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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원인, 왕위 계승권, 가스코뉴 지배권, 플란데런 지배권, 스코틀랜드 문제

Jobs9 2023. 1. 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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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지속해서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다.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프랑스 기사단 vs 온갖 얍삽한 방화 & 노략을 자행하는 잉글랜드 약탈군들'이 이 전쟁 초기의 이미지였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수 1600만 이상의 엄청난 강대국이었고, 잉글랜드는 4~500만 명인 데다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Pontvallain) 전투에서는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때의 잉글랜드-프랑스 대립이 근세기 유럽의 분쟁의 대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은,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조라는 집단이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이 각자의 국경선과 민족 성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 두 라이벌의 외교 싸움에서 촉발되는 유럽의 각종 분쟁,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양 국가를 지원하면서 얻은 엄청난 황금으로 일으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십자군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변화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백년전쟁 원인

 

왕위 계승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은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큰형의 외손자이자 나바라의 왕인 샤를(카를로스 2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나바라의 샤를이 상속권자지만, 살리카법에서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부정함으로써 결국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 왕위를 계승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살리카법을 무시하고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더라도 에드워드 3세의 계승권은 나바라의 샤를 다음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할 약한 명분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는 13세기 동안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시도하면서 잉글랜드뿐 아니라 변경의 자치적인 귀족들과 왕국에 인접한 독립세력들의 반발을 산 데다 14세기 초의 대기근으로 사정이 많이 나빠진 프랑스 왕실에는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 되었다.

 

 

가스코뉴 지배권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여기에 가스코뉴가 더해졌다.

가스코뉴 지방(현재의 프랑스 남서부지역) 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307년 세입은 약 17,000파운드스털링(10만 투르리브르)였다. 참고로 잉글랜드 왕령지 지대 수입이 연 2만 파운드 정도고, 평시의 양모 관세 수입이 연 11,000파운드 정도였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두고 양국이 치고박은 건 당연히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1201년 ~ 1259년, 1226년 ~ 1243년, 1294년 ~ 1298년, 1324년 ~ 1327년에도 이미 전쟁이 있었다. 특히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벌인 첫 전쟁은 프랑스가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를 이기고 1215년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런던을 일시 점령해 대관식을 목전에 둘 뻔도 했다. 이는 존 왕의 급서와 헨리 3세의 즉위로 저지되었으나, 훗날 헨리 5세가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200년 만에 되갚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 마셜의 구식 봉건 규범은 새로운 국가주의의 흐름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가 1217년 헨리 3세의 섭정으로서 프랑스의 루이 왕자와 잉글랜드의 반역 귀족들의 군대와 온건한 조건의 평화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노르망디를 잉글랜드 왕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계속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물론 윌리엄은 자신의 주군이 노르망디를 되찾는 것을 응원했을 것이지만, 그는 그 문제를 자신의 귀족적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서는 탁상공론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이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의 토지를 동시에 보유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통치권(sovereignty)"은 "영주권(lordship)"보다 더 미약하고 비실제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고, 윌리엄이 죽은 후 헨리는 그의 우유부단함을 비판했으며 1241년에는 윌리엄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그것은 반역이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Joseph Gies, 《Life in a Medieval Castle》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통치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Kenneth Alan Fowler 


게다가 중세 후기의 경제 성장과 상업의 발달로 봉건적 경제구조와 더불어 봉건적 정치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했고, 13세기 동안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가 동시에 진행된 결과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간의 전통적인 봉건적 관계가 지속될 수 없게 되면서 정치적 타협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통치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보편적인 정치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파리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한편 가스코뉴인들도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잉글랜드의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것은 아니라서 13세기 동안 이미 수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가까운 곳에 있는 프랑스 왕의 편에 완전히 붙는 대신 먼 곳에 있는 잉글랜드 왕의 신하로 남은 채 줄타기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알고 있었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소환 명령에 불응했고, 결국 소환을 취소하는 대가로 필리프의 다른 권리들을 인정하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곧바로 통수를 쳐서 권리만 인정받은 채 에드워드를 재소환했으며, 결국 같은 해 전쟁이 벌어졌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1303년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결국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두 왕 중 한쪽이 가스코뉴의 통치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될 수 없었다. 분쟁은 계속되었고 어중간한 타협이 반복될수록 갈등은 깊어져 갔다.

프랑스에 비해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잉글랜드의 왕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어는 공격. 즉 끝없이 밀려오는 프랑스군을 방어하다가 말라죽는 것보다는 사방에서 동맹을 끌어들이고 자신도 직접 프랑스 북부를 침공해서 파리와 일드프랑스를 위협함으로써 프랑스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자 대전략이었다. 앞서 이 전략을 사용한 에드워드 1세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손자인 에드워드 3세에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통해 단련된 군사들과 발루아 왕조의 비교적 약한 정통성, 그리고 나바라의 왕 샤를의 내부 트롤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19세기경에는 (중세에 대한 전통적인 폄훼의 연장으로)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에게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백년 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거의 모든 군사작전은 약탈물에 대한 욕심과 개인의 기분에 따른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에 불과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찰스 오만의 《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가 대표적이다. 무려 1885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토크멘터리 전쟁사 같은 현대의 역사 교양프로에서도 오만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장궁병이나 하마기사 같은 무기체계보다는 잉글랜드군의 행정 조직의 정교함과 군사작전의 전략적 타당성에 주목한다.

 

 

플란데런 지배권


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워낙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 항상 대립이 존재했다. 결국 1300년 플란데런은 프랑스에 합병되었지만 플란데런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과거엔 플란데런 상인들이 전쟁을 조장했다는 배후 상인설이 잠시 반짝했지만, 백년 전쟁은 원인이 한두 개가 아닌 데다 정치에 대한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은 군산복합체 음모론에 기반한 음모론일 뿐인지라 결국 묻혔다.

 


스코틀랜드 문제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스코틀랜드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샤를 4세가 죽은 다음 해 바로 로버트 1세가 죽자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1329 ~ 1371)가 1334년 프랑스로 도망치자 잉글랜드는 데이비드 2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잉글랜드는 맞불을 놓는 식으로 필리프 6세(1328~1350)의 이복동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이에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백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 문제로 치열하게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프랑스를 전쟁터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백년 전쟁의 원인
중세에는 어떤 왕이 자신의 왕국 밖에서 작위를 상속하면 다른 왕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1066년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 프랑스 영토 내에 많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하여 양국 사이에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특히 기옌(현재 가스코뉴) 지방과 플랑드르는 분쟁의 씨앗이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기옌(프랑스 남서부) 공작이자 퐁티외 백작이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즉각 반발하였고, 두 나라의  대립이 깊어졌다. 
 


백년 전쟁의 전개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은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지대로 프랑스가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그 보복으로 당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영국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여 파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두 나라 군사는 1346년 크레시 평원에서 대접전을 벌였고,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군은 그 기세를 몰아 칼레 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걸국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그 뒤 두 나라에 흑사병이 유행한 데다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었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다.



△푸아티에 전투: 1356년 9월 19일 프랑스의 장2세는 영국보다 우세한 전력을 보유고도 참패를 당하였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늪지의 수렁에 빠져 꼼짝못한 채 영국 흑태자군 궁수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장 2세 자신도 프랑스군의 마지막 돌격을 지휘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가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흑태자는 1356년 9월 19일 장 2세가 이끈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당시 자크리의 난 등 국내 문제로 궁지에 빠진 프랑스는 결국 1360년 영국과 브레트니- 칼레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아키텐과 가스코뉴 등 서부 프랑스의 3분의 1을 영국에 할양하였다.
 
그러나 조약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장 2세가 감금 도중 죽었고, 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샤를 5세는 조약 준수를 거부해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1377년 영국은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고, 프랑스는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1380년 이후 두 나라는 각각 내부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잠시 전쟁이 중단되었으나, 플랑드르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결국 폐위당하고(1399), 그의 사촌인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정신병 발작으로 통치를 못하게 된 샤를 6세 대신 실권을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전 상태에 이르렀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영국군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쳐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다. 헨리 5세는 이를 계기로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임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1428년 영국군은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써,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1429년 잔 다르크의 구원병이 영국군의 오를레앙 포위를 풀게 함으로써 전황은 프랑스의 승리로 전환되었다.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430년 부르고뉴파에게 붙잡힌 잔 다르크는 영국 측에 인도되어 이단죄로 재판을 받은 후 1431년 화형당하였다.
 
이후 샤를 7세는 영국의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장미 전쟁을 틈타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1453년까지 아키텐 전역을 점령하였다. 1453년 보르도 함락을 끝으로 백년 전쟁은 끝났고,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칼레는 1558년에 프랑스로 넘어갔다.



백년 전쟁의 영향

백년 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중앙 집권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 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 이는 귀족 세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와,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을 굳혀 주었다. 또한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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