개발 관계자 연쇄 암살 등으로 세계를 경악하게 한 모사드는 어떤 기관일까.
암살, 도청 및 해킹 등 전문 작전조직 운영
모사드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12월에 설립됐다. 히브리어로 모사드는 ‘정보 및 특수 임무 연구소(기관)’의 의미를 지닌다. 설립될 때부터 총리 직속 기관이었고 한동안 정부 내에서도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초대 국가원수였던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는 정부 내에서 모사드란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정부의 치밀한 관리와 전폭적 지지 속에서 모사드는 ‘신베트’, ‘아만’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정보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정보와 군사 정보에 각각 중심을 둔 신베트, 아만과 달리 모사드는 철저히 해외 정보 및 공작에 집중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모사드의 연간 예산은 약 27억3000만 달러(약 3조6000억 원), 고용 인원은 약 7000명으로 추정된다. 각 기관의 주요 정보가 따로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비교는 힘들지만 모사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영국 MI6,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등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갖춘 정보기관으로 꼽힌다.
모사드의 주요 작전 부서로는 ‘메차다(Metsada)’ ‘네비오트(Neviot)’ ‘차프리림(Tzafririm)’ ‘링(Ring)’ 테벨(Tevel)’ 등이 꼽힌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메차다이다. 폭파, 암살, 납치 같은 ‘위험한 작전’을 주로 담당하기 때문이다. 메차다는 산하에 ‘키돈(Kidon·히브리어로 단검)’이란 암살 전문팀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미인계와 돈을 이용한 포섭, 납치, 정보 파악 등에도 능통하단 평을 받고 있다. 모사드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보기관’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네비오트는 정보기술(IT)을 이용한 도청과 해킹, 차프리림은 해외 유대인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담당한다. 또 링과 테벨은 각각 경제 분야 정보 파악과 다른 나라 정보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담당한다.
텔아비브대 중동학 박사인 성일광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사드를 국가안보의 핵심이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추고 있는 기관으로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제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자금력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모사드의 역대 국장(최고책임자) 중(13명) 5년 임기를 못 채운 인사는 3명뿐일 만큼 모사드는 전문성과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 모사드 국장은 대부분 군대와 모사드에서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이다. 2021년 6월부터 모사드를 이끌고 있는 다비드 바르니아 국장도 특수부대 출신이다. 그는 모사드에서는 침투작전과 요원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역시 특수부대 출신으로 2002∼2011년 모사드 국장이었던 메이어 다간(1945∼2016년)은 “적의 뇌를 삼키라”는 말을 요원들에게 자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적국에서 리조트 운영해 자국민 구출 작전 진행
설립 직후 모사드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전범 색출과 처벌 임무를 수행했다. 1960년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을 체포한 사건은 모사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로 꼽힌다.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약 600만 명이 살해당한 홀로코스트의 핵심 설계자 중 하나였다. 그는 나치 패망 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요원 14명으로 구성된 모사드의 전담팀은 그를 끝까지 추적했으며, 결국 체포에 성공해 이스라엘로 데려왔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사형당했다.
모사드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5년에 걸쳐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7000여 명을 수단으로 데려와 이스라엘로 비밀리에 이주시킨 ‘브라더스 작전’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슬람 국가인 수단은 당시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어서 모사드 요원들이 철통 보안 속에 작전을 진행했다. 요원들은 스위스 여행사의 사업가로 위장해 수단 홍해 연안의 문 닫은 리조트 하나를 사들였다. 낮에는 호텔 직원으로 변장해 지역 주민을 고용하며 리조트를 운영했다. 특이한 건, 리조트가 인기를 끌며 외국 다이버들과 스포츠 낚시꾼들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리조트는 모사드 작전 기지로 돌변했다. 이들은 항공편이나 선박으로 에티오피아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을 리조트로 데려왔다. 여기서 이스라엘 해군 특공대가 보내온 배에 난민들을 태워 이스라엘로 보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당시 요원 중 한 명이었고 훗날 ‘모사드 엑소더스’란 책을 쓴 가드 심론은 “밤마다 440km에 이르는 움푹 팬 도로를 이동하며 수백 명의 난민을 해변의 리조트로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5년이란 작전 기간 동안 수단 당국은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모사드는 이란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는 작전을 대거 펼쳐 왔다. 모사드는 2011년과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미사일 업무 담당자였던 하산 테라니 모가담 장군을 이란에서 암살했다. 또 꾸준히 이란의 핵과 미사일 관련 과학자와 군 관계자들을 제거했다. 특히 2018년 1월에는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창고에서 이란 핵 개발 관련 문서와 CD를 대거 탈취해 공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당시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이 2015년 서방과 핵 합의를 체결했는데도 이런 자료를 숨기며 비밀리에 핵을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사드는 2020년 11월 이란 핵 과학자인 모센 파크리자데를 테헤란 근교에서 원격조종 기관총을 이용해 사살해 또 한번 주목받았다. 이 기관총은 첨단 정보기술(IT) 장비와 위성 등을 이용해 작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23, 24일 이스라엘이 융단 폭격을 가한 레바논에선 바코드나 QR코드가 찍힌 전단이 뿌려져 눈길을 끌었다. 이 역시 모사드 소행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헤즈볼라는 성명을 통해 “시오니스트 적(이스라엘)들이 베카 지역에 바코드가 있는 전단을 뿌리고 있으며 다른 곳에도 뿌릴 수 있다”면서 “바코드를 열거나(스캔하거나) 유통시키지 말고 즉시 파기해야 한다. 이 코드가 모든 정보를 가져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이 코드를 스캔하면 스마트폰의 개인 정보가 이스라엘로 흘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방국 정보 제공-북한 무기 정보 파악도 관심 커
모사드는 우호 세력을 돕는 작전에도 참여한다. 특히 동맹국인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한 2001년 모사드가 미국 정부에 미리 테러리스트 동향을 귀띔했다는 보도도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당시 모사드는 고위 전문가 2명을 테러 전달인 8월 미 워싱턴에 파견했다. 이들은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에 “최대 200명으로 테러리스트 조직이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모사드는 2020년 1월 이란 IRGC 내 엘리트 부대로 해외작전과 특수전 등을 수행하는 ‘쿠드스군(아랍어로 예루살렘이란 뜻·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의미)’의 당시 사령관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미국이 무인기(드론)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암살하는 데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레이마니의 이동 경로와 현지 상황 등을 미국 측에 제공한 것이다. 쿠드스군은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지원을 핵심 업무로 삼고 있어 이스라엘로서는 미국에 정보를 제공해 주적을 제거한다는 명분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모사드는 이스라엘과 공개적 접촉을 피하는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거나 비밀 관계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과거 이스라엘과 적대적이었지만 지금은 우호 관계인 이집트,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등과 수교할 때 모사드의 첩보 활동과 비밀 접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정설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한편 모사드는 한국에도 요원들을 파견했고, 다양한 정보활동을 한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북한이 이란과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관련 협력을 꾸준히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또 북한산 무기와 땅굴 설계 기술 등이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무장단체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