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와쿠, 迷惑, 미혹, 민폐
메이와쿠(迷惑)는 일본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폐해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또한 일본에는 이 메이와쿠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메이와쿠의 어원이 되는 한자어는 '어떤 것에 홀려 마음이 흐트러지다'는 뜻의 '미혹'으로, 본래는 '남에게 번뇌를 일으켜 마음을 소란하게 하다'나 '번뇌로 마음이 소란하다'를 뜻하는 불교 용어였다. 만요슈에서부터 그 용례가 확인되며, 불교 경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muhyati(흐리멍텅함), sammoha(혼동하여 어리석음), bhranti(전도된 앎) 등의 개념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埴安乃 池之堤之 隠沼乃 去方乎不知 舎人者迷惑
하니야스 연못 제방의 숨겨진 늪, 어디로 흘러가면 좋을지 모른 채, 시종(토네리)은 당황하노라.
《만엽집》 제2권, 카키노모토노 아손 히토마로(柿本朝臣人麻呂) 작 201번 단가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기존의 불교 용어에 가까운 의미로 쓰이는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달리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폐를 의미하는 단어로 변화하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번뇌를 해탈하는 것은 특히 말법 시대에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보았던 일본 불교권의 영향이 변수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남에게 번뇌를 일으킬 짓을 하지 말자는 식으로 의미 변질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어떤 언행이 남에게 번뇌를 일으킬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보니, 이로 인해 타인의 심기를 상하게 할 잠재력이 있는 온갖 행동들이 사회적으로 기피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에서는 그 적용 범위가 이웃이나 마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고, 메이와쿠를 끼치지 말라는 전일본적 분위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곤란함을 느끼는 본인이 완곡하게 불편을 표하는 용도로 '메이와쿠'를 입에 담는 경우는 많이 있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개념 자체는 전세계 여느 공동체에서나 있는 보편적 개념이지만, 그 중에서도 메이와쿠 문화는 다소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일본식 문화이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끼치는 피해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상호 간 갈등의 불씨가 될 만한 언행을 의미하는 단어로 확장되었다. 때문에 일본어 '메이와쿠'를 번역할 경우 영어로 'nuisance'라 쓰고는 있으나 사실 이보다는 메이와쿠의 범위가 더 넓고 복잡하다. 그나마 한국의 민폐가 일본의 메이와쿠와 가장 비슷하다고 여겨지나, 한국의 민폐와 일본의 메이와쿠 사이에도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한 번역은 아니다.
이와모토 미치야(岩本通弥) 교수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제국 정부와 교육 당국에서 서양식 공중 도덕 및 준법(에티켓 혹은 매너) 문화를 제국의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가르치기 위해 메이와쿠의 의미를 변용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현대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를 현대적 메이와쿠 문화의 등장 배경으로 본다.
즉, 최초에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 가깝게 개인의 번뇌라는 의미로 썼다가 중세기에 접어들며 이를 넘어 이웃과 같은 가까운 지역 사회 구성원들에게 끼치는 폐의 의미로 확장됐으며, 에도시대에 상업 문화와 도시 문화가 발달하며 점차 변하다가 메이지 시대를 거쳐 다이쇼 시대에 이르는 1910년대~1920년대부터는 서서히 '공중 도덕 위반'으로까지 뜻을 확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접어들며 메이와쿠가 상당히 변화했는데, 이와모토 교수의 분석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일본제국의 엘리트들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여러가지 유무형의 것들을 도입해 일본제국 내에 퍼트렸는데, 그중에는 서유럽 선진국들, 특히 영국의 신사도와 매너 그리고 준법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일본의 상황에서는 영국식의 문화를 그대로 이식할 수 없었다. 때문에 '메이와쿠'라는 기존 일본의 불교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을 매개체 삼아서 번역 및 설명했으며, 이를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이것이 집단주의적 면모가 강했던 메이지 시대의 교육 및 사회문화의 배경과 결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기존 영국의 매너 및 준법 문화보다도 더 광범위하고 복잡해졌다. 즉, 영국의 매너 문화가 특히 당대 일본의 공동체주의/집단주의적 사회문화 배경 및 집약적이고 압축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당대 일본 사회경제의 배경과 결합하며 현대 일본 메이와쿠 문화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런 메이와쿠 문화가 가지는 긍정적인 면모와 부정적인 면모가 있는데, 긍정적인 면모으로는 사회의 평화와 균형의 유지가 용이하고 각 개인이 알아서 규칙을 지키기 때문에 규칙을 이행시키기 위한 강제적 조치의 발동으로 인한 비용이나 혹은 규칙 미이행으로 인한 비용 소모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부정적 면모로는 사회적 갈등이 제때 제때 해소되지 못하고 쌓이다 문제가 커질 위험과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개성의 표출이 어려워진다는 것이 있다. 이런 메이와쿠 문화로 인해 일본 사회는 사회적 안정성이 높지만 반대급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누적되어 있는 사회적 불만도 상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적 개인주의의 근원이기도 한데, 서구에서의 개인주의는 프라이버시를 "상대방에게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확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반면, 일본의 개인주의는 프라이버시를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의 확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즉 서구에서는 사회와 다른 개인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할 권리를 우선시하여 개인을 인식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사회와 다른 개인을 침해하지 않아야할 의무를 우선시하여 개인을 인식한다. 때문에 서구에서는 어떤 제약과 환경에서도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사회적 관계와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의 범위 안에서의 권리를 추구한다. 이처럼 일본의 개인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때문에 서구의 개인주의는 외부적 요인에 얽매이지 않는 각 개인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상호 간의 투쟁과 타협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 열려있는 개인주의라면, 일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닫혀있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인들은 본심(혼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 중에 자신을 표현하거나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하고(다테마에), 이런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삶과 분리된 사적인 장소를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의 취미 활동 등 사적인 활동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오타쿠 문화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사회적 문제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불거진 것 역시 일본인들이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보다 타인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는, 본인의 집이나 방과 같은 사적인 장소에서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킨 상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도 이러한 일본인들의 특성들을 잘 알기에 식당들에는 일인석을 충분히 갖춰놓는 경우가 많고, 캡슐호텔이나 인터넷 카페와 같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자신만의 공간을 제공하는 등의 일본적 개인주의에 맞춘 서비스들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인해 일본 사회에서 메이와쿠를 끼쳐 사회적 균형과 평온을 깰 경우에 대한 대응은 직접적인 폭력의 행사보다는 따돌림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웨덴에 존재하는 얀테의 법칙 등과도 유사하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가짐인 기쿠바리(気配)나 본심을 숨기고 최대한 융통성있게 돌려말하거나 행동하는 다테마에(建前)도 상대방의 기분을 해치지 않고자 하기 위한 언행들이다.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문화가 발달한 이유로는 일차적으로는 유교적 예 개념 등으로 사회적/공동체적 관계와 그 속에서의 화합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적 경향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며, 전근대의 기술로는 벗어나기 힘들며 단합하지 않으면 서로 싸우다 모두가 죽게될 수 있는 고립되어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과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에 맞서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단합해야 했던 일본 열도의 환경적 요인이이 영향을 주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하게 이런 경향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메이아쿠 문화와 관련된 일본 특유의 토론 문화가 바로 네마와시(根回し)다. 원래 사전적인 뜻은 '나무를 옮겨 심기 전 뿌리를 둥글게 다듬다'라는 뜻인데, 정부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본격적인 토론 혹은 협상 전의 사전교섭, 물밑작업을 뜻하는 속어로 쓰인다. 회의나 토론 전 상급자가 하급자들에게 자세한 내용이 무엇인지, 상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지 등을 미리 알려서 이견(異見)과 불편한 감정이 유발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흑선내항과 메이지 유신으로 상인들이 사회 주도권을 잡기 이전의 전근대 일본은 막부 체제로 대표되는 무신정권의 습성을 주로 띄고 있었으며 고관대작부터 말단 실무직 관료에 이르기까지 지배계급을 무사들이 독점하는 사회였다. 무사들은 시비가 붙으면 언제나 칼을 빼들고 서로를 해칠 수 있었고, 이는 내가 저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무사들 간에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만약 상대방을 배어 살아남더라도 이는 곧 가문 간 전쟁으로 이어져 더 큰 참화를 야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무사들끼리 가급적 충돌을 피하는 문화가 강하게 조성되었고, 이런 무사들의 문화가 일본 사회 전반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평민들의 경우 무기를 들고 있고 그 무기를 자신들을 향해 휘두를 권리가 있는 무사들을 두려워하며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였고, 반대로 무사들은 평민을 밸 경우 따라오는, 심지어는 할복으로까지도 이어질 수도 있는, 여러 제재들을 두려워하여 평민들과 직접 마주치는 상황이나 평민들이 자신에게 반발하며 시비를 걸게 되는 상황을 가급적 피하려 했다. 이 때문에 평등한 관계와 상하관계 모두에서 가급적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일본식 예절 문화와 언어 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상인들이 평민화된 하급 무사 계급 출신의 군인들과 결합하여 메이지 유신으로 사회의 독점적 지배층인 사무라이들을 실권이 없는 화족으로 몰아낸 이후부터 상인들의 비즈니스 문화와 언어가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군인과 화족이 모두 몰락하고, 냉전 시기를 거치며 상공인들의 주도로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루게 되자 이들 상공인들이 사회와 문화 전 영역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상공인들의 비즈니스 문화와 언어가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도 상공인들의 상업주의적 그리고 실리주의적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강하게 받고 있고, 이걸 간과하면 19세기 및 20세기 초중반과는 또 다른 20세기 말 및 21세기의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인과 메이와쿠(迷惑)
"일본인은 왜 이렇게 친절한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초등학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폐(메이와쿠·迷惑) 끼치지 말라'이기 때문"이었다. 큰아이가 일본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아이가 수업 시간에 딴짓을 했다. 웬만해선 얼굴 붉히지 않는 일본 선생님들이지만 아이 하는 짓이 심했는지 불같이 화를 냈다. 선생님은 "네가 이러면 다른 아이들에게 폐 끼치는 게 되지 않느냐"고 했다. 아이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돼 '메이와쿠 않기'를 실천한다. 2011년 3·11 대지진 때 몇백m씩 줄 서서 구호물자를 배급받는 일본인에게 세계가 놀랐다. 2004년 고베 대지진 때 손자가 바위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폐 끼쳐 죄송하다"고 했다. 몇해 전 부산 화재로 일본인 관광객 일곱 명이 숨졌을 때도 부산을 찾은 유족들은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다. 통곡도 폐 끼치는 것이어서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것이다.
메이와쿠는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게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는 이런 문화가 독특한 집단주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썼다. 요즘 일본에선 '메이와쿠 않기에 집착하는 문화'가 일본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