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1949)
오영진
● 줄거리
이중생은 일제 강점기에 외아들 하식을 징용에 보내면서까지 친일을 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 이후 광복이 되자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국유림을 차지하기 위해 무허가 산림 회사를 차리고, 둘째딸 하연을 미국인의 정부로 이용하면서 부를 유지하려 온갖 술책을 부린다. 그러다가 지금껏 저질러온 사기, 배임(주어진 임무를 저 버리거나 임무의 본래 뜻에 어긋남. 주로 공무원 또는 회사원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가나 회사에 재산상의 손해를 주는 경우), 횡령, 탈세 혐의로 체포 수감되었고, 그의 형 이중건은 땅을 팔아 산 집이 이중생의 명의로 된 것을 발견하고 집을 찾아내라고 동생의 집에 드러눕는다. 집안 식구들은 걱정을 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고, 둘째딸 하연은 아버지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면서 언니인 하주와 매일같이 충돌하고 자기 나름으로 회사에 취직한다. 이중생은 최 변호사의 도움으로 특별 보석으로 풀려나고, 이중생과 최 변호사는 이중생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처럼 꾸며 재산을 보호하려는 모의를 한다.
그 다음날 저녁, 이중생이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하고자 한 사위 송달지는 천성이 착하기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송달지는 망설이지만 이중생은 '자신의 전 재산을 송달지에게, 그리고 형 이중건과 최 변호사에게 상당한 돈을 주라'는 유서를 써 놓고, 면도칼로 손목을 끊어 죽은 것으로 위장을 한다. 송달지가 그 일에 쉽게 응하지 않자 이중생은 큰딸 하주에게 병원의 도장을 가져오게 하여 사망진단서까지 직접 작성하고 5일장으로 부고를 인쇄하여 치상(治喪)을 준비시킨다.
그러나 초상집에 온 김 의원의 제안 때문에 전 재산을 무료 병원을 설립하는 데 헌납하게 되고 만다. 이를 관 속에서 듣고 있던 이중생은 김 의원이 돌아가자 김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인 송달지를 크게 꾸짖는다. 이때 징용에서 돌아온 하식이 아버지의 행위를 비판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중생은 일을 도와주기 위해 와 있던 아낙에게 귀신 취급을 받고 결국 진짜 자살을 하여 생을 끝마치게 된다.
● 감상 및 이해
이 작품은 1949년에 발표된 희곡으로, 친일파 경제 사범인 주인공 이중생의 몰락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광복 후에도 친일 잔존 세력이 활개치던 병든 사회상을 고발하는 동시에, 낡고 부패한 기성 질서의 지배로부터 정의롭고 건강한 새 시대로의 전환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
3막 4장으로 된 이 작품은 영남지방에 퍼져 있는 인물 전설인 방학중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1949년 5월 '극예술 협의회'에서 초연되었으나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7년 극단 '신협'이「인생 차압」으로 개명하여 공연하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주인공 이중생은 일제 시대에 외아들을 솔선하여 징용에 보내면서까지 치부를 한 전형적 친일파다. 해방이 되자 이중생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국유림을 사유화하기 위해 무허가 산림회사를 차리고, 달러를 융자받기 위해 작은딸을 미국인의 정부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전에 그의 음모가 발각되어 사기, 배임, 횡령, 공문서 위조 및 탈세범으로 입건되는데, 여기서도 그의 교활성은 잠자지 않는다. 그는 고문변호사와 공모하여 거짓 자살극을 꾸미고 재산을 보전하려 하지만 진상 조사 과정에서 사위에게 넘긴 재산이 몽땅 무료병원 건립에 쓰이도록 결정된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중생은 결국 진짜 자살로써 생을 마치게 된다.
● 정리하기
- 갈래 → 장막극(3막 4장), 사회 풍자극, 희비극
- 성격 → 풍자적, 해학적
- 인물
* 이중생(53세) →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하여 돈을 벌었으며, 광복 후에는 무허가 목재 회사를 차려 거드름을 부리며 산다. 본디 천박하고 무식한 인품을 가지고 있다.
* 우 씨(54세) → 이중생의 아내. 남편을 대단한 존재로 알고 부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인이지만, 집안 하인들에게조차 존경을 받지 못한다.
* 송달지(40세) → 이중생의 사위. 내성적이며 온순한 성격으로, 생활력이 없다. 아내에게 핀잔을 받아가며 처가에 얹혀 지낸다. 그러나 극의 끝부분에서 성격의 변화가 나타나는 인물이다.
* 이중건(63세) → 이중생의 형. 이중생의 비도덕적인 면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동생의 재산으로 편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인물이다. 극중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웃음을 유발시키는 희극적인 면도 있다.
* 최영후 변호사(43세) → 이중생의 고문 변호사. 윤리의식이 결여된 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문제적인 인물 이중생에게 지식을 파는 인물이다.
* 김 의원 → 국회의 조사 의원. 합리적, 객관적, 의지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사건을 전환하고 극의 절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하식 → 이중생의 아들. 아버지 이중생 때문에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10년만에 집에 돌아오게 된다. 해방된 조국의 건강한 가치를 상징한다.
* 하주(35세) → 이중생의 맏딸, 단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송달지)를 천대함.
* 하연(30세) → 막내딸, 사업을 위해서는 불륜도 서슴지 않는 인물임.
* 임표운(32세) → 이중생의 비서
- 배경 → 광복 직후, 서울
- 주제
* 친일 세력 청산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구
*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물에 대한 풍자와 비판
- 특성
1) 극적 긴박감과 희극적 분위기를 공존시켜 긴장과 이완의 효과를 줌.
2) 인물을 희화화하여 풍자함으로써, 전통적 해학극의 표현방식을 차용함.
3) 위장과 위장의 실패라는 서사적 구조를 취하며, 희극과 비극의 요소가 공존함.
● 참고자료
◆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라는 제목의 상징적 의미
* '살아 있는' →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인물의 이중적 행태, 살아 있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는 조롱의 효과, 지키려 했던 재산도 잃고 자식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등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반어적 의미 등을 나타낸다.
* '이중생' → 인물의 '이중생'을 드러내고자 한 이름, 두 개의 생(生)이란 뜻으로 두 번 죽는 사람 혹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 행세를 해야 하는 인물의 상황을 반영한다.
* 각하 → 붙일 필요 없는 높임의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인물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의도를 내포한다.
◆ 무대 장치
이 작품의 무대 장치는 일본식과 한국식이 절충된 가옥으로 해방 이후에 쉽게 볼 수 있던 형태이다. 특히 이중생의 집은 정원이 있는 등 호화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화려한 가옥의 모습은 격조 없는 집안 분위기와 대비를 이룬다. 또한 이러한 무대 설정은 사건이 진행되는 시기가 광복 직후라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는 한편 작품의 시사성, 세태 풍자적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일본식이 가미된 가옥의 모습을 통해 해방이 되었음에도 친일 세력이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득세하고 있던 시대 상황을 암시하며, 그러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시사성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광복 이후의 시대상을 선명하게 반영한 사회 풍자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이 쓰인 당시 친일 잔재의 청산 문제는 가장 큰 사회적 쟁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은 많지 않았다. 오영진은 드물게 이중생이라는 친일파 경제 사범을 극의 소재로 삼아 통렬한 고발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징병에서 돌아온 하식이 보고 온 실상을 이중생에게 전하는 대사를 통해, 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되고 잇으며 그것이 민족의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이 시사성이 강한 작품이라는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다.
◆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와 시나리오 '인생 차압'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1958년에 시나리오 '인생 차입'으로 각색되어 영화로 상영된 바 있다. 희곡의 배경은 광복 직후이고, 시나리오의 배경은 6 · 25 전쟁 이후 5년이 경과한 때이다. 따라서 희곡에서 중요하게 다룬 광복 직후의 혼돈 상황, 친일파 청산에 대한 언급은 시나리오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희곡이 시대 변화 속에서 이중생의 운명을 추적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면, 시나리오는 하연과 임표운의 사랑 이야기 같은 대중적인 주제를 부각하고 있으며, 희곡에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하연, 임표운, 하식, 송달지 같은 젊은이들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리면서 젊은이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희곡의 결말이 이중생의 진짜 죽음으로 비극적으로 처리된 반면, 시나리오는 이중생이 자신의 가까 상여가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으로 끝나면서 희극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차이점이다.
◆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작품 배경 및 주제의식
오영진의 첫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1949년에 쓰인 사회 풍자 희극이다. 이러한 세태 풍자적 주제는 그가 민속 3부작을 계획했던 일제말 당시만 해도 민족주의자로서의 울분을 감내하면서 차마 다루지 못한 주제였다. 그가 '그 누구를 위해서' 영화를 선택했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고, 그 후 희곡을 썼는데, 결국 그가 의도하는 바가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의 승리를 거두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적으로 전통 정신의 현대적 계승과 전통 생활미의 현현을 목표로 삼고 잔재한 봉건적 사고를 비판 풍자하고 선(善) 지향의 삶을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이 환희와 희망의 기대만큼 자유스럽게 되고, 또 새로운 조국으로 건설되고 발전되리라 믿었던 그가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 분열과 친일 잔도들의 배신적 이중성에 사회 질서가 혼란되어 감을 보고 아픔을 느꼈으며, 이러한 시대적 현상을 작품으로 풍자했던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해방이 된 후에도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이 애국 자연하는 친일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반민족적 생태를 파헤치고 있다. 그래서 유영민은 이 작품에 대한 논평에서 '친일파 잔도들의 폐부를 찌르는 사회 풍자극으로서 해방과 함께 소각되어야 할 반민사의 전면에서 날뛰고 있는 사회상을 비판한 것'이라 했다.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시했으며, 오영진의 사상적 배경 및 창작 의도와 방향을 확실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당시 극단 신협에서 공연된 후에 이춘인은 다음과 같이 연극을 평했다.
"오영진 씨가 가지고 있는 유머와 풍자는 그의 전작들에 있어서 이미 정평이 있거니와 금번 신희곡 속에 담겨 있는 풍자 또한 지금 대두되다가 흐려져 가는 반민자들의 교활하고도 가증스러운 발악 양상을 정면으로 날카롭게 찌르는 대신, 오영진 씨의 독특한 유머로 반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민족을 배반한 자들의 교활하고도 가증스러운 발악 양상을 정면으로 공격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략> 또한,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나라를 속이구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과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이라면 나라를 팔아 먹으려는 새로운 세력과 새롭게 대두된 권력과 독재자가 있는 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미래 지향적인 국민 자세를 암시해 주고 있다.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주인공을 통하여 해방을 전후한 격동기를 리얼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작자의 의지가 작품 속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적 역량이 민족사 전면에 재림하고 있는 병든 사회상을 풍자 고발한 것이 주제이다.
-한옥근, '우천(又川)의 작품론'에서
● 대본 읽기
<전략> 전막(前幕)에서 3, 4일 후 저녁. 같은 장소.(이중생의 집) 다다미방에는 거꾸로 둘러친 병풍 한끝이 보인다. 향연이 피어오르고 북소리와 함께 맹인들의 독경(讀經) 소리가 높으락낮으락 들려온다. 경(經)은 우리들이 일상 레코드로 들어오던 저 경쾌하고도 유머러스한 축원경(祝願經)이다.(초상집답지 않은 반어적 상황①) 바깥 사랑과 후원 정자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도무지 초상집답지 않다.(초상집답지 않은 반어적 상황②) 막이 열리면 굴건제복(屈巾祭服, 상중에 있는 상주가 입는 옷. 굴건이란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을 말하며, 제복은 상복을 가리킴)을 한 상주 송달지가 혼자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초상집답지 않은 반어적 상황③) 동리 부인 박 씨, 우 씨와 함께 안에서 나온다. 박 씨는 무엇인지 가득 넣은 이남박(안쪽에 여러 줄로 고랑이 지게 돌려 파서 만든 함지박. 쌀 따위를 씻어 일 때 돌과 모래를 가라앉게 함)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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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 |
그럼 형님, 집엣것들 저녁상이나 차려 주군 곧 오리다. 집에서들은 명일(기일)날이나 온 줄 알겠군. 호호 ……. (다다미방을 들여다보고) 그저, 세상 떠난 분 하나 불쌍하지. 조곰만 참으셨던들 아드님두 만나실 걸. 그래두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지. 돌아가신 아버님이라두 한번 보라구(하식이 곧 집에 돌아올 것임을 알림) 장례 전으로 들어스게 되니 이게 하느님 인도가 아니구 뭐유? 에그, 저 사위 양반은 얼마나 고단하길래 저렇게 앉은 채 꾸벅꾸벅 졸구 있을까? |
우 씨 | 그럼 곧 다녀와요. 난 아우님 없인 못 살어.(박 씨에 대한 신뢰) 내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
박 씨 |
에그, 형님두, 그런 말 허실 테면 난 아주 발길 안 하겠수. (왼쪽으로 퇴장. 우 씨, 방으로 올라가서 송을 깨운다.) |
송달지 | 어? 어……. 경 읽는 소리가 맹랑한데. 슬그머니 졸음이 오니. |
우 씨 |
어젯밤도 늘어지게 자구 그렇게도 졸릴까. 정신 채리구 있어. 오늘은 관청 손님이 조사 나온다는데.(우 씨는 위법 혐의가 있던 이중생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관청 손님들이 와서 행여 남편이 거짓으로 죽은 척하는 것을 들킬까 봐 걱정하고 있다. 온 가족이 이중생이 벌이는 거짓 초상에 협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송달지 | 어이, 졸려. 하식이 아직 도착 안 했어요? |
우 씨 |
하식이야 하연이(이중생의 차녀)가 마중 나갔으니 곧 들어슬 테지만, 관청 손님들이 걱정이군 그래. 말썽이나 없을는지, 온. 정신 채리구 있다가 손님들 오시걸랑 지체 말고 알려요. 술상 준빈 다 됐으니. (오른쪽으로 퇴장. 송, 자기 입은 의복을 둘러보고 하품.(상황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심리가 담긴 행동이다. 거짓 초상의 상주 역할을 하는 것이 지겨우며, 또한 상복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심리가 드러나고 있다.) 이중건, 김 주사, 변 주사, 홍 주사와 함께 후원에서 나온다. 다들 만취했다.) |
이중생, 병풍 위로 목만 내놓고 끼웃끼웃 살피더니 슬그머니 미끄러져 나온다. 수의에 행건 친 차림이 과연 초현실적이다.(풍자적인 서술) | |
이중건 | 너, 여기가 어디라구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
송달지 | 손님들이 많으신데! 어쩌실려구……. |
이중생 |
형님, 웬 손님들이 사랑에두 방 방이구, 정자에두 있구, 이러시는 거요? 무슨 잔칫집인 줄 아십니까? 누구 쌀을 축내시느라구.(이중생이 형 이중건의 손님 접대가 지나치다며 면박을 주고 있는 장면이다. 자기 초상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쌀을 축낸다고 표현하는 데서 인물의 옹졸함이 드러난다.) |
이중건 | 삼촌 댁부터 십이춘, 사둔의 팔춘, 집안이란 집안은 콩나물 대가리꺼정 다 모였구나. |
이중생 | 관청에선 아무도 안 왔지? |
송달지 | 아직 아무도 ……. |
이중생 |
예끼, 고약한 놈들! 올 놈들(살아 있을 때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은 아니 오고……. 엥이, 제 아무리 인정이 백지장 같기루 내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구도 한 놈 얼씬 않는다? 어디 두고 봐라. 엊그제꺼정두 내 앞에서 알쫑거리구 꼬리를 쳤던 놈들이 오늘에 와서는 딱 돌아선다?(염량세태) 인젠 알아볼 때가 있으렷다. 내가 다시 살아나구 볼 지경이면 ……. 에익, 괘씸한지고. 하식이두 아직 안 들어오구? |
송달지 | 네, 하연이가 마중 나갔습니다만. |
이중생 |
하식이에게두 전후사(온 가족이 함께 이중생의 거짓 초상을 치르고 있는 것)를 잘 타일러 두게. 탈짐(일이 잘못 되어 일어나는 사고나 변고)이 나지 않게.(징용에서 살아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아들 때문에 거짓 초상이 발각될까 염려하는 이중생의 비정한 면모가 드러남.) |
[중간 부분 줄거리] : 국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김 의원이 이중생의 집에 온다. 김 의원은 이중생의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다가 이중생의 재산을 보건 시설을 만드는 데 쓰자고 제안한다. | |
송달지 |
(의외로 흥분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의사 공부를 시작한 것두 그런 의미에서 한 것이죠. 의사란 상업이 아닙니다.(내성적인 성격으로, 이중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송달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김 의원의 제안에 힘을 실어 주게 되면서 재산을 보전하려던 이중생의 계획을 틀어지게 하고 있다.) |
김 의원 |
잘 알겠습니다. 판결 결과가 이렇다 저렇다 경솔히 말할 수 없으나, 송 선생의 생각을 관계 당국에 보고해서 고인의 재산을랑 특별히 이 방면에 쓰시게 하시죠?(김 의원은 이중생의 자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회에서 온 인물이며, 최 변호사는 이중생의 고문 변호사로 이중생의 재산을 지켜내야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김 의원이 이중생의 재산으로 보건 시설을 짓는 것을 제안하게 되면서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중생 곤두박질한다.)(이중생의 좌절) |
최 변호사 |
고, 고인의 재산을 어데다 서요? 헤헤……. 아, 아니올시다. 고인의 생각을 그렇잖습니다. 좀 더 찬찬히 의논해 가지구설랑 결정허시지……. 헤헤!(변호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김 의원의 기분을 맞추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중생의 재산이 갑자기 보건 시설 설립에 쓰이도록 결정되려고 하자 당황한 최 변호사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
김 의원 | 그야 물론 당국에서 가부간 집행할 일이지 여기서 결정지을 성질의 것이 아니죠. |
최 변호사 | 아, 아니올시다. 그런 의미가 아니구 고인의 가족, 이를 테면 고인의 마누라……, 그러니까 바루 여기 앉은 상속인의 송 선생의 장모두 계시구, 그의 딸, 다시 말할 것 같으면 송 선생의 부인두 있구, 아들두 있구, 안 그렇습니까? 그 가족들의 생각두 알아봐야죠. 그렇게 됐지 아마, 송 선생?(송달지도 동조하라는 의도) |
송달지 | 네, 제 의견만으룬…….(우유부단한 성격) |
최 변호사 | 암 그렇구말구. 가족의 의사두 참작해야지. |
김 의원 | 잘 아실 분이 일부러 오해하시는 것 같구만요. 사기, 배임, 공금 횡령, 탈세, 공문서 위조 등을 법적으로 청산하면 고인에게는 아무런 재산두 남지 않는 것을 잘 아실 텐데……. |
최 변호사 | 그렇겠지만 개인 재산이야 침해할 수 없잖아요? 더욱이 이 양반에게 양도된 이상……. |
김 의원 |
그렇기에 우리는 이중생 자신이 이미 자기의 죄를 자각하고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였으므로 고인의 소유였던 재산을 법적으로 처리하기 전에 우선 상속자인 송 선생의 의견을 참고하겠다는 게 아닙니까? 만일, 가족 가운데 불만이 계시면 자기 죄과를 자인하고 입증하는 고인의 유설랑은 없애 버리구 이중생을 다시 살려 내 가지구 상속자인 송달지 씨를 걸어 고소라두 하시죠.(이중생을 법대로 처벌하겠다는 김 의원의 단호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중생은 상황을 역전시키려면 자신의 자살을 번복해야 하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
이중생, 옆방에서 "그럴 법이!" 하고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송과 최, 어쩔 줄을 모른다. | |
<중략> | |
이중생 |
(두 팔을 휘두르고 두 발을 궁그르며)(분노의 표현) 달지! 자네는 누구의 허락을 받었길래 독단적 행동을 헌단 말야, 응? 누가 자네더러 무료 병원 세워 달랬어, 응? 대답 좀 해봐. 나는, 그래 무료 병원 세울 줄 몰라서 이 지경인 줄 아나? 내가 뭐랬어? 유산이니 재산 문제는 일체 함구불언하라구……. 자네, 그래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 집안을 망치는 게야, 응? 천치면 천치처럼 말 챙견이나 말 것이지, 뭐이 어쩌구 어째? "내 의견은 그렇습니다만……?" 의견이 무슨 당찮은 의견이란 말야? 내 재산, 내 돈 가지구 왜 염치없이 제 의견을 말해……, 응? 의견이 또 도대체 자네 같은 위인에게 무슨 의견이야. 일껀 의견이랍시구 내세운 게 장인 재산 물에 타 버리는 종합 병원? 예끼,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어디서 배운 의견이야? 자넨 살아 있는, 아니 죽어 있는! 아아, 아니 살아 있는 이중생…….(욕심 때문에 살아 있다고도 죽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중생을 풍자하고 있다) 죽어 있는 이중생의 재산 관리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걸 왜 몰라, 응? 이 천치! 어서 없어져!(이 글의 등장 인물은 나이, 성별, 직업 등으로 구분되는 사회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사회 집단의 언어를 바탕으로 개성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최 변호사와 김 의원은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법조계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비속어를 사용하며 사위 송달지를 비난하는 이중생의 대사에서는 인물의 천박한 인품이 드러나고 있다.) (달지 묵묵히 일어난다) 어딜가? 않어 있지 못허구. 그래 어떡헐 셈인가, 응? 나는 그래 어떡허면 좋단 말야. 이 집은, 토지는, 현금은 어떡허란 말이야. 그래, 자네 의견대루 배라먹을 무료 병원에 내놓으란 말인가? 어디 의견 좀 말해 보겠나, 응? 이 재산이, 내 재산이 어떤 건 줄이나 알구 그래? 이 사람, 왜 말이 없어? 일 처리 그렇게 잘하니 끝을 맺어야지. |
최 변호사 | 영감, 그만 두십쇼. 또 좋은 방법이 서겠죠. 철머리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걸.(책임을 회피하는 최 변호사) |
이중생 | (최에게) 뭣이 어쩌고 어째? 그래 자넨 철머리가 있어서 일껀 맹글어 논 게 이 모양인가? |
최 변호사 | 고정하십쇼. 저보구꺼정 왜 야단이슈? |
이중생 |
자네가 뭘 잘 했길래 왜 날더러 죽으라고 해. 응? (면도칼을 휘두르며 : 긴장감의 고조) 여보! 최 변호사. 내가 뭘 잘못 했길래 이걸로 목 따는 시늉까지 하고 사흘 닷새를 두고 이 고생 이 망신을 시키는 거냐아! 유서는 왜 쓰라고 했어! 내 재산을 몰수하는 증거가 되라구? 고문 변호사라고 믿어 온 보람이 이래야만 옳단 말야? 이 일을 다 망쳐 버린 게 다 누구 탓이야! 응? 유서는, 저 사람에게 책 잡힐 유서는 왜 쓰랬어. 왜 내 입으로 발명 한 마디 못하게 죽여 놨냐 말야. 나를 왜 죽여! 이 이중생을 ……. |
최 변호사 | 영감, 왜 노망이슈? 누가 당신 서사구 머슴인 줄 아슈? 누구게 욕설이구 누구게 패담이야? |
이중생 |
에끼, 적반하장두 유만부동이지. 배라먹을 놈 같으니라구! 은혜도 정리두 몰라 보구. 살구두 죽은 송장을 맨들어 말 한 마디 못하구 송두리째 재산을 빼앗기게 해야 옳단 말인가! |
최 변호사 |
허헛……. 영감, 말씀 좀 삼가시죠. 영감 가정 일은 가정 일이구, 내게 내줄 것이나 깨끗이 셈을 하십쇼. 영감 사위께 내 수수료를 청구하리이까?(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이고 교활한 모습) |
임표운 | 최 선생, 오늘은 어서 그냥 돌아가세요. |
최 변호사 | 왜? 나만 못난이 노릇을 하란 말인가? 영감이 환장을 해두 분수가 있지. 내게다 욕지거리라니. 당찮은 짓 아닌가 말일세. 임군! |
이중생 | (벌벌 떨며) 애끼! 사기꾼 같으니라구, 아직두! |
최 변호사 | 사기꾼? 영감은 무엇이구 응. 영감은 뭐야! |
독경 소리 처량히 들려온다. 일동 무거운 침묵과 긴장한 공기 가운데 싸였다. 용석 아범은 륙색(배낭)을 들고 등장 | |
용석 아범 |
영감 마님, 도련님이 돌아오십니다, 도련님이. 이런 경사로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어서 좀 나가 보십쇼. (달지, 방에서 뛰쳐 내려와 왼쪽에서 등장하는 하연, 하식과 만난다) |
송달지 | 오! 하식이! |
하식 | 형님……. 아버지! |
임표운 | 하식 씨. |
하식 | 임 선생. |
최 변호사 |
영감. 내일 사무원해서 청구서를 보내 드릴 테니 잘 생각허슈. 괜히 그러시단 서루 좋지 않지! 살구두 죽은 척하는 죄는……. 헛헛 참. 이건 무슨 죄에 해당하누? 형법인가, 민법인가? (퇴장) |
이중생 | 하식아! |
하식 | (비로소 아버지 의상을 보고) 아버지, 이게 웬 일이십니까? |
이중생 | 하식아, 네가 살아 왔구나. 네가……. (오른쪽으로부터 우씨, 하주, 옥순 등장) |
우 씨 | 에그, 네가 웬 일이냐. (운다) |
하주 | 하식아! |
하식 | 어머니, 누나. 잘 있었수? |
우 씨 | 에그…… 네가 살아돌아 올 줄이야……. |
하주 | 얼마나 고생했니? 자, 어서 들어가자……. 아버진 나와 계셔두 괜찮수? |
이중생 |
다 틀렸다, 틀렸어! 네 남편 놈 때문에 다 뺏기구 말았어. 네 남편 놈이 내 돈으로 종합병원을 세우고 싶다고 했어. |
하주 | 네? |
이중생 |
하식아, 최가 놈의 말을 들었지? 내가 죽어서라두 집 재산이나마 보전하려던 게 아니냐. 그런 걸, 에끼. (달지에게) 내가 글쎄 자네에게 뭐랬던가, 응? 나는 무료 병원 세울 줄 몰라 자네 내세웠나? 자네만 못해 죽은 형지(모습)꺼정 하는 줄 아나? 하식아, 글쎄. 그놈들이 아주 나를 모리꾼, 사기 횡령으로 몰아내는구나. 그러니 죽은 형지라도 해야만 집 한 칸이라도 지켜낼 줄 알았구나. 왜 푼푼이 모아 대대로 물려 오던 재산을 그놈들에게 덜꺼덕 내주냐 말이다. 왜 뺏기느냐 말이다. 그래 갖은 궁리를 다 했는 게 이 꼴이 됐구나. 에이, 갈아먹어두 션치 않은 놈! 최 변호사 그 놈두 그저 한몫 볼 생각었지. 하식아, 인제 집엔 돈도 없구 아무것두 없는 벌거숭이다. 내겐 소송할 데두 없구, 말 한 마디 헐 수도 없게 됐구나. (흐느낀다) 네 매부놈이 다 후려먹었다. 저놈들이 우리 살림을 뒤집어 엎었어! 하식아. |
하식 | 아버지! |
이중생 | 오냐, 하식아. |
하식 | 제가 하식인 걸 아시겠습니까? 제 얘긴 하나도 묻지 않으십니까? |
이중생 | 오, 참! 그래 얼마나 고생했니? |
하식 |
일본놈들한테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우리나라가 독립된 줄도 모르고 화태에서 십 년이나 고역을 치르고 돌아온 하식이올시다. 화태에서는 아직도 아버지 같은 사람(친일파)이 떠밀다시피 보낸 젊은이와 북한에서 잡혀온 수많은 동포가 무지막지한 소련놈 밑에서 강제 노동을 허구 있어요. |
하주 | (달지에게) 여보, 당신은 뭣이 잘났다고 챙견했수? |
송달지 |
누가 하겠다는 걸 시켜 놓고 이래? 이런 탈바가지를 억지로 씌워 논 건 누군데? (상복을 벗어 내동댕이 친다) |
하주 | 누가 당신더러 무료병원 이얘기 하랬수? |
송달지 |
하면 어때? 난 의견두 없구 생각두 없는 천치 짐승이란 말야? 난 제 이름 가지고 살 줄 모르는 인간이구? 왜 사람을 가지고 볶으는 거야?(성격이 변하는 송달지-입체적 인물) |
하주 | 그러구두 잘 했다고 되려 야단이야. 우리집 망치구 뭣이 부족해서. 천치! |
하식 | 누님! |
하주 | 천치지 뭐야. 바본 바본 척 입이나 다물구 있으문 좋지 않어! |
송달지 | (하주의 뺨을 갈기며) 이것이? |
하연 | 어마, 형부가! |
송달지 |
하식이. 내가 왜 자네 집 재산을 물에 타 버리겠나. 재산두 귀하구 아버님의 명예와 지위두 소중하지만 어떻게 나라를 속이구 법을 어긴단 말인가. 옳다구 생각하는 처사를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까지 해서야 되겠나 말일세. 아버지 일만 해두 한 사람의 욕심과 주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젠가? 더구나 나 같은 위인이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구 묘한 꾀를 부리겠나? 또 아무리 내 장인래두 그럴 필요가 어딨겠나? 나는 구변이 없어 말을 잘 못하네만. 하여튼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떠들 때도 아니구. 장차라두 어떤 세력을 믿구 저 혼자의 이익을 위하여 날뛰어서는 안 될 게 아닌가? 그 사람들은 좋겠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말이지. 하식이, 자넨 내가 장인을 두호허지 않는다구 나를 미워할 텐가. 그렇다고 장인을 고발할 수도 없는 놈이지만. 하식이, 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잘못이 있거들랑 기탄없이 일러주게나. 광대같이 상복을 입구 꾸벅꾸벅 조을 수 있는 내 신세가 가련허구두 미련하지? |
하식 | 형님, 고정하십쇼. 잘 알겠어요. 아버지 시대는 이미 지났어. 형님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가지구 번민할 게 뭐 있수. 형님, 우리 앞엔 우리를 새로운 권력과 독재자에게 팔아먹으려는 원수가 있어요. 나는 골고루 보고 왔어요. 할빈. 장춘. 홍남. 그러군 화태! 어, 몸서리가 칩니다. 형님, 우리나라가 독립된 줄도 모르고 있는 친구들……. 어서 들어 들어갑시다. 할 이얘기가 산더미같이 쌓였어요. 집안 일은, 아버지 일은 순리대로 돼 나갈 테죠. |
우 씨 | (중생에게) 여보, 당신은 어떻게 할 테유? (우씨와 하주도 망설이다가 들어간다. 사이. 이중생 묵념) |
이중생 | 하식아. |
하식 | ……네? |
이중생 | 나는 어쩌란 말이냐? 네 애빈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
하식 | 아버지. 어서 그 구차스러운 수의를 벗어십쇼. 창피하지 않아요? |
하식 퇴장. 무대에서는 이중생 혼자 넋 잃은 사람처럼 서 있다. 독경 소리가 커진다. 후원에서는 "아범, 아범! 아까부터 술상 봐오라는데 뭣하고 있어!" 하는 중건의 소리와 지껄이는 조객의 소리. 박씨, 혼자 중얼거리며 왼쪽으로부터 등장 | |
박 씨 |
내가 뭐라구 했수. 형님은 참 유복두 하시지. 자기 아버지 장사 전에 생사조차 모르던 아드님이 돌아오셨다니. 천우신조로 하느님이 인도하셨지. |
이중생 |
귀신? 헛헛! 그럼 내게는 집두 없구 돈도 없구 자식두 없구…… 벗지 못할 수의 밖엔 아무것도 없는 귀신이란 말이냐. 하식아……. (이윽고 후면으로 사라진다. 독경 소리와 달빛이 처량하다. 무대는 잠시 비었다.) |
용석 아범 |
(술상을 들고 후원으로 가며) 용석이가 우리나라 광복군으로 가다가 일본놈들한테 맞아 죽었다구……. 그럴 테지. 그래야지. 용석아, 잘했다 잘했어. 도련님이 인젠 제 대신 날 돌보아 주시구. 네 몫까지 나랏일을 하신다는구나. 용석아 ……. 그래야 허지. 우리들 늙은 것들은 다아 죽어두 좋아. 암, 어서 죽어야지. 서방님이나 도련님 같은 분들이 씩씩허게 일해야지. 헛. 우리들이야 뭐 관속에 한발 들여 놓은 송장들인 걸. 헛헛 ……. (후원으로 가자마자 '악' 소리와 함께 "영감마님!", "영감마님!" 하며 아범 뒷걸음질쳐 나온다.) |
용석 아범 |
영감 마님. 영감 마님. 시첼 누가 널을 헤치고 뜰루 끌구 나왔어요. 마님. 아이구머니. 이런 흉변이 ……. (결국 이중생은 자살을 하였고, 용석 아범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음) |
술상을 땅에 떨어뜨린다. 전 가족이 놀라 뛰어나와 못에 박은 듯이 한 곳에 정립한다. 후원과 사랑에서도 중건이와 조객들이 뛰어나온다. 달빛은 유난히 밝고 독경 소리 점점 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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