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부관, 카이사르, 아그리파
로마제국의 장군·정치가로서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부관(副官)이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는 데 으뜸 가는 공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의 재위중에는 여러 반란을 진압했으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로마 제국 여러 지역의 행정을 관할했다. 평범한 가문의 출신이지만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던 아그리파는 로마 귀족계급의 미움을 샀다. 스스로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에서 주의깊게 종속적인 역할을 견지했지만 그밖에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의 초기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사실상 전혀 없고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당하던 때에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황제)의 동료로 있었다는 것이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선포했다. BC 43년에 아그리파는 평민계급을 대변하는 호민관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직책의 권한으로 당시 동방에 나가 있던 카시우스를 고발한 듯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핵심적인 군사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BC 41~40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를 상대로 싸웠고, BC 40년에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주로 로마의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행정관)를 맡았으며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사이의 협상을 타결짓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2년간 그는 로마를 떠나 아퀴타니아와 라인 지방에서 활약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방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BC 37년 콘술(집정관) 직책을 맡았다. 그해 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타렌툼에서 협정을 맺었으며 바로 이 시기에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부유한 친구 티투스 아티쿠스의 딸과 아그리파의 결혼을 주선했던 것 같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장군의 아들 식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바다에서 저지하려다 실패했으며 따라서 아그리파가 해상작전의 책임을 맡았다. 아그리파는 나폴리 만에 있는 푸테올리에 훌륭한 항구를 건설하고 BC 36년 밀라이와 나울로쿠스에서 2차례 해전을 벌여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폼페이우스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아그리파는 금관을 받았다. BC 35~34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달마치야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도 아그리파가 탁월한 공로를 세웠다. BC 33년에 아그리파는 로마에서 아이딜리스[造營官:공공건축과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행정관]를 지냈는데 이는 앞서의 콘술보다 훨씬 하급 직책이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는 동안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해 목욕탕을 짓고 하수도를 청소하고 수도시설을 개량해 사람들이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아그리파는 함대 지휘관으로서 옥타비아누스의 승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아그리파는 시인들의 후원자였던 마이케나스와 함께 도시의 행정을 맡아보았다. BC 29~28년 아그리파와 옥타비아누스는 공동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원로원의 숙정(肅正)을 단행했다. BC 28~27년에 아그리파는 다시 콘술을 맡았으며 2차례 모두 옥타비아누스(BC 27년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와 함께 공동 재임했다. 정치체제의 위기가 닥친 BC 23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들자 자신의 옥새 반지를 아그리파에게 선물했다. 이로써 아그리파는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했다. 아그리파는 앞서 4~5년 전에 아내(아티쿠스의 딸)와 헤어지고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大)마르켈라와 재혼했으나 다시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삼았다. 그 직후 아그리파는 레스보스 섬에 있는 미틸리네에 가서 동방의 행정 업무를 관장했다. 그당시 아그리파의 헌법적 권한(임페리움)이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원로원이 BC 23년 동방의 속주 총독보다 높은 '임페리움'의 지위(임페리움 마유스)를 그에게 주었다고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로마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아그리파가 당시 미틸리네에 머문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조카 마르켈루스를 편들어 아그리파를 추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아그리파는 이내 로마로 돌아왔으며 BC 22년에 황제가 친히 동방으로 떠나자 그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돌아오기 전인 BC 19년에 아그리파는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떠났고 마침내 스페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던 칸타브리아인들을 진압하는 전과를 올렸다.
BC 18년에 로마로 돌아온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보유하고 있었던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을 똑같이 받았다. 아마 임페리움 마유스의 지위도 그가 BC 23년에 받은 것이 아니라면 이때 받았을 것이다. 그는 BC 17년에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루디사이쿨라레스(100년제)에 참가한 뒤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동방으로 돌아갔다. BC 15년에 그는 대왕 헤로데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유대를 방문했다. 동방에 머무는 동안 레바논에 있는 베리투스와 헬리오폴리스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어서 그는 흑해 연안에 있는 보스포루스 왕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손 폴레모를 왕으로 앉혔다. 헤로데는 보스포루스 사태 때 함대를 이끌고 아그리파를 지원했으며 그 일이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소아시아 서부의 해안지방을 함께 둘러보았다.
BC 13년에 아그리파의 호민관 임기는 다시 갱신되었고 이때는 확실히 임페리움 마유스의 지위를 받았을(또는 갱신) 것이다. 그는 판노니아에 분란이 일어나자 출정을 해야 했으나 BC 13~12년 혹독한 겨울 추위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BC 12년 3월에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료였던 그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몸소 했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 연설의 일부분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내린 온갖 영예로운 찬사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아그리파가 없었더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로마는 그가 수도·하수도·목욕탕을 돌보는 데 쏟았던 아낌없는 노력을 기억했다. BC 20년대 중엽에 그는 유명한 판테온을 완성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의 다섯 아이들 중에서 대(大)아그리피나는 황제 칼리굴라의 어머니이며 황제 네로의 외할머니였다. 자서전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록한 방대한 지리 자료는 지리학자 스트라보와 대(大)플리니우스의 현존하는 저서에 영향을 미쳤다.
아그리파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석고상 중 하나. 양감은 풍부하지만 머리의 굴곡이 적어 쉽기 때문에 주로 입문용으로 쓰인다. 원본은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친구, 사위였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석상이다.
한 때 입시미술계를 주름잡았던 영광의 얼굴들. 소묘나, 석고정물수채화 등의 입시과목에서 따라 그리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오며 너무 획일화된 방법이라고 지양하는 추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시대의 대리석, 청동 인물상을 석고로 복제한 것의 부분들이며 그 당시의 유명인들이 많다. 고대 로마의 인물상은 일종의 홍보물로, 로마에서 석고로 만든 머리를 각 지방으로 보내면 그 곳에서 머리를 제대로 된 재료로 조각하여 복제한 뒤 몸통, 팔다리 등을 각기 다른 조각가들이 대량으로 조각해서 조립하였기 때문에, 같은 인물이라도 조금씩 다른 버젼이 존재하는 것도 특징. 서구에서 장식이나 미술 교육용으로 복제하기 시작한 것이 원류로, 이에 영향받은 한국, 일본의 미술입시계에도 도입. 다만 입시미술계에서 불리는 이름들은 정확한 고증 없이 닮은 이미지만 가지고 부르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
미술학원이나 학교 미술실에도 몇 개쯤은 필수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게 밤에 보면 은근히 무섭다보니 미술실에 관련된 괴담이나 납량특집 등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고상의 머리 부분이 사실은 진짜 사람의 머리로 만들어졌다거나 하는 괴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