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너 자신을 알라.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된다. 탈레스가 자연철학 분야를 개척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 내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경건하고 윤리적이며 보편성과 객관성을 열망하는 면모가 강하면서도, 신비적, 감성적, 권위적이기보다는 이성적, 비판적, 반성적인 자세와 토대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태도를 타자에게 설교하기보다 자기자신이 우선 체화하고자 노력했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오늘날 말하는 메타인지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개인의 성격은 소탈하고 친절했으며, 대화에는 해학이 있었으므로, 그의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 플라톤 등 명문가 젊은이들까지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여간해서는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낮추었고, 대화자의 학생을 자처했으며, 다만 함께 대화하며 진리를 모색하고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이 문답 과정에서 그의 탐구 및 교육 방법으로 유명한 산파술 혹은 변증술이 탄생했다. 그는 화제의 핵심과 선결 요건을 파악하고 상대 논변의 맹점과 반례를 제시하는 데 탁월했지만, 이를 상대를 부정하고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닌 상호 지양적인 목적에서 행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토론과 학문이 지향하는 바의 모범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대화편 가운데 특히 <<변명>>, <<크리톤>>, <<파이돈>> 3부작은 서구 문학사상 예수의 최후에 필적하는 매우 비극적이고 경건하며 장엄한 최후를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핍박받은 성인, 진리를 위해 죽은 현자로서의 소크라테스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
석공인 소프로니스코스(Σωφρονίσκος)와 산파인 파이나레테(Φαιναρέτη)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본업이 석공이었다고 전해진다.
외모는 못생겼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 플라톤의 저작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와 논쟁 중에 그를 '전기가오리 같다'고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모를 불문에 부치고도 그의 풍모는 상당히 비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발을 신지 않고, 누더기가 되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다녀도 익숙해서 편하고 정신력도 단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이런 초연한 풍모를 과시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석공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튼튼한 몸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잔치 자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들이키고도 가장 말짱한 정신으로 가장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가 유유히 떠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알콜 분해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또한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에도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 더움, 잠자리, 적군 등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강철멘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색을 즐겨 하여, 어떤 문제가 떠오르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이고 길게 생각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이 구경하였다고 한다. 여러 모로 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사망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었고 잔소리에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부부관계가 파탄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현대로 치면 명사나 학자들이 TV나 유튜브 교양 방송에 나와서 토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사상
소크라테스는 윤리학을 철학에 도입한 사람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소크라테스 문제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며, 오직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 플라톤 같은 당대 인물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남긴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이런 소크라테스와 알고 지내던 당대 인물들조차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생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이기에, 2천년이 훨씬 넘은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바로 이러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으며,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상기된 바와 같이 우리가 흔히 아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는 대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문헌학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산파술
추가 질문을 계속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러한 질문 중심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패턴은
1. 상대가 어떤 A 주장을 한다.
2. 소크라테스가 A 주장에 나온 단어 a의 뜻을 묻는다.
3. 상대가 a = b 라고 답한다.
4. 소크라테스가 다시 b의 뜻을 묻는다.
5. 상대가 b = c 라고 답한다.
6. 소크라테스가 a하고 c는 서로 모순됨을 지적한다.
7. 상대는 벙어리가 된다.
거듭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도신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Aporia, ἀπορία)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사용한 이유는 그의 주상대가 소피스트라는데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이 가진 대세의 의견은 진리는 그 사람의 주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답이란 정해진게 없고, 질문하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상대방에 맞춰서 그때 그때 대응하는 어떻게 보면 매우 유연하고, 어떻게 보면 매우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는 했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것은 사유에 있어서 정의 (definition)의 중요성이다.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고 생각을 하니까 도대체 진척이란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삶동안 소피스트들을 박살내면서 정의를 내리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실현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산파술에 대해서는 당대로부터 많은 불만이 있어왔다.
"선생님은 누가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하지 않고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무식한 척을 할 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답에 대한 트라시마코스의 반응. 플라톤의 <국가> 중
"당신 자신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를 원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당신의 견해를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그만 두십시오."
소크라테스를 쏘아붙이는 히피아스. 크세노폰의 <회상> 중
이에 관해서 플라톤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항상 끝맺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가 답을 찾는 여정 자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난 지혜를 낳지 못하네. 그리고 바로 이 점을 두고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다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중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 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도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다.
유(=자로)야, 안다는 것이 어떤지를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논어> 위정편 17
하지만 비슷해보이기만 할 뿐 그 뜻은 매우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 계속하는 것을 말한것이다. 반면에 공자의 말은 전통적으로 2가지로 해석되는데,
1. 수양론적 해석: 부족한 부분을 지나치지 않고 채워야 성인에 이른다는 해석이다. 부족한 지점을 알아야 그것을 채워서 완전한 경지에 이를 텐데, 이를 모르니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과목을 만점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자신이 어느 과목이 약한지 모르는 것과 같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학자로써의 기본자세를 말한 것에 가깝다.
2. 순자의 해석: 잘난척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해석이다. 자로에게 공자가 조언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 해석이다. 자로는 용맹하지만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하찮은 재주로 자랑해서 남들의 마음을 불편하게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다는 것이다. 순자는 개인의 능력은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할 때 나서야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
위와 같이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매우 다른 사유와 접근법을 사용 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둘을 연결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참고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속 편한 알키비아데스,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적수는 이들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자(아테네 정치가)들이 아니니 말일세. 돌봄과 기술(앎)이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걸세. 이것들을 결여한다면,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든 이방인들 사이에서든 자네가 명성을 얻는 일 역시 결여하게 될 걸세. 내가 보기에 어느 누가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네가 더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명예 말일세."
김주일, 정준영 역, 《알키비아데스Ⅰ, Ⅱ》 이제이북스(2007).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토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그의 책, 《법철학》에서 실정법주의(實定法主義)를 주장하며 쓴 글이다. 실정법주의란 서양의 철학에서 실증주의 맥락에서 나온 것인데, 좋은 법 나쁜 법을 따지는 것은 법률가의 영역이 아니고, 오로지 지금 존재하는 법들을 놓고서 법학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일종의 법학의 과학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빠르게 와전되어서 법은 존재하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가면서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이용되었다. 뿐만아니라 독일의 나치, 대한민국의 군부독재에서도 그 통치를 합리화하고, 국민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명언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 때문에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한다며 나선 자들 사이에선 소크라테스가 인기가 없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 11월에, '악법도 법이다'를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냈다. 실정법주의는 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법학계에서는 사장당했고, 법실증주의조차 절름발이 설명력을 가졌다고 보아 뜯어고쳐서 써야한다는 의견이 다수설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다만 "폴리스의 결정을 내가 억울하다 해서 위배하여 이러한 일들이 반복된다면 폴리스가 유지되겠는가? 이러한 행동은 옳은가?" 와 같은 뉘앙스의 말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답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한 해석이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상술(上述)했듯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인 불경죄를 악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죽음을 부당한 법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한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이에 대해서,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이 계약론적 사고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강하게 신봉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압축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 자신의 철학 때문인데, 그는 철학이 유일한 인생의 이유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for a man is not worth living.’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이유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신과의 계약이며, 영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니,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고 도피를 하면 아테네와의 계약은 지키더라도, 신과의 계약을 어기는 행위가 되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변증법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고발되어서 재판에 선 끝에 패소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해서 당대에 자세히 서술한 자료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잘 알려진 플라톤의 대화편의 "변론"이고, 또 하나는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회상"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중에서 철학적으로 성과가 가장 으뜸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철학적 재능은 그보다 훨씬 못하지만, 당대에 유명한 군인이면서 외교, 정치 감각도 탁월했던 인물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면을 잘 조명한다면, 크세노폰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아테네 민중이 어떻게 소크라테스를 바라봤는지에 관한 단서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철학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이라는 두 자료의 차이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원인을 놓고 크게 2가지 해석이 존재해 왔다.
1. 플라톤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미신과 무지, 감정에 휘둘리는 민중의 뜻에 거슬렸다는 '불경죄'를 이유로 그 중우정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2. 크세노폰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그 주변의 정치적 인물들 때문에 희생되었다.
플라톤의 견해는 계몽시대 이전에, 크세노폰의 견해는 계몽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통설을 이루었다. 크세노폰의 정치적 원인설이 인기있었던 이유는 계몽시대 서양인들이 고대 그리스를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로워서 서양의 합리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다는 견해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그 시발은 철학사가 브루커(J.J.Brucker)의 크세노폰에 대한 견해가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 반영되면서 였다는 의견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당대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내용
1.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았으며
2.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 시켰다.
-고발인 시인 멜제토스, 민중파 영수 아뉘토스, 정치가 뤼콘-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비공식 고발내용(당대 악소문)
1. 하늘에 높이 있는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이며 지하의 온갖 것들을 탐사하는 자(=자연철학자)
2. 한결 약한 주장을 더 강한 주장으로 만드는자(=소피스트)
<플라톤, 변론>
소크라테스는
1.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nomizein) 않고,
2. 새로운 신격(다이몬daimon)을 수입한 죄를 짓고 있다. 또,
3.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짓고 있다.
<크세노폰, 회상>
내용은 보다시피 거의 같지만,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게서는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라고 비난받은 점에 대해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들과 학문적 입장이 달랐다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데 반해, 정치가였던 크세노폰은 정치적 상황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정치를 중시하는 크세노폰의 성향 때문에 그의 글에는 플라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정치관련 고발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신탁을 내리는 듯한 행위를 해서 아테네에서 널리 화자되고 있었다고 크세노폰은 증언한다.
"신령스런 존재(daimonion)가 자신에게 신탁을 내린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특히 바로 이걸 근거로 그들은 새로운 신령스런 존재들을 끌어들인다고 고발했던 것 같다.
위 발언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신앙심이 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크세노폰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신의 권위를 존중하며 행위했기 때문에 기성 아테네의 종교활동과 다를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테네가 공직자를 검은콩 중에서 흰콩을 뽑는 추첨방식으로 결정해온 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비판을하여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의 국법을 멸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압제자들이 나왔다고 고발자들이 주장한 사실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함께하는 자들이 현행법을 깔보게 만들었으니, 키잡이든, 목수든, 피리 연주자든 잘못하게 되더라도 나랏일을 잘못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에는 추첨된 사람을 쓰기를 원하는 자가 없거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추첨으로 임명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라고 말을 하였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당대에는 이러한 공직 추첨제의 당위성을 신의 계시에서 찾았기 때문에 신앙심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되었다. 크세노폰은 이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책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떤식으로 당대 신앙을 존중했는지에 관해서 많은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에 끼친 끔찍한 해악에 대해서도 고발자들이 문제 삼은 사실을 말한다.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 두사람은 나라에 너무도 많은 나쁜짓을 했습니다. 크리티아스는 과두정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살육을 일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면,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무절제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라고 고발자(=폴뤼크라테스)가 말했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 집안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써 과두파의 핵심이었으며, 저 폭군 크리티아스가 다름 아닌 자신의 5촌 친척이었던 플라톤으로서는 자신의 가문이 자신이 사랑한 스승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과두파와 가깝지 않았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상적으로도 과두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과두파 집권기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가 정권으로부터 일체의 발언을 금지당하는 처분까지 당했다며 스승을 변론하는데에 장문을 할애했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부친을 바보로 알도록 만들었으며, 사람이 병들거나 소송에 휘말리면 근친들이 나서는 전통 또한 무가치하다고 말한 과거도 문제 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들을 짓밟으라고 가르쳤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들보다 지혜롭게 만든다고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상의 판결을 받아내면 자기 아버지라도 구속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공언함으로써 였으니, 이는 '더 무지한 자는 더 지혜로운 자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적법하다.'는 법조항을 근거로 했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친척들에게까지 망신을 주게 만들었으니, 이는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친척들이 아니라 의사와 변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고 말함으로써였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한편 친구들과 관련해서도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친구들이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로움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또한 그분은 필요한 것들을 알고 있고 설명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존경의 가치가 있다고 공언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시인의 시구를 골라서 비틀어서 오독하는 기술로 제자들에게 부도덕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고발자는 그분이 명성이 드높은 시인들에게서 아주 몹쓸 구절들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폭정(tyrannikos)을 일삼으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헤시오도스의 "일은 전혀 비난거리가 아니고, 게으름이 비난거리이다."를 인용해서는 부정의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멀리하지 말고 그것들도 이익을 고려해서 행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발자는 호로메스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자주 했다고 말했다. "백성들 가운데 소리치는 자가 보이고 눈에 띄면, 그는 지휘봉으로 때리고 말로 꾸짖었다."의 뜻을 그 시인이 일반백성들과 가난한 자들을 때리는 것을 칭찬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크세노폰을 정리하면 고발내용은 다시 4가지로 풀어낼 수 있다.
아테네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했다.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전통을 무시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관직 제도를 무시했다.
아테네에 폭군들을 키워냈다.
1번과 2번의 경우, 일반 아테네 대중의 반감을 산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아테네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아테네인들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만큼 막연하게 그들이 이성적이고, 비종교적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사소한 가정문제에서 부터 중요한 군사결정까지 점을 쳐서 결정할 때가 많았고, 그러한 점치는 행위에는 신이 관여한다는 종교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 제비뽑기 선발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 모욕이었다. 그들은 제비뽑기 기계 클레로테리온의 구멍으로 흰색과 검은색 패를 인도하는 것은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 그리스에서는 신의 승낙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클레로테리온은 단순한 제비뽑기 기계가 아니라 효험 있는 주사위 점이었다. 절대로 비웃어서는 안 될 신성하고 신비로운 절차였다.
-Bettany Hughes, 《아테네의 변명》The Hemlock Cup, 강경이 번역, 옥당, 2012, p.499
더군다나 아테네에서 데모크라티아는 근대국가의 세속헌법적 의미가 아닌, 그 자체로 신격을 지닌 신으로 대우 받았다. 그리고 선거를 민주정치의 한 형테로 인정하는 근대인의 생각과 정반대로, 아테네인에게 선거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행위였다. 이런 환경에서 직접민주정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는 데모크라티아라는 신(神)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아테네에서 '추첨'은 신의 질서가 개입하는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곧 '추첨'은 본질적으로 제비를 뽑아 점을 치는 행위였고, 바로 그 '점 치기'를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것이다.
한편 아테네의 가정은 각각 하나의 나라이고, 가부장이 그 나라의 임금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는 크게 존중 받았다. 그러한 가부장들이 곧 아테네의 시민으로 여겨졌던 만큼 가부장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공격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동시대의 뛰어난 비판적 지성 중의 하나이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던 것도 1번, 2번 항목 때문이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3번과 4번은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와 깊게 연관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희대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 한편 크리티아스는 적의 앞잡이가 되어서 폭정을 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이었다.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만 왜 정치적인 고발내용이 이렇게 풍부하게 들어가있는지 의문이 학계에서는 제기되어 왔다. 도리옹을 비롯한 콜라이아코와 같은 학자들은 크세노폰만이 언급하는 고발내용은 플라톤이 언급하는 세명의 고발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 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기원전 403년에 내려졌던 '사면령'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황금기가 막을 내린 시점이었다. 아테네에는 잘 교육받은 귀족 엘리트를 중심으로하는 과두파와 도시의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민중파가 존재했는데,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파르타는 과두파가 정권을 잡을 것을 아테네에 요구했다.그 결과 크리티아스를 중심으로 30인이 권력을 독점했는데, 이들은 매우 끔찍한 폭정을 아테네에서 휘두른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 숫자를 3,000명으로 제한을 하는 한편 민중파와 온건-과두파를 대대적으로 학살했고, 그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했다. 당연히 이들의 폭정은 시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년만에 민중파가 들고 일어나서 내전이 발생한다. 민중파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민주정은 이전의 과두파에게 "다시는 과거사를 들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통합을 시도한다.
누구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과거 일을 캐서는 안된다.
...
그리고 과거사를 들추었을 때 그를 재판 없이 처형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였다.
아리스텔레스, <아테네 정치제도사> 39-40장
학자 콜라이아코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장의 내용이 크세노폰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와 같은 사면령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위함이라고 본다. 다시말해 사면령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불경죄의 죄목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와 한통속으로 묶어서 처벌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에게도 꺼려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성욕과 과시욕에 휘둘려서 살았던 알키비아데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누가보아도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최소한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자족적으로 사는 것을 보았고, 그분이 모든 쾌락을 아주 잘 지배하며 자신의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크세노폰, <회상>
한편 크리티아스와 소크라테스를 엮기는 더더욱 힘들었는데, 소크라테스가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30인 정권의 심기를 거슬렸기 때문이다.
30인 정권이 많은 시민들을 죽이고, 불의를 행하도록 조장했을 때, 어디선가 소크라테스는 소 떼의 목자가 되어서 소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자신이 나쁜 소치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이며,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민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신이 나쁜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크세노폰, <회상>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강의하고 젊은이들에게 말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처분을 당한다.
30인의 입법가가 되었을 때도 소크라테스에 앙심을 품고 말에 대한 기술을 가르치면 안된다고 법으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선고된 것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도 되는지 크리티아스에게 묻는다. 좋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몇가지 그 다운 질문을 한다.
몇 살까지 젊은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정해주시오.
30세보다 젊은 장사꾼에게 가격을 묻는 것을 되오?
누가 어디에 사는지 묻는 것은 되오?
크세노폰, <회상>
또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행하기도 했다.
시민들 주 어떤 사람(살라미스의 레온)을 끌고 와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법에 어긋나게 명령을 한다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고 만다.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실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사망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감사의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름의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국명:나도독미나리)(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것으로, 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이다.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은 그 후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제에 대해 분노에 휩싸인다. 스승을 죽인 민주제의 한계를 중우정치라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철인정치를 주창하기도 했다.
한 편 중요한 건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영향과 평가
Sed ab antiqua philosophia usque ad Socratem, qui Archelaum, Anaxagorae discipulum, audierat, numeri motusque tractabantur, et unde omnia orerentur quove reciderent, studioseque ab is siderum magnitudines intervalla cursus anquirebantur et cuncta caelestia. Socrates autem primus philosophiam devocavit e caelo et in urbibus conlocavit et in domus etiam introduxit et coegit de vita et moribus rebusque bonis et malis quaerere.
옛 철학으로부터 ,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에게 배운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수와 운동들이 연구되었고, 만물이 어디에서 생겨나고 어디로 돌아가는지가 다루어졌고, 이들의 의해 별들의 크기와 간격과 궤도 등 천문이 전체적으로 열심히 탐구되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도시로 가져다 놓았으며 집안으로까지 들어놓았으며 삶과 도덕과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탐구하게 했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5.4.10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점은, 다양하다 못해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듯한 사상들이 제자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언급하듯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나올 수 있었던것은 그만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가진 사상과 삶의 폭이 넓고 깊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시작이자 끝. 아카데미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명료한 사고 방법론과 초월을 추구하는 태도에 영향받았다.
소(小)소크라테학파: 플라톤 보다 영향력은 작았던 3개 학파를 지칭하는 용어다.
안티스테네스: 개인의 본성을 사회와 대비해서 중시하고, 금욕과 자기극복을 추구했다. 키니코스 학파를 창시한다.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의 삶이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움, 소박하고 절제된 삶에 영향받았다.
아리스티포스: 현재의 지적 쾌락을 미래의 것과 대비해서 중시했다. 키레네 학파를 창시했다. 호기심과 지적탐구의 즐거움에 몰입해서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우클레이데스: 논리정신을 추구했다. 메가라 학파를 창시했다. 유명인들과 무수하게 벌였던 소크라테스의 논쟁들에 영향 받았다.
파이돈: 엘리스 학파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육체적 삶보다 이성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초월적 태도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크세노폰: 의무와 절제를 중시하면서도 실용적인 정치철학을 추구했다. 남성적이면서 시민으로써 의무와 자유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학파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여러 저작을 남겨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학파의 난립에 관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는 《서양철학사》에서 그 이유를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자기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사상은 그만큼 비밀스러웠던 말인가? 또는 그렇게도 풍부했다는 말인가? 또는 그만큼 미완성품이었단 말인가? 이런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의 방향들 중에서 어느 것이 스승의 원래적인 본질과 의도에 꼭 들어맞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관한 결정은 우리들이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즉 플라톤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려질 수 있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그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그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노장(老莊)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귀납적 방법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당장 플라톤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아카데미를 연다든가 하면서 각자의 철학 학파를 창설했을 정도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기는 죽은 이후에 오히려 올라갔으며,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당히 유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를 달린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되듯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나 친구들은 재산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끊임없이 탈옥을 권한다. 고대는 물론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반역죄나 살인죄 같은 엄청나게 사악한 죄상이 아니고서는 죄수를 처박아놔서 콩밥 먹이거나 사형을 시행시켜봤자 딱히 좋거나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걍 범죄종자가 꺼져버리고 다신 자기네들 공동체에 얼씬도 않으면 그러려니 했었다. 실제로 진상이 다르게 밝혀지거나 범죄자가 다시 필요해져서 불러들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서 묘사되는 간수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그를 사형시키기 싫어하면서 은근히 탈옥에 대해서도 그리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 내가 아테네의 법률을 따랐고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혜택을 입었으며, 또 평생 아테네를 위해 옳은 말을 해왔는데, 탈옥한다면 내 가르침들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니 사형 선고에 묵묵히 복종하고 후회하지 않겠다며 의연하게 독배를 마셔 죽음을 택했다. 아마 이로 인해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나 하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소크라테스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특히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모습이 크게 조명되었다. 어느 공동체가 안 그러겠냐만 당시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절제 등을 주요한 가치로 여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어서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 또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잘 선동된 군중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정적을 매도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된다는 것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논객(論客)으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평범한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사리 분별이 지극히 뚜렷하고 양식이 있으며 사나이다운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 했다고 하니, 아마 그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표리부동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적수준 등에 맞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먹고 도움이 되는 식으로 대화를 전개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위인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허나 정작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받은 영향이라고는 일리아스와 귀납적 추론 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를 죽인 것은 물론이고 다시 태어나면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물욕 뿐만 아니라 식욕과 성욕까지 자제하는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실천은 오히려 디오게네스의 철학과 닿아 있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관계는 정치적 파트너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당장 알렉산드로스가 주장했던 세계시민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며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이 싸웠다.
소크라테스 제자들
플라톤
크세노폰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티포스
에우클레이데스
소크라테스에 대한 어록
이것이 우리 벗의 최후였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우리는 말할 겁니다. 그는 당시 우리가 겪었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의로웠노라고.
― 플라톤 『파이돈』 118a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덕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덕을 돌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그분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무엇보다 그리워한다. 나에게 그분은 내가 상세히 설명한 그런 분이었다. 신들의 판단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만큼 경건하셨고, 누구에게도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로움을 줄 만큼 의로우셨으며, 더 좋은 것 대신에 더 즐거운 것을 선택하는 법이 전혀 없을 만큼 자제력이 있으셨고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을 분간하는데 실수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결정하는데 다른 사람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들을 결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현명하시고, 그런 것들을 설명도 하고 규정도 하기에 충분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을 시험하고 잘못하는 것을 논박하고 덕과 아름답고 훌륨함으로 권면하기에 충분한 분으로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행복한 그런 분으로 내게는 보였다. 이것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들과 다른 사람들의 품성을 비교해서 판단하게 하라.
―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 4.8.11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전력을 기울였지만 전체 자연에 관해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것들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을 탐색하면서 최초로 정의들에 관해 생각을 기울였다. [...] 저 사람이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탐색한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는 추론하기를 추구했던 것인데, 추론들의 시작은 바로 어떤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당시에는 철학적 대화술의 역량이 본질 규정 없이 반대되는 것들을 탐구할 만큼,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동일한 학문이 다루는지를 살펴볼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에게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귀납적인 논증과 보편적인 정의인데, 이것들은 모두 학문의 출발점과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7b1, 1078b17
어디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찾을수 있습니까?
― 키티온의 제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 2권을 읽고 기뻐하며 서점 주인에게 한 말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안티스테네스와 그 제자들이 진전해 나아갔다는 사실이 덕이 실제로 있다는 증거가 된다.
― 포세이도니오스 단편 29
이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맞세웠다. 그는 논변의 어떤 정교함을 가지고서 그들의 교설을 물리치는 데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의 매우 풍부한 연설들로부터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철학이, 더 오래전에 있었던, 자연에 관한 저 철학이 아니라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그리고 인간들의 삶과 성격에 관해 논의하는 이 철학이 발견되었다고 이야기된다.
―키케로, 『브루투스』 8.31
그러나 만약 그대가 예시를 원한다면, 모든 고난 속에서 헤매었지만 가정을 괴롭게 한 가난과 군복무를 견디는 수고에도 굴복하지 않은 인내의 노인 소크라테스를 보게나. 그의 집에는 거친 행실과 극성스러운 혀를 가진 아내, 또는 다루기 힘든 성격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아이들의 무리가 있었고, 그는 전쟁 중에 살았거나 폭군 치하에서 살았거나, 전쟁과 폭군보다 더 잔인한 민주주의 시대에 살았다네. 전쟁은 27년동안 계속되었지. 그 후 해로운 30인 참주들의 군대에 의해 도시는 결국 항복했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네. 마침내 가장 심각한 비난으로 정죄가 완성되었네. 그들은 그가 종교를 어지럽히고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신들과 의회를 무시하고 국가에 저항하도록 타락시켰다고 비난했지. 그 다음은 감옥과 독배였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영향을 거의 주지 못했으며 그의 외색 하나 바뀌게 하지 못했네. 이 얼마나 훌륭하고 비범한 기적인가! 마지막까지 소크라테스가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 모든 커다란 운명의 차별 속에서도 그는 한결같았다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104.27
소크라테스가 일반적인 법적 변호 방법을 사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판사들의 마음을 달래고 반박에 전념했다면, 소크라테스의 무죄를 확보하는 데 더 유익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의 품성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이 받게 될 형벌을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하며 형을 받기를 원했다. 이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삶을 죽이느니 남아있는 삶을 죽이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판결을 후손들에게 맡기고, 최후의 노년기를 잠깐 잃으면서 곧 모든 세기의 영원함에 이르렀다.
― 퀸틸리아누스, 『웅변 교육』 9.9
가장 훌륭한 인생의 스승.
―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기념할만한 행동과 말들』 3.4 ext.1
소크라테스는 인생이 언제나 모든 부분에서, 모든 경험과 모든 활동에서 보편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 플루타르코스, 『노인이 공무에 종사해야 하는지』 26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완벽해졌고 모든 면에서 자신을 향상시켰으며 이성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도,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51
지혜와 웅변에 있어서 으뜸.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마르쿠스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 3.16
철학의 논의는 먼저 자연에 관한 것이 유일한 형태였고, 두 번째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윤리에 관한 것을 덧보탰고, 세 번째로는 플라톤이 변증술에 관한 것을 덧보태서 철학을 완성에 이르게 했다 .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항』 3.56
소크라테스는 당신들 신들을 파괴함으로써 진리를 더욱 면밀히 탐구했다 비난을 받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이 세상에 있지는 않았지만, 진리는 항상 비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들은 소크라테스가 퓌티아가 당신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증언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아폴론을 압도하여서, 그는 저 스스로를 거슬러 선언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고백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부인하는 그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에 의하면 그는 신들을 부인했기에 덜 현명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들을 부인했기에 더 현명하다.
―테르툴리아누스, 『이교도들에게』 1.4
켈소스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이나, 영, 혹은 현자가 그러한 일이 그에게 닥칠 거라는 걸 예견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그는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리 일어날 거라고 예측한 그 일에 성급하게 몸을 던진단 말인가?'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신 후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크리톤의 설득을 받아들여 감옥에서 탈출하고 이런 재난을 피하는 것은 그 자신의 힘에 달려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것에 따라 비철학적으로 사는 것보다 철학자로써 죽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했다.
―오리게네스, 『켈소스 논박』 2.17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동료 시민들의 판결로 아테네에서 사형당했다. 그가 부당하게 삶으로부터 추방당했기에 그가 관습, 도덕, 의무에 대해 논의한 것들이 헛된 것이 되었는가?
―아르노비우스, 『이교도 논박』 1.40
철학의 1인자.
―락탄티우스, 『신성한 가르침 요약』 37.1
모든 그리스인들 중 가장 현명한 소크라테스.
―에우세비우스, 『복음 준비』 15.61.12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보잘것없고 미숙한 어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인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와 다른 현자의 '너 자신을 알라'를 말하길 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편지 57: 팜마키우스에게』 12
철학의 최고 스승.
―암브로시우스 『시편 제 118편 해설』 16.11
그 당시 저명했던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도덕 혹은 행실이라 불리는 부분에서 탁월한 권위를 차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18.37
서양 철학의 강의를 듣게 되면 '소크라테스의 저서를 쓰시오'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있는데 상술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의 스승으로 인용되었기에 널리 알려졌을 뿐, 그 자신 소크라테스의 책이 남아있어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서양철학계에 플라톤의 영향력이 어마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덩달아 높혀진 것. 물론 그도 서양철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알려진 계기가 플라톤의 책에서 일뿐.
플라톤의 책 향연에서는 미소년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또다른 미소년 아가톤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알키비아데스가 질투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알키비아데스가 이전에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기까지 하는 등 눈물나는 구애 쇼(...)를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완강한 거절 때문에 실패한 이야기를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