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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국어문법, 말의 소리

Jobs9 2021. 5. 1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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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국어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에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제국신문』 기재(記載), 영국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지식욕은 대단하여 야간에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마치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을 3년간 34세가 되도록 공부하는 열성을 가졌다.

경력으로는 간호원양성학교·공옥학교(攻玉學校)·명신학교(明信學校)·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서우학교(西友學校) 교원 등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오성학교(五星學校)·이화학당(梨花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기호학교(畿湖學校)·융희학교(隆熙學校)·중앙학교(中央學校)·휘문의숙(徽文義塾)·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사범강습소·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주산·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국어운동·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典籍)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관한 논저는 『가정잡지』와 『월남망국ᄉᆞ』(1907), 『보중친목회보』 등에 나타나 있다.

활동사항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국문식」,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품사·구문·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分析)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phoneme)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morpheme)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으로 형성된 후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지고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경)에서 최현배(崔鉉培)·신명균(申明均)·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이규영(李奎榮)·장지영(張志暎)·정국채(鄭國采)·김원우(金元祐)·안동수(安東洙) 등 550여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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