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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 해탈(解脫), 번뇌가 소멸된 상태, 한자 음차, 니르바나, 녈반, 涅槃, Nirvana,

Jobs 9 2025. 1. 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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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涅槃)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하며, ‘멸(滅)·적멸(寂滅)·이계(離繫)·해탈(解脫)·원적(圓寂)’의 의미를 가진다. 이 열반에 관한 사상은 우리 나라에서 열반종(涅槃宗)의 창종 이래 널리 연구, 전승되었다. 원래 열반은 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 등을 나타내며,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는 곧 생사를 넘어선 각(覺)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표이다. 인간이 망집 때문에 괴로워하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일 고(苦)와 무상(無常)과 비아(非我)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서 바른 지혜를 완성한다면, 생사윤회의 근본인 망집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인식을 긍정하게 될 때, 이미 그 무엇을 자아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추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지를 실현하고 진리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기 위하여서는 수행에 힘쓰고 계율을 지켜 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인간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사(不死)·안락(安樂)·적정·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마치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모든 고뇌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열반은 탐욕과 괴로움과 근심을 추월한 경지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경험 안에서는 그 어떠한 말로써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만 체득한 자만이 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교는 세속적인 평범한 생활로는 결코 참다운 열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세속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생활방식이 있다. 하나는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많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의 실천이다. 이 환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피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에 의하여 진실에 대한 바른 인식, 바른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열반에는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 열반은 생멸변화가 없이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미(常住味)가 있고, 다시는 미혹된 생사가 계속하지 않는 적멸미(寂滅味)가 있으며, 영원히 늙지 않고[不老], 다시는 죽지 않으며[不死], 청정하고[淸淨味], 허허로이 통하며[虛通味], 움직이지 않고[不動味], 항상 행복한 맛[快樂味]을 갖추고 있다. 

또 이 열반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있다. 상덕은 상주의 뜻으로 열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고, 낙덕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뇌가 없고 무위안락한 행복만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아는 망아(妄我)를 여읜 진아(眞我)를 말하는데, 아덕은 8대자재(八大自在)를 갖춘 아를 표시하는 것이다. 정은 청정의 뜻으로, 혹(惑)·업(業)의 고통을 여의고, 담연하게 청정한 과덕이 있음을 말한다. 이 상락아정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영원·행복·자재, 번뇌가 없음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3열반·4종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2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소승과 대승이 그 주장을 달리한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이고, 무여열반은 회신멸진(灰身滅眞)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칭하여 이것을 최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대승에서는 소승의 무여열반에 아직 미해결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삼계(三界) 안의 진리와 일에 대한 미혹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명번뇌가 남아 있고, 둘째는 삼계 안의 유루업(有漏業)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루업은 남아 있으며, 셋째는 삼계 안의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없지만 삼계 밖의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삼여(三餘)라 하여 번뇌여(煩惱餘)·업여(業餘)·과여(果餘)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천태종에서는 3열반설을 따랐다. 3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이다. 성정열반은 만법의 실성(實性)인 진여(眞如)를 뜻한다. 이 진여가 본래 불생불멸하여 물들일 수도 없고 깨끗이 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원정열반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증득한 열반이며, 방편정열반은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현하고, 인연이 다하면 입멸하는 것이다. 이를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짐에 비유한다. 이 3열반은 열반을 체(體)·상(相)·용(用)의 이론에 맞추어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4종열반은 우리 나라에서 유식종(唯識宗)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시켰다. 여기서의 4종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만유와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인 진여이다. 그 진여의 성품이 청정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생멸이 없이 적정한 열반을 가리킨다. 

유여의열반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나타나는 진여이다. 번뇌는 소멸하였으나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다. 무여의열반은 유여의열반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오온(五薀)이 화합한 몸까지 소멸하여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열반이다. 

무주처열반은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얻는 열반이다. 소지장마저 끊었으므로 생사와 열반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고, 대비(大悲)가 있으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계의 중생을 교화하며, 대지(大智)가 있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미계(迷界)를 여의었으므로 무주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이 열반에 대한 학설을 가장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킨 이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元曉)이다. 그는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를 통하여 당시의 열반에 대한 이설들을 총정리하고 독창적인 그의 학설을 전개시켰다. 

참고문헌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원효)
『불교개론』(김동화, 보련각, 1954)


열반

생사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소승의 부파불교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며, 여기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2가지가 있다.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은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더욱이 불교 내에서도 소승과 대승의 여러 학파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소승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고 여기에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2가지가 있다고 한다. 
 
'유여'란 의존해야 할 것, 즉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완전한 열반, 즉 반열반(parinirvāṇa)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法身)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열반이란 다만 번뇌를 멸한 상태를 기리키는 명칭으로서 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4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상은 상주(常住)함을 말하는데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변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이라 하며, 낙은 안락의 뜻으로 열반은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떠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낙이라 하며, 아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것으로 열반은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한 세계이므로 아라 하며, 정은 청정의 뜻으로 염오(染汚)에 덮힌 생사의 세계를 여읜 열반의 세계는 청정한 세계이므로 정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열반에는 상(常)·항(恒)·안(安)·청정(淸淨)·불로(不老)·불사(不死)·무구(無垢)·쾌락(快樂) 등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4덕과 관련하여 상·항은 상에, 안·쾌락은 낙에, 불로·불사는 아에, 청정·무구는 정에 대응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근거한 법상종에서는 열반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의 4종열반으로 나누었다.

이중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설명한 유여열반·무여열반과 같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존재가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異體)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열반을 말한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지론종과 섭론종에서는 성정열반과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의 2종열반설을 세웠는데, 이것은 후에 천태종(天台宗)에서 성정열반·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의 3종열반설로 전개되었다. 성정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과 같고, 원정열반은 지혜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고 증득(證得)한 열반을 말한다.

방편정열반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인연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응화열반(應化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寂靜)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인 중도(中道)를 깨달아 모든 존재의 여실한 모습을 보게 되면,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 번뇌가 곧 깨달음이므로(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 생사와 열반은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열반(涅槃)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의 한자 독음으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더 이상의 어떠한 고통, 욕망, 자의식이 없는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를 말한다. 어떤 깨달음에 의해 업보 및 윤회에서 해방된 상태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어
निर्वाण
티베트어
བདེ་བར་གཤེགས་པའི་གནས།
한자
涅槃
만주어
Nirwan
영어
Nirvana

지금의 인도 대륙에서 가르침을 설하던 고대 사상가들은 평안·안은·안락·행복·피안 등과 같은 이상을 목적으로 하여 이에 도달하는 것을 모크샤(Moksha)라 칭하였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निर्वाण(니르바나)라 한다. 어원에는 많은 설이 있는데 '(불을) 불어서 끄다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과 '소멸한다'라는 뜻의 니르바(nirva) 또는 '뚜껑을 없앤다'라는 뜻의 니르브리(nirvr)라는 설 등이 유력하다. 

한자로 음차해서 열반나(涅槃那), 열반(涅槃), 니원(泥洹)이라고도 한다. 원래 涅는 '녈'이라고 읽고 두음법칙으로 단어의 앞에 올 때는 '열'이 된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였던 것이 → 중국에서 한자어 '녈반'으로 음차되고 → 한국에서 두음법칙으로 '열반'이 된 것이다. 산스크리트식 '니르바나'와 한자를 거친 '열반' 모두 옳은 표기다. 사실 열반나(涅槃那)는 중고한어로 net-ban-na 혹은 niet-buan-na로 읽히는 음차 표기다.

의역할 때는 '적멸'이라고 한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적멸'이 열반을 뜻한다.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며 멸도 등으로 쓰기도 하는 참으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해탈(解脫)도 열반의 의역이다.


목표


열반이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이기는 하지만 불교의 최종 목표는 열반이 아니라 무상정등정각, 즉 최상의 깨달음을 이룩하는 것이다. 열반은 무상정등정각을 얻기 위한 세 가지 방편인 삼승 중 하나에 속한다.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는데, 부처처럼 육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열반에 든 경우(유여열반)와 육체가 소멸한 상태로 열반에 드는 경우(무여열반) 두 가지가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현생에서 해탈을 통해 열반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죽음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한 열반의 과정을 잘 모르고 있는데 스님과 같은 사람들은 죽음을 통한 열반(무여열반)을 거쳐왔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장 처음 담아낸 책인 '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 경인 범망경에서 이에 대해 아주 짧게 나온다. 디가 니까야는 팔리어로 쓰였으며 제1차 결집 때 아난다 존자를 중심으로 석가모니의 직계 제자 약 500여 명이 만장일치를 통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써낸 책이다. 범망경이란 '견해의 그물'이라고도 하며 이런 견해에 집착 또는 머물면 열반에 들 수 없다 하고 '잘못된 견해'에 대해 설명한다. 예시 중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을 실현했다고 주장하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오온의 기쁨, 선정을 통한 기쁨을 열반이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반박이다. 이를 다룬 팟캐스트도 있다 

쉽게 말해 부귀, 자식의 성공 등 생전의 삶의 모습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털어내고) 이렇다 할 마음의 작용 없이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와 유사한 이치라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의 교학관에 따르면 색계 선정을 어느 정도 배양한 수행자는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들을 마음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고 여긴다. 이때 도과(道果, magga-phala)의 지혜 역시 배양된 상태라면 열반을 대상으로 삼아서 관찰할 경우 밝은 빛으로 보인다고 한다.

 

 

 

입적


스님의 부고를 불교계에서는 '입적하셨다'라는 말로 지칭하는데 이는 열반과는 약간 의미가 다르다. 입적이라는 말은 '완전한'이라는 의미의 접두사인 파리(pari)를 붙여 파리니르바나(parinirvana, 귀환)라고 한다. 한역으로는 반열반(般涅槃)으로 음사한다. 그런데 1994년도 첫 수능에서 열반의 의미를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열반에 들다'와 '입적하다'를 같은 의미로 판단하였다. 중등 교육에서 여기까지 파고들지 않는 듯하다. 

해탈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 아니면 어귀는 다르고 뜻은 같은가? 아니면 어귀도 다르고 뜻도 다른가? 라고 했을 때 과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많은 분들이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해탈과 열반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또는 혼용을 하는듯 합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해탈과 열반은 개념도 다르고 그 사용범위도 한정되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해탈과 열반의 사전적 개념


●해탈(解脫, vimutti, vimokkha) : 어떤 속박이나 족쇄에서 풀려나고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

① 心解脫(cetovimutti), 慧解脫(paññāvimutti), 그리고 兩分解脫(ubhatobhāgavimutti)

② 범망경에 나오는 8가지 해탈의 종류

③ 찟따 상윳따(S41:7)에 설명되는 무량한 마음의 해탈, 무소유 마음의 해탈, 공한 마음의 해탈,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

④ 빠띠삼비다막가(무애도론)에 설명되는 해탈의 종류



●열반(涅槃. nibbana, nirbana) : (촛불)등이 꺼진 상태. 불이 꺼진 상태. 즉 탐진치 삼독심의 소멸된 상태


해탈이란

해탈과 열반이라는 단어는 불교이전에 이미 요가수행이나 우파니샤드 철학 계통에서 사용되었으며 붓다께서는 이를 불교의 궁극적 수행 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채택했습니다. 위에서도 보듯이 해탈은 여러가지 모양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살펴봐야 할 것은 붓다께서는 출가이후 두 명의 요가 수행자를 찾아 갑니다. 그 내용은 맛지마니꺄야 26 Ariyapariyesana suttam(고귀한 구함의 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알라라 깔라마라는 수행승을 찾아가서 '무소유처'의 경지에 이르지만 붓다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머무는 한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생각하시고 두 번째로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를 획득하지만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하여 마침내 네란자라 강에서 6년간의 고행에 들어 갑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무소유처이든 비상비비상처이든 그것이 해탈의 한 종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해탈의 경지에서조차 열반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고행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해탈만으로는 열반에 이르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준영 교수님의 자신의 글에서  

"심해탈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풀려남’, 혜해탈은 ‘지혜를 통한 풀려남’ 그리고 양분해탈은 ‘양쪽 길의 풀려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해탈 안에서 혜해탈과 양분해탈은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 

을 의미하지만, 대부분의 심해탈은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혜해탈과 함께 성취되었을 경우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심해탈(akuppā cetovimutti, 不動心解脫)을 얻은 경우에만 열반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께서 말씀하신 8가지 해탈을 생각해 보면 '공무변처에 머무는 것도 해탈이고,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에 머무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무변처정이나 식무변처정등은 각 단계마다 초월하고 극복하고 족쇄에서 풀려나는 경지가 별도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무변처정을 넘어서야 식무변처정이 오고, 식무변처정을 넘어서야 무소유처정이 획득이 됩니다. 그런데도 각 단계를 모두다 해탈이라고 함은 다시말해서 어떤 단계에서 필요한 족쇄에서 해방되는 것 그 자체를 '해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탈의 설명은 무애해도에 보면 더욱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애해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해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특정한 족쇄에서 풀려났을 경우를 수십가지로 분류하여 모두다 해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 그대로 특정한 족쇄에서 풀려나고 벗어난 것을 해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준영교수님의 말씀처럼 해탈 = 열반이라는 개념을 100%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해탈했다. ...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라고 해탈 = 열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해탈 = 열반" 이라고 기록한 즉 당사자가 해탈한 내용이 전부다 "오취온(오온)의 무상 무아 고, 탐진치 삼독심 제거등"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 해탈이나 열반이 아니라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에는 반드시 해탈(벗어남)의 디테일한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은 벗어남(해탈)의 경우에는 "... 예류도/과를 성취했다" 라든가 "경이롭습니다. 고따마시여, 마치 길잃은 자에게 길을 일러주시고... 죽을때 까지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라는 경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반이란 

탐진치 삼독이 제거되어 미래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어떤 것인지는 사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 오면서 다양하게 열반의 세계를 세분화 했습니다. 검색을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파불교 시대부터는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 그리고 유가학파에 의한 열반의 세분화등으로 다양하게 그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는 저는 더 첨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열반의 세계를 붓다께서는 '우다나'에서 한번 언급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교리방에 있는 '열반세계의 존재유무'를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해탈과 열반은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해탈과 열반은 다릅니다. 그리고 해탈 = 열반이라는 등식이 동시에 성립하기 위해서는 정준영교수님의 말씀처럼 혜해탈 양분해탈등의 경지를 획득해야 하고, 경전의 묘사처럼 오온에 대한 탐진치 제거 만이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수행은 점차적 순서대로 깨달음과 경지를 획득합니다. 구름타고 한 순간 정상에 도달하는 건너뛰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경전은 언제나 "해탈하여 열반한다" "해탈한 후 열반한다"라고 해탈이 있고 그 다음에 열반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열반후에 해탈이 있다거나 해탈없는 열반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해탈은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 위한 족쇄에서 벗어남이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즉 예류과에서 일래과로 가기 위해서는 부수어야 하는 족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류과에서의 해탈일 것입니다. 아라한도에서 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수어야 하는 족쇄는 하나씩 풀어질 때 마다 그것이 해탈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류도에서 예류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 하는 족쇄가 유신견이나 계금취등인데 유신견을 벗어났다면 유신견에서 해탈한 것이고, 계금취를 벗어났다면 계금취에서 해탈했다는 것입니다. 즉 각 단계에서 풀려나는 과정이 모두다 해탈인 것입니다. 모두다 풀어진다면 마침내 아라한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을 혼용하거나 해탈 = 열반과 같다는 식의 등식은 일반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해탈(解脫), 열반(涅槃)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입니다.

해탈은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이고

열반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행복한 상태이다.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를 소리를 따라 옮긴 말로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를 가리킨다.

부처님은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해탈(解脫, vimoka, vimikti) 또는 열반이라고 불렀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이 완전한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곧 불행이 되고,

자유를 얻지만 속박이 따릅니다.

행복이 불행으로 되풀이되지 않는 행복과 자유를 느낄 때 해탈입니다.

 

어떤 상태에 처하든

자유롭고 괴롭지 않는 것을 해탈과 열반 이라고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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