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는 우리 시조가 누구이며 어떻게 이 장소에 살게 됐는가를 살펴보는 가족사 문제가 된다.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한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가 지구를 정복한 호모 사피엔스 종의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범위를 더 확장해 갈 수도 있다.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종의 하나다. 우리를 생명체로 규정한다면 생명의 기원, 첫 세포의 출현에서 시작해서 어떤 진화과정을 거쳐서 인류를 포함한 다양한 생물종들이 등장했는지의 생명의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확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의 기원을 찾는다면 우주의 역사 속에서 원소의 기원과 별과 행성이 만들어지는 구조의 기원을 살펴야 한다. 과학에 근거한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무엇인가란 질문에도 철학적, 역사적, 종교적 관점을 넘어 과학의 관점이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란 무엇인지부터 살피기 위해 작은 범위의 우리, 어느 지역에서 어떤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집단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답은 그 집단의 역사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문자로 기록된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연구다. 이 정의에 의해 문자 기록의 유무에 따라 역사시대와 선사시대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문자 기록에만 의존하는 편협한 시각의 역사는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듯하다.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될 수 있다. 한편 과거의 사실들은 너무나 많다. 모든 과거의 사실들을 세세히 다 알 필요가 있을까? 많은 역사학자가 생각하는 역사는 대략 과거의 사실들 가운데 현재 우리 삶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역사적 사실들로 구성하여 만든 이야기로 정의가 된다. 이 정의에는 ‘가치’가 들어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치는 누군가의 판단에 좌우된다. 결국 역사에도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라 했고,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두 사람의 언급에도 역사는 주체가 있음이 드러난다.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예외가 있겠지만 대개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의 집단이다.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을 역사공동체라 한다. 신화, 종교와 더불어 역사는 공동체 의식 또는 집단기억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서사이다.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는 집단의 성격과 연결된다. 국가나 민족은 대표적인 역사공동체다. 국가나 민족이 역사의 주체가 되면 역사의 주요 이야기는 지배 세력의 담론과 정치사가 된다. 특정 계급이나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면 역사는 사회사와 문화사 위주가 된다. 역사의 주체가 동양과 서양의 구분 같이 거대한 지역이나 문명집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역사의 주체를 인류 전체로 잡는다면 역사의 초점은 무엇이 될까? 어떤 지역, 국가나 민족의 세세한 역사보다는 인류 전체가 어떻게 집단의 규모를 키워왔고, 어떻게 문명을 만들게 됐으며, 도시와 국가들이 어떻게 네트워크를 확장해왔는지 등이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역사의 주체를 인류뿐만 아니라 인류가 살아가는 환경까지 포함하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가치를 둘까? 그 이야기가 바로 빅 히스토리일 것이다.
빅 히스토리의 중심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역사공동체는 인류를 넘어 환경까지 확장했을 때 우리에게 가치 있는 과거의 이야기는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다. 빅 히스토리를 창시하고 이름을 붙인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기원’에 초점을 맞춰 빅 히스토리를 현대적인 기원 이야기로 정의했다. 빅 히스토리의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빅히스토리협회는 우주, 지구, 생명, 인류의 역사를 통일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빅 히스토리를 정의하는데, 이 정의에는 ‘통일된 방식의 이해’에 초점이 있다. 아직 빅 히스토리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가 있지는 않으므로 각자의 생각을 담아 빅 히스토리를 정의해볼 수 있다. 당연히 이 글에는 빅 히스토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역사를 시대나 지역 또는 주제별로 나누듯이 빅 히스토리에 담길 내용을 주제별로 우주, 지구, 생명, 인류, 문명의 역사로 나눠볼 수 있다. 각 내용을 다루는 학문 분야는 천문학과 물리학, 지질학, 화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 등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까지 걸쳐있다. 빅 히스토리는 각 분야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가져와서 일관성 있는 서사로 구성하는 작업이다. 사실 기존의 역사학에서도 시대구분이나 지역구분 등을 적용한 역사적 사실들의 나열을 넘어서서 전체 역사를 흐름이 있는 일관된 이야기로 전개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연구 방법이 다르고 전통도 다른 여러 학문 분야의 내용들을 일관성 있게 엮어낸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방법으로 일관된 흐름을 만들고 통일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내용의 구성도 달라질 수 있다. 우주, 지구, 생명, 인류, 문명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하고 큰 흐름은 모든 것은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πάντα ῥεῖ (판타 레이 –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너무 당연한 것을 왜 언급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자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신화 속의 우주에는 대개 시작(탄생)과 끝(멸망)이 있다. 신(절대자)이 세상을 모든 것을 쥐고 있다면 시작과 끝도 그의 손에 달려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과학이 등장한 후 20세기 후반에 현대우주론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과학자들은 영원불변한 우주를 선호해왔다. 일단 우주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었다. 하늘(천체)의 운동과 낮과 밤, 계절의 순환으로 대표되는 땅의 변화도 영원히 반복되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더해서 우주의 시작과 끝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과학을 통해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는 현대 과학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우주의 시작이나 생명의 시작을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 영원불변한 우주라면 영원히 반복되는 주기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시작과 끝과 그사이의 변화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영원불변한 우주의 일부로서 인간도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간주해왔다.
모든 것은 변해왔다는 사실은 현대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빅뱅이라는 우주의 시작이 있었고, 우주는 팽창하면서 지속해서 모습이 바뀌어서 은하와 별과 행성이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됐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변화를 체감하기엔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다. 그래서 과학적 증거를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존재도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태양이라는 별과 지구라는 행성이 생겨난 후, 생명이 생겨나고 오랜 시간 진화한 끝에 고도로 지적인 생명체가 되었고 그 결과 복잡한 사회를 형성하게 됐다. 우리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도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변해왔다면 그 변화에 어떤 방향성이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 물리학에서는 이와 관련된 ‘시간의 화살’ 문제가 있다.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들은 시간반전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 (엄밀하게는 아주 작은 대칭성 깨짐이 있지만, 그 효과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시간반전 대칭성에 의해 시간에 따른 변화의 방향은 시간을 반전시킨 변화의 방향, 즉 반대 방향도 허용된다. 이 경우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초기조건이다. 하지만 우주의 초기조건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는 아직 물리법칙이 다루기 난감한 영역이다. 하지만 우주의 변화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 수많은 입자들로 구성되는 거시세계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된다. 열역학 제2법칙은 닫힌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다는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우주는 닫힌계이므로 우주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고 계속 증가해야 한다. (증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은 아마 우주의 종말이 될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과의 충돌을 피하려면 우주는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왜 태초에 수많은 상태 중에서 하필 낮은 엔트로피 상태가 선택될 수 있었는지는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엔트로피는 미시적으로 한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미시상태의 수(의 자연로그 값)로 정의된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가 적은 거시상태이다. 초기 상태의 선택이 무작위여서 모든 미시상태가 동등한 확률로 선택될 수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는 높은 엔트로피 상태에 비해 선택될 확률이 매우 낮아지게 된다.
사실 우주의 엔트로피 변화가 우리의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구라는 특별한 행성에 있는 특별한 기능을 하는 생명체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빅 히스토리가 다뤄야 할 중요한 변화의 방향성은 점점 더 복잡한 열린계가 등장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복잡계들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유입해서 일함으로써 자신은 복잡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복잡계의 존재는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를 촉진한다.) 지구와 같은 행성은 태양과 같은 별이 방출하는 복사에너지를 흡수해서 자신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지구의 생명체는 태양의 복사에너지나 다른 생명체로부터 에너지를 유입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복잡한 기능을 수행한다. 빅 히스토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에너지의 흐름과 복잡계의 형성 과정에 담겨 있는 변화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변화의 방향성으로 복잡도complexity의 증가를 제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복잡한 계가 등장하는데, 복잡도에 큰 도약이 있는 중요한 사건들을 문턱넘기thresholds라 명명했다[그림3]. 그가 제시한 문턱넘기에는 빅뱅(우주의 탄생), 별의 탄생, 화학원소의 기원,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 집단학습, 농업의 시작,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등 현대의 혁명을 들었다. 복잡도를 통해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한 듯이 보이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실 복잡도는 정량적 정의가 어려워서 아직도 보편적인 정의가 없는 지표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도 어떤 사건들이 문턱넘기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정성적인 느낌에 근거한 제안이었고 정량적인 수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복잡도와 문턱넘기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임에 틀림없지만 정량적 근거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천체물리학자인 에릭 체이슨은 일률밀도energy rate density라는 정량적 지표를 통해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그림4]. 은하, 태양, 지구, 식물, 동물, 인간사회로 이어지는 복잡계의 등장 과정에서 일률밀도는 계속 증가했다는 것이다. 일률밀도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할 수 있고 복잡계의 동역학과 연결고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음이 장점이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에서 가치를 두어야 할 사건들을 모두 잡아내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거대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집어내고 일관된 이야기를 펼치는 구성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주에서 문명까지 이르는 변화의 방향성을 하나의 지표만으로 온전히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는 다양한 관점 중의 하나로 간주함이 옳겠다. 어떤 관점이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먼저 우리는 무엇인지를 과학의 관점에서 자세히 다뤄보겠다. 이어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의 답을 찾아서 우주, 지구, 생명,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고 한다. 이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의 나열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에너지, 정보, 진화, 조직화의 관점에서 변화의 방향성을 살펴볼 계획이다.
현대 문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빅 히스토리가 왜 필요한지, 즉 어떤 가치가 있는지 피력하면서 첫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빅 히스토리는 과학의 시대에 인류를 위한 정체성 서사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과학에 근거해서 구하는 과정이다. 과학의 발견으로 인간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신화와 종교를 통해서 인간은 윤회를 거듭하는 고통 받는 존재이거나 절대자인 신이 만든 특별한 지위를 갖는 창조물이었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가 사는 곳(지구라는 행성, 태양이라는 별, 은하수라는 은하)이 우주에서 특별한 곳이 아니고, 우주에는 그런 곳이 무수히 많을 수 있음을 밝혔다. 또한 인간은 처음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진 생명체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생물종 중의 하나임도 밝혀졌다. 생명체 중에서 인간은 특별한 지적인 생명체로 간주됐지만 이마저도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과학을 통해서 인간은 물질과 정보로 해체됐다. 빅 히스토리는 물질과 정보로부터 우주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의 이야기이고, 물질과 정보로 해석된 인간이 어떻게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사실 지구는 지적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다.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매우 특별한 기능을 가진 물질의 집합체고, 인간은 우연과 필연의 조합이 만들어낸 고도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매우 특별한 생명체다.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우주도 지배할 수도 있다. 빅 히스토리를 통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드 카의 표현을 본떠서 빅 히스토리는 인간과 우주의 끊임없는 대화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빅 히스토리는 인류 전체의 공동체 서사로서 기능한다. 역사공동체는 공유된 역사를 통해서 집단의 응집력을 발휘해왔다. 문명의 역사가 보여주는 내용은 인간은 점점 더 큰 집단을 형성하면서 번성해왔다는 사실이다. 흩어져 살아가던 작은 규모의 수렵채집 집단에서 시작해서 도시가 탄생하고 국가와 제국으로 이어지고 지금은 전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되는 세계화의 전환기에 와 있다. 하지만 인류의 번성은 불가피하게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대처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낳고 있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 과도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 위기 등, 인류 전체의 운명이 걸린 전 지구적인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또한 정보화시대로의 전환과 인공지능의 등장 등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인류와 문명의 역사를 넘어서 생명, 지구, 우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관점으로 살펴봐야 한다. 정보혁명은 인류와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까? 인류는 인공지능 또는 인공생명을 만들고 그들과 공존할 수 있을까? 물질과 생명의 경계는 어디인가?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거나 대치할 수도 있는가? 역사의 중요한 역할은 알고 있는 과거로부터 알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빅 히스토리는 인류가 현재 처한 상황을 살펴보는 확장된 관점을 제공한다.
세 번째로 빅 히스토리는 융합적 사고 교육을 위한 좋은 기반이 된다. 빅 히스토리를 통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융합적 내용들을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기본 소양을 갖춤에 더해서 에너지, 정보, 조직화, 진화 같은 통섭적 개념들을 통해 현상을 분석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과학자로서 나의 기대는 인류가 쌓아 올린 과학의 지식이 어떻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류가 다른 생물종을 제치고 지구의 정복자가 된 것은 지식을 축적하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빅히스토리는 우주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역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과거의 이야기이듯이 빅 히스토리도 우주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우리의 존재와 관련하여 가치가 있는 사건들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어떤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의 집단이다. 집단을 이루는 개체로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임도 중요하지만 개인들이 모여서 고도로 조직화된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도 우리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문명을 이룩하고 지식을 축적해서 다른 생물종들을 제치고 지구의 지배자로 올라선 데는 개체의 경쟁력보다 집단의 경쟁력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번 글에서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빅 히스토리가 담아야 할 이야기들의 윤곽을 그려보겠다.
우리를 규정하는 데는 우리의 인식체계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두뇌는 나와 남을 구분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주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 능력은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생존과 번식에 확실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주변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가진 존재다. 자기 자신인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해왔고 사회 속에서 행동을 결정하는데 그 결과를 활용해왔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의 집단인 사회에서의 경쟁이 인간의 진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탓이리라. 우리의 원시 조상들이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했는지는 원시종교의 흔적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는 종교에서 먼저 다뤄졌고 철학의 고찰을 거쳐 현재는 과학이 다루는 영역이 됐다.
종교에서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봤을까? 수렵 채집기의 원시종교에서는 인간이 겪는 고통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물론 죽음과 고통은 지금도 중요한 과제이다.)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두뇌와 마음을 발달시켜온 인간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설명은 인간은 물질로 된 육체와 그것을 다스리는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죽음을 둘의 분리로 보는 것이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봄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살아남는 사후세계를 상상하게 됐다. 영혼의 존재도 인간을 넘어 동물, 식물, 자연으로까지 확대됐다. 영혼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샤먼들이 출현했고, 이들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집단의 지도자 역할도 하게 됐다. 농경이 시작되고 문명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서 인간은 그 수가 늘어나는 등 성공을 거두었지만 집단에 속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삶은 전반적으로 더 힘들어졌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개체 간에는 불평등이 발생했고 전쟁과 기근과 질병은 더 혹독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단의 규모가 커졌는지는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자신들을 돌봐주는 조상들이나 자연물의 영혼을 초월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졌고, 이들을 받드는 의식과 축제는 공동체의 중요한 일상이 됐다. 대제국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소위 ‘축의 시대’에는 조직화된 보편종교가 등장했다. 이 시대에는 거대해진 권력에 의한 폭력과 전쟁, 심화된 불평등 등으로 인해 가중된 개인들의 고통이 종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됐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등장하는 한편,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종교에서는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고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지위를 가진 피조물로 신에 의한 구원을 통해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난다. 반면 일부 다신교와 범신교에서는 인간은 삶과 죽음의 윤회를 거듭하며 고통받는 존재로 깨달음에 의한 해탈을 통해서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견해들은 보편종교와 함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축의 시대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이 등장했다. 철학에서 인간은 사유하고 성찰하는 존재로 인식, 사고, 행동의 주체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기반으로 하지만 몸보다는 마음의 탐구에 집중해서 영혼의 기능은 마음, 이성, 의지 등으로 분화됐다. 철학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간이 세상에서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통해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생물학과 뇌과학에 근거한 철학이 등장해서 몸과 마음을 연결하여 인식론, 도덕론 등을 재조명하고 있다.
과학의 등장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종교와 철학은 인간은 신이 창조한 우월한 존재거나 이성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가 있는 곳(지구, 태양계, 은하수)은 우주에서 특별한 곳이 아니며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수없이 많고, 우리는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 진화로 생겨난 수많은 생물종 중의 하나이며,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긴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이 더 뛰어날 수도 있음을 밝혀주었다. 그렇다면 과학의 시선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진화론과 현대우주론이 정립된 이후 인간의 정체성을 다룸에 있어 과학이 종교나 철학과 가장 다른 점은 인간의 본성이 영원불변한 본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물질의 응집과 생명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형성 과정을 따라 물질, 생명, 인간, 사회라는 네 단계로 나눠서 인간의 정체성을 논의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물질은 인간에게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환경인 지구와 태양을 이루는 물질과 똑같이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질량비로 봤을 때 산소 65%, 탄소 18%, 수소 9.5%, 질소 3.2%, 칼슘 1.5%, 인 1.2% 등의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다. 분자들의 질량비로 보면 물 62%, 단백질 16%, 지방 16%, 탄수화물 1%, 그 외의 다양한 분자들로 구성된다.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는 이 원소들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물질과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과학이 밝혀놓은 물질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현재의 물질 이론을 간략히 소개하는 정도로 하고 물질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주의 역사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환경인 지구와 태양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된다. 원자에는 100여 종의 화학적 성질이 다른 원소가 있다. 하나의 원자는 크기는 작지만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중심이 되는 핵과 그 주변에 분포하는 입자인 여러 개의 전자들로 되어 있다.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라는 두 종류의 입자 여럿이 뭉쳐서 만들어진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거의 같지만 양성자는 양전하(전기)를 띠고 중성자는 띠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전자는 양성자와 크기는 같지만 부호는 반대인 음전하를 띠고 있다. 핵에 있는 양성자의 수와 핵 주변에 있는 전자의 수는 정확히 같아서 양전하와 음전하가 서로 상쇄되는 효과로 인해 겉보기에는 원자는 전하를 띠지 않은 상태가 된다. 하지만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원자가 가진 전자의 수가 몇 개인지에 의해 결정되며, 그 수에 따라 다른 원소가 된다. 원자와 원자가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의 전자들을 교환하거나 공유하면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원자들이 결합한 다양한 분자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원자들의 화학 반응과 전기적 결합은 원자들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물질들을 구성하고 변화해가는 기본 원리가 된다.
생명체나 지구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거시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물질이 100여 종류의 화학적 성질이 다른 원소가 있는 원자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원소들의 기원, 즉 그런 원소들이 왜 우주에 존재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더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20세기에 물리학에서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이 정립됐는데, 이를 입자물리학 표준모형이라 한다.[그림1]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6종류의 쿼크quark와 6종류의 렙톤lepton이라는 기본입자로 구성된다. 6종류의 쿼크는 두 개씩 짝을 이루어 각각 위up, 아래down, 매력charm, 기묘strange, 꼭대기top, 바닥bottom 쿼크라 불린다. 이중 질량이 작은 두 쿼크인 위 쿼크와 아래 쿼크 세 개가 결합하여 양성자(위-위-아래)와 중성자(위-아래-아래)가 만들어진다. (나머지 쿼크들도 이와 비슷한 결합 상태를 만들 수 있지만 불안정해서 빠르게 붕괴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더라도 오래 남아 있지 못한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결합을 통해 다양한 핵을 구성한다. 6개의 렙톤도 두 개씩 짝을 이루어 전자, 전자중성미자, 뮤온muon, 뮤온중성미자, 타우tau, 타우중성미자라 불린다. 이중 전하를 띠면서 가장 가벼운 렙톤인 전자가 원자를 구성하는데 참여한다. (쿼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자보다 무거운 뮤온과 타우는 빠르게 붕괴해서 만들어지더라도 오래 남아 있지 못한다.)
기본입자인 쿼크들이 뭉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거쳐 핵을 만들고, 핵이 기본입자인 전자와 뭉쳐서 원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기본입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은 힘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상호작용에 대한 지식은 물질이 어떤 과정으로 뭉쳐서 결국 생명체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기본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의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이중 강력은 쿼크들을 뭉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뭉쳐서 핵을 만드는데 작용한다. 약력은 6종의 쿼크와 렙톤 사이에 서로 변환될 수 있게 함으로써 핵의 종류가 변환되는데 작용한다. 전자기력은 핵과 전자들을 뭉쳐서 원자를 만드는 데 작용한다. 물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물리적, 화학적 변화는 원자들이 가진 전자들 사이의 전자기력의 작용으로 일어나므로 전자기력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중력은 다른 세 힘에 비해서 아주 약한 힘이지만 축적되는 성질이 있어서 물체가 엄청나게 커지면 가장 중요한 힘으로 부상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커다란 물체의 표면에 살기에 지구가 작용하는 중력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힘이 된다. 더 나아가 우주가 진화하고 그 과정에서 물질이 뭉쳐서 별과 행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력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이다.
우리의 몸이 원자로 되어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그 원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원자들로 교체된다는 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대사를 지속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몸의 조직과 기관은 그 형태를 유지하지만 세포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새로 유입된 원자들로 바뀌고 세포도 새로 만들어진 세포로 바뀐다. 우리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들이 협력을 통해 만들어낸 어떤 복잡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물론 그 상태는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물질과 상태의 관계는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은 유입, 탄생과 죽음을 통해 계속 교체되지만 사회의 형태는 유지된다.
인간 개인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200) 종류의 수많은(~30조)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체는 우주에서 만들어진 (적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복잡계다. 그렇기에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는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어려운 문제여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통일된 정의가 아직 없다. 여기서는 생명의 기본적인 기능과 그 기능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의 측면만 살펴보겠다. 생명의 기본적인 기능은 번식과 진화, 그리고 대사다. 번식과 진화라는 기능면에서 보면 생명체는 자신과 (거의)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자기복제기계라 할 수 있다. 자기복제를 수행하는 데는 물질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대사는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획득해서 생명 기능을 유지하는 기능이다.
아직 지구 이외의 곳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모르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에 대한 지식은 지구의 생명체로 국한된다. 그래서 지구라는 행성이 어떻게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구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복사) 에너지를 유입하여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으며 생명이 번성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유지한다. 태양은 중력에 의해 뭉쳐진 거대한 물질 (주로 수소와 헬륨) 덩어리의 중심부에서 핵융합 (수소 4개 → 헬륨)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활용하여 우주 공간에 복사에너지를 방출한다. 태양과 지구로 대표되는 별과 행성이라는 복잡계는 생명이라는 더 복잡한 복잡계가 탄생하는 환경이 된다. 별과 행성도 탄생과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변화한다. 태양과 지구의 진화는 그 환경 속에서 탄생하고 진화해온 생명체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생명의 진화도 지구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켜 왔다. 생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는 태양과 지구의 역사라는 배경 위에서 전개되는 지구와 생명의 공진화 이야기다.
지구의 생명체가 기본적인 생명기능을 구현하는 방식은 큰 틀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먼저 생명에는 자신을 정의하는 경계가 필요하다. 이 경계는 내부와 외부로서 나와 환경을 가른다. (다세포생물에서는 이 경계가 조금 모호해질 수 있다.) 경계를 만들고 내부에서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정보를 처리해서 대사와 번식의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과정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중합체들의 화학반응을 통해서 구현된다. 생명의 화학반응은 물이라는 액체용매 속에서 진행된다. 번식과 진화를 구현하는 방식의 통일성은 생명의 정보는 DNA에 염기서열로 저장되고, 이 정보는 RNA를 거쳐 단백질의 생성을 통해 생명체로 구현된다는 중심원리central dogma로 표현된다. 대사를 통해 획득한 에너지를 화학반응이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방식도 대부분의 생명체에서 통일되어 있다. 산소호흡을 통해 당을 이산화탄소와 물로 분해하는 과정에서 얻은 에너지로 ATP를 생산하여 세포 곳곳으로 보내고 에너지가 필요한 곳에서는 ATP가 분해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ATP는 세포에서 표준배터리의 역할을 한다.
생명의 구현 방식의 통일성은 모든 생물종이 공통의 단세포 조상에서 출발했음을 암시한다. 하나의 단세포 공통 조상에서 시작해서 현재 관찰되는 수많은 생물종들이 출현하는 과정은 진화를 통해서 설명된다. 진화의 원리는 변이와 선택으로 요약된다. 유전정보에는 무작위로 일어나는 변화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변형들을 만들어지고 환경의 변화와 자원의 제한은 다양한 변형을 가진 개체들의 집단에서 생존과 번식 경쟁력이 높은 변형을 가진 개체의 비율을 늘린다. 진화는 오랜 기간을 통해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 수많은 생물종들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진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생물종 중의 하나다. 생물종은 진화의 계통과 유사성에 따라 역-계-문-강-목-과-속-종의 단계들로 분류하는데, 인간은 진핵생물역-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영장목-사람Hominidae과-사람Homo속-사람spience종으로 분류된다. 생물학적 구조를 보면 인간은 세포-조직-기관-기관계-개체로 이어지는 계층구조를 가진 매우 조직화된 다세포생물이다. 진화의 경이로운 점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포들의 분화와 조직화를 통해 놀라운 기능들을 발명해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체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진화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더없이 중요하다.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점을 진화를 통해 획득했을까? (사실 모든 종은 제각기 특별하다.) 인간은 동물에 속하고 두뇌라는 중추신경계를 가지고 있다. 신경계는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다른 생명체의 것을 취하는 포식을 발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거나 반대로 다른 생명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감각을 발달시키고 감각에서 얻은 정보를 처리하여 행동을 제어하는 지능을 발휘해야 한다. 동물 중에서도 인간은 뛰어난 지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감각, 판단, 운동에 필요한 동물적 지능뿐만 아니라, 마음, 추상적 사고 등 집단생활에 필요한 사회적 지능이 발달했다. 소위 인지혁명으로 불리는 과정을 통해 추상적, 상징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언어와 집단학습 능력의 도약을 가져왔고 대규모의 협력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지구의 지배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단세포 생물 중 일부가 집단을 이루었을 때의 장점들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여 다세포 생물이 됐듯이, 일부 동물 종은 집단을 이루는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다. 집단 내에서 경쟁과 협동을 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에게 집단의 특성과 규모 자체가 개체에게 자연환경 못지않은 중요한 환경으로 작용한다. 많은 사회적 동물 종이 존재하지만, 이중 개미나 꿀벌 같은 몇몇 종은 진사회성을 진화시켜 개체의 기능이 분화된 조직화된 사회를 이뤘다. (협력이 일어나는) 인간 집단의 규모는 (어떤 이유로) 계속 커져 왔다.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가면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집단은 거대한 규모의 집단으로 바뀌었고 산업사회와 현대사회로 바뀌면서 더욱 커졌다. 규모가 커지면서 인간 사회는 더 복잡하고 조직화된 사회가 됐고, 그 기반에는 에너지소비량과 정보유통량의 증가가 있었다. 그 결과 현재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사회적 협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이 변화는 생물학적 진화의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1만 년 이내의 기간에 진행됐다. 이렇게 빠른 인간 사회의 변화는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문화적 진화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 사회의 진화는 그 구성원인 인간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문화적 진화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비교하는 데는 정보의 관점에서 살펴봄이 도움이 된다. 정보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는 모두 정보처리장치로 볼 수 있다. 인간에 담겨있는 정보는 생물적 정보와 문화적 정보로 구분할 수 있다. 생물적 정보는 유전정보로서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고 문화적 정보는 지식정보로서 두뇌에 기록되어 있다. 두 유형의 정보는 유전정보는 번식, 지식정보는 모방이라는 다른 방식의 자기복제를 통해서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유전정보는 안정성이 높지만 진화 속도가 느린 반면, 지식정보는 환경변화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진화 속도를 가졌다.
정보의 관점은 우리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우리를 인간이라고 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의 공통점에 우선 주목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유전정보를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라는 집단을 정의할 때 행동이나 생각의 공통점도 고려하는데, 이것은 공유된 유전정보의 요인도 있겠지만 공유된 문화의 영향이 훨씬 크다. 공유된 유전정보만큼이나 공유된 지식정보(기억, 지식, 문화)도 우리의 정체성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정보의 의미는 정보가 많은 복제를 통해 공유됐을 때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복잡계는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화를 통해 다양하게 변형된 복제품을 만들어냄으로써 다양한 의미를 생성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주의 변화과정에서 물질(별과 행성), 생명, 인간, 사회로 이어지는 점점 더 조직화된 복잡계가 출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기복제 복잡계가 출현한 사건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빅 히스토리는 우주에서 물질, 별과 행성(태양과 지구), 생명, 인간, 사회, 문명의 기원과 진화를 다룬다. 우리의 정체성에서 인간과 사회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변화한다. (인간에 의해서 지구의 환경도 빠르게 변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인간과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갈까? 전통적인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빅 히스토리도 예측 불가능의 복잡계인 인간과 사회의 미래를 그럴듯하게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