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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돌리드 논쟁, 인디오, 흑인 노예,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Valladolid debate, 1550년

Jobs9 2024. 3. 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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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돌리드 논쟁, Valladolid debate

바야돌리드 논쟁, Valladolid debate

 

1550년 스페인 서북부의 바야돌리드에서 일어난 논쟁.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수많은 인디오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잔혹한 식민통치가 계속 되자 스페인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이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로 점점 인구가 감소하면서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엔코미엔다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엔코미엔다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던 스페인 대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바야돌리드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저명한 스페인의 석학인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는 "인디오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강압적 방법으로 지배하고 통치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도미니코회 수사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설득과 교육으로 인디오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당대의 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였던 세풀베다는, 아메리카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옹호하던 이였고 이에 맞선 라스 카사스는 1544년 66세이 나이로 치아파스 지역의 주교로 부임했었고 1547년까지 아메리카에 실제로 머물러 있었다. 

세풀베다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군사적 정복을 옹호한 인물이었는데, 1529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십자군 거병을 요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세풀베다로 대표되는 호전적 정신은 에라스뮈스의 평화주의에 맞서 군사적 정복을 옹호한 카프리의 영주 알베르토 피오의 후원을 받았다. 상기한 대로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대가였으며, 이에 따라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적 노예 상태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 것을 역설할 수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노예' 이론을 전개하였고 그 근거로 인디오들의 우상숭배, 식인 풍습, 인신공양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의 토지 소유권 역시 자연법과 국제법에 따라 하느님 앞에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고대 유럽에도 야만적인 그리스-로마, 켈트 게르만 이교도의 우상숭배, 식인 풍습, 인신공양들이 만연했으며, 예수님과 12사도들은 이들 죄인을 사랑과 복음으로 죄악을 회개시켜 교화했었다고 했다. 신대륙의 인디오들도 문명을 쌓은 이성인들이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다고 처벌되어서는 안 되며, 악의적으로 복음의 전파를 막는 이들만이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교황이나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편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타 문명인이 자리잡은 아메리카에 대한 군사적 정복은 합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원주민 교화론자들의 의견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큰 변화가 옛 아즈텍 영역 전체에서 일어났으니, 아즈텍인이 믿던 인신공양의 종교적 메커니즘이, 가톨릭의 성체성사 교리 안에 완벽히 녹아들어, 남미인들의 급속도의 가톨릭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스페인으로 전해지자, 원주민에 대한 차별론은 그 힘을 크게 잃었다.

 

결과 및 의의
논쟁 끝에 교황 특사는 라스카사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인디오에게도 이성과 문화가 있으며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니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따라 인디오를 노예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불법화한다. 

그런데 인디오를 노예로 삼지 못하게 되자, 노예상인들은 "아, 그러면 아프리카인을 끌고와서 노예로 부리면 되겠구나?"라는 신박한 결론을 내린다(...) 이후 아프리카의 중서부 지역의 흑인을 대규모로 노예로 끌고 오며 그들은 바야돌리드 논쟁과 같은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도 논쟁 당시 인디오 대신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흑인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고 노예제 철폐를 주장한다. 당연하게도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무시했고, 흑인 노예 무역 금지를 비롯한 노예 철폐는 한참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다. 

그래도 이 논쟁은 근대 국제법의 탄생에 직결되며 몽테뉴가 1580년에 "야만인의 악행엔 정죄하면서 우리의 악행엔 눈이 멀었다"라고 개탄하는 등, 자기 반성적 태도를 부른다

상기의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 프랑스의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쓴 소설도 있으며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바야돌리드 논쟁, 샘터, 2007). 

 

In April 1550,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and king of Spain, halted Spanish conquests in the Americas. He had scruples; could they be overcome? 

A panel of over a dozen theologians, officials and administrators gathered in the Colegio de San Gregorio in Valladolid to hear the opposing arguments. The two disputants were humanist scholar Juan Ginés de Sepúlveda and Dominican friar Bartolomé de las Casas. Both agreed evangelism, the spread of Christian truth, was the goal; the question was, were war and subjugation a just means to expedite it?  

The debate opened on 15 August 1550 with a three-hour oration from Sepúlveda. He drew on Aristotle to argue that the indigenous peoples of America were ‘natural slaves’, incapable of self-government, and it was Spain’s moral duty to wage war on them, as a prelude to subjugation and Christianisation. ‘They are as inferior to the Spaniards as children to adults, women to men’, he wrote: almost ‘as monkeys to men’.   

Las Casas had recently returned from nearly 50 years in the Americas where, as bishop of Chiapas, he had refused last rites to Spanish colonials whose cruelties appalled him. His response to Sepúlveda lasted five full days. 

Las Casas went so far as to defend human sacrifice, widely seen by the Spanish as proof of barbarism, if not outright evil. ‘Nor is human sacrifice – even of the innocent, when it is done for the welfare of the entire state – so contrary to natural reason that it must be immediately detested’, he wrote. Sacrifice – offering up ‘the greatest and most valuable good, that is, human life’ – was a mark of religious feeling, not irrationality. 

A second session followed in 1551; at least one judge didn’t deliver his opinion until 1557. Conquest and cruelty continued. But still, the debate was a watershed, a point at which we can see the shape of modern questions about human rights. In 1573, Philip II issued a new ordinance regulating all future discoveries by land or sea. It banned the word conquest, recommending pacification instead. In its own way, that was a modern response to the question,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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