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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경제, 국민소득, 1인당 실질 GDP

Jobs 9 2023. 5. 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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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경제

 

양적인 성장만을 놓고 볼 때 박 전 대통령 집권 동안의 경제 성적은 가히 경이적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636달러로 20배로 불어났다. 수출은 4천만달러에서 150억달러로 급상승했다. 이 기간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3%에 이르렀다.
이런 실적은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 1차 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였는데, 2% 안팎에 그쳤다고 밝혔다. 또 1차 대전 전야로부터 1·2차 대전, 대공황 등이 끼어 있던 1913~50년까지 주요국 중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았으나 2%에 미달했다고 한다. 1950년 1인당 국내총생산 8.0% 증가 등 1950~70년대에 고도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1955년까지는 전쟁 이전 수준의 회복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지속 기간에서 한국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늘 논란이 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오롯이 ‘박정희 개인’의 업적으로 돌리는 게 합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다. 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릴 수 있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60, 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 전 대통령의 공은 제한적이다. 
박 전 대통령이 시대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모두 그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 전 대통령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  
경제개발계획과 기획원 설립 구상이 2공화국에서 준비돼 있었다곤 해도 박 전 대통령처럼 뚝심 있고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데 따른 정통성 부족을 경제적 성과로 메우기 위해 경제개발에 매진함으로써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개발독재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공6 과4’로 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세계시장이 급속하게 통합되는 때여서 나라 밖의 수요를 적극 활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해외에서 수출로 승부를 걸게 하고 잘하는 쪽에 지원을 더 해주는 유인체계는 국내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과 비교해 정경유착이나 시장 왜곡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던 상황에서 수출에 집중한 것은 관련 분야 노동자들한테도 비교적 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당시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박정희 정부가 타깃(목표)으로 삼은 중화학산업이 실제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된 점은 인정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 집중 육성한 산업이 실제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국제적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 옛 소련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일본의 경우도 정작 정부 차원에서 육성한 산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박 전 대통령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당시 한국의 경제규모와 1인당 실질 GDP

 


박정희 집권 이전 한국의 1인당 실질 GDP는 5.16 군사정변 직전인 1960년에는 세계 46위였다.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의 공정환율(official exchange rate)은 1960년 겨울, 미국에 의해 1달러 500환(50원)에서 1달러 650환(65원)으로 조정되어 불과 1여년 만에 화폐 가치가 77%로 감소하였다.

이때 평가절하 당한 화폐 가치로서, 한국은행에서 집계한 그해 명목국민소득 2조 4,490억 환(2,449억 원)과 명목국내총생산 2조 4,310억 환(2,431억 원)을 미 달러로 환산하면 GNP는 37.6억 달러, GDP 37.4억 달러였고, 세계은행 및 OECD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세계와 비교할 때 39~36억 달러로서, 1960년도 남한의 경제 규모는 105국 중 30위권 초반에 이른다.

그러나 오늘날 개발도상국인 인도와 선진국으로 평가 받는 네덜란드의 경제 규모 격차가 3배이고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탈리아의 차이가 6배란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더 쉬웠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총산출이 아닌 최종재 기준이라는 점에서 통계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60년대에 GDP 순위가 사실상 30위권이었다고 해서 현재의 30위권 국가들과 같은 생활 수준을 가졌다고 하기에도 어렵다. 게다가 1960년대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인구 성장률은 해방에 따른 해외동포 귀국, 월남, 한국전쟁 베이비붐 등의 특수로 경제 생산이 하락하고 정체했음에도 불구, 단기간 만에 타국보다 부쩍 늘어 인구 증가율이 연평균 2% 중반을 넘나들며 세계 수위권에 머물렀고, 특히 1960년~1961년에는 2년 연속 무려 3%를 초과하는 등 수년간 인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음을 필시 따져봐야 한다.

특히 '6.25 전쟁으로 인해 물질적 재산 요소가 다수 파괴되었다'는 단절론자들의 주장이나 이승만 정권의 경제성장이 볼품없었다는 일각의 주장을 고려할 경우, 한국의 경제 규모가 상당했다는 것은 더욱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한국이 최빈국이었다는 상황은 일시적이었던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전후 국민 소득이 100달러 밑으로 추락한 일본에서도 똑같이 목도되었다.

또한 공정 환율로 따질 경우 1960년 이후 한국이 최빈국이었던 기간은 화폐 가치 50% 절하에 따른 1961년과 1962년이 전부였으며, 1인당 GDP가 취학률 및 문맹률과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고려할 때 1960년도 한국이 이미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취학률이 높고 문맹률이 낮은 편이었다. 1960~1992년 세계에서 가장 인적자원 개발률과 경제성장률의 상관성이 강한 나라였다는 UN개발계획의 보고서 역시 이 같은 주장을 입증해주고 있다.

장면 내각-미국에서 두 차례에 걸쳐 650환에서 1,300환으로 반토막난 해인 1961년을 봐도 GNP와 GDP는 22억 달러로 줄어들지만, 경제규모가 40위권 초반으로 진입하였고 1인당 GDP로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10위권의 상대적으로 높은 1인당 GDP를 기록했다. 

1963년에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재)돌파, 절대빈곤선을 월 천 원으로 잡아 농촌의 절대적 인구비가 36%, 전인구 대비 40.9%라고 추산한 한국경제연구원의 연구결과, 1962년 이후 엥겔 계수가 60%(Absolute poverty) 미만으로 관측된 김창남 교수의 한국경제발전론을 봤을 때 해방·전쟁·인구 폭발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특히 한국의 공정환율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미국의 도매물가지수를 가지고 한국만 독자적으로 다시 계산할 경우 브레튼우즈 체제(고정환율제) 당시 국제간 비교가 불가능해진다. 비록 과거로 갈수록 과거추계 값이 왜곡되어 원 용도가 국제 간의 비교는 아니나, 금융자유화 이후를 기준으로 한 1인당 실질GDP나 PPP 등으로 일괄환산해서 따지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도의 사례처럼 고속성장한 국가의 소득이 저성장한 국가보다 훨씬 낮게 잡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표를 참고하면 당시 한국이 특수한 어려움을 겪은 직후였음에도 당시의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해서 한국이 뒤쳐지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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