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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일본어설, 고구려어(부여어족), 야요이, 알렉산더 보빈, 원시 한반도어설,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

Jobs9 2022. 1. 1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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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일본어(半島日本語; Peninsular Japonic)설이란, 과거에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족(Japonic) 계통의 언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영어 명칭이 Peninsular Japonic인데, Japanese가 아닌 Japonic임에 유의할 것. 즉, 상기했듯이 한반도에서 일본어(Japanese)가 쓰였던 것이 아니라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Japonic 계열의 언어)가 쓰였을 것이라는 학설이다. Japanese는 일본어 그 자체를 뜻하지만 Japonic은 일본어를 포함한 류큐어 등의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1] 반도 일본어설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이 있고, 해당 학설을 주장한 그의 대표 논문으로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가 있다.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Japonic 계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도래인이고, 이 도래인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 열도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만주에서 남하한 한국어족(Koreanic)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밀려 결국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로 동화·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같은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고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우선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는 없다. 양서(梁書)에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고 서술되어 있으며, '신라는 중국인과 말을 할 때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言語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어 삼국(三國)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고구려-백제-신라 언어동조대의 근거로 보기도 하나. 이 문장은 백제인을 사이에 둔 이중통역으로 볼수도 있다. 20세기 한국 출판업계의 서양문학 일본어 중역처럼 말이다. 백제의 경우 토착 세력인 피지배층과 고구려 유민 계통의 지배층이 서로 다른 언어를 썼다는 이중언어설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 가설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늘날 들어서는 고구려의 변체한문(變體漢文) 문법 구조가 한국어의 문법적 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나 백제 목간에서 현대 한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수사가 확인됨으로써, 이들이 한국어족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인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 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도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재구는 모두 삼국사기 지리지나 일본서기, 삼국지 등 중국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비교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일본서기 민달천황조의 기록을 참고하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고구려-백제어와 한어를 별개로 보는 이중언어설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가 다른 계통이라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백제어, 즉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한다.[3] 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설은 없다.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나 동류의식 자체는 언어계통의 논박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4]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해당 언어의 화자인 문화 그룹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아,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세력으로는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만주족 연구자들[5]이 있으며 이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오야마국
'미오야마(彌烏邪馬)', '사이기(斯二岐)'와 같은 어휘는 한국어 음운과 비교하여 낯설다.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44권에는 '가야에서는 '梁'을 문(門)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加羅語謂門為梁云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량(梁)'이라 이른다.

량은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고 실제 梁이 표기하는 발음은 '돌(twol)'인데 고일본어에서 문을 의미하는 '토(と; 戶)'와는 음운이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가야어-일본어 간의 관계를 추측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울돌목’, ‘돌쩌귀’ 등 순우리말에 문을 돌로 지칭하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고한국어에서도 원래 돌이나 그 비슷한 발음으로 발음했으나 한자어 ‘문’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야어가 한국어족 언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늦게 대체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6]. 즉, 돌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공유했던 어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다 이전에는 규슈대학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郎) 등이 수사의 유사성을 제기한 바 있다. 수사의 유사성은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로서,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가 있는 등. 고구려와 일본어의 수사가 유사하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언어, 문장학 교양서에서 인용되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벡위드 등이 주장한 부여어족 가설도 이러한 어휘 비교를 근거로 했었다.

수사
고구려어
한국 한자음
구결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3
mv
미쓰[밋쯔; みっつ]
5
于次
우차
u-ts
이투
이쓰쓰[이쯔쯔; いつつ]
7
難隱
난은
na-n
나나
나나쓰[나나쯔; ななつ]
10
tv
토워
도[토오;とお]



위의 수사 비교는 모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 이력을 근거로 했다. 《삼국사기》의 지명은 대개 한문을 훈과 음 양 쪽으로 읽던 시기의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명의 고유명사에서 실질 형태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계통 연구에서 상당히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며 실제 '물(勿)'이 '수(水)'와 통한다는 것[8]이나 '달(達)'이 '산(山)'과 통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를 근거로 분리된 수사에 대한 신뢰성이다. '물'과 '달' 같은 후보는 수많은 지명에서 사용되어 표본이 확실하나, 수사의 경우 이를 재구할 수 있는 표본이 굉장히 적다.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숫자 '10'이 '덕'인 이유를 두고 삼국사기 지명 '십곡현(十谷縣)'을 다른 말로는 '덕돈홀(德頓忽)'로 불렀는데, '골 곡(谷)'자가 '조아릴 돈(頓)'과 통하므로 '열 십(十)'이 '큰 덕(德)'이라고 비정했다. 7의 '난은' 역시 '칠중현(七重縣)'을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일곱 칠(七)'이 '난은'이라는 주장이며, '오곡군(五谷郡)'은 '우차탄홀(于次呑忽)',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는 기록에서 각각 5, 3이 이쯔쯔(いつつ)와 밋쯔(みっ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벡위드나 이기문 등이 고구려-백제 계통에서 분리하는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와 매우 가깝다고 추정한 보빈의 경우에는 이 지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어 지명만으로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후자는 다른 지명 기록에서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이 곧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5'의 경우에도 이를 '우차'로 인정하더라도 고일본어 '이투'와의 대응이 문제이다. 이를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기 어렵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9]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10]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이는 백제어가 한국어족이었거나, 일본어족 언어가 백제 시대에는 완전히 단절되었거나, 백제가 이중언어 체계였다는 설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osaham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11],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오히려 한자의 고대어 음가를 생각하면 고구려 독음과 고일본어 독음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외에 반도일본어 어휘 후보로 진지하게 고려되는 고유어 어휘들로는 불(히[12]), 벌(하치), 게(카니[13]), 가마(카마), 쌀(와세[14]). 닭(토리) 등이 있다. 단, 이 중에서 '불'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옛 한자음을 재구해 보면 '火'로 가차된 어휘들의 말음이 [t]였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차한 고유어의 발음이 '불'의 당대 형태와 음이 같았거나 유사했기 때문인데, 이로 볼 때 '불'은 중세 한국어의 '블'을 거슬러서 '*븓'과 유사한 발음으로 소급한다.

이외에도 신라의 지도자 칭호들도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알렉산더 보빈의 추가 추측


상술한 알렉산더 보빈이 추가적으로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일본어족의 조어는 한반도에 넘어온 것보다도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17] 사실 소위 '남방언어'들과 일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지적은 옛날부터 있어서 크라다이어족은 물론이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등까지 묶어서 남방어족(Austric languages)라는 대어족 가설을 세우는 소수 학자들이 있었다. 다만 보빈은 이걸 부정하면서도 크라다이어족과 일본어족은 서로 별개의 어족이기는 하나 고대에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되었기에 접촉에 의해 어휘나 문법요소가 가까워졌을 수 있다며 중국어파 확장 이전의 선사시대 중국 동~남부쯤에서 일본어족의 조어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다만 본인도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단순 가설임에 주의.
6.2.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편집]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로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가 있는데, 이쪽은 가설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벡위드는 일본어와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으로 묶고[18] 오늘날의 한국어는 이 계통에서 철저히 떼어놓았다.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어휘 차용 이외에는 친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어휘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보빈이 지적하듯 그의 분석에는 결함이 많아서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자의적으로 차용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어의 기본적인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는 신라가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표기가 있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본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적었을 뿐인 것도 몰랐고, 국어의 'n+r→ll'의 자음동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였다. 또한 일본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벡위드의 주장은 굉장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일본어와 알타이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 알타이학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원시 한반도어설
한편, 한국 학자 중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 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는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 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 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김방한 교수는 그 기층언어를 니브흐어 등으로 추측했다.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
또 다른 가설로 일본어족의 기원이 한반도 기원의 야요이인의 언어가 아니라 조몬어, 즉 원주민들의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 극히 최근 들어 제기된 새로운 가설로, 2017년 무렵 이가라시 요스케가 주장한 이후 2020년에 Chaubey와 George van Driem에 의해 다시금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은 본래 혼슈 서부의 조몬어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야요이인들과 융합하여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즉, 이 가설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과 달리 야요이인의 언어가 일본어족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몬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보빈의 학설과 비교하면 보빈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건너가 조몬어를 밀어냈지만 이 가설에서는 이주 자체는 같으나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적으로는 야요이인이 조몬인(일본어족)에게 동화되었다고 본다. 

한편, 이 가설을 채택하면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언어, 즉 알렉산더 보빈이 반도 일본어로 본 언어는 일본어족도 한국어족도 아닌 제3의 어족일 가능성이 커진다. 이 경우, 김방한 교수의 '원시 한반도어 가설'과도 많은 부분에서 비슷해진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동안 조몬인의 후계 민족으로 알려졌던 아이누족의 기원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새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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