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세계 1·2위 인구 대국입니다. 두 나라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질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쌀입니다. 두 나라는 지금도 세계 1·2위 쌀 생산국입니다. 전 세계 총 생산량(7억6965만t)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밀보다 1.7배나 생산성 높은 쌀
벼의 열매인 쌀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됩니다. 쌀의 생산력이 높은 것은 벼의 독특한 생육조건 때문인데요. 벼는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아니면서도 뿌리가 물밑에서 자랄 수 있는 독특한 식물입니다. 물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른바 농사일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잡초 뽑기에서 자유롭습니다. 거기다 논에서 자라는 수생 양치식물인 아졸라(물개구리밥)에 붙어 있는 미생물을 이용해 공기 중 질소를 양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질소는 생물의 생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인공적인 질소비료가 없었던 시절에도 쌀은 질소를 양분으로 삼아왔던 셈이지요.
그래서 쌀은 다른 볏과 식물인 밀이나 옥수수, 보리 등에 비해 매우 높은 수확량을 자랑합니다. 예를 들어 쌀은 1㏊당 생산량이 밀(820㎏)의 1.7배 수준인 1440㎏입니다. 생산 효율성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옥수수(860㎏)보다도 훨씬 많아요.
이런 생산력 덕택에 쌀을 재배하는 지역에는 사람이 몰리고 도시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들에는 다른 곳보다 빠르게 고대국가가 성립할 수 있었지요. 중국은 이미 1500년쯤 인구가 1억을 넘었고, 인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인구가 1억1000만에 달했어요. 반면, 당시 영국·프랑스·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다 합쳐도 5700만명쯤에 불과했어요. 서유럽 국가의 인구가 1억을 넘은 건 18세기 말이라고 해요. 중국과 인도는 이런 막강한 인구를 바탕으로 기원전 1000년쯤 철기 문명을 이룩해냈습니다. 유럽보다 100~200년이나 앞섰던 거죠.
사람이 많이 모이면 지혜가 싹트는 법이죠. 중국이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 같은 '세계 4대 발명품'을 내놓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종이는 2세기 무렵, 나침반은 3세기 초중반, 화약은 7~8세기 무렵, 활판인쇄술은 11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됐습니다. 인도는 4세기 굽타 왕국 때부터 벼는 물론이고 사탕수수·목화·후추 같은 '돈이 되는' 작물을 재배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과 인도는 이처럼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왕이 모든 법과 질서에 우선하는 절대왕정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쌀을 통해 거대 자본 축적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지요. 중국에선 이미 기원전 221년 자신을 '왕 중의 왕'인 '황제'로 부르도록 한 진시황이 등장했습니다. 군소 국가들을 정복해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을 세웠죠. 이후 중국 황제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황제는 중화민국을 만든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야 사라졌어요.
인도의 왕들도 4세기 굽타 왕조의 찬드라굽타 2세 때부터 '신들의 왕' 또는 '존귀한 존재'로 불렸어요. 또 불교의 발상지임에도 왕권 강화에 힌두교가 더 적합하다고 보고 힌두교를 적극 장려했지요. 찬드라굽타 2세 이후 인도 왕은 신과 동격이 되었답니다. 기원전 14세기 전후 수립된 신분제인 카스트제도도 갈수록 엄격하게 뿌리 내리기 시작했지요.
농업 생산력 낮았던 유럽에서 꽃핀 상공업
반면 유럽에서는 왕이 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왕정이 17~18세기에만 존재했습니다. 많은 경제학자가 서양에서 동양 같은 절대왕정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낮은 농업 생산성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터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와 비용이 필요한데, 빵을 주식으로 밀을 생산하던 유럽에서는 이런 자본 축적이 어려웠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상품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상업과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경우 11세기 이후 왕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도시들이 곳곳에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길드' 같은 상인 조합의 활동으로 도시가 성장했고, 도시들은 활발하게 무역을 하면서 서로 동맹을 맺고 왕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이 같은 자치도시들이 나중에는 중세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는 1776년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농업 생산력이 높은 중국은 자연스럽게 국부(國富)가 증진됐지만, 토지에서 나오는 잉여생산물에 만족해서 법·제도 개선과 대외무역을 등한시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쌀을 비롯한 농업에서 나오는 잉여생산물만 해도 황제가 쓰기에 충분했다는 거죠. 쌀의 높은 생산력이 훗날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더디게 한 걸림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 유럽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늦었습니다. 쌀이 주식인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해 쌀 생산량이 많지 않았고, 모내기법(모를 이식해서 재배하는 방법)도 조선 후기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시행했어요. 상공업을 천시한 탓에 무역이나 제조업이 발달하지도 못했지요. 19세기 이후 한동안 동양이 서양에 크게 뒤졌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