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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性理學, 주자(주희)학, 정주학, 신유학,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Neo-confucianism, 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반발, 불교의 영향력 증대

Jobs 9 2025. 6. 2.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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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변천사
선진유학 | 훈고학 | 성리학 | 양명학 | 고증학 | 공양학 | 현대 신유학

 

 

 

성리학(性理學, Neo-confucianism)

 

송나라 시기 외래사상인 불교에 대응하고, 형식화, 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탄생한 유교의 한 갈래이다. '도학(道學)',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주자(주희)학', '정주학' 등으로도 불린다. 현대에는 송명대에 출현한 신유학의 한 갈래로 구분하기도 한다.

 

 

용어에 관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 쓰는데 성리학이나 송명이학이나 어디까지나 현대 철학 용어로서 만들어진 조어이며 기본형은 이학(理學), 도학(道學)이다.

 

이것이 현대 철학 용어로 조어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용어가 정착됐고, 중국, 일본에서는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주자(주희)학, 정주학, 신유학 등의 용어가 일반화됐다. 성리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원래도 쓰이던 '성명의리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인 성리지학(性理之學), 성리(性理)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사에서는 여말선초 이래로 이학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한국 한정으로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에 KISS, DBPIA, 그리고 우리역사넷 등 여러 한국 학술 사이트에서도 보편적으로 성리학이 공식 용어로 사용된다. 서구권에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으로 불린다.

 

사실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는 표현이 주류지만 이는 송명대 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 및 일본에서 발전 전개된 신유학 전통은 은근히 배제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국에서 쓰이는 성리학 용법과는 차이가 있다. 즉 한국에서 쓰이는 '성리학'이라는 표현은 한국이나 일본 이학 역시 이 학문사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며, 나아가 한국이 독특하게 한국만의 이학으로 정립시킨 학문사조 그 자체를 일컫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도 송명이학이라는 용어에서 송, 명은 말 그대로 송나라와 명나라를 가리키며 이는 정몽주를 원류, 비조로 삼는 동방이학(東方理學, 조선이학) 같은 중국사 외의 이학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리학은 근본적으로 주자의 학문이라고 하여 '주자학'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주차철학은 송명이학의 大宗임은 확실하다.'라고 서술한 논문도 있어 송명이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아예 배제하진 않고 있다.

 

'송명이학의 과학적 해석의 해석'이라는 대만 서적에 따르면, 중화권에서는 송명이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송명유학의 발전은 선진의 유학에서 '심즉리(心即理)'를 강조하여 '성즉리(性即理)'라는 설로 바꾸어, '요존을 위하지 않고 걸왕을 멸하지 않는다'는 천리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희는 유학 제2기 발전의 집대성자로, 먼저 여조겸과 북송 4자의 사상을 정리하고 《근사록》을 편찬하였으며, 《주역본의》를 혼자 힘으로 완성하여 진회(陳抟)의 《용투역》을 권두에 두고 《사서장구집주》를 편찬하여 선진 유학을 《내용이 스스로 조화롭고 앞뒤가 일관된》의 문화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는 송명유학=이학처럼 쓰고 있다. 명나라에서는 양명학의 발전으로 송명유학=이학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송명이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송명유학의 주된 사조를 이학으로 이해하고 있음도 나타난다. 따라서 송명이학 역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용어는 아니며 편의상 사용되는 조어임을 알 수 있다.

 

 

배경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이 탄생한 주된 이유는 형식화, 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반발과 불교의 영향력 증대라고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학문체계였다. 이후 진나라 때 발생한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된 유교 경전을 전한시기에 되살리는 과정 속에서 훈고학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당나라 때까지 훈고학이 유학의 주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훈고학은 당나라 때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어 관학화되자 결국 획일화,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된다.3 결국 당나라 중기~말기 그리고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면4, 기존의 유학인 훈고학은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56 그러나 전한말부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도교 역시 후한말부터 재조명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ㆍ장재ㆍ소옹ㆍ정호ㆍ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희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한편 당대 중국의 정치 상황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을 하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전한 이래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중국 중심주의가 금의 북중국 정복 때문에 깨지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의 관료제와 문치주의의 영향에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리학이 탄생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조선에서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이유 중에는 주희가 불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이 있었다. 주희가 설파한 귀신론의 핵심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 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내세ㆍ영혼ㆍ환생 등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호히 부정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조선 성리학사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것은 이기론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이다. 이를테면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등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면모를 두고,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을 주장했고, 이황은 이선기후를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안한 것이 유명하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탄 것"으로 요약되는 한편,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은 "기가 발하면 이는 탈 뿐이며, 이가 단독으로 발하는 일은 없음"으로 정리된다.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10과 양명학11 또한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강항 등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에도 막부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가마쿠라 막부시기에 유입되었으나, 외래 사상이 처음 들어올 때 대개 그렇듯 이해가 부족하였다.12 17세기에 와서 조선 성리학과 교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은 본격적인 발전을 맞이한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유림이 사회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서구화 및 근대화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성리학도 위축되었다. 하겸진(1870-1946)은 1943년 저술하고 1970년에 출판한 《동유학안(東儒學案)》으로 조선 내 성리학 학자들과 학파의 연원을 집대성했다. 하겸진은 성리학적 이념을 의심 없이 고수하였다. 그의 노력 역시 맥이 꺼져가는 성리학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땅에서 전통적인 성리학은 하겸진과 그 제자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다.

 

하겸진의 제자로는 대표적으로 '진주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성환혁(成煥赫)이 있다. 위당 정인보가 동생처럼 매우 아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에도 상투를 자르지 않고 유생의 옷차림 그대로 다녔으며, 해방 이후에는 해인대학(경남대학교의 전신)에서 한문 강사로 잠시 있었다. 성환혁은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한학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했으나, 학생들의 소양 부족과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서 다음 말을 남기고 강사직을 사임했다.

 

아이들은 엿을 달라고 하는데 내겐 줄 것이란 술밖에 없다.

 

얼마 안 가 성환혁은 정인보의 납북 소식을 듣고 생의 의욕을 잃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 김창숙도 세상을 떠나면서 유림은 더 이상 단일하고 가시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내용

 

이기론

 

성리학의 핵심은 세상(物)과 마음(心)을 모두 리(理)와 기(氣)의 두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다. 기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리는 우주의 원리인 것. 현대과학에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 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예컨대, 해, 달, 바람, 비, 눈, 서리, 이슬, 천둥, 번개 등의 현상들은 '기'에 해당하며,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까닭으로 작용하는 원리나 물리법칙 등은 '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이기론은 도가와 불교의 문제의식을 포용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구절인데,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규정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자는 무극을 무한한 궁극자, 태극을 존재의 거대한太 궁극자로 읽어 무극=태극이라는 주장을 했다. 반대로 무극에서 태극이 발생한다는 해석은 '도대체가 없는데서 있는게 만들어진다니 불교적 냄새가 난다'며 거부했다. 참고로 이 해석을 수용하는 게 육구연과 그를 계승한 왕양명의 양명학이다. 이것 때문에 성리학에게 '양명학은 귀신놀이하는 불교랑 똑같다'라는 비난을 받은 것.

 

이 태극이 움직이면서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으며 만물을 만들게 되는데, 주돈이는 여기서 태극이 리理이고 음양오행이 기氣라고 주장한다. 이를 송나라의 다양한 학자들이 해석하며 이기론의 기초를 낳았다.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 정이 형제는 천리와 각각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장재는 기를 주인공으로 '태허에 기가 있었다'는 태허지기太虛之氣를 주장한다.

 

이런 이론적 흐름을 주희가 종합해, 주자는 리를 비교적 더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를 만물의 다양한 요소로 산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는 보편적인 이와 같다'는 정이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가져온다. 주자는 그러나 여기에 "이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는 이기불상잡과 "이와 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기불상리를 더하면서 기를 이에 꿀리지 않은 조연으로 끌어올려 이기이원론을 완성한 것이다.

 

성리학이 전개되며 주자가 정립한 '이가 살짝쿵 더 중요한 이기이원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리론이나, '기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기론이 아래의 심성론 논쟁이 심화되면서 조선에서 중요해지고, 아예 '둘 중 하나가 먼저다'라는 일원론을 주장하는 흐름 역시 중국에서는 적지 않았다.

 

여담으로 기를 중시했던 이이가 유물론적, 이를 중시햇던 이황이 관념론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와 기는 차설 존재와 의식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단순히 치환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유학자의 성향이 다른 만큼 이이는 이와 기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을 이황은 이와 기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두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이이)와 남인(이황)의 입장 차와 예송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심성론(성정론)

 

성(性)은 타고난(生) 마음(心), 즉, 태어날 때 부터 생기는 마음을 말하며 '이성(도덕성-인의예지)'과 '본능'(욕망)이 있다.

 

정(情)은 본디(靑) 마음(心), 즉, 본심. 솔직한 마음. 감정을 말하며 '사단'(동정심, 의협심, 공경심, 분별심)과 '칠정(희노애락)'이 있다.

 

'어떤 감정에서 도덕성(이성)이 발현되느냐?, 사단의 감정과 칠정의 감정은 분리 가능한 문제인가?, 이기론에 해당되는 바는 무엇인가?'가 성리학의 심성론, 성정론, 사단칠정을 만들어 내었다.

 

주자는 이기론을 사람의 마음에 적용해 성리학은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분리하며, 마음은 성과 정을 주재한다(심통성정心統性情)고 주장했다. 주자는 심과 성은 같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지만 섞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심과 성과 리가 같다고 주장하는 양명학과 갈리게 되는 것.

 

주자는 성과 리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다. 성性을 순수한 이인 본연지성과 이기가 섞인 기질지성의 두 가지로 보는데,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의예지)인 본연지성本然之性를 형성하고, 다만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에 따라 현실로 구현된 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사람마다 달라져 사람들의 개성,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킬 여지가 있어 근대 중화권의 신분제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이게 모든 성리학 학파에서 동의한 것은 아니라, 이이 같은 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수양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도를 익힐 수 있다는 교기질론을 제시해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내포한 학자들도 매우 많다. 여기서 비롯된 신분 사상이 양인 내의 법적 신분 구별을 없애고 양인과 천인만을 두는 양천제로, 중국은 당나라 (실질적으론 송나라) 대부터17, 한국은 조선부터 실시되는 것. 그렇지만 유학은 반대로 가정 내의 신분질서, 또한 학식에 따른 신분질서를 부정하지 않아 조선 중기에 반상제가 대두된다.18

 

문제는 정情에 대해서는 학파마다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위에서 적었듯이 정은 인간의 기질에 따른 감정과 욕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맹자는 우리에게 윤리의 원리인 사덕이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사단四端, 즉 인의 단서인 측은지심, 의의 단서인 수오지심, 예의 단서인 사양지심, 지의 단서인 시비지심의 네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주자는 사단이 정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은 성처럼 이기가 섞여있나? 아니면 그저 기일 뿐인가? 쉽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도 우주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조선 성리학의 문제의식이 시작한다. 이황의 학파는 사단은 이이고 칠정은 기이다고 주장하며, 이이의 학파는 칠정이 사단을 포함해 모두 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정치까지 불어나면서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현실정치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

 

 

수양론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방법은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 거경궁리를 거경과 궁리로 따로 해석해 보면, 거경은 궁리를 임할 때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 하나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며, 궁리는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궁리는 격물치지이며,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이다. 이는 인간의 기질을 우수하게 하기 위한 학문적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마음이나 사물에 몰입한 후 그 이치를 성실히 연구해서 알고, 그 이치를 실천함으로써 사람의 도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거경에 대해서 좀더 부연설명하자면, 주희는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희노애락이 크게 발하기 전의 고요한 마음 상태(미발, 未發)를 관찰하는 주경함양(主敬涵養)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미 희노애락이 발하였고 의식 위로 떠오른 상태에서(이발, 已發) 그 이치와 작용을 탐구하는 격물치지와는 구분된다. 즉 주희는 잠에서 막 깨어나 마음에 생각이나 감정이 활성화되기 전인 미발 상태에서도 수행이 계속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주경함양을 위해서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수양론은 불교의 지관법(사마타+위빠싸나)과의 유사점을 많이 주목받아 왔다. 현대에는 심리치료에서 성리학적 주경함양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내세관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귀신의 유무

 

성리학에서는 세상을 이기론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이기론에 입각하여 불교나 도교 등이 '허황된 설을 주장한다.'고 하며 거부했다. 그런데 만약 불교 등이 허황되고 귀신이나 윤회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제사를 지내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성리학도 유교인 이상 제사라는 형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었고, 제사가 무용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귀신이 존재한다면 성리학의 기본철학과 어긋나고, 그렇다고 없다고 하자니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이황도 이 문제를 의식하면서도 다루기를 어려워한 듯하다. 그래서 문집을 살펴보면 시간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 '귀신의 일처럼 알기 어려운 것은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도 했고, 사람이 죽으면 기가 흩어지는데 어찌 귀신이 있겠냐고 부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사람이 죽어도 기가 바로 흩어지지 않고 아직 뭉쳐 있을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는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만약 귀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옛 성인들은 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거짓으로 의례를 제정하였다는 뜻이 된다. 성리학도 유학인 이상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율곡 이이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지도,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또한 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죽은 지 얼마 안 된) 조상을 제사 지내면 후손의 정성에 따라 기가 감응하고, 기가 이미 흩어진(죽은 지 오래 된) 조상을 제사 지내더라도 조상을 이루었던 '이'가 감응하기 때문에 제사는 무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도 이러한 설명에 동의했으나, 이런 설명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미수 허목은 정말로 귀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허목의 주장에 따르면, 옛 성인들이 제사를 정한 것은 귀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도 기가 흩어지지 않은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윤휴도 귀신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임금이 백장의 어버이자 귀신을 주관하는 자로서 제사 등 예법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왕권중심적 사상과 연결지었다. 김원행은 기존 성리학계의 설명이 귀신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걸쳐 있으며, 제사를 경솔히 지내게 하는 폐단을 부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김원행은 귀신이 기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주나 위패를 만들어 깃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호 이익은 처음에는 정말로 귀신이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훗날에는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비판과 반론

 

성리학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도교와 불교의 지나친 이상 추구와 비현실성이 나라를 망친다는 비판 의식 아래 생겨난 사상이 성리학이라는 것이다. 원래 유교는 우주론에 관심 없이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을 해결할 목적으로 철저하게 현실에 치중한 윤리학이자 정치철학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유교가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했던 가려운 부분을 도교와 불교가 시원하게 긁어 주면서 위진남북조시대와 당나라(한국의 경우 고려)의 학문을 휘어잡았다가, 지도층들이 현실에는 관심없이 내세(來世)에만 치우치면서 정치를 말아먹는 꼴을 지켜본 사대부 계층이 불교와 도교의 요점만을 수용해 현실주의 유학의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이론적 전성기 직후 하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겪은 탓에, 과학기술과 같은 실용학문들은 연구자가 죽거나 일본에 납치되면서 인적 기반이 대거 무너졌다. 그 결과 조선식 성리학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시작하며 종국에는 과도한 이론성만 남아 현실과 점점 괴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노론이니 소론이니 당쟁을 거치며 유학의 교조화까지 일어나다 보니, 결국 유학이 비판했던 불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즉, 조선 성리학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데에는 조선이 그동안 겪었던 혼란이 치명타였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성리학이 처음부터 형이상학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정치와 도덕에 대해 고찰하는 데에 있어 형이상학을 도외시할 수 있는가? 현대의 민주주의 체계와 인본주의 철학은 형이하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다.

 

중국은 반대로 명나라 대에 양명학이 등장하며, 성리학은 '세상을 극한까지 탐구해 이치를 얻어내라'고 한다면 양명학은 격물치지를 '마음만 이해하고 실행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학도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해 내놓은 분석은 엿장수 마음대로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무엇이 더 형이상학적이라 단정하긴 어렵다. 청나라 대에는 고증덕후스럽게도 문자의 옥을 거치며 성리학이든 양명학이든 황제의 심기를 건들 것 같아서 '유교 경전이 고증부터 틀린 것 아니냐?'라는 의문 아래 고증학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결국 성리학이나 양명학 학자들의 연구를 건륭제가 문자의 옥으로 탄압하자 두려워져 심기를 건들 만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학문으로 도피해 버렸다는 점에서 고증학 역시 비현실적 학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물론 고증학 연구로 진짜 고증이 틀린 부분들을 실제로 찾아냈고, 그러면서 공자처럼 현실로 돌아가자는 흐름이 생겼다는 점에서 공자 때의 유학처럼 다시 현실로 집중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반론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착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 주자가례도 현실적으로 모두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자 본인조차도 이 가례는 원리원칙일 뿐이니까 상황에 맞게 응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특히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당대 상황과 관계없이 성리학을 절대화, 종교화시키는 바람에 학문의 취지를 훼손시켜버린 것이다.

 

예송 사건에서 성리학을 상대해석 하려는 윤휴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낸 송시열과 그 추종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배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성리학의 사상이 당초부터 신분 차별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대상은 달라도 이치는 하나"라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은 윤리학적 개념으로 시작해 주자가 우주론으로 확대 적용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의 리로부터 기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이기론적 주장을 응축하는 단어인데, 개념의 방점이 '이치는 하나'에 찍히기도 '형태는 여럿'에 찍히기도 한다. 문제는, 신분제에 있어서 이 개념이 "이치는 하나지만 대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방식으로 적용되어 인(仁)과 같은 보편 윤리를 차등적으로 행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범주에 신분의 귀천을 포함했다는 것.

 

사실 성리학의 근간인 유학 자체가, 주나라의 봉건제 질서를 이상향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신분제를 긍정한다. 설령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군주는 바뀔지언정 상하계급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처럼,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인 것이고, 한번 신하는 영원한 신하인 것. 이는 유학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로, 유학에 뿌리를 둔 성리학 역시 이를 피해갈 순 없었다.

 

 

반론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 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 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맹자'의 사상은 매우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군군신신부부자자부터가 그런 이야기다. 위에서는 "군주는 영원한 군주"라는 뜻으로 신분제를 공고히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세상이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갈아치워라"라는 뜻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 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 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또한 성리학이 신분제도 강화를 옹호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도 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 후에 생긴 사회혼란으로 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을 변질적으로 해석하여 생긴 부작용이지 성리학이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당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악용한 지배층 잘못이 크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한계라고도 볼 수는 있다.

 

애초에 당시에는 신분제와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후에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오용되거나 변질되는 경우도 살펴봐야 한다. 당장 불교나 기독교 등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후 권력자들이 자신들 통치와 지배 이데올로기 정당화로 써먹은 걸 떠올려보자.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목격될 수 있는 현상이라 성리학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의의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20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사장되었다.21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이 때문에 해동 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되기도 한다.

 

 

 

성리학자

 

학자로서 성리학을 연구, 발전시키는데 전념한 인물이나 유명인들 위주로 게시가 되어있으나, 사실상 남송(南宋) 이후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중국 명나라나 한국 조선 왕조의 관리들이 대부분 성리학자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경우 충무공 이순신같은 무관(武官)들도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배웠으므로 하술된 인물들이 문관(文官)위주로 작성되었음을 참고 바람.

 

범중엄

정호, 정이 - 이정(二程; 두 정씨 형제)을 정자(程子)라고 높여 부르는데, 여기서 정자관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주희 : 성리학을 집대성. 주자(朱子)로 높여 부른다.

안향

6군자 : 이진, 권부, 우탁, 백이정, 이조년, 신천 등 안향의 제자.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길재

김숙자

김문기

박팽년

성삼문

김종직

레 타인 똥(聖宗:성종) : 베트남 후기 레(黎:여) 왕조의 군주로, 체제 정비를 위해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데 힘씀.29

정여창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

조광조

서경덕

이언적

주세붕

이항

조식

이황 : 이자(李子) 또는 이부자(李夫子)로 높여 부른다.

김인후

노수신

기대승

성혼

이이

이산해

류성룡

정구

조헌

김장생

이항복

후지와라 세이카 : 조선 성리학자 강항의 도움을 받아 《사서오경왜훈(倭訓)》을 편찬하는 등 사실상 일본 성리학의 시초이다. 신불습합(불교와 신토의 혼합)처럼,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일본에서는 신토를 이기론적으로 해석, 접근(신유일치)하는 등 성리학의 일본 토착화가 이루어진다.

이덕형

강항

김상헌

안방준

김집

하야시 라잔

최명길

송준길

송시열 : 송자(宋子)로 높여 부른다.

윤선거

윤휴

야마자키 안사이

윤증

박세채

아라이 하쿠세키

아메노모리 호슈

채제공

임윤지당 : 조선, 아니 동아시아권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중 한 명.

최익현

전우

조상

 

 

 

 

 

 

유시민은 한국의 기술력이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며, 만악의 근원이 성리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일제시대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한국인들이 많았고, 박정희와 같은 군인출신 독재자를 높이 평가하는 우익 인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중국에서도 송나라가 약화되어 여러 오랑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 굴욕을 당한 이유를 공리공론만 일삼고 정신승리를 시전하는 송학, 즉 성리학이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송나라가 군사력은 약했을지 몰라도 경제력에서는 중국사상 가장 부유한 왕조 중 하나였고 더구나 조선사상 가장 부유한 시대인 세종대왕 시절은 성리학이 그렇게나 강했음에도 문화적 과학적으로 해당분야의 황금기였다. 즉 성리학 때문에 한국이 발전못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 시대가 삼국 시대에 비해 기술적으로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말도 거짓인 게 당장 연은분리법을 만들고 또 화약, 금속활자 등을 전 시대보다 발전시킨 게 바로 조선 시대이며 이는 삼국시대에는 없던 것들이다. 물론 둘 다 전근대 사회이니 삼국시대와 조선 시대의 차이보다 조선 시대와 현대 대한민국의 기술력 차이가 더 크기는 하지만 이는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봐야지 성리학 탓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성리학의 영향이 덜했던 동시대 일본의 경우 꽤 정교한 자동기계를 만들 수 있고 전통 수학을 바탕으로 기초적인 미분의 개념을 이해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기도 했지만 이는 통치철학의 차이라기보다는 개방성과 경제구조의 차이로 인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송나라 이후에 촉한정통론이 사회적으로 자리잡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성리학이었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한국명 이만열)는 한국이 제대로 된 문화 산업을 이끄려면 유교(성리학)를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처럼 선비정신이나 유교 같은 한국의 전통적 정신 문화를 버리고 뿌리 없이 표류하는 대중문화만 좇다가는 만주족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페스트라이쉬 외에도 우리 사회의 대안을 해외로부터 본받는 것보단 우리 안에서 그걸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성리학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북대학교 허태용 교수는 '조선시대 수많은 현상 원인은 성리학' 견해 부적절"이라고 얘기했다. 허 교수는 '성리학으로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연구 경향의 비판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국내외에서 특정 사상을 역사적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문제의 소지가 작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상적 요소를 역사의 동인으로 보려는 이유에 대해 연구자의 심리적 편견이 투영됐을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선동에 유리한 측면이 있으며, 비판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안전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 후기에 주체적 역사학과 국어학, 현실적 문학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열린 것은 실학이라는 학풍이 대두됐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마치 인과적 설명이 마무리된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서 설령 이러한 설명이 불만족스러워도 반론이 쉽지 않아 설득력을 얻게 된다고 했고,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체제 교학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어떤 역사 현상이 성리학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명은 공기에 산소가 포함됐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시대에도 상황마다 성리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모습과 역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며 "그런데도 모든 사건의 원인을 성리학으로 돌리는 것은 관념론적 환원주의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역사학에서 편의적으로 특정 시점과 공간을 잘라내서 특정 사건이나 현상의 인과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라며 "복잡한 요소들을 늘 입체적으로 고찰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사상적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가족법 등에 관하여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고, 그 보수적 성리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사농공상의 신념에 의거하여 민의원 후보에 나오고도 선거 운동을 안 했는데 그 이유가 아랫 사람에게 어떻게 표 달라고 고개를 숙이냐는 이유였다. 다만, 성리학의 폐해 하나만으로 결론짓기는 어려운 게 당시 비슷한 시기 독립한 신생독립국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비슷한 사상이나 행동을 보인 자들은 많았다. 애초에 저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되는 시절이라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 여성인권 역시 서구권 선진국만 해도 더 나아지는 것은 수십 년은 지난 뒤의 일이다.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이기론은 필히 출제되었다. 




 

 

 

 

성리학 (性理學)

 

송나라 이후의 유학으로 특히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신유학 · 이학 · 정주학 · 주자학.

 

 

성리학의 의미와 특성

유학을 발전사적으로 볼 때 선진(先秦)의 본원(本源) 유학, 한당(漢唐)의 훈고(訓詁) 유학, 송명(宋明)의 성리학, 청(淸)의 고증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성명·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중국 송(宋)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성리학이라 부른다. 성리학은 보통 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이학(理學)·도학(道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송의 주희(朱熹)는 주렴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고서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虛無寂滅之敎)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한편 같은 유학임에도 불구하고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이(理)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학이라 부르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상대적으로 마음(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心學)은 미미하였다.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심학이 주류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불교는 당(唐)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지만 송대에는 성리학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폐쇄적 귀족 사회였던 당은 안록산(安祿山)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을 계기로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의 혼란기를 겪으며 송나라가 등장하였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後周, 951-960)는 재정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에 대해 대규모의 박해를 가하였다.

 

송대로 접어든 이후 관료학자(士大夫)로서의 유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성·반사회성·비윤리성 등을 공허하다(虛學)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성리학을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정당화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이 보기에 도교의 은둔 경향과 불교의 세속을 떠난 출가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었다.

 

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주로 사회적 인간 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두 측면에서 그 사상을 심화시켰다. ≪주례 周禮≫를 중시함으로써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 본체,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심화시킴으로써 도교나 불교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는 유교의 텍스트들 중에서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사서(四書)를 경전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논어≫는 공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고, ≪맹자≫는 맹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다. ≪대학≫·≪중용≫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대학≫은 증자(曾子)와 그 문인들이 지었고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생각하여 각각 한 책으로 독립시켰다.

 

사서의 정립을 통하여 공자(孔子)·증자·자사(子思)·맹자(孟子)라는 유학 도통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예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희는 사서에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나중에 성리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의 중심 텍스트를 선정하고 거기에 새로운 해석학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유학으로 거듭났다.

 

성리학의 특징은 공자·맹자의 선진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일분수(理一分殊)·천도유행(天道流行)·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보편타당한 법칙의 편재를 주장하였다.

 

인간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았다고 보아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하고(窮理)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盡性)할 것을 주장하였다.

 

보편타당한 법칙을 온전히 익히기(體認·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한다.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다.

 

한편 공자가 말했던 자기실현의 학문(爲己之學)을 닦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항상 반성적으로 살피고(存心), 본성을 기르며(養性),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신중히 하는 것(愼獨·戒懼) 등이 그것이다.

 

성리학은 마음(心)의 극단으로 치닫는 불교와 기(氣)의 극단으로 치닫는 도교를 비판하면서 마음·기·이의 통합적 구도를 제시한다. 이와 기는 성격상 다른 것(不相雜, 決是二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不相離, 理氣相須)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마음·성(性)·정(情)의 역시 통합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마음은 성과 정 전체를 아우르는 것(心統性情)으로 보았다. 인(仁)·의(義)·예(禮)·지(智)로 구성되어 있는 마음의 본체(未發心體)가 성이고 성이 밖으로 표현되면 정이 된다고 하였다. 성과 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관계에 있으므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도(道)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인 기(器) 역시 단절되지 않는다(無間斷)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구도를 가졌던 성리학은 일상적인 것(日用之間)에서부터 학문의 근본을 다져야 한다(下學而上達)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의 전래와 발달

 

성리학의 초기 수용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때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송(北宋)에서 성리학이 발흥할 무렵인 고려 인종기 전후(11∼12세기)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해 들여 왔고, 김양감(金良鑑)·윤언이(尹彦頤) 같은 대학자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송에 가는 한편, 중국 사신들이 고려에 빈번히 왔다.

 

중국에 유학가는 고려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고려 시대 학자였던 최충(崔冲)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이 솔성(率性)·성명(誠明)·대중(大中) 등 성리학자들이 특별히 중시한 텍스트였던 ≪중용≫의 용어로 되어 있는 데서도 성리학의 전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예종 때 왕의 임석 하에 거행되었던 중신들의 경전 강론의 분위기를 가리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敎)과 성명도덕(性命道德)의 도리(理)가 만당에 가득하였다"고 하는 기록(淸讌閣記)이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성리학은 중국에서 발흥·성장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安裕)은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따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 무렵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의 수도에 가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 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 왔다.

 

또한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 등을 전파함은 물론 과거 시험에서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은 피상적 차원을 넘어 성리학이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들처럼 성리학을 익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당시의 향리 출신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명적(正名的) 명분 의식에 기초하여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면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의 외교정책, 정방제(政房制)의 폐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에 힘썼다.

 

 

양반 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조선조를 개창하였던 당시 역성혁명의 주체는 대내적으로는 왕씨 정통의 문란을 비판하고 대외적으로는 배원친명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여기에서 성리학의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을 엿볼 수 있다.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일찍이 고려 초의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이색 등도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그것은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도전은 <불씨잡변 佛氏雜辨>·<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허구성·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의 비인륜성·반사회성 등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배척하였다. 불교도 중에는 기(器)를 버리고 도(道)만을 추구하여 사회를 멀리하는 고고(枯槁)·응체(凝滯)의 폐단에 빠지거나, 도와 기의 의미적 층차를 무시하고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고자 하여 창광방자(猖狂放恣)의 폐단에 빠지는 부류가 있다고 꾸짖는다.

 

또한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하여 현실을 벗어나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성리학이야말로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여 사회 윤리를 강화하고 국가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그는 성리학을 가리켜 “옛사람들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국교인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으로서 국가의 통치 이념을 건립함에 따라 성리학은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불교에 대한 비판 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오경천견록≫은 오경(五經)에 주해를 단 것으로 중국 오징(吳澄)의 ≪주역찬언 周易纂言≫, 진호(陳澔)의 ≪예기집설 禮記集說≫ 등의 약점을 보완·극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체용관(體用觀)을 적용하여 오경 전체를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하였다.

 

≪주역 周易≫과 ≪춘추 春秋≫를 각각 체[全體]와 용[大用]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시 詩≫·≪서 書≫·≪예기 禮記≫는 그 중간에서 정사(政事)·언정(言情)·행위를 다룬 서적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경 각권 또한 그 내용에 따라 체용을 갖춘 것으로 이해하였다. ≪주역≫에서는 이와 도, ≪춘추≫에서는 도와 권(權)이 각각 체와 용에 해당한다고 파악하였다.

 

권근의 성리학적 식견은 그의 창의적 저술인 ≪입학도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것은 ≪중용≫·≪대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 입문서로서 성리학의 중심 사상을 뽑아 작도(作圖)하고 개략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림(圖)의 위치 배열과 해설(說)에서 그의 성리학적 견해를 볼 수 있다.

 

권근은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인간(人)·심·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천인 합일이라는 유학적 이상을 심성의 수양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의 근원과 기의 근원을 대립적으로 배열하여 이로부터 순선무악(純善無惡)의 사단(四端)을 연역하고 기로부터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정을 연역하였으며 선하고 악한게 되는 계기를 의(意)의 기미(幾微)에 두었다. 또한 성(誠)·경(敬)·욕(欲)의 권역을 구분하여 성인과 중인의 갈래를 보이고, 중인도 기질을 변화시켜 경으로써 존양성찰(存養省察)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형질적 기와 본래적 이를 함께 갖추고 있으므로 이로써 동물적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의 이기 심성(理氣心性)론은 군주 및 지배층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인정(仁政)·왕도(王道)를 실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황·이이 등 일군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의리 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士林派) 성리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특히 사화가 많았던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는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의 의리관과 도학 정신은 도덕·정치·역사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慈)-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계통이 사림파의 계보로 공인되었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김숙자를 통해 이어졌다. 사림파 학자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많은 사화(士禍)를 받으면서도 성리학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였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절의를 밝혔고 김시습(金時習) 등의 많은 절사(節士)들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즈음하여 윤리 도덕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소학≫ 등이 널리 간행·반포되었다. 성리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던 ≪소학≫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등의 편으로 되어 있는 성리학적 율신(律身)·수기(修己)의 책이었다.

 

≪소학≫의 학습은 김굉필·남효온(南孝溫) 등 당시 사림파 학자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특히 평생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칭하였던 김굉필은 한시도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도 도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도(道), 즉 정(正)과 선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의리·공사(公私)의 구분을 확실히 함으로써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던 그는 의(義)와 공(公)에 입각하여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책으로 공부(貢賦)의 경감,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언로의 활성화, 소격서(昭格署)의 철폐, 사림의 사기진작, 공신호(功臣號)의 재정리 등을 시행하였다.

 

한편 조광조는 의와 공을 살리는 길을 선비(士)에게서 찾았고 선비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모범이 되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학 정신에 근본하여 국정 개혁에 힘쓰던 중 기묘사화를 만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公)과 의리를 지켰던 도학 정신은 길재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하나의 학통관을 형성하였고 한국 성리학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기심성의 이론적 탐구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것은 16세기부터이다. 의리를 중시하던 이전의 성리학자들은 전기 사림파로, 이기심성(理氣心性)을 이론적으로 정밀화하였던 성리학자들은 후기 사림파로 분류할 수 있다.

 

16세기가 되면서 이기 문제의 본격적 논의가 이언적(李彦迪)과 서경덕(徐敬德)에서 시작된다. 이언적은 이와 기,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 도와 기(器)·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二而一, 一而二)인 관계로 합하여져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보편적 원리인 이를 구체적 기와 동시적으로 읽음으로써 이가 공허한 초월성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기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도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다’고 함으로써 이의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한편 자득(自得)의 방법으로 공부하였던 서경덕(徐敬德)은 기일원론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의 선차성을 부정하고 이는 기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세계는 담일무형(湛一無形)한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聚散)에 불과하지만 기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기불멸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기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이와 기로써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해석할 것인가라는 심성론적 연구로 이어졌고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논의의 발단은 이황이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 天命圖≫에 나와 있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내용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고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사단(四端 : 惻隱·羞惡·辭讓·是非의 情)을 이에 칠정(七情 : 喜·怒·哀·懼·愛·惡·欲)을 기)에 대응시켜 사단과 칠정의 근거를 분립시켰다(七對四).

 

그러나 기대승은 사단은 이에 칠정은 기에 분립할 수 없고 사단 역시 칠정에 포함되어 있다(七包四)는 통일된 해석을 제시하였다. 기대승은 이와 기의 합(合)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황 역시 기대승의 이기 구도에 동의했지만 인간의 선(善)한 감정(四端)이 발생하는 경로를 감정 일반(七情)의 발생 경로와 내용적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이 일치할 수 없었다.

 

이황은 나중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와 기의 결합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우선성에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분립시킨 것이다.

 

이이(李珥) 역시 이황의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에 비판적이었다. 이이는 이황의 사단과 칠정의 분립에 반대하고 칠정이 사단을 내포한다(七包四)고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도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氣發理乘)’는 것만을 옳다고 인정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이와 기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묘합(妙合)의 관계로 해석하였다. 이는 이이고 기는 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선후가 없고 사이가 없기 때문에 둘로 나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이기론을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총괄하고 있다. 즉 우주에는 하나의 동일한 이가 관통하여 있으면서도 서로 차이나는 기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사물들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각각 분리하여 논의할 수 있는 선택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동시적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예학적 변용과 그 구현

 

이기심성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한창이던 16세기 말엽부터 예학(禮學) 역시 매우 고조되었다. 유학에서 분류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종이 있다고 할 만큼 잘 세분화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학을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준수하고자 하였다.

 

예의 준수는 성리학의 의리 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분별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예를 둘러싼 복상 문제(服喪問題)나 예송(禮訟)의 시비가 당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예학은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胡亂) 등으로 문란해진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인간의 생활 양식을 제도화하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이었다. 불교의 비윤리성·반사회성을 비판하였던 성리학은 예를 통하여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식화시킴으로써 성리학적 규범을 제시하였다. 특히 성리학이 관학화(官學化)된 이후로 예의 정립과 실천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려 말기에는 ≪가례 家禮≫의 시행을 적극 권장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 등이 간행되어 윤리적 실천 지침이 되었다. 또한 향교와 향약은 오륜(五倫)에 근거한 미풍양속을 전국으로 보급시켜 일반 서민 계층에서도 예가 준수될 수 있게 하였다.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예학에 대한 전문 서적을 내놓으면서부터 실용적 예절로만 행해지던 예가 학문적 연구 분야로 부상하였다. 예는 ‘보편적 이치가 구체로 드러난 형태(天理之節文)이며,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형식(人事之儀則)’이라는 성리학적 예 관념은 예학을 통하여 매우 세세한 일상사에서 구체화되었다.

 

정구는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를 지어 예를 종류 별로 정리하였고 김장생은 ≪의례문해 疑禮問解≫를 지어 처 부모의 칭호를 자칭·타칭의 경우에 각각 어떻게 불러야 옳은가 등등 예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의리 관념은 예학의 정통성(正統性) 문제와 직결되었다. ≪의례≫나 ≪의례도≫에 근거하여 정통(正統)을 중요시하여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 계통을 바로하고자 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조(趙)씨의 복(服)을 일 년[朞年]으로 할 것인지 삼 년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서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남인이었던 윤휴(尹鑴)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효종을 가통(家統)으로 볼 것인지 왕통(王統)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정통성의 계열 분류를 놓고 발생했던 예송은 당쟁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지만 직접적으로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을 해석하면서 나타났던 입장의 차이였다.

 

 

인성·물성의 동이론

 

퇴계·율곡 이래 사단칠정의 논변이 1세기 정도 전개되었을 무렵 사람의 성(性)과 동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논변이 시작되었다. 보통 이것을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라고 부른다.

 

청풍(淸風)의 황강(黃江 : 堤川 寒水)에 살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인물성에 대한 논변이 발단되었다. 이간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하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함으로써 서로 공박하였다.

 

이 논변이 전개될 당시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고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뒷날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렀다.

 

이간은 인간과 동물이 다섯 가지 온전한 덕성인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태극·천명·오상을 동일한 본체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오상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만 인간과 동물은 기질적 차이 때문에 오상의 드러나는 정도가 다르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도 기품의 맑고 탁함(淸濁粹駁)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지만 마음이 발하지 않을 때의 기는 본질적으로 순선(純善)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편 한원진에 의하면 태극과 천명은 무제한○무시종의 보편타당한 본체여서 형기(形氣)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상은 사람의 형기 가운데 있는 기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기질이 다르므로 기질에 내재한 본성 역시 다르다고 추론하였다.

 

이간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보면 만물이 동일하지만(一原)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偏全)의 차이가 생긴다(異體)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간이 일원이체(一原異體)의 입장에서 인물성을 이해하는 것과 달리 한원진은 이와 기질(氣質)이 교섭하는 세 가지 계층을 나누어 인물의 본성을 해석하였다.

 

이는 본래 하나이지만 형기를 초월한(超形氣) 태극의 층이 있고, 기질로부터 나오는(因氣質) 건순·오상의 층이 있고, 기질과 섞여 있는(雜氣質) 선악(善惡)의 성(性)에 해당하는 층이 있다고 하였다. 기질로부터 나오는 건순·오상의 층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의 성은 서로 다르고, 기질과 섞여 있는 층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 또는 동물과 동물의 특성이 다르다고 보았다.

 

이간과 한원진의 주장은 모두 이기론의 구도를 취하여 기질의 차이로써 존재의 차이를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의 구도에서 보면 이간은 이통(理通)의 측면에 일관되었고 한원진은 기국(氣局)의 측면에서 인물성의 다름을 논의하였다. 이들의 인물성론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자연계에까지 심화확대하였던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도전과 성리학의 응전

 

15세기 말엽부터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기 시작하였지만 이황을 비롯한 정주계(程朱系) 학자들의 강한 배척 때문에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남언경(南彦經)·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에 의해 왕양명의 심학은 겨우 피상적으로 소개된 정도였고, 오직 정제두(鄭齊斗)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외롭게 시도되었다. 이어서 신대우(申大羽) 부자와 이충익(李忠翊)·이건창(李建昌) 일가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 20세기에 들어 정인보(鄭寅普)·박은식(朴殷植) 등에게서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중심 사상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조선시대의 양명학은 매우 미미하였고 이단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성리학은 여러 측면에서 양명학을 비판하였다. 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고 하여 마음을 벗어나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성리학은 주희가 말한 ‘성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에 서서 양명학이 충효와 같은 객관적 규범을 주관적 마음의 문제로 혼동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양명학에서 주장하는 ‘양지(良知)’와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의 학설 역시 객관적 이치를 모르는 주관적 독단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황은 ≪백사시교변 白沙詩敎辨≫·≪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 등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였다. 이 밖에 박세채·한원진·이익·안정복·정약용 등 대부분의 한국의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선(禪)불교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양명학은 연구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위축되고 말았다. 한편 이기심성론을 주로 탐구하는 한국 성리학의 이론적 경향에 비판을 가하면서 학자들의 관심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유학의 텍스트와 제자서(諸子書)에 두루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 학문(實事求是)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부른다. 서명응·홍양호·홍대용·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성해응·정약용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성리학의 지나친 이론적 천착과 예 의식의 지나친 형식성·명분성 등을 비판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힘쓰고자 하였다.

 

성리학자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 배척하였지만 실학자들은 현실적으로 닥친 국고의 고갈과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청나라를 왕래하며 다양한 모색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양명학·서학·고증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청나라의 객관적·실증적 학문 태도를 받아들였고, 17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의 천주교·과학 기술·문화 등에도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개방성·실용성·실증성 등을 지녔던 실학은 이기심성론에 치중하였던 성리학의 일면성을 크게 보충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위협 및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이항로(李恒老)·기정진·이진상(李震相)·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성리학자들은 천주교의 우주관·인생관·윤리관이 국기(國基)를 흔드는 오랑캐[夷狄]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고 유교의 삼강오륜을 지키려고 애썼다.

 

이들은 서구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쇄국(鎖國)·주전(主戰)·척화(斥和)를 주장하면서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목숨을 바치며 대항하였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민족을 보호하고 천주교 사상을 가진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 하였던 이들의 활동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폐쇄적 태도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와 민족을 보호하려고 하였던 것은 정당하고 용기있는 정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

 

① 정주학의 절대 우위 : 정주학 계통의 성리학은 처음에는 불교의 비인륜성을 비판하였고 나중에는 육상산·왕양명 계통의 심학을 이단시하면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일부 소론(少論) 계통의 학자들이 양명학에 개방적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발전할 수 없었다.

 

특히 17세기경부터 정주학은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어 조금이라도 주희의 이론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붙여 배척하였으므로 정제두를 빼고는 이렇다 할 양명학 연구자가 없었다.

 

한편 정주학 계통의 성리학은 이기심성론·사단칠정론·인물성동이론 등 많은 부분에서 연구를 진척시켰다.

 

②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 : 정주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양명학은 주정주의(主情主義)적 경향이 강하므로 정주학이 발달하였던 한국 성리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사실 사단칠정론, 인물성 동이론 등의 탐구는 200∼300년 여에 걸쳐 논의되었고, 그 내용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오하고 풍부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적 토대였던 이와 기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져 주리(主理)·주기(主氣)·유리(唯理)·유기(唯氣) 등의 다양한 학설이 나왔다.

 

③ 예학(禮學)의 발달 : 합리성을 추구하는 한국 성리학의 주지주의적 정신은 명분론적 예학을 꽃피웠다. 성리학자들은 의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태를 예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 이기론은 공허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예의 실천을 통하여 체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몽주가 ≪주자가례≫를 실천하고 권근이 ≪예기천견록≫을 저술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정구·김장생·박세채(朴世采) 등의 예론에서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한편 윤휴(尹鑴)와 송시열(宋時烈) 등의 예송에 의한 당쟁은 예 실현을 향한 열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④ 주리론(主理論)의 보수성 : 한국성리학은 주기론 보다는 주리론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명분론적 사고가 두드러졌다. 변화하는 감각적 세계(氣)의 근저에 있는 초감각적·불변적 원리(理)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념형적 가치를 강하게 추구하였다. 왕통·가통 등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이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는 가차없이 지탄받았다.

 

이러한 주리적 경향은 변화하는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과 가치를 묵수하려는 보수성이 강하였다.

 

그러나 주리파의 명분 의식은 개항기에 우리 민족의 주체 의식을 발양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대표적 주리론자인 이항로·김평묵과 그 문인들이 척사 위정을 부르짖으며 창의호국(倡義護國)운동을 일으킨 것이 그 실례이다.

 

⑤ 인존정신(人尊精神)의 지향 :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를 계승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이론화시켰다. 사칠논변을 통하여 인간의 선한 감정이 무엇인지 연구하였고 인물성 동이론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인간의 본성을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이(理)로부터 해석하여 인간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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