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칭 대학살(肅淸大虐殺, 肅清大屠殺, 肃清大屠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이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인종청소 사건이다.
숙칭 학살로 희생된 사람의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걸쳐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했으며 민간에서는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했다.
숙칭(肅清)의 의미는 숙청을 민남어로 말한 것이다. 즉 홀로코스트처럼 '일본 제국의 화교에 대한 인종청소'를 의미한다.
전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영국이 홍콩을 통해 중화민국을 돕는다고 여겨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였다.(홍콩 전투) 영국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탓에 손쉽게 식민지를 뺏겨 버렸다. 사실 홍콩의 경우 대부분 병력이 영국령 말라야 식민지의 방어를 위해 증원되어 제대로 된 전력이 없었단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 기세를 몰아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 전 지역으로 확대해 필리핀과 괌도 미국으로부터 빼앗고 또 다른 영국령 말레이 연방까지 쳐들어가 말레이 반도 본토를 순식간에 차지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령 말레이 연방의 최대도시였던 싱가포르까지 조호르바루에서 일본 육군의 기갑, 포병 부대가 진격하고 센토사섬에 일본 해군의 육전대가 상륙하는 식으로 침공하여 싱가포르 전투를 치렀지만 영국군은 역시나 허약한 동남아시아 식민지 주둔군 특성 상 손쉽게 패배했고1 싱가포르 주둔군이던 영국 해군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호주로 패퇴해야 했다.(남방 작전)
싱가포르는 이후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이름부터 쇼와의 남쪽 섬이라는 의미의 쇼난(昭南/소남)으로 바뀌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를 일본군이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많은 물자를 얻게 되어 사기가 올라가고 물자 전달 방식을 현지 조달, 손쉽게 말해 약탈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에서 굉장히 많은 전쟁범죄들을 저질렀다.
이때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일본 제국의 적국인 중화민국과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많은 탄압을 받았다.
학살의 시작
이 사건은 일본 군부가 게릴라 또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자행한 학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추산 5000명, 학계 추산 약 5만명, 커뮤니티 추산 10만명 정도의 화교가 학살당하였다.
이 학살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 및 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중화민국에 재정지원을 한 자.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 활동을 하거나 반일 행동을 한 자.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경찰관 및 식민지 주둔 영국군 군속.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하이난성(海南省) 출신자.
일본군의 검문 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위의 기준에 따라 대학살이 벌어져 문자 그대로 중일전쟁 때 난징에서나 볼 법한 인간 도축장이 섬 전체에서 펼쳐졌다.
한편 순수 화인 말고도 한족 피가 섞인 혼혈민들도 같이 학살했는데 위의 숙칭 대상에는 유럽 혈통이 혼혈된 유라시안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그리고 무슬림이고 말레이인과 피가 섞인 프라나칸들이 그 다음 대상이었다. 물론 화인 학살과 동시에 영국군 포로들도 같이 싸잡아 죽였다.
이때 중국계는 하도 탄압을 당해 그 악명 높은 백호주의를 실시하던 호주로 돈 싸들고 도망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난했다가 온 사람도 많으며 특히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풍골 비치, 창이 비치 등 동부 해안가는 현재 목 없는 중국인 귀신이나 군복 차림 영국인 귀신이 대거 출몰한다는 괴담, 도시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일본군이 난징에서처럼 학살할 때 사람들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유독 말레이반도 쪽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사람 취급조차 해주지 않고 잔혹하게 학살하기만 했다.4 학계에서도 왜 유독 말레이반도 쪽 화인들만 잔혹하게 다뤄졌는지 원인조차 모를 정도다. 이에 대해 일본이 중일전쟁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중국 내륙으로 가면 갈수록 패색이 짙어지자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이 중화민국을 돕고 있어서 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일종의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이상행동이라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계 학살 역사는 싱가포르 교육에서 싱가포르인 전 인종을 통틀어 제대로 배우며 특히 중국계는 밥상머리 교육 등을 통해 젊은 세대도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와 별개로 역사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35년 동안 지배받은 한국보다 더 반일 감정이 강한데 짧은 기간 동안 너무 잔혹한 전쟁범죄를 당했기 때문이다.
중국계는 물론 영국인, 아르메니아인 등 백인들도 박해를 당했으며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일본군으로부터 터무니없는 망신소리까지 들어야 했으며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백인들 중 일부는 망신소리와 조리돌림 끝에 자결하기도 하고 일부는 호주로 피신해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싱가포르를 영국이 탈환한 후에나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은 말레이반도에 재배되는 농산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속칭 바나나 달러라고 불리는 일본 발행 달러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는 해협 달러가 더 많이 쓰였으며 군표, 화폐의 남발과 현지 공장의 가동 중단, 영국령일 때 인도 제국과 호주에서 수입하던 식량이나 자원을 수입하지 못해서 생필품 가격이 오르는 턱에 무지막지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연합국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가 맹공격으로 해안가의 일본 해군기지에 대규모 폭격을 퍼붓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등의 본격적 탈환 시도는 없었고 일본 해군도 해안선 방비를 철저히 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선 곳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미국 해병대에 밀리며 하나둘씩 점령지를 뺏기기 시작하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전멸해 버려 전쟁이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자 영국군은 말레이반도 본토와 홍콩에 상륙해 두 지역은 일찍이 해방시켰다. 필리핀도 이 시기에 미국 해병대가 상륙해 전면 탈환했다.
이후 끝까지 일본군이 버티던 싱가포르의 경우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탈환할 지퍼 작전과 조석 작전을 영국 해군이 입안했다. 그러나 그 전에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실행하고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한반도 북부, 만주, 내몽골,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모두 쫓아내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이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여 항복(일본의 항복)한 뒤에도 한 달 동안이나 싱가포르에선 일본군이 버티는 바람에 싱가포르만 계속 일본의 군정 통치 아래에 있다가 영국 해군이 전함 두 척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일본군을 설득하여 현지 지휘관이 받아들임으로써8 영국은 싱가포르를 되찾았다.
싱가포르는 한반도 남부와 함께 그나마 패망한 일본군이 곱게 물러난 케이스인데 소련이 탈환한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 사할린 등에서 일본군, 민간인들이 비참한 꼴을 당하며 끔살당하거나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미국이 일본에게서 빼앗은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민간인 희생이 매우 컸고 미국이 탈환한 필리핀이나 괌 등에서도 일본군은 대거 미군의 압도적 공세에 끔살당하는 배드 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선 일본군이 연합군, 현지인 게릴라들에 의해 모두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