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전쟁
제1차 대륙회의
참을 수 없는 법으로 인하여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요청에 따라 AD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First Continental Congress)'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식민지 중 조지아를 제외한 나머지 12개 식민지의 대표 56명(뉴햄프턴 식민지 2명,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4명,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 2명, 코네티컷 식민지 3명, 뉴욕 식민지 9명, 뉴저지 식민지 5명,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8명, 델라웨어 식민지 3명, 메릴랜드 식민지 5명, 버지니아 식민지 7명, 노스 캐롤라이나 식민지 3명, 사우스 캐롤라이나 식민지 5명)이 참석하였다.
제1차 대륙회의에 참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대표인 조지 워싱턴와 패트릭 헨리,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대표인 존 애덤스와 새뮤얼 애덤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대표인 조세프 갤러웨이와 존 디킨슨, 뉴욕 식민지의 대표인 존 제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식민지 대표인 에드워드 러틀리지 등이 있다. 다만 가장 외딴 곳에 위치한 조지아 식민지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직까지 영국군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1차 대륙회의에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제1차 대륙회의에 참여한 각 식민지의 대표단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진 채 서로 격론을 벌였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조지프 갤러웨이와 존 디킨슨, 뉴욕 식민지의 존 제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에드워드 러틀리지 등과 같은 온건파는 영국 의회에 압력을 가하여 참을 수 없는 법을 폐지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식민지의 패트릭 헨리, 코넷티컷 식민지의 로저 셔먼, 매사추세츠 주 식민지의 새뮤얼 애덤스 및 존 애덤스와 같은 급진파는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통하여 식민지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1차 대륙회의는 AD 1774년 10월 14일 '식민지 권리 선언(Declaration of Colonial Rights)'을 채택하고 그동안 취해진 일련의 탄압 조치에 대한 철회를 요구한 후 만약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경우 영국 본국과 모든 교역을 중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다만 이 때까지만 해도 식민지인들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까지 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온건파들의 요청에 따라 영국왕 조지 3세에게 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청원서에서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영국 의회와 관리들을 견제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이미 영국 정부는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간주하고 강경하게 진압하려 했기 때문에 별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서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인들과 영국 정부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을 무렵 식민지 정책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던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군 총사령관인 토마스 게이지가 AD 1774년 메사추세스 만 식민지의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토마스 게이지는 이듬해인 AD 1775년 봄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식민지인 강경파 지도자들이 보스턴 근처의 렉싱턴에 머물고 있고 그 옆의 콩코드에는 무기와 탄약을 비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강경파 지도자 체포와 무기고 파괴를 위해 약 700명의 병력을 4월 19일 새벽에 출동시켰다. 토마스 게이지로서는 은밀한 군사행동을 위해 새벽에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었으나 이미 식민지인들은 영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명의 정찰병을 파견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중에서 폴 리비어가 영국군의 이동을 발견하고 식민지 민병대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공격 사실이 사전에 노출되었다.
비록 콩코드에서는 정규 군사 훈련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식민지인 민병들의 저항은 쉽게 무너졌지만 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에 콩코드에 있던 군사 물자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파괴되었다. 영국군으로서도 콩코드의 무기고를 파괴하겠다는 최초의 목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이 지원 온 식민지 민병들이 길가에 있는 가옥이나 창고, 바위, 나무, 돌담 뒤에 2~4명씩 숨어서 계속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전투 결과 식민지 민병대는 95명이 사망한 반면에 영국군은 무려 273명이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를 통해서 식민지 민병대가 영국의 정규군과의 정면 대결에는 열세를 면치 못할 수 밖에 없지만 지형 지물을 이용하는 유격전으로는 충분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제2차 대륙회의와 대륙군의 결성
제1차 대륙회의에서 결의하고 영국 정부에게 청원한 식민지 정책에 대한 개선 방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식민지인들도 이제는 적극적인 무력 대응을 논의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대표적인 급진파인 패트릭 헨리는 AD 1775년 3월 23일 리치먼드의 세인트존 교회에서 열린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연설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Liberty or Death)"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이제 영국과의 전쟁이 이제 불가피해졌으므로 민병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결국 AD 1775년 5월 10일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가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대표로 국제적인 저명인사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참여했고 그 이외에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대표로 영국 정부에게 밀수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던 존 핸콕이, 버지니아 식민지의 대표로 젊은 농장주인 토머스 제퍼슨이 새롭게 참석했다. 그리고 제1차 대륙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조지아 식민지에서도 이번에는 뒤늦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7월 20일 합류하면서 제2차 대륙회의가 명실상부하게 영국의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모두를 대표하게 되었다.
제2차 대륙회의는 더욱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당시에는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에서 호되게 당한 토마스 게이지의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식민지인들이 자원하여 15,000명까지 증강된 민병대가 보스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제2차 대륙회의는 뉴잉글랜드 민병대를 중심으로 각주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라는 이름의 정규군으로 편성하였고 총사령관으로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인 조지 워싱턴을 임명하였다. 또한 대륙군의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지폐를 발행하기로 하면서 이제 제2차 대륙회의는 이제 독립을 위한 임시 정부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