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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 문인화, 국보 제180호, 논어 자한편,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Jobs9 2022. 9. 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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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조선 헌종 때 제주도에 유배 중에 있던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으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원소유주로부터 기탁받아다가, 현재는 완전히 기증받아서 소유하고 있다.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논어 자한편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김정희.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中 출처


세한도의 크기는 23 X 69.2 cm이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인 120권 79책짜리 황조경세문편을 구해와 유배지 제주도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추사 김정희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보고 "가장 추울 때도 너희들은 우뚝 서있구나."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에 가져가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를 비롯한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제찬을 받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온 후 문인 3명에게 또 제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한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었다.


우선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주었다. 우선을 격려한 것이며 또한 자신에게 준 것이기도 하다. 그 뒤에 아울러 세상을 등져도 번민이 없다는 생각으로 추사옹의 뜻을 엿보다.
을사년(1845) 초봄 양호 장악진이 쓰다.
청의 문인, 장악진의 제찬.
추사라는 이름 일찍 들어는 보았으나 아쉽도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네.
우여곡절 끝에 가시에 상처를 입고,
몸은 곤궁하나 도는 변함이 없네.
푸르름이 동심(冬心)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굽히지 않네.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먼저 이 시로 인사하노라.
청의 문인, 조무견의 제찬.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은 논어 자한편에서 따왔는데,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시절이 좋을 때나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나 한결같이 인격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추사의 다짐은 이처럼 여러 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민씨 일가로 넘어갔다가 경성제국대학의 중국철학 교수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은 지 석 달이 지나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운명처럼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문학적 가치
문인화이므로 그림의 미술적 기교보다는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나 제목 부시등이 중요하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한데,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이 세한도의 건물을 본따서 만들었다.  

 

2차 창작물
세한도의 숨겨진 내면적 의미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이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시를 지었는데 대표적인 시가 도종환의 세한도이다.  

일본에서 손재형 선생은 세한도를 받았으나...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현재는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손창근 선생은 이 기증건으로 금관문화훈장에 수훈되었고 이후 2020년 12월 9일 청와대에 초대되었다.영상 이후 일본 학자의 아들은 추사 김정희의 그림 2000점을 기증했다.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金正喜 筆 歲寒圖)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세한도와 함께 마음을 담아서 쓴 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두루마리로 감싸기 위하여 맨 앞에 쓴 김학준의 제목과 서문
세한도와 김정희의 글

 

 

 

세한도는 조선 후기 선비, 금석학자, 문인화가, 서예가로 조선 학자들의 품격을 중국에까지 알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인생의 후반기(1844년, 59살)에 제주도로 귀양가 어렵게 살던 때 그의 제자인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한 폭의 수묵화다. 수묵화는 채색(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붓에 먹물로 그린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세한도의 그림에는 초라한 초가집 한 채가 고목이 된 나무 몇 그루 사이에 있고, 고목들은 비록 비틀리고 가지가 꺾이기도 하였지만, 초연한 듯 꽂꽂하게 서있다. 주변은 다른 잡다한 나무 한그루 없는 을씨년스러운 광야같은 곳임에도, 초가 주변의 소나무는 거칠지만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푸르른 잎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다. 여기서 세한(歲寒)이란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뜻한다.

 

 이 그림은 평생 학문을 좋아하던 추사에게 통역관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상적(당시 중인 통역관)이 스승인 김정희를 위하여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을 중국에서 수소문으로 구하여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에서 따온 것으로 그 의미는 '한 겨울이 와서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구절에서 유래한다.

 

세상 사람들은 권세가 있을 때에는 가까이하려하고, 만나면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척하기에 누가 진정 친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처지가 어렵게 되어 모함을 받아 절해고도 멀고 먼 곳으로 귀양을 온 뒤에는 그 많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아 마치 겨울이 되자 온갖 초목들이 푸른잎이 남김 없이 떨어진 것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한도 거친 붓끝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보면, 어려운 처지가 된 자신을 잊지 않고 멀고 먼 중국을 다녀오면서도 좋아할 만한 귀한 책들을 구하여, 바다 멀리까지 여러차례 보내주는 제자 이상적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요, 측백나무 같은 사람임을 알고, 이 세한도를 그려서 마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김정희는 이 그림을 그리고, 제목으로 세한도(歲寒圖)라 쓰고,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썼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인데, 『우선(藕船)이 그림은 내가 자네에게 전하는 마음이라네!』 하는 의미다.  그리고 그림의 마지막 부분에는 인장을 하나 찍었는데, 이는 '장무상망(長毋相忘)'으로, 그 의미는 『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말고 사세』였다. 곧 "내 그대를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러니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그려져 이상적에게 전해진 그림이 세한도였다. 그런데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은 뒤 스승 김정희의 뜻을 알고 마음으로 깊이 감동하여 자신이 또 다시 중국으로 가는 길에 이 세한도를 중국의 여러학자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였다. 그러자 중국의 학자들은 이상적이 세한도를 보여주자 김정희와 이상적의 인간적인 의리에 감동하였으며,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귀양간 김정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세한도의 그림 끝부분에 자신들이 느낀 감상문들을 덧붙여 나갔다.

 

세한도 그림 끝 부분에는 당대에 뛰어난 16명(중국학자 13인, 한국인 3인)의 학자들이 발문을 달았다. 한국인으로는 정인보(독립운동가이면서 신채호의 학문을 이은 민족사학자), 이시형(독립운동가이며 초대 부통령을 지냄.), 오세창(독립운동가이며 일제강점기 전시대를 살아오면서 한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이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세한도는 10m도 넘는 길고 긴 두루마리가 되어갔다. 정인보는 광복 후인 1949년 손재형을 만나 세한도가 돌아오게 된 경위를 듣고 세한도의 끝부분에 세한도와 손재형의 정성에 감탄하는 내용의 발문을 썼다.

 

이러한 곡절의  세한도는 이상적의 손에서 떠나 조선왕조가 망하고, 이상적의 형편이 변하면서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소실될 위기도 맞이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가 김정희의 학문을 존경하여 김정희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김정희의 글씨와 그림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세한도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 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을 정년퇴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렇게 세한도도 일본으로 건너가 영원히 일본에 머물수밖에 없을 처지가 되었으나, 1944년 손재형(1903~1984)은 세한도가 영원히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한도를 한국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전쟁터로 급변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무작정 후지쓰카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세한도를 반드시 자신이 가져가야 한다며 후지쓰카를 설득하였다. 이때 후지쓰카는 늙어서 병중에 있었는데, 두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병든 자신을 찾아와 졸라대는 손재형의 정성에 감동하여, 세한도를 넘겨주기로 마음먹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평생 김정희를 연구해온 만큼이나 김정희를 최고 학자로 존경하였는데 자신 만큼이나 추사를 존경하는 손재형에게 넘기는 것이 존경하는 김정희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생각하고 또 세한도를 오래도록 귀하게 간직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기꺼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세한도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계속되자 미군의 폭격에 후지쓰카 가의 대동문화학원의 자료는 모두 불에타 사라지고 말았다. 손재형이 막무가내식으로 후지쓰카를 찾아가 구해오지 않았으면 세한도는 그 때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는 1956년 12월 진단학회에서 김정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추모유작전을 하였다. 이 전시회에는 그동안 김정희의 작품을 수장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다. 손재형은 그동안 오랜 역사동안 한민족이 갈고닦아오던 붓글씨를 중국이 부르던 서법, 일본이 부르던 서도에 대하여 한국은 서예로 용어를 붙이도록 하였다. 손재형은 여러 서체를 수련한 결과 자신만의 서체인 소전체를 창안하기도 하였다.

 

이후 손재형은 정치의 길에 들어서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가 모아온 많은 작품들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한도는 정치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손재형이 사채업자에게 맡겨져 한동안 전당포에 저당되어 있다가 손세기(1903~1983)의 소유가 되었다. 손세기는 개성출신의 무역상으로 많은 부를 쌓았는데 문화재에도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손창근에게 전해졌는데, 손창근은 손세기의 장남이다. 손창근은 아버지가 모아온 수많은 보물급 고서화를 모아 여러차례에 걸처 국가에 헌납하였다. 그가 헌납한 작품은 모두 305점에 이른다. 그는 "진정 국가의 보물은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 올바로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국가에 기꺼이 기증헌납함으로써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온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가 되었다.

 

세한도를 감상하고, 그 우여곡절을 살펴보며,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비추어 보는 것이 바로 세한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코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 하나하나 살펴보면 삭막함마저도 느낄 수 있는 작은 그림이지만, 세상에 화려하고 큰 어떤 그림보다도 가치있게 평가되는 까닭은 이 그림을 그린 김정희와 그의 제자 이상적의 삶이 그 어떤 권세와 부귀와도 바꿀수 없이 고귀한 것으로,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키고 권장해야할 가치라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리라. 

 

세한도를 그린 김정희가 살던 조선 후기는 안동김씨들이 온갖 권세를 다 거머쥐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세도정치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그런 세월의 지속은 결국 집안도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멸망으로 끝났다. 그리고 오랜 고통의 세월을 지나서 오늘의 한국이 되었다.

 

그리고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제야 한국은 당당히 민주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세상사람들은 권력과 돈을 쫓아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다. 마치 한여름밤 불나방처럼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또 현재 살아가는 국민들의 삶을 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나무, 측백나무처럼 푸르고 옳곧은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 겨울이 오기 전이라도 그 잎을 알아보는 국민들의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 추운겨울이 아니라도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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