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문답가(牧童問答歌)
임유후(?)
녹양 방초안에 소 먹이는 아이들아
인간 영락을 아는다 모르는다
인생 벽년이 풀끝에 이슬이라
삼만 육천일을 다 살아도 초초커든
수단이 명이어니 사생을 결할소냐
생애는 유한하되 사일을 무궁하다
역려 건곤에 부유같이 나왔다가
공명도 못 이루고 초목같이 썩어지면
공산 백골이 그 아니 느껴우냐
시서 백가를 자자히 외워내어
공맹 안증을 일마다 법받으며
직설을 기필하고 요순을 비겨내어
강구연월에 태평가를 불러 두고
사해 팔황을 수성에 올리기는
이음양 순사시 재상의 사업이요
백만 군병을 지휘중에 넣어 두고
풍운을 부쳐 내어 우주를 흔들기와
장검을 비끼 잡아 만적을 당하기와
자수금인을 허리아래 비끼 차고
황룡부에 통음하고 능연각에 회상하니
위권이 혁혁하여 오정식에 누리기는
장수의 모략이라 그 아니 기특하냐
내 재조 편견하여 장상이 못 되어도
금수 간장에 만고를 넣어두고
풍운 원로를 붓끝에 희롱하니
주기를 헤치는 듯 백벽이 뒤트는 듯
귀신을 울리는 듯 풍우를 놀래는 듯
문채로 가잘시고 단계화 한 가지를
소년에 꺽어 꽂고 향가 자맥에
영총이 그지없다 금문 옥당에
문한으로 누리다가 석실 금궤로
만세에 유전하면 소 먹이는 저 아이야
그 아니 즐거우냐 하늘이 사람낼 제
나라에 사람 쓸 제 귀천을 가리더냐
하늘이 삼긴몸을 닦아 내면 사군자요
기포를 달게 여겨 던져두면 우하로다
내 재조 가지고 한 몸만 용차하니
희보 미방을 세상이 뉘 알더냐
자세히 들어스라 손곱아 이르리라
이윤은 솥에 지고 부열은 달고 들고
영척 백리해는 소치다가 명현하니
가난하고 천하기야 이 사람만 하랴마는
인생 궁달이 귀천이 아랑곳가
불식 부지하여 세사를 모르는다
입신 양명을 헴 밖에 던져두고
연교 초야에 소치기만 하나슨다
목동이 대답하되 어와 그 누구신고
우은 말씀 듣건지고 형용이 고고하니
초대부 살려신가 잔혼이 영락하니
유학사 자후신가 일모 수죽에
혼자어둑 서 계셔서 내 근심 던져 두고
남의 분별 하시는고 우리는 준준하와
대도를 모르어도 인생도 저러하다
소치기 아나이다 송아지 어이 쫓아
녹음간에 절로 내어 이리가락 저리가락
누으락 일어나락 풀잔디 뒤져 먹고
시냇물 흘러 마셔 먹음먹이 박하여도
제 뜻대로 노닐기와 귓도래 코에 꿰어
저 고삐 굳게 잡아 곧은 낚대 삶은 콩을
배가지 칠지라도 물 같은 더운 볕에
한겨리 마주 메워 코춤은 카니와
흘없게 그지없다 어느 소는 고되고
어느 소는 한가하뇨 일시에 빛나가야
희생만 할건가 헌 덕석 벗기 치고
금의 삼정 갈아 덮어 삿구레 벗기 치고
홍사로 얽어 내어 대로에 벽제하고
예관이 고삐 잡아 태묘를 들어 가서
포정의 큰 도채에 골절이 제곰 나니
저더러 물어 보면 어느소 되랴할고
고금에 어질기야 공부자만 할까마는
광인이 욕 보시고 진채에 싸이시여
목탁이 되여겨사 도로에 늙으시니
전 사람 이른 말이 그 아니 옳톳던가
부차의 촉루검을 오자서를 준단 말가
서산 저문 날에 비풍이 스슬하다
무안군 백기는 이룬 공도 하건마는
두우역 하라 나재 칼을 주어 죽이더고
이사는 승상으로 보수를 다한 후에
부귀도 극진하고 영총도 무한터니
상채 동문에 누런 개를 슬퍼하네
나는 새 진한 후면 양궁이 장하이고
토끼를 잡은 후에 산영개 아랑곳가
한신의 공적으로 삼족조차 죽이더고
문인은 예로부터 궁상이요 박명이라
만장 광염이 니 뒨들 욀가마는
고신 거국에 야량이 몇 천리요
성도 초당에 성계도 소조하다
한창려 문장으로 동정 춘풍에
물결이 일어나니 조주 팔천리에
고국이 어드메요 지하로 옷을 하고
난초도 섯거 차고 이소 구가의
문자는 좋건마는 초강 밝은 달에
한원이 슬피 우니 장상 문장이
그 아니 섬거우냐 산중에 사향 느니
깊이는 있건마는 춘풍이 헌사하여
향내를 불러 내어 산하에 날랜 살을
면하기 어렵거던 군미끼 혈낚시를
어히하여 따르는다 기산에 귀 씻기와
상류의 소 먹이기 즐겁고 즐거움을
너희는 모르리라 내 노래 한 곡조를
불러든 들어 보소 장안을 돌아보니
풍진이 아득하다 부귀는 부운이요
공명은 와각이라 이 퉁소 한 곡조에
행화촌을 찾으리라
임유후(任有後)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川). 자 효백(孝伯). 호 만휴당(萬休堂) ․휴와(休窩). 시호 정희(貞僖). 1624년(인조 2) 생원시 ․진사시, 1626년 정시문과에 각각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판서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하자 사직했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기용되어 종성부사(鐘城府使) 때는 여진족에 대한 방비를 하고, 백성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1660년(현종 1) 예조참판을 거쳐 승지를 지내고 1670년 공조참판 ․병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지내고 은퇴했다. 이조판서가 추증, 울진(蔚珍)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만휴당집(萬休堂集)》 《휴와야담(休窩野談)》 등이 있다.
해설
이 작품의 작가가 이황이라는 설도 있으나, 임유후(任有後) 측근 인물들의 증언과 문헌의 신빙성으로 보아, 임유후로 추정되기도 한다. 내용은 제목에서 살필 수 있듯이, 문가(問歌)와 답가(答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반부인 문가와 후반부인 답가가 대조적인 주제를 부각시킴으로써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입신양명의 꿈을 실현해보고 싶은 뜻을 보였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천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구가(謳歌)와 인생무상의 달관(達觀)을 합리화한 다시 말하면, 입신양명과 자연귀의라는 현실 긍정과 현실 부정의 이질적인 양극성의 상충심리가 균형 있게 조화됨으로써 인정의 기미(幾微)를 구김 없이 잘 표현했다. 문답가 계열의 가사 작품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