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지배는 죽음으로 끝나지만, 순교자의 지배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쇠렌 키르케고르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순교(殉敎)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살당하거나 처벌, 옥고 등 여러 수난을 치른 경우 그 원인이 되는 외부의 탄압을 '박해'라고 칭한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의 표기가 대표적이다.
원론적으로는 1) 자신의 의지로 행해져야 하며, 2) 그 의지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발휘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즉, 신앙을 포기하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순교도 분류상 자살의 한 종류라고 규정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종교에서 금기시되는 자살과 달리 순교는 추앙받고 권장하는 행태를 보인다. 결국은 해당 집단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가 의로운 죽음인지를 가르는 기준일 뿐이다.
현대에는 여기서 더 확장되어 특정 '주의'나 '사상'을 위해 죽는 경우에도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다.
종교적 관점
그리스도교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옳은 말이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14장 13절 (공동번역성서)
그리스도교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는데 당장 12사도 중에 자연사한 사도 요한과 배신자인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다. 순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순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불교처럼 어떤 추상적인 신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직접 체험했다고 주장했고 본인들이 주장하는 바의 진위 여부를 본인들이 확실하게 알 수 밖에 없으므로 사도들의 순교는 다른 종교들의 순교가 그 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는 자살한 사람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며 심지어 종교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경우에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배교를 강요당하면 거부하고 탄압하는 측이 가하는 형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한국 사회가 크게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와 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순교'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는 쪽은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초기 선교의 과정에서 기성 유대교, 이어서 로마 제국에 의한 탄압에 의해 순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종교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제국에서는 체포된 그리스도인이 로마 신전에 경배, 즉 배교하지 않으면 맨손이나 단검 한 자루를 쥐여주고 맹수들과 싸우다 죽게 하거나 십자가에 못박고 참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교부들의 기록은 때로 매우 자극적이기도 한데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면 찢어죽이거나 기름에 튀겨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네로 시기인데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을 네로가 치하 콜로세움에서 박해했다고 전해지지만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지어졌다. 다만 여기서 더 나아가 "네로의 기독교 탄압은 전설에 가깝다.", "네로 황제의 로마 대화재 관련 탄압 기사는 사실 고작 1-2년에 걸쳐 로마 시 중심부에서만 이루어진 산발적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도 비슷한 급의 과장, 왜곡이다. 콜로세움이 아닐 뿐 네로의 기독교 탄압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ergo abolendo rumori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Tiberi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그래서 네로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수치스런 행동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던 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군중은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 불렀다. 이 명칭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도'christus는 티베리우스 재임 때 재정 대리인procurator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이 치명적인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은 얼마간 잠잠해졌지만, 그 악의 근원지인 유다에서뿐만이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몰려들어 유행하는 로마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 15.44
타키투스는 위에 서술하였다시피 기독교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의 기록은 비록 그가 네로가 속한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음에도 자료조사를 통한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기에 동시대에 대해 다룬 다른 기록들보다 상당히 자세하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타키투스는 네로 시기를 직접 산 인물이기 때문에 네로 시기에 대한 서술은 이전의 황제들에 비해서 더욱 자세한 기록이라고 평가받는다.
"네로 황제의 로마 화재 관련 탄압 기사는 사실 고작 1-2년에 걸쳐 로마 시 중심부에서만 이루어진 산발적 사건이었다."는 주장에는 큰 문제가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후 내용을 죄다 빼먹은 서술이다. 로마 제국 초기에 황제의 통치는 사실 현재 생각하는 것만큼 막강하지는 않아 네로 시기 이후의 황제들이 작정하고 밀어붙인 기록말살형도 로마시 바깥에서 철저히 실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지적하는 '중심 내의 산발적'이라는 건 그 전후의 황제들과 연관된 대다수 사건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건 자체에 대한 축소다.
'1~2년간의 사건'이라는 것도 이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빠진 주장이다. 64년 로마 대화재로부터 고작 1년 후인 65년에 네로 몰락의 결정타인 피소 음모가 벌어졌으며 네로가 사망하는 68년까지 유대 반란, 코르불로 숙청, 빈덱스 반란 등등 혼란스러운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이 모든 사건들은 기독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형사건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기독교 탄압 관련 내용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박해가 꾸준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기독교 탄압은 지속되었다. 트라야누스 시기 1세기의 로마 총독 소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관할지역인 비티니아-폰투스 속주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소당하자 그리스도교라는 컬트(cult) 자체를 낯설어한 데다 법적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익숙하지 않아서 트라야누스에게 질의했는데 트라야누스는 110년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리스도인의 마구잡이식 처형에는 반대했으나 일단 잡히면 처형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아 이 시기에도 꾸준히 박해는 이어졌다. 그리스도화된 후대 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라고 불린 황제의 시기에도 이랬으니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게릴라처럼 지하교회나 가정교회 등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는 등 생존의 투쟁에 가까웠다.
그래서 A.D. 200년대부터 박해에 의한 개종이나 배교는 나중에 회개한다면 어느 정도 참작해 주기도 했는데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 박해 시대에 배교했던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가지고 4세기~5세기에 도나투스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슬람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에 배교하여 살 수 있음에도 순교를 택하는 것은 성인 시성에서 기적 심사의 요건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여서 동아시아에서의 가톨릭 전래 시기 대규모 가톨릭 순교자들은 상당히 높게 쳐주는 편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에도 순교자들은 존재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희생당한 군인들은 순교한 것으로 여겨졌고 서구 세계의 확장 과정에서 종교를 이유로 타지에서 살해당한 선교사 및 신자들을 순교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의 개념 자체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세계 확장의 과정은 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제국주의적 확장일 수 있지만 서구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적 확장이더라도 오지에 가서 선교하다가 믿음을 지켰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므로 순교로 간주되는 것이다. 서구의 '순교' 판정의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과 아마존의 추장 사이에 차이가 없다.
한국 가톨릭은 초기 전파 당시 엄청나게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절두산을 비롯해 성지도 많고 순교 성인들도 많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가 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행해졌고 부산광역시에 있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도 1868년에 부산에서 순교자가 발생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이 부분이 순교와 자살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인데 박해 당시 신부에게 배교와 상관 없이 그냥 곱게 출국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부하고 사형을 선택한 경우가 있다. 일단은 이 경우도 순교로 치는 듯하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 막부 시대에 가혹한 가톨릭 탄압이 이어졌기 때문에 현지인 중에서도 가톨릭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대거 처형당하고 시복, 시성된 사람들이 많다.
다만 종교적 의미의 순교자가 맞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사영 같은 경우다. 천주교계로 보면 분명한 순교자이지만 그 목적이 모국에 대한 배신, 침략 사주에 해당되어 줄곧 순교성인에서 제외되고 있으며 외부에게 호불호가 갈려도 순교로 여기는 토머스 목사 같은 이의 경우도 있다. 토머스 목사는 1866년 평양 대동강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발포하여 주민들을 살상한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탄 통역 담당 목사였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조선 측은 관대하게도 고기와 쌀까지 주면서 정중히 나갈 것을 요구했지만 보답이라곤 포격과 같이 조선군관 납치 및 금품 요구였다. 그래서 목숨을 잃은 평양 주민들의 증오와 반발로 제너럴 셔먼 호는 화공으로 불태워졌고 겨우 탈출하여 뭍으로 올라온 몇 명은 그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토머스 목사도 올라와서 이렇게 맞아죽었는데 훗날 개신교계에서는 단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개신교 목사 1호라는 명목으로 교회도 세우고 있고 토머스 목사 교회까지 세웠다.
물론 토마스 개인의 경우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엄밀히 그는 선교사의 신분이지 장교 신분은 아니다. 그가 직접 조선인 약탈을 지시했을 리도 없고 도리어 만행에 항의하려 했다 해도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닌 이상 셔먼호 선원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도 없으니... 그러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는 단순 통역이 아닌 교섭창구의 역할을 했고 박규수가 쓴 환재집에는 토마스가 조선 관헌의 말을 끊고 무시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토마스와 셔먼호 선원들이 죽은 이유는 해적질이 컸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계에서도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평양 주민들에게 죽은 것은 맞지만 성경을 뿌리다가 죽었다는 설, 그리고 배에 불이 붙여진 후에 탈출을 못한 토마스 목사가 배 위에서 성경을 뿌리며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성경을 뿌렸다는 설은 대부분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개신교에선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대의 실록, 평양지, 환재록 등의 기록에는 성경을 뿌렸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1928년 오문환의 주장에서나 나오는데 당시 정황상 토마스가 죽기 전에 성경을 뿌렸다는 구전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도 토마스 목사의 순교자 논란에 대한 서술이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음에도 개신교계에서 일단 순교자로 인정하고는 있다.
일제강점기의 순교자로는 주기철 목사를 예로 들 수 있다. 6.25 전쟁 시기에도 순교자가 많이 나왔는데 손양원 목사, 전덕기 목사, 김응락 장로 등이 해당된다.
가톨릭 신자는 순교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리상 틀린 건 아니다. 순교는 혈세라고 해서 피로 받는 세례로 치므로 보통이라면 연옥에 가야 할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신약에도 예수와 그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은 유익하다고까지 나와 있다.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인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에 따르면 순교자를 죽이는 박해자도 교리상으론 사랑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뜻은 그 박해자가 저지르는 악행까지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개개인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 사람의 올바른 회개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가상칠언의 첫 번째 유언인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카 복음서 23, 34)를 생각해 보자. C.S.루이스도 그의 저서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계명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약성경의 유다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1장 23절)라고 나와있다. 최초의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부제도 죽으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했다고 사도행전에 나온다.
간혹 가다 예수의 죽음을 순교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단어 선택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모두)에선 예수의 죽음의 목적이 순교의 정의와는 맞지 않고 인류의 죄로 인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당함' 정도로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맥락에서 예수 사건은 단일적인(유별난) 사건이므로 그리스도교의 순교라는 범주에 묶이기 어렵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에서는 대속론 하에서 간혹 원죄개념을 이용하기도 하여, 죄가 없는 예수가 인류의 종교적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제물로 죽임당했다고 인식하는 반면 자유주의(전기, 후기 모두) 개신교에서는 '인류의 죄'의 개념을 다르게 잡아 (사회적) 불의 및 후기선지자 시대에 비판된 (사회적) 부정의를 죄로 보며 예수의 죽음이 이로 인해 수없이 살해당한 억울한 생명의 모범으로 삼아졌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보수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순교가 아니라 구속사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대속의 결과이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예수의 죽음은 (마치 사법살인을 순교라고 하지 않듯이) 순교가 아니라 불의한 체제, 종교, 사회, 혹은 이념 등에 의한 타살일 따름이다. 따라서 순교의 정의에 부합하기는 어렵다.
한편 가톨릭에서 순교는 기적으로 취급되므로 교황청에서 시복, 시성을 조사할 때도 순교자에 대해서는 기적심사를 면제한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지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 자체를 '인간의 의지로는 하기 어려운 엄청난 일'로 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시복 과정에서 기적심사를 하지 않는 것이고 시성에는 원래 최소 두 번 이상의 기적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순교는 그 자체로 1회의 기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인들이 최초로 시성되었을 때는 바로 그 두 번째 기적에 대한 심사를 교황의 명령으로 권면받은 경우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등 참고.
현재도 이슬람 문화권 일부 등 그리스도교에 매우 적대적인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들이 많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탄압으로는 최악으로 악명이 높은 북한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는데 그야말로 그냥 주체사상을 택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데도 그리스도교를 지키다가 죽거나 정치범수용소으로 끌려가 고문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슬람
이슬람에서는 초창기인 무함마드 예언자의 시대에서부터 메카군에 대항해 분투했던 역사로 순교를 매우 영예로운 행위로 여긴다. 가령 메디나에서 계시된 구절인 제3장 이므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69.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치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에서 살아있노라.
170.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못 하고 뒤에 올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노라.
수라트 알 이므란 3:169-170
이외에도 메디나 시기에 계시된 구절 가운데 무려 109절이나 순교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특히 '칼의 구절'이라고 부르는데 본디 당대에 박해받는 무슬림들이 성전(지하드)에 임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는 가운데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구절이지만 오늘날 알카에다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요상하게 곡해해서 그들의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무함마드 시대의 성전 이외에도 이슬람에서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이교도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에 대해서도 순교자라고 대우하는데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그리스군과 프랑스군 등에 항전하다 죽음을 맞은 튀르키예 병사들도 순교자(튀르키예어로는 Şehit)라고 부르머 6.25 전쟁 및 현재진행형인 반PKK 진압작전 및 PKK에 의한 테러로 사망한 이들도 순교자라고 지칭한다. 따지고 보면 튀르키예어에서 순교란 '나라를 위해 죽은 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무슬림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벌인 전쟁은 방어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무함마드와 대적하던 메카는 다양한 다신교와 일신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였고 특히 메카의 주 수입원 중 하나는 다른 지방에서 오는 종교 활동을 위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가기전 메카에서 살 적에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포교하였다. 물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포교의 효과는 별로 없없지만... 그 후 무함마드는 메카를 오가는 상단을 약탈하고 도시를 봉쇄하고 메카와 전쟁을 벌였다. 이후에도 그는 종교적 명분 아래 아라비아 반도 곳곳의 크고 작은 부족들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고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내새우는 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명분도 이러한 무함마드의 행적을 따르는 방법으로 쿠란을 해석하고 이를 도덕적 기준으로삼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쟁을 통한 약탈의 허용 전쟁포로를 성노예로 삼기, 대량학살, 이교도를 대하는 방식, 사형 집행 방법으로서 참수 등 이 모든 악행들의 근거를 무함마드가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의 주석을 보면 꼭 무함마드가 다신교도들을 학살하거나 이교도를 성노예로 취하거나 한것은 아니다. 후세의 종교인에게 악용될 여지를 남기고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겠다.
사실 전술한 구절들은 전쟁 상태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구절이고 의외지만 여성이나 노약자, 장애인은 살해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걸 엉뚱하게 극단적으로 해석하는게 문제지.
무아트 알 카사스베 요르단 조종사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의해 화형을 당했을 때 요르단 당국은 그를 순교자로 표현했다. 다만 이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IS를 규탄하기 위해 당국에 의해 순교자로 칭송된 것이다.
라마단이나 할랄을 지키느라 죽는 것은 자살이며 잘못이라는 것이 정설임을 감안했을 때 단순히 교리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게 순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타끼야가 시아파에는 있는 것을 보면 명확하다.
불교
불교에서도 순교자들은 제법 있었다.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타 교단 사람들에게 린치당해 사망한 목갈라나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중국에서는 달마의 뒤를 이어 중국 선종의 2대조가 된 '혜가'도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한국에서는 신라에 불교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이 유명하다. 목이 베어지자 하얀 피가 나오고 연꽃이 내렸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일화다.
세속적 관점
순교는 능력 없이 유명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조지 버나드 쇼
이슬람 근본주의의 자폭 테러, 한국 내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개념없는 행태로 인해 무교인들 일부에서는 점점 개죽음 내지는 광신적 행위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늘고 있다. 어떤 의미냐면 무교인 입장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므로 광신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그리고 그 죽음을 숭고한 죽음으로 여기는 일은 무교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벌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죽는 게 아닐 뿐 사실상 자살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있다. 특히 순교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오직 자기 조직의 내부불만을 제거하고 결속력을 강요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적대감을 몰고 가려는 종교 지도자가 있으면 어느 순간 순교자에 대한 추모와 신념의 존중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신념이 과연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다. 문제는 무교인들 입장에선 당연히 종교적 신념에 큰 가치를 두기 힘들다는 것이다. 안 그랬으면 이미 무교인이 아닐 가능성이 클 테니 말이다. 다만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나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친가톨릭/반불교 탄압에 반대하기 위해 분신한 틱꽝득 스님, 재난이나 사건사고를 맞닥뜨렸을 당시에 사람을 살리라는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목적으로 평신도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다가 사망해서 순교자가 된 종교인은 다른 종교인이나 세속주의자, 무신론자, 무교자들도 긍정적인 의미의 순교로 평가하는 동시에 국가적/사회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의미 이외에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순교도 있다.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형을 집행하였고 미네르바 사건 당시 그에게 면회하여 자살을 종용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김충식 교무를 원불교에서 순교자로 본 것도 해변에서 물에 빠진 연수생을 구한 뒤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도 이 사람은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에 의해 의사자로 선정되었다.
순교신앙의 실존적 의미
직시하는 대로 짧은 기독교 역사에 비해 많은 순교자를 가진 한국교회이다. 그 순교역사 속에는 신앙의 박해만이 아닌 민족의 고난과 비극도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신앙의 박해로 순교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오늘 이 시대에 순교신앙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속에 어떤 의미로 가치화 되어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해야 한다. 필자는 순교자를 찬양하거나 기리는 의미가 아닌 삶의 현장 속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으로서의 순교신앙의 의미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순교자들은 목숨을 걸고 선포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 메시지를 듣고 전하는 자를 죽게 했다. 그래서 순교는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증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정말 반대, 핍박, 원수들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실존이어야 한다. 지금은 나와 다르면, 지적질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쓸어버리려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아니다.
셋째, 삶의 지향이 오직 주님, 오직 말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 지금 우리의 실존은 너무나 땅의 것을 구하고 차지하려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넷째, 순교신앙의 실존적 의미의 최대, 최고는 '예수 닮음'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클라이막스는 '예수 닮음'이었다. '예수 닮음!' 과연 어느 만큼 내 삶에서 실존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예수 닮음'은 바로 '성령의 내주', '성령 충만'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면에서 힘들고 갈등하고 분열되는 이 세대 속에서 순교자의 순교신앙이 한낱 예화로 쓰이거나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향기나는 기독교적 실존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순교에 이른다는 진정한 의미
나는 굽힘없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의 자리에 이르신 믿음의 선조들을 많이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하였는가. 아니 그분들은 죽음 이상의 무엇을 잡고 계셨기에, 죽음 이상의 그것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자리에까지 기꺼이 나가실 수 있었는가. 죽음을 당당히 맞이할 수 있었던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 속에 중심을 이룬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가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호화롭거나 넉넉한 풍토 속에서 웃고 즐기는 가운데에서가 아니라, 성 삼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부인과 변절의 위협에, 오히려 순교의 영광을 감사하며 사라져간 그분들의 피의 대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어 머무는 곳에 일어나는 핍박의 상황들을 막지 않으시고, 순교의 피로 인하여 복음이 넓게 확장됨과 동시에, 진리란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여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성질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시대를 통해 알게 하셨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메시야상을 고대했던 유대인들과 황제숭배사상을 가지고 있던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중세의 1천년 종교적 암흑시대와 종교개혁의 깃발이 들려진 시기(1516년: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536년: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불란서, 독일 등으로 퍼져 나갔다)에는 로마 캐톨릭의 교리에 반대하여,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신앙의 표지를 외치며 성도들은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순교의 자리가 오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겐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도는 삶이 주어졌다. SOLI DEO GLORIA!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은 너무 깊어 사람의 지혜로 어찌 알 수 있으랴마는, 어떤 면에서 보면 박해와 핍박은 끊임없이 줄기차게 진리를 따라다녀 그 진리를 흐리게 하려는 사단의 궤계인 것이다. 이제 바로! 진리를 흐리게 하여 교회를 흩으려는 계획에 착수한 사단은 이스라엘과 유럽과 아메리카를 거쳐 대한민국에로 그의 최대의 무기인 핍박과 박해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의 나타남은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기 때문이리라.
핍박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일어나게 된다. 일제는 천황을 중심으로한 식민지 국가로의 통일을 위해 식민지인들의 사상적 통일(사실 이것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을 감행하던 중, 자신들의 목적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세력이 삼위 하나님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고 이를 핍박하기로 계획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는 신사(다신 숭배)를 통하여 식민지인의 정신을 하나로 매어두려는 큰 계획이 있었는데, 교회는 그 지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신앙교육과 함께 민족의식에 관한 교육과 주체성 교육을 교회나 가정에서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정책인 창씨개명, 단발령 시행, 일본식 교육(일어 사용), 신사참배는 민족성 말살 정책이면서도 강하게 교회를 핍박한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분들과 협박하며 회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그것, 그분들과 그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그것, 그분들과 그분들이 섬기는 성 삼위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그것. 바로 그 사이에 가로놓인 그것이 죽음 이상의, 즉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신앙과 정신의 진정한 내용이다.
협박하며 회유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여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죽음을 만류하거나 슬퍼하는 사람 앞에서 오히려 상대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초연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 안에 충만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강렬하게 신앙하는 외적인 고백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교에 이르는 진정한 의미이며 내용이다.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말하여 왔던 것은 사람이 세운 목적을 위한 항변이 아닌, 늘 삶에서 고백했던 말(삶)이요, 고난 중에 고백했던 말(삶)이요, 이젠 죽음 앞에서도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릴 수 없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삶)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말 한번 바꾸고 신사에 절하는 것이 그리 하나님께 죄를 얻는 것이냐? 이 기회를 지혜롭게 피해서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면 될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신앙은 고백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고백을 포기한 사람은 그 고백의 본질인 신앙까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이 신앙의 고백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존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순교자들은 그 순교 자체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었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초대 교부였던 폴리갑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의 정신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망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마땅히 여기신 두 분의 신앙고백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에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울려 퍼진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으나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 --- 내가 이러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를 위해 당신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 폴리갑 -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되는, 신이시며, 예수는 그분의 아들되는 신이니,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은 일체가 되는 고로 기독교에서는 이를 삼위일체라 부른다 ---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이외의 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되어 있고 신사의 신은 신이기는 하나 하나님은 아니며, 신의 형상을 만들어 모셨으니 분명한 우상이므로 참배해서는 안됩니다. 우상 숭배하고 예배하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 손양원 목사 -
선교 1백년을 지난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와 외식주의로 기울어지는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신앙의 진정한 본질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렸던 믿음의 선조들 앞에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이에 이러한 계기로 말미암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순교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재무장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말이다.
“순교는 가톨릭을 위해 몸과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니 무서운 일이다. 가톨릭은 군대를 파견해 다른 나라의 탈취를 도모하는데, 천 년 후에도 가톨릭이 일본을 탈취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 골수에 가톨릭의 사악함을 새겨야 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가톨릭이 군대를 앞세워 일본을 탈취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인이 가톨릭에 세뇌되어 영혼을 기만당하고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일본인은 ‘할복’으로 죽음을 명예롭게 여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할복은 무사 계급에 한정된 것이었고 또 할복이 명예를 담보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었지 순교와 같이 ‘죽음을 숭배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교의 실체를 꿰뚫어 본 하비안은 ‘가톨릭의 사악함을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자료7>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들이 결집한 성으로 들어간 정부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군이 들이닥치자 가톨릭 신도들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얼굴로 죽음의 순간, 즉 순교라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교는 집단 자살과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타인이 끊게 만든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죽음을 찬미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이후 숨어 있는 가톨릭 신도들을 색출하며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을 금지했다.
순교(殉敎)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순교라고 하면 ‘죽음까지 불사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신앙이라 여기며 숭배한다. 순교의 한자를 보면 ‘따라 죽는 것(殉)을 가르친다(敎).’는 뜻으로 가톨릭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란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며 “죽음을 강제하는 사고방식(종교학대사전)”이기 때문이다.
순교를 의미하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은 ‘증거’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르티리온’ (μάρτυριον)에서 왔다. 이에 의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결한 ‘증거’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은 끊임없이 순교자를 ‘성인(聖人)’으로 기념하고 추앙하고 있다.<자료8> 이처럼 죽음을 신앙의 증거로 숭배하고 찬미하는 사고 방식은 가톨릭의 발생 시점,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가형은 예수 출생 전 로마 시대부터 집행된 사형 방식으로 이보다 더 혐오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당하고 새들이 날아와 맨살을 쪼아 먹기도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가는 시체를 직접 보고 그 악취를 맡아 본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고,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역겨워했다.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은 가장 극악한 범죄자의 본보기였으며 예수 또한 같은 이유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러우며 기괴한 일이었다. 특히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는 가장 높은 신(야훼)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십자가형을 받아 피 흘리며 죽어 갔다는 것은 극도로 경악스러운 이야기였고, 신성모독을 넘어 발광 중의 발광이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가톨릭 신도조차 예수가 죽은 과정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끔찍하고 비참한 장면을 아무도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313년 가톨릭이 공인되고 십자가형이 폐지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톨릭은 ‘예수와 야훼가 하나의 본체’라는 선언(325년 니케아 공의회)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폐지로 그 광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가톨릭은 십자가형을 ‘혐오스러운 사형 방식’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 방식’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의식을 혼동시키는 계략과 술수가 집요하고 은밀하게 계속되면서 신도들은 십자가형에서 잔인한 공포를 느끼고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형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순교 전설’이었다. 가톨릭 교황 젤라시오 1세(Gelasio I, 492~496 재위)는 미사 중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는데, 순교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인(聖人) 전설’이 미사 중에 낭독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口傳)됐으며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시각적으로 묘사되었다. 또 가톨릭교회는 순교자를 기리는 축제를 열어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순교 이야기는 신도들에게 ‘사이코드라마’처럼 작용해 신도들이 예수나 순교자들이 겪었던 죽음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동참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숭배와 갈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를 죽여 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년~1824년)의 이야기를 보면 십자가형을 곧 은총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썩어 가는 시체가 매달린 혐오스러운 형틀이 구원과 은총의 상징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역사 저술가인 톰 홀랜드는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세상을 바꾸어 놓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교주로 내세운 초기 가톨릭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드러냈을 때, 이를 본 로마의 사법당국은 가톨릭 신자들이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골의 장소’라는 뜻을 지닌 골고다 언덕에서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스스로 ‘보편적(catholic)’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자신들의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광적인 신념 덕분에 미지의 바다를 건너 대륙을 탐험할 수 있었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대륙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제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생명까지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었다. 톰 홀랜드에 의하면 이 세상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죽음을 정복하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 줬다고 신봉하는 이 세상은 아직도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이 세상이 다시 뒤집혀 진리를 올바로 바라보게 된다면 이전의 지배자는 능수능란한 기만술로 여전히 보편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위장술이 벗겨지고 썩어 가는 악취를 풍기며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될까?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
순교자에게 천국을 약속하다
먼저 종교들이 순교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아본다. 많은 종교에서 ‘순교를 하면 천국에 간다’, ‘순교는 영광되고 기쁜 일’이라고 가르쳤다.이는 기본적으로 경전에 명시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에서는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에서 살아있노라.(꾸란 3장 169절)”, “하나님을 위해 성전(聖戰)에 참여하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하나님은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꾸란 4장 74절)”,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뒤에 올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노라.(꾸란 3장 170절)” 등 순교를 권하는 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교를 중요시하는 종교다. 그들의 경전 성경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장 35절)”,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4장 13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받았느니라(마태복음 5장 12절)” 등의 내용이 여러 곳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믿어온 순교란 ‘키두쉬 하셈(םשה שודיק, Kiddush Hashem)’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란 의미다. 구약성경에는 ‘키두쉬 하셈’이란 단어가 나오진 않지만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라”, 또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궁극적인 행위는 ‘율법을 어길 바에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할 때도 키두쉬 하셈을 외치며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핍박도 즐거이 받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순교를 가르치는 데에는 경전의 지침 외에도, 순교한 자의 일화를 영웅담처럼 풀어내는 방법도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유대교에는 ‘아키바’라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다.<자료2> 서기 135년, 로마인에게 공개적으로 고문당해 죽은 랍비 아키바는 “들어라, 오, 이스라엘이여,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을 하며 죽었다고 한다. 그는 토라 교육이 사형죄로 규정된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르쳤고,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 나왔을 때도, 아침 쉐마(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신앙고백 기도문)를 암송해 쇠빗으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에선 아예 순교자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따로 출판하기도 했다. 1260년경 출판된 야코부스의『황금전설』은 유럽에 널리 퍼져있던 가톨릭 성인 전설을 한데 모은 책으로, 중세 당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였다. 발간되자마자 성직자들은 강론을 위해 읽었고 신자들은 신심 함양을 위해 이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어떤 인물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나 악마의 유혹, 잔인한 고문을 받다 순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영웅스럽게 묘사되었고, 천국에 간다는 믿음에 오히려 순교를 기다리고 고통을 기뻐하는 모습들도 보여주었다. 이는 순교가 천국을 보장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심어주었다. 일례로 동정녀라는 아가타(Agatha, A.D 230년-251년)의 전설에서도 순교를 고대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칠리아 총독 퀸티아누스가 아가타를 탐했다. 아가타는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순교의 영광을 얻기를 갈망하며 매일 울면서 기도할 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퀸티아누스는 그녀를 고문대에 대(大)자로 눕혀 놓고 고문하라 명령했다. 그러자 아가타는 “이러한 고통들은 나의 기쁨입니다. 마치 내가 좋은 소식을 듣고 있는 것 같으며, 내가 오랫동안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그 어떤 분을 보고 있으며, 위대한 보물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화가 난 퀸티아누스는 사형 집행인에게 그녀의 젖가슴을 오랫동안 비틀어 짠 다음 절단하라 명령했고, 아가타는 가슴이 도려진 채 감옥에 갇혔다.”
이 전설 때문에 아가타는 보통 자신의 잘려 나간 가슴이 담겨진 접시를 받쳐 들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며,<자료3> 강간 피해자, 유방암 환자, 수유하는 여인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녀의 유해라 주장하는 가슴, 손, 발, 대퇴골 및 기타 뼛조각들은<자료4> 위대한 순교자의 성유물로서 숭배받고 있다.
살인한 순교자도 천국에 가는가
순교를 권장하고, 천국을 보장해준다는 종교들의 가르침에 따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본인만 일방적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달 1월,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이란 케르만주 ‘순교자 묘역’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이를 ‘이중 순교 작전’이라 명명했다. IS는 자살 폭탄의 의미를 ‘순교’라 성명하며 작전을 수행한 두 대원의 실명을 밝혔는데, 이는 그들을 ‘순교자’로 추앙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맨 처음 소개했던 가톨릭 선교사 장 드 브레뵈프를 비롯해 그의 동료 7명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하다 살해당했다. 가톨릭에선 그들이 영웅적인 삶을 살다 순교하였고, 북아메리카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써 일어난 것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왜 이들을 죽였던 것일까?
1633년, 브레뵈프와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휴런 지역 선교에 나섰다. 그러나 유럽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던 휴런족에게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치명적이었다. 1634년(이질과 결합된 천연두), 1636년(악성 인플루엔자), 1639년(천연두)의 전염병으로 인해 3만 명으로 추산됐던 인구가 1만 2천 명으로 줄어드는 재앙이 발생했다. 한 늙은 휴런족 여성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검은 로브(신부복을 입은 선교사를 지칭) 가 우리에게 주문을 걸고 우리를 죽게 만들고 있어요. 모두가 잘 지내던 마을에 들어왔어요.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죽었어요. 그들은 다른 마을의 오두막집을 방문하러 갔고, 그들이 발을 디디지 않은 곳만 죽음과 질병을 피할 수 있었어요.”
반복되는 재앙으로 원주민들에게 선교사들의 존재는 불쾌해졌으며, 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간주되었다. 휴런족은 전염병의 책임을 예수회에 물었고, 이에 가톨릭 신앙을 거부했던 것이다. 3만 명이던 원주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지만, 덕분에 브레뵈프를 포함한 이 8명의 선교사들은 생전 그들이 원했던 순교를 하게 되었고,<자료5>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천국에도 가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해 전사하는 것을 순교라 표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회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지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전대사(全大赦)를 주고, 전사자에겐 순교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약속했고, 열성적인 신자들은 흔쾌히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피를 뿌렸다. 1096년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군 무리는 라인강 계곡의 유대인 공동체를 초토화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보라, 여기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이 있는데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에게 복수하러 가고 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수하자.” 이것이 유럽에서 최초로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벌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폭력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의 면죄부를 받은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유대인은 회당에 몰아넣고 검으로 죽였으며, 모스크로 피신한 무슬림 만 명도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사흘 동안 약 3만 명을 살육했다. 거리에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프로방스의 연대기 기록자 아길레르의 레몽은 다음과 같이 학살 현장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무릎과 고삐까지 차는 핏물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 장소가 불신자들의 피로 가득 찬 것은 정의롭고 훌륭한 심판이었다.” 유대인 회당과 이슬람 사원엔 주검이 쌓였고,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시신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다섯 달 뒤에도 예루살렘에서는 썩어가는 주검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8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약 17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세계 인구가 3억 명이었으며, 발달된 살상 도구도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잔혹한 살육전이 일어났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한 십자군은 사람을 죽여도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며, 죽더라도 천국에 갈 것이었다.
십자군에 살해당한 무슬림과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박해에도 개종을 거부하다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일텐데, 이들도 전사한 십자군과 함께 천국에서 만나게 되는 것일까? 또 순교로 죽임을 당한 자보다 죽인 자가 더 많더라도 그 순교자들은 천국에 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