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근대

삼균주의(三均主義), 조소앙

Jobs9 2022. 10. 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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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균주의(三均主義)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미래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생활을 실시하려는 주의’이다.

완전균등을 대전제로 하면서 이의 실현을 위해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말 기본적 구상이 정립되고, 한국독립당의 정강에 채택되었으며, 1941년 1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공포하였다.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이후 가혹한 정치적 유린과 토지수탈 등 경제적 파탄 및 심한 교육차별대우를 받았던 한민족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추구하며, 무차별 평등교육의 실현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는 민족혁명론·무저항주의·대외구국론·민족교화주의·독립전쟁론·계급투쟁론·무정부주의투쟁론·문화구국론·민족유일당촉성론 등 다양한 사상조류가 혼재하였다. 특히 임시정부의 소재지 상해에서도 잡다한 외래사상이 교차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정치이데올로기로써 제반 민족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대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양사상의 재해석 및 서양사상의 소개내지 추종에 그쳤으나, 이러한 것으로는 민족의 특수한 정치현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일부 선각자들은 점차 한민족 고유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창안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균주의였다.

1918년경부터 싹트기 시작한 평등주의 사상인 삼균주의는 1931년 임시정부의 ‘대외선언’에서 체계가 정립되었다. 나아가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임시정부의 기본이념 및 정책노선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삼균주의는 임시정부의 기초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당강령이자 독립군의 강령으로, 1930년대부터 독립운동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광복 후 우익 민족진영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되는 듯했으나 국토분단과 남북대립으로 좌절되었다.

삼균주의는 국내의 모든 권력과 부력(富力)이 일제에 의해 독점된 현실에서, 한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전통에서 민족의 활로를 추구하였다. 또한,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사상(大同思想), 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들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삼균주의의 대전제는 ‘완전균등’으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완전균등을 표방하였다. 개인과 개인간의 균등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보통선거제·국유제·국비의무학제를 실행해 각각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민족과 민족간의 균등은 민족자결을 통해 이룩된다고 전제하면서, 이를 모든 민족에 적용해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이 피압박·피통치의 위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와 국가간의 균등은 식민정책과 자본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침략전쟁행위를 금지하여 모든 국가들이 서로 간섭, 침탈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이룩된다고 보았다. 이로써, 완전평등의 국제생활이 이루어지며, 더 나아가 사해일가(四海一家)·세계일원(世界一元)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서는 “삼균주의로써 복국(復國)과 건국을 통해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자주·균치(均治)를 동시에 실시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 강령을 반대한 자 등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규정까지 두었다.

의의와 평가

삼균주의는 민족사의 전통과 선례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아낸 뒤에 동서양의 기존 사상으로 보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것이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독립운동의 기본이념이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혁명성을 추출하려 하였다. 또한 민족혁명사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고려의 노예혁명과 3·1운동까지의 각종 혁명사를 정리하고 거기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찾았다. 토지사유제의 폐해와 일제의 토지수탈정책에 대항해 토지국유제를 주장, 빈부격차 및 봉건적 신분차를 일소하려 하였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국비교육론을 강조하였다.

민족사에서 도출해 낸 기본 입장을 동서사상과 연결시킨 삼균주의는 어느 한 민족에 국한된 특수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전인류에 적용되는 구세적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삼균주의의 역사적·사상적 특징은 우선 한말 이래의 수많은 정치사상 중에서 가장 체계적·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사상으로, 상당히 합리적이며 구체적인 이론 기초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광복 뒤의 국가 건설에 대한 구체적 입장을 밝히고 이를 세계평화에까지 연결시킴으로써 다른 정치사상들에 비해 진보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의 정치사상 가운데 노예해방론·계급타파론·구국혁명론 등을 부르짖은 철저한 민족혁명론이었다. 제국주의시대에 등장한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였으나, 단지 종교적 저항론이나 계몽적 혁신론, 또는 사회주의적 투쟁론의 어느 하나에만 만족하지 않고, 이들을 모두 주체적인 평등주의 입장에서 포용했다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삼균주의에도 정치·경제·교육균등이라는 삼자 상호간의 대립과 모순 가능성, 또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평등을 거쳐 ‘세계일가’에 이르는 과정상의 문제 등 몇 가지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을 전제로 한다면 삼균주의는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된다.

 



 Q  
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상을 정립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三均制度)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조들이 분명히 명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야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급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야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保維)하려 함이니 홍익인간 (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킬 바 최고 공리(公理)임


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②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다.  
③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④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③ 
임시정부 건국강령인 삼균제도를 정립한 조소앙에 관한 문제. 조소앙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김구 등과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1935년 한국 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한 뒤 민족혁명당에 합류하였다가, 민족혁명당을 탈퇴한 뒤 1937년 다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1940년에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었다. 충칭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에 참여 하였으므로 1948년의 5・10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이후 1950년의 2대 총선에서는 전국 최다득표자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25 전쟁 때 강제 납북되어 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③ 조소앙은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므로 1948년의 5・10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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