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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한족 관계, 신해혁명

Jobs 9 2025. 6. 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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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만주족의 운명은 매우 비참해졌다. 특히나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이 반청복명·반만흥한적 성격이 다분해서 혁명파 및 한족이 만주족을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지배자로 군림하며 악행을 저질렀고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주족 축출 운동까지 전개되며 반만주주의 폭동이 벌어져 수많은 만주족이 학살당할 정도였다. 

 

이 당시에 많은 만주족이 학살을 피해서 성씨를 한족처럼 외자로 바꿔버렸다. 예를 들어 황족이었던 아이신기오로씨는 주로 김(金)씨로, 허서리 송고투가 소속되었던 허서리씨는 영(英)씨로, 우징의 조상이었던 우야씨는 오(吳)씨로, 용골대로 알려진 타타라 잉굴다이의 성씨인 타타라씨는 담(覃)씨 등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만주족은 대부분 한족이나 한국인처럼 외자 성인데, 문화대혁명 이후로 박해받을 일이 없어지면서 일부 명문가들은 다시 만주족 고유의 성씨로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옛 팔기군 군영터에 만주족 노파 둘이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한족 남성들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파가 겁에 질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우'라는 말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난다.

 

이는 명나라 멸망 과정에서의 약탈과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만주족에 대한 분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건 맞지만, 청나라의 명나라에 대한 약탈과 학살도 청나라 후기 만주족의 무능함으로 만주족이 한족에게 실망의 대상이 됨에 따라서 재조명된 것에 가깝다. 원래 중국은 왕조 교체나 정권 교체기에 항상 지배계급에 대한 학살이 있어왔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무너뜨려서 북쪽으로 몰아낸 이후, 포로가 된 몽골인들과 색목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고28, 청나라도 건국하면서 양주대학살 등 수많은 반청세력을 학살했듯이, 딱히 중화민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로 토지개혁으로 중화민국의 지주계급에 대한 인민재판과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과거 금나라나 원나라가 패망 후 원래 살던 고향 땅으로 돌아간 경우처럼 만주족도 일부는 동화되어도 민족과 영토 자체는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청나라 후기의 경우가 특수했기 때문이었다.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은 청나라 후기부터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만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고 타이밍도 좀 나빴다. 만주족은 기본적으로 한족에 동화되는 걸 경계해서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철저히 했고, 언젠가 돌아갈지도 모를 만주를 보험삼아 봉금 지역으로 지정해 한족의 유입을 막아뒀지만, 하필 청나라 후기는 예상치 못한 외세의 등장으로 이게 어려워졌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만주 북쪽에는 위협적인 세력이 없는 게 정상인데, 이 시기에는 북방에서 러시아 제국이 갑툭튀해 버렸다. 이때부터는 패망한 유목 제국의 패턴대로 만주로 돌아가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거나 부족 상태로 존재하는 등, 만주족 전통을 계승해서 한족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만주 땅의 주요 지점은 러시아에게 하나씩 빼앗겨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만주족은 중국 정복 후 성공에 취해서 점차 정체 혹은 쇠퇴하고 있었고, 신식 무기의 등장과 함께 기병과 유목민이 가지던 힘이 약화됐다. 기병은 소수 인구로 다수를 정복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수단이고 활이 주무기였기 때문에 말타고 싸우는 법만 안다면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여지가 있었지만, 신식 무기인 현대식 총포 앞에서 소수정예 기마궁술은 유물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만주족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적응하려하지 않았다. 특히나 시대의 변화로 한족 지배자들이 개혁을 하기 시작해서 유목민들과 힘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몽골의 군사력만 해도 청나라 전반기에는 상당히 강력했으나 신해혁명 이후에 수립된 복드 칸국은 안휘군벌 쉬수정의 외몽골 출병으로 자치가 취소되고 중화민국에 복속되어 1920년 안직전쟁으로 안휘군벌이 몰락하고 담딘 수흐바타르,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의 독립운동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개입한 개판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독립할 정도였다. 이후의 국공내전에서도 이제 소수 민족들은 한족 세력이나 외부 세력의 지원이 없으면 그냥 잉여로 전락했다. 냉병기와 기병으로는 자동소총, 기관총, 야포, 전차, 항공기에 도저히 맞설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청나라 후기의 대변혁으로 쓸만한 인재가 부족해지고 근대화가 시급해지면서 정책을 바꿨는데, 한족 견제정책을 거의 폐기하고 한족에게 만주족이 독점하고 있던 고위 관직을 마구 퍼준 것이다. 특히나 태평천국을 진압할 때 한족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청나라 정부에서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팔기군이 건륭제 말기에 막장화된 이후로 청나라의 군권 및 실질적인 권력은 이런 한족 의병들을 지휘했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의 손에 넘어간다. 그러니 한족의 폭풍 출세를 경계한 북방 지역 지도자들은 황실에 항의하고 한족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반발한다. 이러한 상황에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한족에게 만주를 개방하자, 한족이 만주로 대거 이주해서 만주를 한족 천지로 만들었다.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풀어버리면서 한족이, 특히나 당시 아편전쟁으로 인한 해안 방어 정책으로 청이 해안에만 투자를 하면서 가난해진 산동 서부, 하남 지역 등의 한족이 우르르 만주에 몰려갔다. 한족이 만주로 몰리면서 만주족과 한족의 숫자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졌고, 수적 우위에 서게 된 한족은 결국 만주족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증국번은 "그 백면 유생의 호령 한마디에 무수한 사람이 일제히 호응하여 무한을 함락했습니다. 따라서 장래에 그가 꼭 나라의 복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족 측근들은 그를 부추겨 만주족 왕조를 멸하고 다시 한족 제국을 세우려 했다. 게다가 서태후와 광서제의 대결에서 광서제의 통수를 친 원세개는 고위직을 유지하다가 청나라가 충분히 무력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청 황실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멍청한 서태후는 이를 눈치채기는 커녕 한족의 힘을 빌려서 권력을 독점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광서제는 훗날 큰어머니인 서태후를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독살당하고 만다.

 

광서제 사후, 한족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해가는 사이에 내부 갈등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수준까지 와버린 청나라는 결국 신해혁명을 맞아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한족의 국가였기에 만주족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개중에는 몽골인들과 만주족이 합심한 만몽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신해혁명 이전부터 청나라의 망조를 감지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계획한 것이다. 이후에 소련과 몽강국처럼 만주국은 유목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니 만주족의 정체성이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만주족이 스스로 만주국을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현대 만주족의 분포도. 고대에 랴오닝에 한민족계가, 지린에 퉁구스계가 많이 살았던 것과 달리 2010년 기준으로 지급시 중 랴오닝성 단둥(31.6%), 번시(28.4%), 후루다오(25.5%), 진저우(24.9%), 푸순(24.3%), 그리고 허베이성 청더(承德; 38.2%) 시에서 만주족 비율이 20%를 넘긴다. 이는 입관 이후 만주족이 중국 본토로 대거 옮겨갔고, 조선 후기부터 두만강 유역의 봉금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조선족의 조상이 되는 한민족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소수민족 보호를 약속했고 그리하여 만주족 자치현이 만주족의 본거지인 랴오닝성에 여럿 설치되었다. 이런 자치현에서는 행정문서에 만주어를 병기하고, 모든 공무원은 만주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청조 몰락 이후에 만주족은 정체성을 숨기고 민족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중화민국 시기에는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있었고, 이런 행정적인 조치는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20세기 만주국 시절에도 만주국에서는 만주어가 아니라 한어(표준중국어)가 쓰이고 있었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만 하더라도 만주어를 전혀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중국어만 쓰고 있었던 형편에서 딱히 만주족 정체성을 되살리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문화대혁명 때문에 한족과 소수민족을 불문하고 전통 문화를 모두 반동시하자, 만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또 다시 숨기게 되었다. 다만 이미 청말부터 만주족의 정체성은 희미해져갔고 중화민국 성립 당시부터 만주족의 문화는 거의 감추었기에 문화대혁명이 결정타였던 것은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좡족1957만 명과 위구르족1177만 명, 후이족1138만 명, 묘족1107만 명에 이어 인구수 5위이다. 약 1,042만 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 성(省)급 행정구역인 만주족 자치구는 없으나, 자치현은 11개(허베이성 4, 랴오닝성 6, 지린성 1), 자치향(鄕)도 랴오닝성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 있다. 유독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이다.

 

그러나 중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정말 만주족이 저 정도 규모로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많은 한족이 세제혜택이나 두 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를 제시하여 소수민족으로 주민등록을 변경하곤 한다. 또한 청 말기부터 학살을 당하기도 했고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거의 한족이나 마찬가지인 후이족과 함께 청대에 고유 문화로 규정된 언어가 거의 소멸된 채 표준중국어 및 지역별 방언만을 사용하는 민족이라 외모나 언어로는 한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반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내무부 소속 보오이거나 팔기한군에 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 게 가능하다. 입관(1644년) 당시 기준으로 팔기군 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46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은 금나라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통념상의 여진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임에도 그러하다.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든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소수로 남아 있다(가령 헤이룽장성 싼자쯔 마을(三家子村)). 그나마 귀족이 아닌 하층민일 경우에는 결국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고,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그 나름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청나라 왕조 시기에 만주족이 청나라 전역에 퍼져 통치계급을 구성하였던 역사적인 연고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중국 전역에 고루 분포하는데 그중에서도 내몽골자치구(499,911명), 베이징시(250,286명), 허난성(61,705명), 톈진시(56,548명), 산둥성(33,527명), 구이저우성(21,932명), 닝샤후이족자치구(21,962명), 신장위구르자치구(19,493명), 간쑤성(17,285명), 광둥성(17,972명), 섬서성(15,801명), 후베이성(14,540명), 쓰촨성(13,849명), 산서성(13,665명), 윈난성(12,187명), 장쑤성(11,880명) 등 순으로 다수 거주한다. 여타 각 성급 행정구역에는 각기 1만 명 미만의 만주족이 산재하고 있다.

 

2000년 현재 만주족의 도시 지역 거주비율은 20.65%로서 전체 소수민족 평균보다는 높고 중국 전체 및 한족의 도시거주 비율보다는 다소 낮다. 준도시화 지역인 진(鎭) 거주비율은 14.60%이다. 향촌 지역 거주비율은 64.75%로서,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 평균(76.56%)보다는 낮고 중국 전체 평균(63.08%) 및 한족의 향촌 지역 거주비율(61.83%)과 비슷하다.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쪽에 주둔군으로 파병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코르친 몽골에 종속되어 있던 여진족의 한 갈래로, 일각에서는 선비/실위-시버 간의 음운학적 연속성이라는 가설과 Y DNA를 근거로 실위나 선비의 후예로 보기도 한다.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 안준을 비롯한 시버족 언어학자들은 만주어와의 방언적 관계를 부정하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만주어를 연구하고 고문헌을 번역할 능력이 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이 시버어를 할 줄 아는 시버족 언어학자들이다.

 

청나라 때 고위직을 점유해서 그런지, 중국의 민족 중에는 학계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인 한족보다도 교육 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소수 민족이 받는 여러 우대 조치와 인구를 고려하면 특히나 금수저가 많은 만주족의 평균치가 한족보다 높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사실 만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유명한 저출산 지역이기에, 이곳은 만주족 뿐만 아니라 한족, 몽골족, 조선족 등 다른 민족들도 인구가 감소했다.

 

 

 

 

 

 

 






완벽한 소멸-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의 고초


"우리 조상들은 만주족에게 항복하길 거부하였다.
눈을 감고 격렬한 전투의 장면을,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쓰러진 시체가 땅을 덮은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 조상들의 양심이 고결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손문孫文-


청 제국이 스러지기 직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된 한족들의 만주족 혐오는 20세기 초 극에 달하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천국운동,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으로 청 제국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고 국토는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해졌으며, 중화라는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외세 침략과 민생고는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엉뚱하게도 그 칼끝은 만주족을 향하였다.

1895년, 그러니까 청일전쟁 발발 1년 후, 육호동陸晧東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모든 이유를 만주족 탓으로 돌리며 만주족 혐오에 앞장선다. 그는 만주족이 '혐오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청조를 몰락시키지 않고서는 중국이 어떠한 경우에도 부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주길 바란다.' 라고 덧붙였다. 유명한 여성혁명가인 추근은 기하인의 치파오를 입지 않고 일본인의 기모노를 입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었다.

"기모노는 한당 양식을 모방하여 지은 옷이니 이것을 입는 것은 곧 중화의 복식을 제현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추용은 <혁명군> 이라는 신문을 출간하며 글을 쓰기를,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만주족을 추방해야 하며, 만주 황제를 처형해야만 한다.' 비단 급진적인 혁명파뿐만 아니라, 1896년의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던 양계초 또한 중화제국을 멸망시킨 만주족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1912년을 전후하여 만주족 고관대직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가 성행했다. 이런 단편적인 사건들만 보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족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1911년, 신해혁명이라 불리는, 만주족과 한족 모두에게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선통 2년 10월 10일, 무한의 신군은 무기고를 점령, 또 다른 신군 3개 연대가 이들을 도왔다. 다음 날 혁명단체의 회원들은 한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기고와 철공소를 장악하였으며, 12일에는 한구 부대 또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의 전복과 만주족의 소멸을 바라였다. 1911년 10월 22일, 신서의 혁명군에 의해 수백명에 달하는 만주인이 학살당한다. 한 영국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리는 텅 비었고 사방에는 만주족의 시체가 즐비하며, 50구의 시신이 성문 밖의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반란군은 여전히 만주족을 사냥하고 있고, 만주족 8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의창에서도 만주족 여성과 아이들이 공개처형당하였다. 11월 서안에서는 약 2만 명의 만주인에게 식량 공급이 중단되었고, 이후 사흘간 혁명군은 쇠약해진 만주족을 도륙하였다. 한족 혁명파들은 청군에 의해 명의 신민들이 당했던 고초를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명 제국의 백성들이 당한 학살은 소수의 기하인들이 아닌 청에 항복한 한족 병사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였다. 또 그들은 기인들이 은과 곡식을 배급받으며 기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주인들은 이미 최하층민으로 전락해 있던 상태였다. 광기에 휩싸인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만주 지방으로 도망친 일부 운 좋은 만주족들이 아니라면, 그 대부분은 학살당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굶어죽었고, 돈이 많으면 혁명군들이 가산을 몰수하였기에 또한 굶어죽었다.그들은 인력거를 끌거나 곡예사, 똥지게꾼, 거렁뱅이, 매춘부가 되어 조상들의 화려한 영광을 억지로 망각한 채 살아야만 했다. 세자왕손이 성문동에서 죽고, 군주명부가 기원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청 황실의 골동품을 가소로울 정도의 헐값에 팔았다. 팔 물건조차 없는 일반 기하인들은 집도 먹을 것도 없이 야외에서 얼어죽어갔다.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다는 경친왕 혁광의 손자는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가 되었다. 북경성 내의 칠천기녀는 대부분이 팔기자제였다.

지금 중국에 살고있는 만주족은 약 천만 정도라고 추정된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는 평생 떳떳치 못한 비밀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고, 임종의 순간이 되서야 만주족의 혈통을 밝히며 기인과 종족의 상세한 정보를 실토하였다 한다. 대청제국의 후손이 당한 고초의 유일한 이유는, 만주족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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