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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일 극작가, 시인, 연출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코카서스의 백묵원, 싸구려 오페라, 브레히트 서사극

Jobs9 2022. 9. 2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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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독일의 극작가, 시인, 연출가


출생 1898년 2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동베를린
국적 독일 제국
동독 (1949 - )
바이마르 공화국
오스트리아 (1950 - )
언어 독일어
직업 극작가, 작사가, 각본가, 무대 연출가, 시인, 리브레토 작가, 문학 평론가, 작가, 저자, 영화 감독, 감독
활동기간 1918년 ~ 1956년
장르 극작, 희곡, 시문학
자녀 Stefan Brecht, Hanne Hiob, 바바라 브레히트 샬, Michel Berlau, Frank Banholzer

 

Bertolt Brecht (1898 – 1956)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이자 연극 개혁가였다. 소년기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917년 가을 뮌헨 대학교 재학 중 1918년 10월-1919년 1월 9일에 걸친 짧은 군복무를 마친 뒤, 의학 공부를 버리고 창작과 연극의 길을 택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자 독일을 떠나 15년이라는 긴 망명길에 올랐다. 1947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서지만, 혐의를 벗고 스위스로 갔다. 브레히트는 1949년 동독을 종착지로 선택하고 동베를린에서 극단 베를린 앙상블을 창설했다.

브레히트는 극작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시인이었다. 시인 미하엘 호프만은 그의 시가 “지적이고, 압축적이고, 각색이 용이하여 연극에 쓰였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시로서 기능한다”고 평했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브레히트는 현존하는 독일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극작가로서는 아마도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라고 극찬했다. 

 

 


독일의 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 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이다.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생애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첫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첫작품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사천(四川; Szechwan)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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