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無神論
Atheism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사상.
무신론이 등장했던 시기에서 정의하는 신은 Personal god, 좁은 의미의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같은 것을 말하며 기원전 5세기에 '신이 없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아테오스)에서 유래했다. 고대에 더 큰 사회가 숭배하는 신을 거부한 이들에게 경멸적으로 쓰거나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무종교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도 많고, 교리에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종교도 있기 때문에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무신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단어의 기원과 이러한 이유로 앤서니 플루나 마이클 마틴 등의 철학자들은 무종교와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같은 것이라 이해한다. 그리고 실제로 덜 엄격하게 쓰이기 때문에 무종교와 혼용되는 것이 쉽게 관측된다. 따라서 일상적으로는 무신론이라는 말이 무종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서방에서는 무신론을 'atheism'으로, 불가지론을 'agnostic'으로 구별한다.
무신론에 대해, 고지식적이거나 별로 아는 게 없는 사람들 또는 극단적인 신봉자들 중에선 평범한 무신론자를 반종교주의(대표적으로 반기독교나 이슬람포비아)와 연관 짓는 경우가 있다. 무신론과 저들이 아예 교집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의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고 신을 안 믿으면서도 오컬트는 흥미롭게 여기는 등등 무신론자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다. 유신론에서 신이 있지 않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는 신도와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광신도 등이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종교 = 유신론'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안에서도 갈래가 나누어지긴 하지만) 유교, 불교 등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 종교이다. 애초에 종교(宗敎: 높은 가르침)라는 용어가 원래 싯다르타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니 '신'과는 관련이 없는 용어이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종교 = 불교인 셈인데 이제 와서는 "불교는 신을 믿는 게 아니니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식의 말이 떠도는 게 아이러니.
기독교, 특히 과격한 개신교도 입장에서 착각하는 바가 있는데 불교에서 부처란 신이 아니다. 붓다는 가르침을 설파하고 떠난 한 명의 인간이자 일종의 선생님, 성인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바로 부처란 자기 내면에 있고 그 부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 붓다나 불상을 두고 신으로 숭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때문에 사실 불교는 종교를 뜻하는 '교' 자를 쓰긴 하지만 무신론적인 종교가 맞다.
유신론적 종교에 속한 신도라고 해서 모두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독심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실제로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라고 해도 경제·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 차원에서, 혹은 재산상 손해나 생명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불릭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또는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종교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종교가 설파하는 교리 중 일부를 받아들이기 위해 종교인이 되는 사람도 있다. 초기 불교의 모습이 기독교나 이슬람 등과 다르게 철학적인 모습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사후 세계의 존재나 윤회 등으로 볼 때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거나 무신론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무신론은 반신론(antitheism: 반유신론)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무신론이 위와 같이 신의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라면, 반신론은 신에 대한 믿음의 모든 형태들을 공격하고 반대하는 입장(an opposition to belief in deities)이다. 반신론은 무신론과 달리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을 거부해야 인간이 더 나아진다는 입장이다. 현대의 무신론자, 특히 소위 신무신론자라 불리는 인물들(대표적으로 리처드 도킨스)은 반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무신론의 발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이 많다. 자연 과학이 이전에는 인간이 닿을 수 없었던 세계를 비추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합리적인 설명을 도출해 내면서, 이전에 그 설명을 대신하고 있던 신화와 종교를 밀어내어 그 역할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세계에서 번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의 권능으로 여겨졌고,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번개(천둥)의 신은 대부분 높은 위세를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유피테르), 북유럽 신화의 토르, 힌두교의 인드라. 그러나 오늘날의 발전된 과학은 신의 영역이었던 번개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두렵고 경이로운 신의 권능'이 아닌 '합리적인 자연 현상'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비구름 속 온도 차이로 인해 전하가 양전하와 음전하로 분리되고, 지면에는 구름 아래쪽의 음전하 때문에 양전하의 양이 증가한다. 이렇게 형성된 양전하와 음전하의 전자 교류로 인해 전기가 방출되고 이것이 번개이다. 우주의 규모 같은 것도 상상하긴 힘들 정도로 매우 커다랗지만, 이 역시 물리 법칙을 따른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현재 관측하지 못하고 확증하지 못하는 현상, 아직은 알 수 없는 현상 역시도 물리 법칙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자연을 초월해서 무언가 있다라는 개념, '초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이다. 최종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틈새의 신에 불과하다고 본다. 애당초, 신이 그냥 존재할 수 있다면, 우주도 그냥 존재할 수 있다.
근대 이후 북유럽 등지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무신론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종교의 힘이 많이 미치는 곳에서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놓은 곳도 적지 않으나 리처드 도킨스 등 아예 '적극적 무신론자'가 나타날 정도로 사회상이 많이 변화하면서 사회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한 사고방식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역사
무신론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무신론을 뜻하는 단어 'atheism'은 '신이 없는'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atheos)에서 유래
신앙의 자유가 흐릿한 시절에는 “무신론자”는 오늘날과 달리 멸칭으로 쓰였다.
그리스도교도 공인되기 전에는 비슷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2세기 중엽, 그리스도교의 한 순교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라고도 불렸다. 우리는 당신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 앞에서는 무신론자임을 고백하지만, 진정한 신과 관련해서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자기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불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출처: 김응종, “근대 무신론의 철학적 기원*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와 피에르 밸을 중심으로 - “, KCI, 2009, P.47
인용문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지 못하던 시절, 기독교조차 무신론자라 불렸다. 이는 기독교가 정말로 신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없고 공인된 종교와 반드시 숭배해야 하는 신이 존재할 시절에는, 특정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거짓 신을 믿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교도들의 신앙은 거짓된 신을 믿는 것이었다. 물론, 현대에 법적으로든 사회적 시선에서든 신앙의 자유가 확고한 지역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더 이상 '무신론자'를 멸칭으로 쓰지 않는다.
(유럽에서) 체계적인 무신론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는 확답하기 어렵다. 역사 속에서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무신론의 정의, 그리고 다른 사상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장 자크 루소와 세속적 인본주의의 역사를 들면서 "무신론은 생각보다 이신론과 덜 구분된다"하는 경우도 있고, 스피노자와 피에르 밸이 세운 철학적 업적이 체계적 무신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별도로, 시작이 그렇다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현대의 무신론을 이신론과 범신론과 일치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위의 가디언지에 실린 기사처럼 '무신론은 이신론의 분파다(Atheism is an offshoot of deism)'다 같은 약간 도발적인 제목을 쓰는 저자도, 무신론이 이신론의 신도 부정하는 것을 확실히 한다. 또한, 범신론 혹은 다른 개념을 '신'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는 부류의 경우, 그런 언어 사용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에 무신론자는 거부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여러 요인으로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다만 선진국보단 더 종교적인 개발 도상국이나 중진국의 출산율이 더 높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눈에 띄게 늘어나는 편은 아니다.
무신론의 범위
암시적 무신론, 명시적 무신론
원론적으로 무신론은 모든 신적 존재와 영적 존재, 초자연적 존재,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신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도 무신론인가에 관해서 고찰하게 되면 무신론에 관해 크게 두 가지 범위를 둘 수 있다.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이 그것이다.
암시적 무신론은 유신론을 알지 못해도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1772년 계몽주의 사상가 폴 티리 돌바크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무신론자로 태어나며, 그들은 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후 1979년 자유 의지론 사상가인 조지 해밀턴 스미스 또한 비슷한 발언을 하였는데, "유신론에 노출된 적 없는 사람은 무신론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들과 아직 유신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 부류에 포함한다. 이 아이들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스스로 무신론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라고 시사하였다. 즉 갓난아이들은 자연을 유신론적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암시적 무신론자인 것이며, 스스로 무신론자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신론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 유신론을 알지 못하기에 무신론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가 시사하는 바이다. 그는 스스로 신적 존재에 대한 견해를 의식하는 것이 아닌, 유신론에 노출되지 않아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을 "암시적 무신론"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유신론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명시적 무신론이라고 한다. 어니스트 네이글은 조지 해밀턴 스미스의 무신론에 대한 정의를 반박하였는데, 스스로 유신론을 인식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명시적 무신론만을 진정한 무신론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강한 무신론자들만 명시적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명시적 무신론자의 범위를 좁히게 된다. 신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서 (신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의 존재를 아직 믿지 않는 사람도 약한 무신론 또는 부정적 무신론이긴 하지만 이들은 불신자(non-believer)라고 부를 수 있고 명시적 무신론자로 보아야 한다. 마법이나 외계인, UFO, 요정 등 각종 신비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증거의 부재를 이유로 믿지 않아도 이들을 머글이나 UFO 회의론자나 신비주의 불신자로 보니까.
이에 대해서도 후술할 신무신론자들의 입장은 신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알지 못해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암시적 무신론 또한 무신론으로서 인정해서 가장 무신론으로 인정하는 범위가 넓다.
비신론(非神論, nontheism) 또 무종교(unaffiliated, non-religious, Irreligion)란 분류도 있는데 이는 좁은 의미의 무신론뿐 아니라 암시적 무신론, 불가지론, 반신론 등 유신론(범신론을 포함한)의 모든 여집합을 집합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즉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애초에 신이라 초월적 존재에 대해 가정하고 그게 허구인지 실재하는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비신론은 애초에 신이나 종교라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에서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무신론이라는 이름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용어다.
이는 서구에서는 특히 미국 등에서는 역사적으로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무정부주의 등과 함께 엮여서 부정적으로 또는 특이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그런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탈피하고자 하고자 쓰이기도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기독교도나 불교도는 용납하지만 무신론자는 알라를 부정하는 신성 모독 세력으로 간주해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을 무신론자가가 아니고 무종교자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unaffiliated 는 무소속이라는 의미로 종교 관련 설문에서 특정 종교나 종교 단체에 속하지 않은 무종교자를 지칭하는 데 쓰인다. 또 비신론은 몇몇 진보적/현대적 종교에서 엄격한 종교적 교조(dogma)나 신비주의적 성격을 반대하는 것을 지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서양의 관점에선 유교나 불교, 창가학회 등은 비신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철학에서
애초에 통일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오늘날 철학계에서 다수 의견은 위와 같이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유신론' 구분을 유의미하게 바라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라는 존재론(ontological)적 고찰에서 "-론"은 무엇을 믿지 않는가보다 무엇을 믿는가를 위주로 전개가 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소위) '약한 무신론'은 해당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화자가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강한) 무신론자인지, 아니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신의 유무에 대한 질문 그 자체를 유보해 둔 불가지론자인지를 적절하게 답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학술적 의미에서 철학적 정의로서는 부정확하며 부적절하다.
게다가, 애초에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의 구분법, 혹은 '강한' 무신론과 '약한' 무신론은 태생적으로 논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동일 논리적 과정을 반대 방향으로 전개하지 못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음을 '약한 무신론' 내지는 '암시적 무신론'으로 친다면, 그와 동일한 논리적 과정으로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음은 '약한 유신론'이자 '암시적 유신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개념 정의가 본래의 의의, 목적을 상실하고, 명시적 형태로 믿음을 표하지 않은 모든 대상이 유신론적이면서도 무신론적이라는 모순적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개념 정의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약한/강한' 무신론, '암시적/명시적' 무신론 구분법의 모순을 꼬집기 위해 흔히 나오는 일종의 유희적 예제로 '아기는 무신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혹은 '바위가 무신론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약한/강한 무신론, 명시적/암시적 무신론에 의거하면 주체적 판단 및 믿음을 표현할 능력이 없는 대상인 아기와 같은 존재나 바위와 같은 사물조차도 논리적으로 무신론자일 수 있으며, 동시에 내재된 논리적 모순에 의해 유신론자일 수도 있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암시적/명시적 무신론, 약한/강한 무신론의 구분법은 현재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즉,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화답은 각자가 '무엇을 믿는가'의 명시적 형태로 화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앞 문장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신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화답으로 주어질 수도 있지만 답의 범주를 제한하고 있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 무신론 (강한 부정)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 유신론 (강한 긍정)
"나는 그에 대해 현재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 불가지론 (긍정/부정의 유보)
위의 삼종 구분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직관적인 구분법인 동시에 문외한들 사이에서조차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해석임에 오늘날 철학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 경우, 불가지론은 물음에 대한 강한 긍정이 아니기에 신이 존재함을 믿지는 않지만, 동시에 강한 부정도 아니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믿지도 않는다. 이 경우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라는 일차 순위에 의문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유보해 두며, 그 믿음은 '현재로서의 나는 그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이는 해당 존재론적 질문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이자 믿음으로서 소위 이차 순위의 믿음(second-order belief)이 된다.
무신론의 일부로서의 유신론
'유신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무신론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가령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야훼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믿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인간 버전의 무신론자 캐릭터를 그냥 한 단계 뒤로 미룬 것일 뿐이라는 것.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라는 무한한 퇴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어느 단계에서는 이렇게 무신론적인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살며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 미스터 앤더슨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서 접한 그 기계 제국이 현실일 것이라 믿는 네오는 결국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로.)
신무신론
New Atheism
신무신론의 '네 기사(The four horseman)'로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 아얀 히르시 알리를 추가하기도 한다.
과거의 무신론 담론은 대개 포이어바흐에서 시작하여 논리 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무신론에 관련된 오래된 서적들을 뒤져보면 거의 대부분 카를 마르크스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야기만 나온다. 인간이 신을 만들고 스스로 그 신에게 지배당했다든가, 유일신이라는 아이디어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라든가 기타 등등.
오늘날의 신무신론 담론은 대개 이들과 관련이 있다. 도킨스나 데닛은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라는 전통 속에 있다는 전제하에 종교의 유익이 무엇이든지 간에 종교는 전적으로 인간의 정신 안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샘 해리스는 한술 더 떠서 자유 의지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 의지나 윤리관 도덕적 행위라는 개념은 뇌의 화학적 작용에 불과하고 사회 관습에 따른 학습이라고 본다. 이는 창작의 자유와 예술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비종교적 자유주의자들 성향과 거리가 먼 것이다.
기존의 무신론적 자유주의자들이 종교가 없어도 또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인간성을 긍정하며 인본주의적 사고를 갖는 데 비하여 도킨스의 전제는 인간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이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측면이라 기존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의 전제와 차이점이 있다. 현대 무신론의 특색을 몇 가지 들자면 과학적 회의주의며 신무신론자들은 주로 과학적 관점에서 글을 쓴다.
그 밖에도 사회 참여적 성격, 과학적 계몽주의 성향이 상당히 강하며, 종교 권위에 따른 인권 탄압 문제에 민감하다.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하여 현대 무신론의 주류이기도 하다. 다만 무신론자들 내에서도 이 노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황. 대표적인 신무신론자인 4기사의 대담 무신론자인 마이클 루스의 도킨스 비판
그렇다고 이들의 사고가 좌파적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샘 해리스만 하더라도 좌파 지식인 놈 촘스키 등을 비판하면서, 중동 국가와 미국은 동등한 도덕적 위치가 아니라며 미국은 패권 국가지만 착한 거인이라 주장한다. (촘스키-해리스 논쟁 참조)
과학주의가 신구를 나누는 큰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신무신론자들이 사회 참여적 태도를 보일 때도 흔히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개인적 인권의 보장에 중점을 둔다.
흔히 서구에서는 직접적으로 '무신론 연맹' 같은 표현을 쓰기보다는 '인본주의자 연맹'과 같은 식으로 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단체가 휴머니스트 인터네셔널. 또한 국내와는 달리 서구에는 자유사상이라는 단어도 많이 퍼져 있는데 이는 무신론과 직접적으로 동의어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굳이 따지자면 자유사상 내에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으로 포괄되지만, 자유사상이 다루는 주제들이 신의 존재 유무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성 소수자들이 '즐거운'이라는 뜻의 'gay'를 남성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꾼 것에 크게 고무된 후, 무신론자들도 자신들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로 'bright'를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브라이트 운동'(Brights movement)이다. 최초의 시작은 2003년, 캘리포니아의 교육자 게이세르트(P. Geisert)와 푸트렐(M. Futrell)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흔한 비판은 "무신론자들이 현명(bright)하다고 자부한다면, 그럼 종교인들은 멍청(dim)하다는 말이냐?"인데, 이에 대해 대니얼 데닛은 《주문을 깨다》에서 "게이의 반대말이 '우울한(glum)'이 아니라 '스트레이트(straight)'인 것처럼, 우리가 현명하다고 자부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자동적으로 멍청하다고 표현되는 건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즉, 흔한 스노비즘이나 엘리트주의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브라이트 운동은 리처드 도킨스의 지지와 홍보 속에서 영국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이들이 정모를 할 때에는 일반적인 'meeting'이라는 단어 대신 'meet-up'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런데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온라인에선 참여 열기가 그렇게 뜨겁더니, 막상 뚜껑을 열어 보자 참석 인원수가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2003년 9월 첫 개최 당시에는 13명, 이후로는 2009년 7월이 되기까지 내내 4~33명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출처는 《신 없는 사람들》, 앨리스터 맥그래스, p.77.
그 기간 동안 오프라인에서의 수많은 대형 교회들에 매번 모여들었던 구름 떼 같은 신도들을 생각한다면, 브라이트 운동이 "무신론에 대한 대중적 호응을 얻는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내부적 자성도 있다. 종교인들은 그 종교가 자신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타인과도 끈끈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교류하기를 선호하는 반면,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개념에의 소속감이나 정체감에 크게 개의치 않기에 정기 모임의 필요성도 덜 느끼는 것일 수 있다.
기독교 무신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을 기독교에서 일부 받아들여 하나님은 죽었으니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신학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고대 그리스어 atheos라는 형용사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는 부정을 의미하는 a와 theos(신)의 합성어다. 재미있는 점은 정작 무신론자(atheist)로 불리는 사람들은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이는 무신론이라는 말이 '신이라는 게 있는데 그 신이란 건 없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무신론이라는 말 자체가 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무신론은 신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종국에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산타클로스나 요정이나 찻주전자나 인격신이나 인격적이지 않은 신이나 모두 비슷한 확률로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어느 누구도 "산타클로스가 존재하나요?"라는 질문에 "산타클로스라는 개념은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확률은 극히 적어서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산타클로스론자입니다."라고 답하진 않는다. 그냥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라고 할 뿐이다.
신이 없으므로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무신론은 신이라는 관념과 신에 대한 믿음이 사회에 존재하기에 등장한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무신론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신이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 없이 신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므로 무신론자들이 원하지 않았는데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샘 해리스가 말한 '비점성술론자(non-astrologer)'나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무찻주전자론자(a-teapotest)' 같은 지어낸 말들은 이들이 무신론자라는 말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즉, 러셀의 찻주전자처럼 근거가 희박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atheist로 낙인찍혀야 하냐는 것이다. 낙인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게 아닌 것이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21세기에도 신의 존재가 교리에서 크게 작용하는 종교의 영향이 큰 국가에서는 atheist나 atheism에 상당히 부정적인 어감이 있다. 미국도 그러거니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테러리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 국가에선 불가지론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회의감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리처드 도킨스는 실제로는 불가지론자이고 원래 모든 것에는 불가지론자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아두지만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은 무신론적일 뿐 아니라, 일부러 무신론이라는 단순명료한 명칭을 페미니즘 운동의 저항 의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는 한 유신론자가 히친스에게 "당신은 신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했다가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왜 화를 냅니까?"라고 답변을 들은 사례가 유명하다.[무신론] Christopher Hitchens 인터뷰
하지만 밑의 문단의 내용처럼, 이는 잘못된 용어 정의에서 출발한 비생산적인 논쟁이란 의견도 존재한다. 무신론은 "신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는 그 존재를 믿지 않는다"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나는 그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다"를 뜻하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말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무신론이란 단어에 무신론자들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단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말이 어떠한 사상 내지는 종교적 뉘앙스가 함유된 단어라고 본다. 즉, '신을 안 믿는 놈들'이라는 뜻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무신론'이란 상식 같은 것이라,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학계에선 그리하여 무신론을 여러 갈래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한국에선 종교 안티와 무신론을 잘 구별하지 않으며, 불가지론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흔히 무신론자로 인식되는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사상은 불가지론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00% 무신론은 유신론과 같이 믿음의 영역이기에 나는 7분의 6.9 정도 무신론으로 기울어진 불가지론자이다." 덕분에 이리저리 오해도 많이 받는다.
실질적으로 무신론이라는 말은 그저 방편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기꺼이 비신앙적인 태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얘기하는 대신 간단하게 "나는 무신론자다."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출처: BBC 다큐멘터리, A Rough History of Disbeleif)
사실 비신앙적인 태도를 분명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맞다. 오컴의 면도날, 패러디 종교 등을 참고. 이런저런 단점들이 있지만 대체할 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고 이미 널리 퍼진 낱말이기에 그대로 쓰는 것뿐이라고. 그 대안으로 위에서와 같이 세속주의, 인본주의, 자연주의, 비신론 등이 제안되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고, 여전히 무신론이란 표현이 가장 유명하다.
종교인들의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믿을 뿐'이라는 주장에 대한 무신론자의 반응은 간단하게 "'우표를 모으지 않는 취미'는 어떤 취미입니까?" 정도.
다만, 이 우표를 모으지 않는 취미의 비유는 다소 부족할 수 있는데, '종교 = 신이 있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모순이다. 신은 단순히 인격신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 너머에 존재하는 신성한 성격을 지닌 존재 등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 경우 단순히 '유일신 종교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대표되는 신이 없다'는 담론을 넘어 본래 무신론이 나타내고자 하는 담론에 근접하게 된다. 좀 더 정밀하게 반박하자면, 앞서 보았듯이 "믿음이 아니라 정반대인 의심(회의)이다" 같은 것들이 있으니 이쪽을 이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좀 더 완전하다.
애초에 종교인들이 무신론자를 저렇게 비판하는 것도 진짜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신론을 강박적이고 강압적으로 주장하고 강요하는 행태가 (설령 본인들이 생각하기엔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반대편에 서있는 종교 극단주의자들의 폭압적 행태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즉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의미에서의 비판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런 식의 대답은 말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제대로 대답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믿음이 아닌 의심을 가진 사람이지 신이 없음을 종교마냥 숭배할 마음이 전혀 없다" 쪽이 합리적인 대답이다.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이라는 명칭을 싫어하는 데에는 유신론자나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종교의 신도들이나 보수 언론 쪽에서 특히 이 명칭을 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통계에서 보여주듯이 미국 같은 나라에선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는 순간 정말로 괴짜 내지는 차별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도 무신론은 테러리즘과 동급으로 취급받고 실제로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기도 한다.
미국은 냉전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소련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종교를 배척했던 반면,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은 정반대로 국가적으로 종교를 밀어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자국민들에게 사회주의와 소련이 좋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던 미국에게 종교는 정치적으로 가장 쓰기 좋았던 도구였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나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무신교 = 사회주의자 = 소련 = 나쁨'이라는 인식을 박제시키는 계기가 된다. 과거에 비해 나아지는 추세라고는 하나 현재까지도 영향이 남아 무신론자들을 좋지 않게 보거나 조롱의 의미로 쓰기도 하며, 미국의 정치인들은 종교 없이 정치생명을 유지시키기 매우 힘들다.
소위 보수 언론으로 일컬어지는 폭스 뉴스 같은 데선 종교가 없는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직업 소개란에 '무신론자'라고 써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를 불러다 놓고도 시청자들에게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면서 완전히 괴짜 취급을 해버리기도 했다. 그나마 근래 서구권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탈종교화 성향이 강해지고 각종 사회적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커지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자유롭게 칭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많이 확산된 편이다.
신무신론과 무신론 개념의 오남용
'무신론'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다의어이다.
심리적 감각에서 무신론은 무신론자가 되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이때의 무신론자란 유신론자가 아닌 사람으로 정의되고,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관점의 무신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부족한 심리 상태.
반면에 철학, 특히 종교 철학에서 '무신론'은 표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 따른 무신론자는 판단의 유보를 넘어 신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감각의 용법은 유신론 철학자들뿐 아니라 많은 무신론 철학자들에게도 선호된다.
따라서 달리 이유가 없다면 철학자들은 무신론 'atheism'에서 'a-'는 '부재/없음'을 뜻하는 접두사가 아니라 '부정(neg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종교 철학의 형이상학적 질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되는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표준 정의 방법은 명백히 유용하다. 그 질문에 대해 가능한 직답은 단 두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라는 대답은 유신론을 의미하며, "아니다"라는 대답은 무신론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은 종종 '유신론'을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 믿음의 참, 거짓에 대해 논쟁하는 것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믿음'의 의미는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태도나 심리적 믿음 상태가 아니라 믿음의 명제적 내용을 지칭한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finitions of Atheism"
(부연: 이하 서술에서 형이상학적 유/무신론 정의에 쓰이는 표현인 '믿음', 인식론 범주에서 주관적 명제 태도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인 '믿음'을 혼용해서 읽지 않도록 유의할 것.)
신무신론의 대중적인 인기로 인해 무신론에 대한 대중적 담화가 촉발된 것은 긍정적인 효과라고 여길 수 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게 존재하며, 특히 가장 심각한 것은 이미 학계를 통해 분명하게 그 의미와 정의가 확정된 수많은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심각한 오용과 곡해가 퍼진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무신론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바로 위에 정의된 바와 같은 '무신론'의 정의와 용례에 대한 비전문적인 접근과 잘못된 확장으로 인하여 대체로 불필요하고 심한 경의 무의미한 대중적 논쟁을 생산해 냈다는 점에 있다.
참고로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는 psychological state인 정의 또한 전달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정의로만 무신론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원문에도 없는 내용들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으니 아래 내용들을 읽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신론이란 '신이 있다'는 명제 - 즉, 유신론 -에 대한 부정으로, '신이 없다'는 명제, 즉, 유신론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며, 'atheism'에 있어서 'a-'는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종종 통용되는 설명: 'atheism 에서 a-는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 것, 즉, 신에 대한 회의적(skeptical) 태도 그 자체가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신무신론의 설명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는 신무신론이 등장한 배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대중적 목표 중 하나가 '회의주의(skepticism)'와 '무신론'을 대중에 일반화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회의론(skepticism)'이란 용어조차도 잘못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즉, 대체로 기독교 문화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일종의 '정상 상태'로 규정하며, 그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부정이 일종의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 서구 사회에서, 기득권화되어 여러 가지로 사회적 부조리, 억압의 원천이 되어온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의 일환으로 대중의 탈종교화를 이끈다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성을 갖고 있는 배경에서 신무신론이 출발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정치적 목적성을 띠고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문제는 분명하게 무신론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가지론이나 불분명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까지 모조리 '무신론'이라는 하나의 간판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신론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시킨 결과 숱한 오남용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상기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항목에 기술되어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무신론'의 정확한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신론이란 '신이 있는데 신이 없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소리를 싫어한다"는 것부터 매우 잘못된 얘기다. 이 잘못된 얘기의 유래는 무신론자들에 대한 (일부) 유신론자들의 고전적인 비판 수법에서 기인하는데:
T(유신론자): "무신론이란 신을 부정한다는 소리 아닌가?"
A(무신론자): "그렇다."
T: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뭣하러 부정하는가?"
T: "신을 부정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신이 존재함을 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논리를 사용하는 유신론자들은 (신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atheos'의 원래 의미가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을 의미함에 착안하여 2천 년도 전에 사용된 단어의 용례가 현재 통용된다는 식의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어 atheos의 가장 오래된 의미는 신의 가호를 잃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경우 'atheos'의 '신이 없음'이라는 의미는 영어로는 '신에게 버림받은'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im Whitmarsh, Department of Classics and Ancient History, University of Exeter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상기 상황에서 A(무신론자)의 반론은 매우 간단하게, "여기서 '부정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함을 가정하고 그에 거역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마디 설명으로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인용한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 강조한 무신론의 올바른 정의의 유용성이 바로 이러한 데 있다. 게다가, 애초에 상기 유신론자들의 논리는 '언어학적 오류(etymological fallacy)'에 해당되는 것으로 무신론에 대한 별로 유의미한 공격도 아니다.
문제는, 용어의 엄밀한 정의와 용례를 알지 못한다면 이처럼 간단하게 반박되는 것을 하지 못해서 "정작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학자, 종교학자, 철학자들이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문제 없이 잘만 써왔고, 각자가 스스로를 'theist', 'atheist'로 멀쩡히 잘 규정해 온 게 적어도 100년이 넘는데 어떤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말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애초에 '무신론'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정의한 경우에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오용과 혼동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철학에서 무신론과 유신론을 각각, 상기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 인용한 대로 엄격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본 문서의 '오늘날 철학에서' 항목에 간단하게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무신론', '유신론', '불가지론'은 각각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의 태도이자 하나의 명제로서 표현되는 믿음이다.
명시적으로 '신은 존재한다'를 믿는 사람이 유신론자, 명시적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믿는 사람은 무신론자,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 그 답을 보류하고 있는 사람은 '해당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2차 순위의 믿음을 가진 불가지론자이다.
신무신론이 지닌 긍정성, 대중적인 순효과,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종 활약과는 별개의 것으로, 정작 그들이 화두로 끌어올린 '무신론'에 대한 신무신론자들의 이해는 상당히 조악하고 부정확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대의에 공감하는 것과,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정확성은 분리하여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신무신론자들의 무신론 정의,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거나 촉발된 수많은 유명한 전형적인 화두의 대중 논쟁은:
(1)부정확하고 자의적인 무신론의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2) 그 잘못된 이해로 인해 고전 철학이나 신학의 훈련을 받은 유신론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3) 반대 논리를 급조해 내 조악하게 반박한 결과
(4) 위의 과정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무신론에 대한 곡해와 오해를 더 많이 퍼뜨리는 과정에 가깝다.
앞서 살짝 언급한 바와 같이, 애초에 '회의론자(skeptic)'라는 용어부터가 히친스의 오용으로부터 출발해서 널리 퍼진 용어의 오남용에 해당하고, 불가지론에 대한 도킨스의 혼란스러운 설명도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철학적 자연주의의 차이에 대한 무지와 무신론, 불가지론 용어의 잘못된 정의에서 출발한 버벅거림에 가깝다. 애초에 도킨스의 입장이라면, 매우 간단하게 "나는 불가지론자입니다만, 반종교주의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매우 쉽게 설명이 된다. 무슨 원래는 불가지론인데 입장상 무신론이라 이야기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느니 이런 궁색하고 혼란스러운 소리 필요 없이
다시 강조하지만,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항목에 나열된 모든 내용은 올바르지 못한, 잘못된 용어 정의에서 출발하여 개념 혼동으로 인해 촉발된 비생산적 논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