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연방공화국 제4대 연방총리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Bundesarchiv B 1...
출생
1913년 12월 18일
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뤼베크
사망
1992년 10월 8일 (향년 78세)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팔츠 주 운켈
정당
사회민주당
재임기간
제4대 연방총리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정치인.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냈다.
독일연방공화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정을 통해 원내 제1당 당수를 제치고 총리로 등극한 사례가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동독, 소련,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동방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사생아로 태어나 편모 슬하에서 가난한 외가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가게 점원이었고, 외할아버지는 노동자였다.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는데, 사생아였기에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어 외할아버지의 성인 프람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도 사생아 출신이고, 외할아버지조차 어머니의 친부가 아닌 계부였던 관계로 프람이라는 성은 그와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성이었다. 1948년 독일 국적을 재취득할 때 망명 중에 썼던 가명 중 하나인 '빌리 브란트'로 아예 개명했다.
사회주의 활동
10대 시절인 1929년 청년당원을 거쳐 1930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정식 입당했다. 1930년대 초반 독일 정치계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극심했다. 이틈을 이용해 공산당 타도를 외치던 나치당이 세를 불렸고, 정국 혼란을 이용하여 1933년 정권을 잡았다. 직후 나치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브란트는 1933년부터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 사민당의 청년 분과로서 국제 혁명 청년국(IBRYO, International Bureau of Revolutionary Youth Organizations)을 창설했고, 브란트는 이 조직의 서기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창설했으나 네덜란드 경찰에 의해 해체되어 일부 대표들이 독일로 넘겨졌다.
브란트는 1933년 1월 노르웨이로 도피하여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가 이끌던 IBRYO 역시 네덜란드에서 해체된 후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점으로 재건했다. 그는 노르웨이식 이름인 군나르 가슬란드라는 가명을 사용에 독일과 노르웨이, 스웨덴을 오가며 활동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서방 각국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자는 운동이 일었는데, 브란트는 이때 군인으로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기자로 스페인 내전에서 취재를 하였다. 1938년 나치 독일은 그의 독일 국적을 박탈했으며, 그는 노르웨이 국적을 신청했으나 1940년에야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무국적자였다.
하지만 1940년 독일국방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게 했고,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노르웨이군 군복을 입고 있었고, 독일은 그를 노르웨이군으로 파악했고, 그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혹은 빌리 브란트)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노르웨이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곧 독일군은 그를 풀어주었다. 사실 당시 그의 노르웨이어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노르웨이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아 넘어갔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당시의 활동으로 인해 추후 정치계에 입문한 후에도 독일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나치 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은게 아니라 노르웨이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했다는 의심. 실제로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독일 점령군에 대한 정보를 연합국에 제공했다는 사실이 그의 사후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어쨌거나 조국을 위해 전쟁에서 목숨바쳐 싸운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족과 나라에 대한 배신과 다를 바 없다 인식될 수 있었다. 정계 입문 초반 이런 의혹이 제기되자 브란트는 도망치는 도중에 노르웨이군으로 신분을 속였을 뿐이지 진짜 노르웨이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하진 않았다고 변명해야 했다. 이런 변명은 독일에 위치한 빌리 브란트 기념관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나치와 싸운 독일인은 여전히 스스로를 배신자가 아니라고 변호한다는 것.
여튼 독일군에게서 풀려난 후 그는 스웨덴으로 달아났으며, 그는 스웨덴어를 열심히 연습하면서 스웨덴에서 반나치,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곧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동시에 추방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스웨덴 스톨홀름 등을 기반으로 독일과 노르웨이 등을 오가며 사회주의 활동을 이어나갔고 차차 전쟁이 나치의 패전으로 기울면서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정계 진출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그는 노르웨이 정부 관계자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왔다. 1948년 사민당에 정식으로 재가입했고, 얼마 후 가명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본명으로 하여 독일 국적을 회복했다.
훗날인 2021년 그가 1948∼1952년 미국 방첩부대(CIC)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1949년 서독 총선에서 서베를린의 사민당 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1957년 서베를린 시장이 되었다. 서베를린의 유력 정치인으로서 그는 당시 집권 기민련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이 강대강 전략을 구사한다고 비난하며 소련 및 동독과의 긴장 완화를 주장했다. 그는 먼저 서독과 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베를린에서 위기는 심화되었고, 급기야 1961년 동독과 소련은 불시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며 베를린에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그동안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 완화를 주장해 왔던 그에게는 정치적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미국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시기는 하필 서독 총선 직전이었는데, 당시 브란트는 사민당의 대표 겸 총리 후보로 선거에 나선 상황이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직후 언론들은 브란트의 사민당이 참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베를린 위기 상황에서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의 중심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으며, 노회하고 인기가 전같지 않았던 아데나워가 이끄는 CDU/CSU는 관심에서 소외되어 갔다.
게다가 소련과 직접 대화하겠다 주장하면서도 미국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양다리 전술을 구사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동준서주하는 모습이 연일 언론에 집중 조명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빌리 브란트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몰랐던 서독 국민들도 이때 본격적으로 브란트의 연설을 접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선거 초기 사민당의 총선 패배가 예측되자 온건 중도좌파 성향 지지자들이 대거 결집하였고 이런 일련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사민당은 오히려 의석을 증가시켰다. 이후 사민당은 1962년 12월 19일의 슈피겔 스캔들[6]을 빌미로 과반에 미달하게 된 CDU/CSU의 대연정을 거부했고 다시 CDU/CSU-자민 연정이 성립되었다.
베를린 위기가 그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라는 초기의 전망과 달리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지지율의 반등을 경험한 브란트는 이후에 베를린 장벽 건설 때문에 동서베를린 간의 통행이 갑자기 전면 중단되면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동안 동독과 협상을 진행했고, 서독 중앙정부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에 와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연설을 하여 베를린 시민을 열광케 했고, 케네디 옆에 서있었던 브란트는 이 연설의 후광 효과를 제대로 입었다.[8] 이후 1963년 12월 결국 통행증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브란트의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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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는 1963년 에리히 올렌하워의 뒤를 잇는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바탕으로 당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며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년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련/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경제위기, 외교 노선 갈등[9] 등으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기민/기사련이 자유민주당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년 11월, 제1당 기민련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90.1%(447/496석)의 의석이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당초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소연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CDU/CSU와는 동방정책 공약을 두고 전격적으로 충돌한 전력이 있었고 또 선거 과정에서 브란트의 과거사를 공격한 구원이 있었고, 사민당과 자민당의 하원 의석만으로도 하원의 과반을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러나 사민당 원내대표 헤르베르트 베너의 강력한 설득과 함께 자민당 에리히 멘데 대표 역시 사민당과의 연정에 미온적 태도로 나오면서 결국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꿔 대연정을 수락했다.
제1당 기민련의 키징어 총재가 총리를 맡고, 제2당 사민당에서는 빌리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포함해서 총 9명의 장관이 내각에 참여하였다. 사민당 역시 연정 참여로 수권정당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쌓게 되었다.
외무장관으로서 브란트는 자신의 안보 참모인 에곤 바를 정책기획국장에 임명하는 등 동방정책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하려 했다. 동방정책 추진은 대연정 당시 브란트가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브란트는 구체적으로 소련과의 상호 무력 사용 포기 협정,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 조정 협정을 추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교가 단절됐던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화하였다.
키징어 역시 처음에는 동서독 화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근본적으로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대연정은 무너진다.
연방총리 시절
1969년 9월 총선에서 CDU/CSU가 242석, 사민당이 224석, 자민당이 30석을 얻었다. 또 다시 야당에 머무르는 듯했으나, 브란트는 독일 자민당과의 연정을 성공시킴으로써 판을 뒤엎고 총리가 되었다.
키징어 정권 말기에 CDU/CSU와 사민당의 관계는 경색되어 있었다. 키징어와 자민당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키징어가 선거 기간에 "자민당을 의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라고 발언하는 식으로 도발을 일삼은데다가 독일식 비례제의 철폐를 핵심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지역구로 의원을 배출할 능력이 없어 비례제로 연명하던 자민당에게 키징어의 해당 공약은 재앙과도 같은 소리였다.
브란트는 이 틈을 이용해 자민당과의 연정을 성사시켰다. 총선 전에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발터 셸이 자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점도 브란트가 연정을 이루어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키징어가 뒤늦게 내각의 절반을 자민당에 내주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했음에도, 결국 CDU/CSU는 자민당과의 연정에 실패했다.
이렇게 빌리 브란트는 서독 수립 이래 최초의 사민당 출신 총리이자, 최초의 제2당 당수 출신 총리가 되었다. 다만 총리 인준이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자민당의 몇몇 의원들이 반란표를 때려서였다. 3표만 모자랐으면 브란트의 도전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키징어의 이같은 행보는 같은 중도 우파 표밭을 두고 경쟁하던 자민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그 표를 기민당/기사당 연합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겠지만, 상황은 얘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키징어는 전후 서독 역사에서 선거에서 이겼음에도 총리가 되지 못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브란트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광범위한 사회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기본적인 사회부조 제도를 대폭 강화했고,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와 대상을 확대했으며, 실업급여와 퇴직자 연금도 강화했다. 주택 문제에 대해서도 임차인의 권리를 강화하거나 주거 관련 지원금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거 늘렸는데, 기존에 160억 마르크 정도였던 예산을 500억 마르크까지 확대했고 일반 대중이 고등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크게 확장시켰다. 실제로 브란트의 취임을 전후해 대학생 수는 100,000명 수준에서 650,000명으로 늘었다. 고등교육뿐만 아니라 초·중등교육 및 직업교육에 대한 투자도 늘렸다. 브란트 집권 이후 사민당은 현대 독일의 이원적인 교육 체계를 만들고 정착시켰다. 또 학교를 증설, 보수하고, 교사의 질을 강화하는 등 교육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다.
대대적인 사회 투자가 이루어지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십상이었지만, 50년대부터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오던 서독 경제의 저력 덕분에 브란트 내각 시기에도 서독은 여타의 선진국들보다 비교적 낮은 인플레이션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비롯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상승해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감소했으며 빈곤률이 대폭 떨어졌다. 석유 파동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경제적 지표들도 나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는 콘라트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던 "동독과 수교를 맺은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했는데, 이는 때마침 미국 공화당 출신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데탕트(냉전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던 것과 맞아떨어지며 힘을 얻었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 교류를 확대하며 긴장관계를 완화하였다.
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맞아가며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에곤 바르는 브란트의 행동이 만용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것이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데다,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 와중에 추념비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총리가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 혹자는 당시 브란트의 파격적인 사과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그가, 이렇게 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브란트는 당시에는 보수우익을 포함한 많은 국민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자기 멋대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항목 참조할 것. 당시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소련 등에 의해 동방 영토를 강제로 상실한 것은 연합국의 일시적인 조치였으며, 동방 영토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독인들에게 통일은 동독은 물론,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서독에서는 한때 동방 영토에서 강제로 쫓겨난 실향민들이 정당을 구성하여 총선에서 수십석씩 차지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대해 거센 역풍이 있었고, 특히 실향민들에게 브란트는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온 고유한 영토를 개인의 영달과 1972 뮌헨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마음대로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졌을 정도이다.
또한 브란트 내각은 동독과의 관계 개선 및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추진했다. 당시 동독과 소련은 서독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국인 동독에 대해 경제 지원을 하려는 브란트 내각의 대외정책에 대해 보수 정당들은 반발했다.
야당인 기민당은 물론이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 내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 급기야 의회에서 불신임 결의를 받게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최초이자 유이한 불신임 투표가 치러졌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신임 투표에서 2표 차이로 극적으로 부결되면서 간신히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2표 차이로 간신히 불신임을 면했지만 이미 연정이 붕괴되어 내각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을 잃게 되어 향후 정권의 존립 당위성이 사라진 상태였다.
한편 당시 브란트의 불신임 투표에 1968년부터 서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던 소련은 발칵 뒤집어졌다. 1971년 정상회담을 통해 브란트에게 개인적 호감을 느끼기도 했던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브란트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유리 안드로포프는 독일 연방의회를 매수하는 계획까지 검토했다. 실제로 동독 슈타지는 브란트 불신임표를 차단하기 위해 기민련에 5만 마르크를 퍼붓기도 했다.
결국 브란트는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최초의 의회 해산을 실시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선거권이 21세에서 18세로 낮아진 1972년 11월 총선에서 동서독 기본조약 조인 여부 등 브란트 내각의 동방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속에 치러졌고 투표율이 무려 91.1%에 이르며 사상 최고치에 정도로 치열했다. 선거 결과 예상을 깨고 사민당은 지난 총선 때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얻었으며, 사상 최초로 CDU/CSU을 누르고 1당을 차지했다. 이런 민심의 지지를 확인한 기민련과 자민당 내 우파는 브란트에게 다시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다시 구성되었고 브란트는 총리로 재집권하게 되었다.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 브란트는 총선 직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체결 직후 브란트 정권은 당장 연내에 7억 마르크 가량의 차관을 동독에 제공했고, 이후 서독은 동독에 총 1,044억 마르크를 지원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있게 2기를 맞이하는듯 했지만 행복을 오래가지 않았다.
1973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서독 경제와 함께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오일쇼크가 발생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의외로 브란트 내각이 큰 공헌(?)을 했다. 1971년 5월 브란트가 이끄는 서독이 브레튼우즈 체제를 탈퇴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의 방아쇠를 당겼다.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 서독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탈퇴하자 세계는 충격에 빠졌고 공포에 휩싸인 유럽 각국은 미국으로 몰려가 금태환을 요구했다.
유럽 각국들이 금태환을 요구하며 아우성치자 결국 그해 8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되었고 세계 경제는 닉슨 쇼크라 불리는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달러 가치가 급격히 절하되자 달러를 사용하던 중동 산유국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유가를 대폭 상승시키자 오일쇼크가 야기된 것이었다.
사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60년대 내내 미국과 다른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샤를 드골이 계속 딴지를 걸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한 기민련 정부는 드골에 동조하지 않으며 브레튼우즈 체제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키징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 외교를 강조한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은 미국 달러화 기반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브레튼우즈 체제 탈퇴라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고 이는 결국 세계 경제의 큰 충격을 불러오는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
오일쇼크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은 수출 경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서독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서독은 기존의 성과를 뒤로 하고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사상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어야 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50~60년대의 고도 성장은 오일 쇼크를 계기로 완전히 끝났고 이후 서독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때마침 서독과 비슷하게 발빠른 성장 가도를 걷던 일본에 세계 경제 3위(제1세계 내 2위) 자리를 빼앗기는 충격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대책 및 동독 지원을 두고, 브란트 총리와 재무장관인 헬무트 슈미트가 마찰을 빚었다. 슈미트는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관료 출신이었고, 케인즈주의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당내에서도 강성파였던 브란트와 중도적 성향의 슈미트는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온건한 성격으로 유명한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과도한 동독 퍼주기라 여겨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당내 2인자로서 진영 논리에 입각해 브란트에게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15] 하지만 오일쇼크가 터지자 슈미트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정책을 강하게 주장하며 브란트와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슈미트는 경기 침체 완화를 위해 확장적 재정정책 실시와 수출 산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장했고, 브란트의 과도한 동독 경제 지원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동방 정책을 자신의 정치적 생명으로 여겼던 브란트는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 와중에도 원래 계획대로 동독에 대한 대규모 경제 지원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확장 재정을 통한 조기 경기 부양의 타이밍을 놓친 서독 경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은 커녕 더욱 상황이 악화되어 사상 최악의 불황으로 이어졌고, 그동안 5%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고속 성장을 이뤄왔던 서독 경제는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했다. 실업율은 증가했고 사민당의 지지율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기욤 간첩 사건과 성추문
1차 오일 쇼크의 충격이 여전하던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빌리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비서만 그랬을 뿐 브란트가 이에 관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크게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만 공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에는 브란트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브란트는 자신은 간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연방범죄청이 기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의 섹스 스캔들, 심한 음주 행각 등이 추가로 드러난 것. 귄터 기욤이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시로 브란트에게 매춘부를 공급했음이 밝혀졌다. 기욤은 브란트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에 순방을 나갔을 때나 선거 유세를 위해 지방을 순회할 때도 브란트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창녀들을 엄선해서 브란트의 호텔방이나 총리 전용 열차에 계속 공급했다.
이에 브란트의 소속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19]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란트에게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사임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취임 4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으로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후임 총리로는 예정대로 헬무트 슈미트 재무장관이 취임했다. 어쨌거나 섹스 스캔들이 언론에 본격 이슈화되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일반 독일 국민들은 그가 단지 기욤 간첩 사태 때문에 사퇴한 줄만 알고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총리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사민당 대표 자리는 사임하지 않았고, 무려 1987년까지 대표직을 유지했다.
퇴임 후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브란트는 포르투갈 정치에 개입하여 포루투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에 좌파 사회당 정권이 집권하도록 노력했고, 동시에 포르투갈 공산당에 명백히 반대하며 포르투갈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길 원했다.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즉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통일사회당의 김철 당수와도 인연이 있어서,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김철을 지원했다고 한다. 도쿄에서의 SI 대회에서는 김철의 귀국을 위해 일본사회당 의원들을 대동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1987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후 김대중은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꾸준히 올랐고, 마침내 2000년에 수상했다.
한편 같은 해, 드디어 공식적으로 사회민주당 대표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 명예대표직에 취임했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자, 서독 내 좌파 인사들 가운데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2국 연방제' 혹은 과도 정부 구성이 아닌 '신속한 재통일'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듬해 3월에는 동독을 직접 방문하여, 동독 정부 하에서 실시된 최초이자 유일의 자유 총선을 위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3일의 독일 재통일 선포식에 독일의 여러 정치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일화인데, 당시 그는 방한중이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와의 면담에서 김대중이 언제 독일이 통일되겠냐고 묻자 "먼 훗날" 이라고 답했는데, 몇시간 후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독일로 귀국했다고 한다.
1992년 10월 8일, 지병인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어록
"Unter der Last der jüngsten Geschichte tat ich, was Menschen tun, wenn die Worte versagen. So gedachte ich Millionen Ermordeter."
오늘의 역사의 무게 아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행하는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의 죽음을 나는 그렇게 기렸다.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에겐 외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특별한 관계"일 뿐입니다.
1969년 10월 28일, 정부의 정책 발표회 때.
우리는 신이 아니라 투표자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공헌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올해 여름에 신문을 다시 내려놨습니다. 베를린은 살아남을 것이며, 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시청에서. 그리고 장벽이 무너지고 1년뒤인 1990년 독일은 통일되었다.
사생아 출신으로 이 때문에 자주 인신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총리 인준 표결 당시 나타났던 몇몇 무효표에는 '프람은 절대 안됩니다.'라는 글귀도 있었는데, 사생아 출신인 그를 프람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비방이었다.
골초였다. 총리 재임 시절 주치의의 권고로 금연을 했는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심각하게 악화됐다. 브란트가 금연을 하던 시기에 그의 측근이자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는 내각 회의에서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브란트의 비서에게 '총리 각하가 힘들어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흡연을 했어야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보기와 다르게 울보였다. 선거에서 질 때마다 보좌관 앞에서 눈물을 쏟은 일이 잦았다고.
사생활이 상당히 추잡했다. 그의 총리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매춘부들과의 섹스 중독을 차치하고, 결혼 생활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 망명생활 중이던 1941년 노르웨이에서 안나 카를로타(Anna Carlotta)와 결혼했으나, 1948년에 이혼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노르웨이 여류 작가이자,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던 루트 한센(Rut Hansen)과 처음 만났다. 2년 후 루트의 남편이 죽자, 브란트는 안나와 이혼하고 루트와 재혼했다. 브란트가 총리직을 사임한 후, 루트는 섹스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위로해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1980년 브란트는 그때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했던 루트를 배신하고 총리 시절 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브리기테 제바허(Brigitte Seebacher)와 재혼했다. 루트는 죽을 때까지 브란트를 만나지 않았으며, 브란트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세번째 부인이었던 브리기테 제바허-브란트가 루트가 장례식 참석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