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곡(莎堤曲)
박인로
어리고 졸한 몸이 영총이 이극하니
궁국진취하여 죽어야 말려 여겨
숙야비해하여 밤을 잊고 사탁한들
관솔에 켠 불로 일월명을 도울는가
시위반식을 몇해나 지내연고
늙고 병이 들어 해골을 빌리실새
한수 동 땅으로 방수심산하여
용진강 지내 올라 사제 안 돌아 드니
제일강산이 임자 없이 바려나다
평생몽상이 오래하여 그렇던지
수광산색이 옛낯을 다시 본 듯
무정한 산수도 유정하여 보이나다
백사정반에 낙하를 비끼 끼고
삼삼오오 섞이 노는 저 백구야
너다려 말 묻자 놀래지 말라사라
이 명구 승지를 어데라 들었던다
벽파가 양양하니 위수 이천 아닌게오
충만이 올올하니 부춘 기산 아닌게오
임심 노혹하니 희옹 운곡 아닌게오
천감토비하니 이원 반곡 아닌게오
배회사억하되 아무덴 줄 내 몰라타
애지청란은 청향이 욱욱하여 원근에 이어 있고
난간동계에 낙화가 가득 잠겼거늘
형극을 헤혀 들어 초옥 수간 지어 두고
학발을 뫼시고 종효를 하려 어겨
원거원처하니 차강산지 임자로다
삼공 불환 차강산을 오늘사 알았고야
어지러운 구로와 수 없은 미록을
내혼자 거느려 육축을 삼았거늘
각 없는 청풍명월은 절로 기물 되었으니
남과 다른 부귀는 이 한 몸에 갖었고야
이 부귀 가지고 저 부귀 부를소냐
부를 줄 모르거든 사괼 줄 알리던가
홍진도 멀어가니 세사를 듣볼소냐
화개엽락 아니면 어느 절을 알리던고
중은암 쇠북소리 속품에 섞여 날아 매창에 이르거든
오수를 갓깨어 병목을 열어 보니
밤비에 갓핀 가지 암향을 보내어 봄철을 알외나다
춘복을 처음 입고 여경이 더딘 저기
청려장 비끼 쥐고 동자 육칠 불러내어 속잎 난 잔디에
족용중케 흩걸어 청강에 발을 씻고
풍호강반하여 흥을 타고 돌아 오니
무雩영이귀를 적으나 부를쏘냐
춘흥이 이렇거든 추흥이라 적을런가
금풍이 슬슬하여 정반에 지내 부니
머괴잎 지는 소리 먹은 귀를 놀래나다
정치추풍을 중심에 더욱 반겨
낙대를 둘러 메고 홍료를 헤혀 들어
소정을 끌러 놓아 풍범낭즙으로 가는대로 더져두니
유하전탄하여 천수변에 오도고야
석양이 거인 적에 강풍이 짐즉 불어
귀범을 보내는 듯
아득던 전산도 홀후산에 보이나다
수유 우화하여 연엽주에 올랐는 듯
동파 적벽유인들 이내 흥에 어찌 더며
장한 강동거인들 오늘 경에 미칠는가
거수에 이렇거든 거산이라 우연하랴
산방에 추만커늘 유희를 둘 데 없어
운길산 돌길에 막대 집고 쉬어 올라
임의 소요하며 원학을 벗을 삼아
교송을 비기어 사우로 돌아 보니
천공이 공교하여 묏빛을 꾸미는가
흰 구름 맑은 내는 편편이 떠서 날라
높으락 낮으락 봉봉곡곡이 면면에 버렸거든
서리친 신나무 봄꽃도곤 붉었으니
금수병풍을 첩첩이 둘렀는 듯
천태만상이 참람하여 보이나다
힘세이 다투면 내 분에 올까마는
금할이 없을 새 나도 두고 즐기노라
하물며 남산 나린 끝에 오곡을 갖춰 심어
먹고 못 남아도 긋지나 아니 하면
내 집의 내 밥이 그 맛이 어떠하뇨
채산소주하니 수륙풍도 잠간갖다
감지봉양을 족하다 할까마는
오조함정을 벱고야 말렸노라
사정이 이러하여 아직 물러 나왔은들
망극한 성은을 어느 각에 잊을런고
전마미성은 백수에야 더욱 깊다
시시로 머리 들어 북신을 바라보니
남모르는 눈물이 두 사매에 다 젖나다
이 눈물 보건댄 차마 물러 날까마는
가뜩한 부재에 병하나 짙어가고
훤당노친은 팔순이 거의거든
탕약을 그치며 정성을 비울런가
이제야 어느 사이 이 산밖에 날오소냐
허유의 씻은 귀에 노래자의 옷을 입고
앞 뫼에 저 솔이 푸른 쇠 되도록
함께 뫼셔 늙으리라
핵심정리
* 작자: 박인로(朴仁老:1561~1642)
* 연대: 조선 광해군 3년(1611)
* 갈래: 가사
* 운율: 3.4.조, 4.4조의 연속체
* 주제: 사제(莎堤)의 승경(勝景)과 이덕형의 유유자적함.
박인로
조선 중기의 무신. 시인(詩人). 본관 안동(安東). 자 덕옹(德翁). 호 노계(蘆溪), 무하옹(無何翁), 영천(永川) 출생. 승의부위(承議副尉) 석(碩)의 아들.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막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발탁으로 종군, 1598년 왜군(倭軍)이 퇴각하자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가사(歌辭)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 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군비(軍備)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애국심 ․자연애(自然愛)를 바탕으로 천재적 창작력을 발휘, 시정(詩情)과 우국(憂國)에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장가(長歌)로는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詩風)을 이룩하고 가사문학(歌辭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천의 도계향사(道溪鄕祠)에 제향되었다. 문집(文集)에 <노계집(蘆溪集)>,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해설
사제(莎堤)는 용진(龍津)에 있는 이덕형의 휴양처이다. 작자가 ‘사제’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덕형의 소요자적(逍遙自適)하는 모습을 읊은 것으로 이덕형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내용은 이덕형이 임금의 영총을 지극히 받아 성은에 감격하여 진력하다가, 늙고 병이 들어 관직을 사퇴하고 광주(廣州) 용진강 동쪽의 사제로 돌아왔음을 읊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옛날 보던 제일강산이 임자 없이 버려져 있어 이제야 주인을 만난 듯함을 춘흥과 추흥을 통하여 노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망극한 성은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임금을 그리는 정과 어버이를 받들고자 하는 심정을 간절히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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