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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 자치도시, 베네치아, 4차 십자군 전쟁 지원,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르네상스, 이탈리아 전쟁

Jobs 9 2021. 3. 1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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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 자치도시 번영


베네치아의 전성기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지원


베네치아는 십자군 국가와의 교역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의 교역으로도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라틴계 상인들이 그리스계 상인에게 밀려나면서 위기감을 감돌기 시작했다. 이에 AD 1193년 베네치아의 도제가 된 엔리코 단돌로는 제4차 십자군을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86세의 고령에 시력까지 잃은 상태였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베네치아를 이끌고 있었는 데 AD 1202년 결성된 제4차 십자군의 의뢰를 받아 수송 함대를 준비했으나 제4차 십자군이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약점을 이용하여 베네치아의 지배를 거부하고 헝가리 편으로 돌아선 달마티아의 자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로마 황제 이사키우스 2세가 폐위되면서 그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도움을 요청하자 제4차 십자군의 대표인 보니파치오 드 몬페라토를 설득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AD 1203년 6월 베네치아 함대를 지원받은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사키우스 2세가 두 눈이 멀어 통치가 어려웠기 때문에 황태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공동 황제인 알렉시우스 4세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알렉시우스 4세가 당초 약속했던 막대한 보상금과 로마카톨릭 개종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으나 이를 반대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 부자가 모두 살해하고 알렉시우스 5세를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에 분개한 제4차 십자군은 AD 1205년 4월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대대적인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는 사이에 엔리코 단돌로는 4마리의 청동제 말 조상을 비롯한 많은 보물을 베네치아로 빼돌리며 막대한 이득을 얻어 내었다. 


제4차 십자군의 폭주는 멈추지 않아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자신들이 차지한 채 라틴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엔리코 단돌로는 제4차 십자군의 라틴 제국 수립을 지원한 대가로 기존 동로마 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얻어냈으나 나중에는 이 지역을 라틴 제국에게 넘기고 대신하여 크레타와 에우보이아 등의 섬 등의 여러 지중해 무역기지를 넘겨 받았다. 일부에서는 엔리코 단돌로에게 라틴 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제안했으나 엔리코 단돌로는 거절하고 대신하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보니파치오 드 몬페라토를 제치고 황제 보두앵 1세로 즉위하게 만들었다. 비록 엔리코 단돌로는 AD 1205년 5월 베네치아로 귀국하지 못한 채 병으로 사망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묻히게 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을 무너지고 친(親) 베네치아 성향의 라틴 제국이 등장하면서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재해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제노바와의 대결


AD 1356년 고리치아 백작 마인하르트 6세, 파두아 영주 프란체스코 1세,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니콜라우스 그리고 그의 이복형제인 신성로마황제 카를 4세, 헝가리 왕 러요시 1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 사이에 광범위한 반(反) 베네치아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들의 공격에 의해 베네치아는 그라도와 무지아를 상실했고 AD 1358년 1월 네르베사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달마티아도 헝가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더구나 지중해 교역을 두고 경쟁하던 제노바와도 AD 1257년 십자군 국가 중 예루살렘 왕국의 최후의 거점이 되는 아크레의 특권을 두고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탈리아 서부의 오래된 도시인 제노바는 AD 11세기 후반에 시민들이 단결하여 기존 봉건 영주와 교회 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자치 도시가 되었고 이후 피사와 함께 서(西) 지중해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뒤에 동방 무역과 성지 순례객 수송을 두고 베네치아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비록 해군력은 여전히 베네치아가 우세했지만 제노바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상선만 기습하는 방법으로 베네치아를 괴롭혔다. 또한 AD 1261년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의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한 후 라틴 제국을 지원하던 베네치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노바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비록 베네치아 함대가 제노바 함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 왕국에서 추방했으나 마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에 의해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의 무역 특권을 일부 제한하며 제노바를 지원했다. 그렇지만 AD 1270년 제8차 십자군을 일으킨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를 모두 이용하고자 중재에 나서면서 전쟁이 일단 종식되었다. 비록 베네치아가 여전히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특권을 유지했지만 제노바의 권리도 일정 부분 회복되고 말았고 동로마 제국의 비호 속에서 동지중해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지역에 많은 해상 무역의 거점을 구축하게 된다.


AD 1376년 베네치아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5세로부터 다르다넬스 해협의 근처에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의 테네도스 섬의 영유권을 넘겨받고 제노바의 흑해 진출을 방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제노바의 지원을 받은 요한네스 5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가 아버지를 폐위시키면서 오히려 제노바가 테네도스 섬의 권리를 차지하게 되자 양국 간의 네 번째 전쟁이 발발했다. 제노바가 전통적으로 베네치아와 적대 관계인 헝가리 왕, 오스트리아 공작,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파도바 영주 등과 동맹을 체결하자 이에 맞서서 베네치아는 육상에서 제노바를 위협하기 위해 밀라노와 연합하였고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바 있는 키프로스 왕국과도 동맹을 체결했다.


먼저 AD 1379년 루키아노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의 소규모 함대가 아드리아 해의 풀라에서 베토르 피사니의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했고 이듬해 더욱 함대를 증강시켜 베네치아 남부의 키오자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AD 1378년 12월부터 베네치아의 반격이 시작되어 폐색선을 입구에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제노바 함대를 키오자 항구를 가둬놓으면서 AD 1380년 6월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베네치아도 전쟁이 지속되면서 심각한 재정 압박을 느꼈기 때문에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의 중재를 통해 AD 1381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였다.


토리노 조약을 통해서 베네치아는 제노바와 그 동맹국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다. 토리노 조약은 크게 4개의 세부 조약으로 나뉘어지는 데 먼저 제노바와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의 원인이 된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의 테네도스 섬을 중립화하고 키프로스 왕국과의 동맹을 파기하며 키프로스 섬에 대한 제노바의 권리도 인정해야만 했다. 다음으로 베네치아는 헝가리와 조약을 체결하여 달마티아에 대한 헝가리의 영유권을 승인하고 매년 7,000 두카트의 공물을 보내야 했으며 다마티아의 상인들은 베네치아로부터 35,000 두카트 이상을 구매할 수 없도록 제한받았다. 그 밖에 오스트리아에게는 코넬리아노를, 파도바에게는 트레비소를,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에게는 트리에스테를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토리노 조약에서 밀라노는 제외되었다. 


이렇게 하여 베네치아와 제노바 간에 벌어진 120년에 걸친 총 4번의 전쟁에서 전투 자체는 베네치아가 승리하였지만 영토적인 이득은 제노바와 그의 동맹국들이 취득한 형태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 제노바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벌어진 재정난을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로 진출한 여파로 에게해와 흑해를 통한 동지중해 무역이 차단당하게 되었고 아라곤 왕국도 세력을 확대하면서 서지중해 무역까지 위협당하는 진퇴양란의 위기에 빠졌다. 결정적으로 프랑스까지 세력을 확대하자 제노바는 프랑스와 아라곤 왕국 사이에 낀 형태가 되면서 점점 그 세력이 축소된다.


반면에 베네치아가 고질적인 정치 불안으로 인하여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우선 베네치아는 나중에 신성로마황제가 되는 당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 AD 1408년 화친을 맺었고 AD 1409년 나폴리 왕 라디슬라우스로부터 10만 두카트를 지불하고 달마티아에 대한 권리를 구매했다. 또한 북이탈리아의 패자로 올라선 밀라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내륙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여 베로나, 파도바 등의 베네토 지역 대부분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AD 1423년 로마냐를 두고 밀라노와 피렌체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밀라노를 견제하기 위해 AD 1425년 베네치아도 피렌체의 편에 가담하여 밀라노와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밀라노 공국의 성장


비스콘티 가문의 밀라노 지배와 북이탈리아 패권 성립


밀라노는 AD 12세기부터 모직산업의 발달로 신흥 상업 세력이 교회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했는 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델라 토레 가문의 구엘프(교황파)와 밀라노 대주교 오토네 비스콘티의 기벨린(황제파)의 대립 속에서 자치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AD 1277년 오토네 비스콘티가 데시오 전투에서 델라 토레 가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밀라노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AD 1287년 자신의 권력을 자신의 종손인 마테오 1세 비스콘티에게 이양했다. 마테오 1세 비스콘티는 밀라노 지도자의 임기를 당초 6개월에서 5년으로 늘리는 데 성공하였고 AD 1294년에는 독일 왕 아돌프 폰 나사우로부터 밀라노에 대한 황제 대리로 임명받았다. 이후 비록 AD 1302년 잠시 델라 토레 가문의 반격을 받아 밀라노에서 추방당했지만 AD 1310년 기벨린으로 돌아선 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의 지원을 받아 밀라노를 탈환하였다. 


마테오 1세는 AD 1322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아들인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에게 물려주었고 이는 AD 1327년 다른 아들인 아초네 비스콘티로 이어졌다. 이후 비록 아초네 비스콘티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여 권력 세습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의 삼촌이자 갈리아초 1세의 동생들인 루키노 비스콘티와 조반니 비스콘티가 공동 군주로 선출됨으로써 극복되었다. 특히 조반니 비스콘티는 AD 1342년 밀라노 대주교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AD 1349년 루키노 비스콘티가 사망하자 성직자의 신분으로 밀라노 군주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성직자인 조반니 비스콘티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AD 1354년 사망할 때 세 조카인 마테오 2세 비스콘티, 베르나보 비스콘티,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에게 분할하여 영지를 상속시켰다. 그리고 마테오 2세 비스콘티가 이듬해 사망했기 때문에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에 의해 동서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AD 1378년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가 죽자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자신의 딸 루차를 프랑스의 앙주 공작 루이의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의 아들인 잔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가 AD 1385년 기습적으로 베르나보 비스콘티를 체포한 후 몇 개월 뒤 독살하였다.


이제 비스콘티 가문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잔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에 의해 비스콘티 가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잔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는 이미 AD 1379년에 밀라노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AD 1396년에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도원인 체르토사 디 파비아를 세웠다. 또한 독일 왕 벤첼에게 많은 뇌물을 써서 AD 1395년에 밀라노 공작 칭호를 공식적으로 받아내면서 이제 밀라노는 비스콘티 가문의 통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잔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는 밀라노 공국의 영토를 확장시켜 AD 1387년 베네치아 북쪽 트레비소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AD 1399년에는 피사와 시에나를, AD 1400년에는 페루자를, AD 1402년에는 볼로냐를 모두 통치하게 되면서 북이탈리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남은 피렌체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그 전인 AD 1402년 9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잔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가 죽자 그의 밀라노 공작 작위는 그의 아들인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이어졌지만 무능하고 지나치게 잔인한 성격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이로 인하여 밀라노 공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수많은 도시들이 독립해 나갔지만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대장) 파치노 카네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AD 1412년 파치노 카네가 파비아에서 병을 얻은 사이 조반니 마리아 비스콘티가 살해당했고 이후 밀라노 공작 작위는 그의 동생인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계승했다. 그리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파치노 카네가 죽은 이후 그의 미망인과 재혼하면서 파치노 카네의 병력과 영토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비스콘티 가문의 권력을 재확립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AD 1423년 로마냐를 두고 피렌체와 전쟁을 시작했는 데 AD 1425년 피렌체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베네치아와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상황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변경백령의 일부였던 피렌체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진 서임권 분쟁 당시 로마교황의 강력한 지원자였던 토스카나 변경백 부인 마틸데가 AD 1175년 사망한 이후 그녀의 영지를 둘러싸고 로마교황과 신성로마황제가 대립한 틈을 타고 AD 12세기에 자치 도시로 독립할 수 있었다. AD 12세기 무렵 모직물 공업과 귀금속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과 금융업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AD 13세기 이탈리아 전 지역을 휩쓴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의 대립 속에서 피렌체 귀족들은 기벨린이었지만 피렌체의 민중은 구엘프로 나뉘면서 피렌체는 내분에 휩싸였다. 사실 구엘프와 기벨린이라는 말도 피렌체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비록 피렌체는 구엘프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인근의 시에나는 기벨린의 차지가 되면서 AD 1460년 피렌체와 시에나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피렌체는 토스카나 동맹 도시인 볼로냐, 프라토, 루카, 오르비에토, 산지미냐노, 산미니아토, 볼테라, 콜레발델사 등의 병력을 모두 합쳐서 3만 5천명을 이끌고 시에나를 공격하였다. 이에 반해서 시에나는 같은 기벨린 세력인 피사와 코르토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로마교황청과 대립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만프레디의 협력도 얻어냈지만 동원 가능한 병력 숫자는 2만명에 머물렀다. 그러나 AD 1260년 9월 4일 몬테페르티 요새 인근에서 벌어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의 기벨린 세력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의 구엘프 세력 중 일부가 배신하여 피렌체 군사령관을 암살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투의 향방을 결정시킨 구엘프 측 배신자의 악명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이 전투의 참전하였던 단테 알리기에리는 나중에 자신이 쓴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지배 시작


몬타페르티 전투로 인해 피렌체에서 구엘프 세력이 축출되고 기벨린 세력이 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벨린 세력은 피렌체를 잘 운영하지 못했고 이에 로마교황 클레멘스 4세의 지원을 받은 구엘프 세력이 다시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또한 시에나 소속으로 그동안 유럽 은행업의 선두 주자였던 본시뇨리 가문이 AD 1298년 파산하는 사이에 피렌체에서 바르디스, 페루치스, 아치아올리 가문 같은 몇몇 신흥 금융 가문들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유럽 금융업의 중심이 시에나에서 피렌체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록 피렌체도 AD 1347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하여 AD 14세기 전 유럽의 인구 중 3분의 1을 사망시킨 페스트(흑사병)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AD 14세기말부터 이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D 1397년 10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에 의해 메디치 은행이 세워졌고 이후 그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아버지가 이룩한 부를 더욱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메디치 가문에 의한 피렌체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밀라노와 피렌체-베네치아의 대결, 롬바르디아 전쟁

제1차 롬바르디아 전쟁

AD 1423년 포를리를 두고 밀라노와 피렌체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다. 먼저 포를리의 군주인 조르조 오르델라피가 자신의 9살짜리 아들인 테오발도의 후견인으로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를 지명했지만 이몰라 군주의 딸인 루크레치아 델리 알리도시가 강제로 섭정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자 포를리 사람들이 밀라노의 콘도티에로(용병대장)인 아뇰로 델라 페르골라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피렌체도 콘도티에로인 판돌포 말라케스타를 보내 이몰라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AD 1424년 2월 피렌체 군이 패배하고 이몰라가 함락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피렌체의 다른 콘도티에로인 카를로 말라테스타도 패배하였다. 피렌체는 또 다시 콘도티에로인 니콜로 피치니노와 오도 다 몬토네를 파견했지만 격퇴당했다.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모습

다급해진 피렌체는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24척의 함대가 밀라노의 동맹인 제노바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실패했다. 그동안 밀라노의 편으로 돌아선 콘도티에로 니콜로 피치니노와 새로 고용한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토스카나를 공격하여 안기아리와 파주올라에서 피렌체 군에게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AD 1425년 베네치아가 피렌체와 동맹을 맺고 가담하였고 이전까지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에게 고용되었던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를 막대한 봉급을 제시하며 전향시켜 오히려 자신들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AD 1426년 11월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는 피렌체-베네치아 동맹군을 이끌고 엄청난 대포를 동원하여 밀라노가 점령한 브레시아를 탈환하여 베네치아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 함대가 파도바까지 진군하는 사이에 피렌체가 그동안 상실했던 토스카나 지역의 영토를 점차 회복하고 리구리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결국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도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로마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AD 1426년 12월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만 하였다. 


제2차 롬바르디아 전쟁

AD 1427년 5월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 카살마조레를 점령했다. 그리고 밀라노에 고용된 콘도티에로인 니콜로 피치니노가 베네치아의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를 상대로 고톨렌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초기 전황은 밀라노에게 우세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반격에 나서서 7월에 카살마조레를 탈환하고 파르마 영주 오를란도 팔라비치노와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가 밀라노를 공격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몬페라토 변경백인 조반니 자코모 델 몬페라도 역시 동쪽에서 밀라노를 공격했다. 

이에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도 콘도티에로인 카를로 말라테스타를 고용하여 밀라노 군을 이끌게 했지만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의 베네치아 군에게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이 전투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AD 1428년 4월 페라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에게 베르첼리를 넘기고 그의 사위가 되기로 하면서 사보이아 공국을 베네치아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고 전쟁을 끝냈다. 
 

제3차 롬바르디아 전쟁

AD 1431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콘도티에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토스카나의 주요 도시인 루카를 공격하도록 하여 3번째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피렌체와 베네치아 간의 동맹이 재건되었고 베네치아 출신의 신임 로마교황인 에우게니우스 4세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도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앙숙인 제노바를 끌어들여 피렌체에게 선전포고하도록 했고 콘도티에로로 니콜로 피치니노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재고용하여 베네치아의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와 맞서도록 하였다. AD 1431년 5월 17일 피렌체-베네치아 동맹군이 손치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모나에서 밀라노 군이 승리를 거뒀고 특히 포 강에서 베네치아 함대가 충격적인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비록 AD 1431년 8월 27일 베네치아 함대가 산프루투오소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지상에서는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가 전면전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에게 매수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기에 11월 25일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가 밀라노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고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향했는 데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가 이를 지원하면서 의심은 더 커졌다. 결국 프란체스코 부조네 다 카르마뇰라는 직위가 정지된 채 소환되었고 AD 1432년 3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사이에도 전황은 밀라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AD 1432년 11월 델레비오 전투에서 밀라노 군이 대승을 거뒀다. 결국 AD 1433년 5월 페라라에서 다시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밀라노는 앞선 2번의 전쟁의 손실을 모두 보충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베네치아의 도제인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와 피렌체를 이끌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모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사임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겨우 도제 자리를 지켜내었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는 반대 세력인 알비치 가문으로부터 군주처럼 군다는 죄목으로 탄핵당해야 했다. 그러나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막대한 뇌물을 뿌린 덕분에 사형만은 겨우 피한 채 추방령으로 감형받아 파도바에 유폐되었고 다시 베네치아로 이동하여 군주와 같은 대접을 받은 후 막후공작을 통해 1년 뒤 선거를 조작하여 추방령을 취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화려하게 피렌체로 복귀하여 알비치 가문을 숙청하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제4차 롬바르디아 전쟁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3차 롬바르디아 전쟁에서 활약한 콘도티에로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중용하여 AD 1433년 자신의 외동딸 비앙카 마리아와 약혼까지 시켰지만 여전히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이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AD 1434년 로마교황령인 안코나를 함락시킨 후 로마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로부터 도시 대리인 칭호를 받자 즉각 로마교황군으로 전향했고 AD 1438년 가르다 호수 전투에서 밀라노 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베로나를 점령했다. 한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떠나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베네치아의 콘도티에로였던 잔 프란체스코 곤차가를 영입해 왔고 다른 콘도티에로인 니콜로 피치니노에게 브레시아를 포위하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밀라노 군은 토스카나 지방에서 여러 차례 패했고 AD 1440년 6월의 손치노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전황이 베네치아에게 유리해지는 듯이 보였다. 

이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한때 사위로 삼으려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화해를 추진했다. 그리고 AD 1441년 니콜로 피치니노가 키아리에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수비대를 괴멸시키면서 다시 전황이 역전되었다. 이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마르티넨고를 포위하고 비스콘티 가문이 소유한 피아첸차의 권리와 마르티넨고를 교환하자고 제안했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해가 성사되었다. 이제 AD 1441년 10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딸 비앙카 마리아와의 미루었던 결혼이 마침내 이루어졌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양 측의 중재인 역할을 맡으면서 같은 해 11월 크레모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베네치아는 라벤나를, 피렌체는 카센티노를 지켜냈으며 많은 전공을 세운 니콜로 피치니노는 파르마의 오를란드 팔라비치노를 영지로 받았으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노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더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지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밀라노 장악

정작 밀라노와 피렌체-베네치아 간의 전쟁이 끝나자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사이에 다시 불화가 발생했다. 그러던 중 AD 1441년 아라곤 왕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자 AD 1442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나폴리 왕위를 노리는 프랑스 앙주 가문의 르네와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나폴리 왕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베네치아를 버리고 돌아오는 조건으로 밀라노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편을 바꿔가며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였으나 AD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병에 걸려 죽음에 임박하고 베네치아 군이 다시 밀라노를 위협하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서둘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서둘러 밀라노로 향했지만 미처 도착하기 전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마음을 바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아닌 나폴리 왕국을 차지한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5세(나폴리 왕으로서는 알폰소 1세)를 후계자를 지명한 채 사망했다. 그러나 밀라노 시민들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나폴리 왕국의 알폰소 1세를 모두 자신들의 군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반란을 일으켜 공작 작위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밀라노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聖)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을 딴 '암브로시아 공화국(Ambrosian Republic)'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탈환을 노리자 AD 1449년 밀라노가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이에 분노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봉쇄해 버렸다. 이로 인해 발생한 식량 부족 때문에 밀라노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였고 결국 밀라노 의회가 굴복한 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 공작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수용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AD 1450년 2월 26일 밀라노에 입성하면서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밀라노를 지배한 비스콘티 가문이 무너지고 새로운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로디 조약 체결과 이탈리아 동맹 결성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차지하자 오랫동안 밀라노와 대립하던 베네치아와 밀라노 공작 작위를 노리던 나폴리 왕국의 알폰소 5세가 서로 동맹을 맺고 사보이아와 몬페라토까지 끌어들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당초 베네치아의 동맹이었던 피렌체에게 접근하여 피렌체를 지배하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고 만토바, 제노바까지 연합하며 베네치아-나폴리 왕국 동맹에게 맞섰다. 이렇게 되자 AD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최종적으로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의 패권이 위협받게 된 베네치아가 전쟁을 그만두기를 원했고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도 마찬가지로 많은 재정만 소모되는 전쟁을 끝내기를 바랐다. 

AD 1454년 4월 로디 조약이 체결되면서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벌어졌던 오랜 분쟁이 종식되었다. 로디 조약에 나폴리 왕국, 피렌체도 서명하면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그 대신에 베네치아는 브레시아와 베르가모를 되찾았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는 오랜 분쟁을 끝내며 밀라노 공국와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에 의한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유서 깊은 나머지 세력인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아 가문, 만투아-몬페라토의 곤차가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은 주도권을 상실한 채 로디 조약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로디 조약은 AD 1454년 8월 '이탈리아 동맹(Italic League)'으로 변경되었고 이듬해 3월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5세까지 가입하면서 이탈리아 전체 도시들의 25년간 상호방위조약으로 재편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탈리아 패권 성립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락


로디 조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는 베네토 주를 비롯하여 프리울리, 베르가모, 크레모나, 트렌토, 라벤나, 이스트라 반도 및 달마티아에 이르고 해외 영토도 발칸반도의 에우보이아와 에지나 등지를 거점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AD 1454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그동안 누리던 동지중해 무역의 특권을 상실하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AD 1463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의 베네치아 요새가 파괴되었고 AD 1470년에는 에게 해의 주요 거점이었던 에우보이아를 상실했다. AD 1475년 베네치아로 향하는 입구에 해당하는 알바니아의 스쿠타리가 함락되면서 프리울리까지 오스만 제국에게 유린되자 베네치아로서도 더 이상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포기한 채 AD 1479년 1월 강화 조약을 맺고 아르고스, 에우보이아, 렘노스, 스쿠타리의 영유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AD 1499년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AD 1499년 8월 오스만 제국의 제독인 케말 레이스에게 안토니오 그리마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가 이오니아 해에서 벌어진 존치오 전투(사피엔차 전투 혹은 제1차 레판토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케말 레이스의 오스만 함대에게 AD 1500년 이오니아 해의 두 눈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거점인 모도네와 코로네마저 모두 점령당하면서 이제 베네치아는 안마당인 이오니아 해의 재해권마저 상실할 위험에 처했고 오스만 제국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얼마 남지 않았던 거점을 모조리 점령당했다. 비록 AD 1503년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지만 이제 동지중해 무역을 위해서 오스만 제국에게 공납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그동안 누리던 동지중해의 독점적 무역 권리를 송두리채 상실하고 말았다. 더구나 AD 16세기초 대서양을 통한 신항로 무역망이 개척되면서 지중해 무역의 중요성마저 사라지면서 베네치아는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탈리아 전쟁과 북이탈리아 자치 도시들의 쇠락




나폴리 왕국은 AD 1441년 아라곤 왕 알폰소 5세에게 점령당한 이후 아라곤 왕국과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으나 알폰소 5세가 AD 1458년 임종 시 아라곤 본국은 동생인 후안 2세에게 넘기는 대신에 나폴리 왕국은 자신의 서자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물려주면서 다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옛 앙주 가문의 지배를 핑계로 나폴리 왕위를 요구하고 있었고 AD 1494년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를 기회로 나폴리 왕위를 노리고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 간의 대결에 휘말리면서 경제적 기반은 흔들거리고 정치적 독립성마저 위협받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먼저 샤를 8세가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북이탈리아를 아무런 제지없이 통과한 후 나폴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나폴리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이 일어나자 이탈리아 전체의 공분을 샀다. 이에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교황청, 아라곤 왕국,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를 상대하기 위해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하였고 밀라노마저 프랑스를 배신한 채 이에 가담하였다. 이제 고립될 위기에 몰린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비록 AD 1495년 7월에 벌어진 포르노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전리품을 나둔 채 서둘러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나폴리 왕국은 다시 해방될 수 있었다.


AD 1498년 샤를 8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게 된 루이 12세가 AD 1499년 밀라노를 공격했고 AD 1500년 새로운 밀라노 공작인 루도비코 스포르차(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차남)가 포로로 붙잡힌 채 8년 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밀라노는 프랑스의 차지가 되면서 북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나 프랑스가 노리던 나폴리 왕위는 AD 1504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차지하였다. 더욱이 AD 1508년 신성로마황제가 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1세가 옛 신성로마황제들처럼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이탈리아 전쟁은 이제 프랑스, 아라곤 왕국, 신성로마제국이 서로 다투는 복잡한 양상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전쟁은 밀고 밀리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번번히 프랑스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등장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부계 쪽으로는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아의 손자가 되었고 모계 쪽으로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의 외손자가 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부르고뉴,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상속받으면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하여 AD 1521년 밀라노를 점령하였고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차남인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를 복위시키며 밀라노를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이제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을 대표하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탈리아 패권 성립



카를 5세가 AD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대승을 거뒀고 AD 1527년 황제군에 의해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 로마 약탈)가 일어나면서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세력도 완전히 붕괴시켰다.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어쩔 수 없이 카를 5세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를 청할 수 밖에 없었고 프랑스도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에도 밀라노는 스포르차 가문이 통치하도록 허용되었지만 AD 1535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 소유로 몰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에 이어서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가 되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이 성립되었다. 이는 로마교황령과 피렌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탈리아 지역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AD 1556년 카를 5세가 사망할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광대한 영지가 나뉘면서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의 오스트리아 계열과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스페인 계열로 나뉘게 되자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 공국은 스페인의 지배 영역으로 편입된다.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지배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독재 체제 구축


코시모 데 메디치는 밀라노를 장악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동맹을 체결하여 그의 군사 지원을 통해 AD 1458년 8월 반대 세력의 쿠데타도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비록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워진 '100인 위원회(Cento)'을 구성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독재자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의 통치기간 동안 피렌체의 산업과 문예가 크게 진흥되었기 때문에 AD 146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사망하자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아이(Pater Patriae:국부)'라는 호칭이 붙여 주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죽은 이후 그의 권력은 아들인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이어졌으나 피에로는 어릴 때부터 통풍을 앓고 있어 고작 5년 밖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AD 1469년 피에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21살의 나이에 권력을 계승하게 되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통치와 르네상스의 번영


로렌초 데 메디치는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함께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했는 데 기존의 방식대로 교묘하게 법률에 따라 통치하는 겉모습을 유지한 채 사실상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지만 사육제, 무도회, 마상 시합, 결혼식, 연회 등을 계속 열어 피렌체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던 중 AD 1478년 금융업에서 메디치 가문과 경쟁 관계에 있던 파치 가문에서 로마교황 식스투스 4세의 지지를 받아 로렌초 데 메디치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비록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살해당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피렌체 시민들을 선동하여 암살 음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암살에 가담했던 사제 2명이 사망하자 이를 핑계로 로마교황 식스투스 4세는 파문령으로 피렌체를 협박하면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신변을 넘기도록 요구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는 대담하게도 로마교황 식스투스 4세의 동맹인 나폴리 왕 페르난도 1세를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로마교황 식스투스 4세도 어쩔 수 없이 로렌초 데 메디치의 피렌체 지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로렌초 데 메디치는 밀라노와 같이 공작 작위를 획득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대신에 기존의 100인 위원회를 보다 통제하기 쉬운 70인 위원회로 변경하며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치세 동안 피렌체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이자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는 데 그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예술가들에는 보티첼리,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있다. 이 덕분에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AD 1492년 사망하면서 장남인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자신의 권력을 물려주면서 세습 체제도 확립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직계 단절과 방계의 토스카나 대공국 수립


피에로 데 메디치는 친(親) 프랑스 정책을 펼치다가 AD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 때문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선동에 따라 밀라노에서 추방당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피렌체가 로마교황에게 맞서기 위해 열린 피사 공의회를 지지하자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와 친분을 맺고 있던 추기경인 동생 조반니 데 메디치가 AD 1512년 교황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공격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피렌체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무혈입성하여 그대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AD 1513년 조반니 데 메디치가 로마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자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피렌체의 통치권을 넘겼다. 이렇게 하여 메디치 가문은 로마교황까지 배출하는 명문 가문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지만 로마교황 레오 10세가 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것 때문에 AD 1521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촉발하게 된다. 

AD 1516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피에로 데 메디치의 아들인 로렌초 2세가 피렌체의 군주가 되었고 로렌초 2세 역시 AD 1519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추기경인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다시 피렌체의 군주가 되었다. AD 1521년 로마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한 이후 로마교황 자리를 하드리아누스 6세에게 잠시 빼앗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AD 1523년 11월 줄리오 데 메디치가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되었다. 대신에 피렌체 군주 지위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에게 넘겼는 데 그는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AD 1532년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는 사악하고 방탕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AD 1537년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로부터 시작된 직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메디치 가문의 방계로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생인 대(大) 로렌초의 증손자인 코시모 1세가 AD 1537년 피렌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코시모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로부터 그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AD 1567년에는 로마교황 피우스 5세에게 이단 혐의를 받고 있던 피렌체의 종교개혁가 피에트로 카르네세키를 종교재판소에 넘긴 대가로 2년 뒤인 AD 1569년 토스카나 대공으로 임명받게 된다. 이제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세습하게 된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지배가 AD 18세기까지 이어지지만 AD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남계 혈통이 단절되면서 이후 토스카니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로 최종적으로 흡수당하게 된다. 

 

 

르네상스 운동

르네상스 운동의 시작


AD 14세기에 이르면서 중세를 지배하였던 봉건 제도와 로마카톨릭 교회가 더 이상 유럽 세계의 근간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자치 도시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옛 로마 시대의 질서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는 데 이러한 사상은 처음에는 서로 대립하고 있던 피렌체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그 양상은 서로 정반대였다. 먼저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장인 클루초 살루타티는 로마공화정 시대를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기로 규정하고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을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독재자로 취급하며 독재자로부터 자유를 수호할 것을 피렌체 시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반대로 밀라노 측에서는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을 수습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비스콘티 가문이야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존재라며 그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이렇게 관점의 차이는 보였지만 양측 모두 고대 로마 시대를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통하여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정치와 도덕 원리를 추구하는 인문주의 지적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시민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 사상으로 발전한 것을 역사적으로는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프랑스어: Renaissance /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운동이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운동은 신 중심의 중세 문영을 인간 중심으로 회귀시켰다는 점에서 정치사상의 성격도 띄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과 더불어 유럽 사회에서 중세를 종식시키고 근대를 출범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는 데 AD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다수의 학자들이 중요한 서적과 필사본,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으로 지니고 이탈리아로 피신해 오면서 단숨에 해결되었다. 또한 밀라노와 피렌체의 지배자가 된 스포르차 가문이나 메디치 가문에서 르네상스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미술과 건축분야 등에서 탄력을 받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의 예술가에 의해서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정신이 손쉽게 유럽 각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밖의 르네상스 운동


이렇게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 자치 도시의 경제적 번영 속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AD 16세기에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르네상스는 위기를 맞이했다. 특히 AD 1527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황제군에 의해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약탈당하고 많은 예술품이 도난당면서 사실상 르네상스 운동은 종말을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프랑스와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여러나라가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접목시키며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선 비교적 교회 세력이 강력했던 프랑스에서는 엄숙한 교회에 대한 반발로 프랑수아 라블레의《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Gargantua et Pantagruel)》처럼 난잡하고 반(反) 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의 세속적인 면을 보여주거나 미셸 몽테뉴의《수상록(Essais)》와 같이 신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고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강한 귀족적, 궁정적 성격을 띄며 훗날 이어지는 절대왕정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의 르네상스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를 찬양한 에드먼드 스펜서의 대서사시 《페어리퀸(Faerie Queene)》의 예에서 보듯이 절대주의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로마교황의 개입이 심각했던 독일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초대 교회의 순박함을 동경하는 종교적 색채를 띄기도 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종교 개혁에 휘말리면서 단명하였다. 또한 유난히 로마카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스페인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Don Quixote)》와 같은 소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르네상스 운동은 나라에 따라 그 성격이 많이 다르며 그 전개방식도 다양하였지만 고전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켰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르네상스 운동은 AD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의 발달로 이어져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아이작 뉴턴 등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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