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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孫晋泰),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국사대요

Jobs9 2021. 5. 1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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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국사대요』 등을 저술한 학자.국사학자.

 

호는 남창(南倉).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재 부산광역시) 남창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송석하(宋錫夏)·정인섭(鄭寅燮)과 더불어 조선민속학회(朝鮮民俗學會)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 朝鮮民俗』을 창간하여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였다.

1933년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강사, 1934년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대학장에 재직중 6·25전쟁으로 납북되었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민족항쟁기에 민속학자로서 활동한 시기와 광복 후 역사학자로서 활동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본디 역사학연구에 뜻을 두었던 그가 민속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제시대에 역사학을 자유로이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이 결과로 문헌에만 의존하는 한국사연구가 빠지기 쉬운 좁은 안목으로부터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갖출 수가 있었다(손진태선생전집 해제).

그의 민속학적 주요 저작에는 『조선신가유편 朝鮮神歌遺篇』(1930)·『조선민담집 朝鮮民譚集』(1930)·『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이 있다.

민속학계에 남긴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점이다. 그 이전의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는 민속학을 역사연구의 보조수단으로 여겼고, 일제에 대항하는 ‘조선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앞의 두 사람이 한국민속학의 텃밭을 일군 선구자라고 한다면 손진태는 그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가 열리도록 진력한 중흥자라 하겠다.

비록 3호로 종간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주도로 발간된 『조선민속』은 귀중한 결실이었다. 또, 그가 현지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쌓아간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앞사람들이 문헌에만 의존하였던 데에 반하여 그는 현지에 나가서 일차 자료들을 수집함으로써 민속학이 실증과학임을 인식시켰고 역사학은 물론 인류학·고고학·사회학 등 인접과학을 폭넓게 원용하여 민속학 연구방법의 차원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그는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을 캐는 데 있어 주변문화 곧 중국·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문화와 비교하는 새로운 방법을 이용하였다. 특히, 설화연구에 있어 발생과 전파과정을 밝히고 우리 설화가 지닌 특질을 고찰한 점은 큰 성과라 하겠다.

그가 설화·민간신앙 그리고 무속연구 외에 온돌이나 살림집과 같은 물질문화에 관심을 기울인 점도 눈길을 끈다. 그는 온돌의 구조·기원·역사·전파경로 따위를 면밀하게 고찰하는 한편, 이를 중국·만주의 그것과 비교, 검토하였고, 민가연구에서도 움집의 발생과 분포를 비롯하여 유형에 따른 분포까지 언급하였다.

당시에는 물론 그 뒤 상당기간 동안 이 분야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지녔던 넓은 시야와 그가 거둔 학문적 성과는 더욱 돋보인다. 그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조국광복과 더불어 되살아났다.

일찍이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주요 회원이기도 하였던 그는 신민족주의사관(新民族主義史觀)에 입각해서 『조선민족사개론 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 國史大要』를 저술하였다. 특히, 앞 책은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그의 야심적 노작이었으나, 바쁜 생활과 건강 때문에 신라 말까지의 상권밖에 나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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