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요시다 쇼인, 정한론, 안세이의 대옥사

Jobs 9 2025. 6. 10. 14:27
반응형

요시다 쇼인

吉田よしだ 松陰しょういん

(1830년 8월 4일~1859년 10월 27일, 향년 29세)

 

 

일본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 하기 출신의 하급 무사, 사상가, 교육자. 본명(諱)은 '노리가타'(矩方, 구방)이며, '쇼인'은 그의 호이다. 통칭은 '토라지로'(寅次郎)이다.

 

이른 나이에 죽어 생전에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조슈 번의 제자들로, 그들의 사상적 근간을 제공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 일각에서 선구자로 받들여지는 인물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아는 사람들도 정한론 등 훗날 일본 군국주의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주장을 한 것이 부각되어 부정적인 평이 지배적이다. 아베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국내 인지도가 크게 늘었다.

 

 

생애

 

그의 원래 성씨는 스기(杉) 씨로, 전국시대 당시 스오 지방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의 중신을 맡았던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1551년에 오우치 요시타카가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죽은 뒤 스기 가문은 모리 측과 오토모 측으로 분열되었다. 쇼인의 집안은 모리 측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방계 후손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스기 츠네미치(杉常道, 통칭 유리노스케)때에는 이미 가난한 하급무사 집안이 된 상태였다.

 

5세 때 야마가류 병학(兵學)의 사범인 숙부(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데 양부는 그가 6세 때 죽어,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한 집안의 호주(戶主)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탓에 호적상으로만 양자로 하고, 원래 자랐던 부모님 집에서 자랐다. 그리고 가독을 잇는 자는 집안 대대로 이어 온 직업을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에 병학 사범이 되는 숙명을 짊어졌다. 그래서 또 다른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에게서 스파르타식으로 병학을 배웠다.

 

12세 때는 조슈 번 13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 앞에서 강의(프레젠테이션)를 하고 칭찬을 받았다. 강의한 내용은 《무교전서》라는 당시의 교범 중 하나였다고 한다. 조슈 번이 위치한 스오국, 나가토국 일대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일본에서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수백년 동안 해당 지역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은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칭하며 일찍부터 선진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학문을 장려했으며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대부분 무(武)를 숭상했던 것과 달리 문•무를 모두 중요시했고 오히려 문치를 더욱 중요시하여 문관들을 무관들보다 우대하기도 했다. 조선과 꾸준히 교류를 시도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200년에 걸쳐서 수백건의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내전(大內殿)이라고 언급된 세력이 바로 오우치 세력이다. 오우치씨가 멸망하고 모리 가문이 해당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그런 풍토는 상당히 남아있었고 더군다나 조슈 번은 일본의 다른 여러 제번들과 달리 사족(士族)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번이었다. 애당초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었기도 했거니와 세키가하라 대전 이후 모리 가문이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감봉되고 영지가 스오, 나가토 2국으로 축소된 이후에도 기존 가신단이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당시 법도로 사족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상공업과 학술이 발달할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19세 때부터 사무라이 자제들을 위한 공립 교육기관인 번교 명륜관(明倫館)에서 병학의 정식 사범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이즈음 동아시아는 서양 열강 세력의 침략으로 급변하던 시기였다. 쇼인은 아편 전쟁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배웠던 구닥다리 병학으로는 서양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그래서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0년, 20세의 쇼인은 규슈(九州)를 비롯한 일본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세상 실정을 파악했다. 나가사키 데지마에서는 네덜란드 선박에 직접 올라가 살펴보기도 했고, 에도(江戶)에서는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략을 염려하여 도호쿠 지방을 살피러 갔을 때는 번의 통행허가서를 기다리지 못해 탈번까지 했다.

 

1853년(23세) 흑선내항 시기에는 사쿠마 쇼잔과 함께 직접 우라가로 찾아가 미국의 크고 아름다운 증기선을 목격했다.

 

"이제 병학자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왜인(倭人),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아무 쓸모도 없고 입만 번지르하게 되었습니다."

흑선을 보고난 후 숙부 타마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현재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칠 힘이나 기술도 없다고 느껴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승 사쿠마 쇼잔의 권유도 있었기에 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3월, 나룻배를 훔쳐 제자이자 친구인 카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와 미일화친조약을 위해 다시 내항한 페리 제독의 흑선 선단 중에서 해안에 당도하지 않았던 기함 포하탄(USS Pawhatan)을 찾아가 밀항을 부탁했다. 그러나 페리 제독에게 거절당해 그대로 쫓겨났다.

 

이후 쇼인과 카네는 시모다 부교소에 자수했고, 조슈 번으로 압송되어 14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감방 동료들끼리 서로 자신의 잘 아는 분야를 가르치고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수감도중 카네코는 위생관리가 형편없던 서민 감옥에서 병사했다.

 

1855년 12월, 석방된 쇼인은 근신 처분을 받아 하기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유배생활을 보냈다. 요시다 쇼인의 소문을 듣고 여러 학생들이 찾아왔지만 유배중인 죄인의 신분에서 정식으로 학원을 차릴 수는 없어 막부의 법을 위반하는 불법 과외 같은 개인 지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2평도 안되는 자신이 거처하는 단칸방에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1대 1로 가르쳤고, 나중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큰 교실을 지어 옮겼다. 점차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1857년 원래 숙부 타마키 분노신이 맡았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의 숙장이 되어 약 2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조선으로 치면 마을의 작은 서당의 훈장으로, 조슈 번의 정식적인 인정을 받은 숙장으로써 가르친 기간은 단 5개월뿐이었다.

 

1858년, 일본에게 불리한 불평등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고메이 덴노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체결한 에도 막부에 쇼인은 분노했다. 그래서 에도 막부의 고위 관료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츠를 납치해서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할 것을 건의하고,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자들 전원이 만류했다.

 

명나라의 명장이자 유학자인 왕양명이 일으킨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쇼인은 실천을 중시했다. 그래서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죽을 수 있느냐, 아니면 일단은 목숨은 소중하니까 죽을 필요는 없고 지금은 참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천천히 개선해도 되지 않느냐는 토론에서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면 언제 죽어도 좋다. 살아서 대업을 이루고 싶다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 행동을 일으키면 그 뜻(志)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진다."라고 주장하며, 실행을 강조했다.

 

이러한 쇼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인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패거리는 양이 사상에 따라 주일영국공사관 방화사건(1862년)이라는 테러를 실행에 옮겼다.

 

 

최후

 

1858년부터 에도 막부에서 난키 파에 속하는 최고 권력자였던 대로(大老,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히토츠바시 파 뿐만이 아닌) 막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는 안세이의 대옥사를 일으켰다. 에도 막부를 비판하고 도막 운동을 전개하는 쇼인을 위험분자로 판단한 번에서는 다시 그를 붙잡아 노야마 감옥에 투옥시켰다.

 

1859년, 존황양이 지사였던 우메다 운빈이 막부에 의해 체포되자, 요시다 쇼인은 그가 하기에 있을 때 만났다는 죄로 에도로 압송되었다. 평정소(評定所)에서 막부가 쇼인에게 심문한 것은 우메다 운빈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였는데, 쇼인은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막부의 고관인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자백해버렸다.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아 그해 10월 27일 참수되었다. 이는 안세이 대옥의 마지막 처형이었다.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로부터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존황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야마토/일본의 혼)를 외쳤다.

"かくすれば かくなるものと 知りながら やむにやまれぬ 大和魂"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야마토다마시이

쇼인이 옥중 생활 중 남긴 와카(和歌).

 

요시다 쇼인이 죽은 후에 쇼카손주쿠는 숙부 타마키 분노신이 다시 이어받아서 운영했다.

 

 

 

쇼카손주쿠와 쇼인의 제자들

 

정확한 수강생 명단은 남아있지 않지만 약 50명~100명의 문하생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으로 치면 구한말 개화파의 스승으로 불린 박규수가 자기 집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김홍집 등을 가르친 것과 비슷하며, 실제로 박규수와 쇼인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업 스타일은 기본적으로는 한문의 암기였다. 수제자였던 타카스기 신사쿠는 《고사기》, 《일본서기》를 통째로 외웠다. 주입식 교육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토론하는 세미나도 자주 열렸다. 제자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요시다 쇼인보다 서너 살부터 10살 정도로 나이차가 크게 나지 않다보니 사제관계 보다는 선후배 관계와 비슷했고, 이 때문에 격한 토론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유명한 제자로 타카스기 신사쿠와 쿠사카 겐즈이가 있는데, 이들은 조슈 유신지사 그룹의 중심이었다. 타카스기 신사쿠와 쿠사카 겐즈이는 유신 이전에 사망했지만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여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렸다. 쇼카손주쿠에서 배출한 또 다른 존황양이 지사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203고지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초래해 비판받은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쇼카손주쿠에 입학해서 쇼인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같은 동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이지 정부의 실세가 된 된 선배들의 이쁨을 받아, 일개 병졸에서 장군까지 빠르게 출세할 수 있었다.

 

쇼카손주쿠는 지금도 야마구치현 하기에 그 건물이 남아 있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포함되어 군함도와 같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에서는 강제징용 문제로 군함도가 부각되어 국가적인 이목이 집중된 반면, 쇼카손주쿠는 국권 침탈의 원흉들을 키워낸 장소라는 점에서 한국 입장에서 불편할 여길 만함에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군함도와는 달리 한국인이 직접 피해를 입었던 장소가 아니여서 그런듯 하다.

 

 

 

 

사상

 

일군만민론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

- 1859년 쇼인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했다. 이는 막부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리고 《맹자》의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을 주창했다.

 

일군만민론에 따라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대상에 신분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같은 출신이 낮은 사람들도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제자 타카스기 신사쿠는 쇼인의 사상을 실행에 옮겨 일반 민중으로 구성된 민병대인 키헤이타이(기병대)를 창설했다.

 

이 사상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훌륭한 논조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놓치면 안되는 점은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과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는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정한론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에조(蝦夷=홋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으며, 유구(琉球=오키나와)에 말하여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며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 《유수록》 (요시다 쇼인 저, 1854) 16쪽

 

国力を養い、取り易き朝鮮、満洲、支那を切りしたがえ、交易にて魯墨に失うところは、また土地にて鮮満に償うべし

"국력을 키워, 뺏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복종시키고, 교역에서 러시아, 미국에게 잃은 것은, 다시 토지로서 조선과 만주로부터 이를 충당해야 한다."

- <옥시장(獄是帳)>

 

존왕양이론자였던 쇼인은 무작정 서양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제국주의 논리를 수긍했다. 그래서 서양 열강이 일본을 노리는 것은 서양 열강이 나빠서가 아니라 일본이 약하기 때문이고,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배워(부국강병) 국력을 길러 서양 열강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쇼인은 일본의 국력을 키워 서양 열강에게 빼앗긴 것을 조선 등 주변 아시아의 약소국들을 약탈해 되찾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선민의식과 자국 우월주의, 민족주의, ‘진구 황후가 조선을 정벌했다.’는 엉터리 이야기가 담긴 『고사기(古事記)』의 내용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제국주의적 마인드에 빠져 주변국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정한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상은 독창적으로 주창한 사상이 아닌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新論)같은 이 시절 일본에 퍼진 민족주의 침략사상에 동조한 것이다. 사실 본인은 애초에 만 29세에 죽은 막말의 흔한 무사 교육자라, 제자들이 없었으면 역사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일개 하급무사 정도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에조지(지금의 홋카이도)를 개간하여 여러 대명들에게 봉토를 주고 틈을 봐서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류큐도 타일러 내지內地의 제후와 마찬가지로 참근參勤시키고 회동會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분할하여 빼앗고, 남으로는 대만, 루손(지금의 필리핀)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

- 『유수록』

 

홋카이도 개척부터 류큐 흡수, 조선의 속국화, 만주ㆍ대만ㆍ필리핀의 영유화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당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쳐들어갈 국력도 없었고,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에 혼란을 겪는 어려운 시기라 현실성 없는 주장이었다.

조선, 만주에 진출할 때 다케시마(울릉도)15는 첫 번째 발판이다.

영국이 다케시마를 이미 점거했다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언제 일본에 쳐들어올지 모른다. 조슈번은 다케시마와 조선을 급선무로 점령해야 한다.(1858년 6월 28일)

 

다케시마는 겐로쿠(元祿, 1688~1704년) 시절 조선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변혁의 시기이므로 조선에게 ‘섬을 비워두면 무익하므로 우리가 개발해주겠다.’라고 교섭하면 그들도 납득할 것이다. 만약 서양세력이 다케시마를 점령하면 조슈번으로서는 대단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1858년 7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여러 국가가 앞 다퉈 얻으려고 한다. ~ 만약 일본이 이곳을 손에 넣으면 분명히 큰 이익이 될 것이다. ~ 조선은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 「유수록(幽囚錄)」

 

이 밖에도 오스트레일리아를 차지하고, 울릉도를 조선과 교섭하여 일본이 개간하자는 주장을 했다. pdf 주의

 

 

 

과대평가설

 

고인이 된 아베 신조 前 내각총리대신은 옛 조슈번인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그는 외무대신과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자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장례식에서도 쇼인의 글을 바탕으로 추모사를 낭독했을 정도로 고향의 역사적 인물 쇼인을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리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3년 8월 13일에는 쇼인의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2016년 말 국회에서 쇼인의 ‘이십일회맹사’ 이야기를 언급하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하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도쿄의 헌정기념관에는 역대 총리들의 좌우명이 걸려있는데 아베 신조의 좌우명은 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이다. 참고로 쇼인의 학생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좌우명도 이와 같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요시다 쇼인이 엄청 훌륭하고, 미래를 예측한 인물로 그려졌다. 요시다 쇼인은 조슈 번의 의도대로 타고난 천재이며 박학다식한 지식을 가진, 일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미래를 내다 본 선각자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에서 정권을 잡은 조슈 번 출신 세력은 이런 식으로 요시다 쇼인의 우상화 작업을 했다. 그 여파가 지금도 남아서 일본 우익 세력에서 요시다 쇼인 하면 위대한 위인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2010년대 들어서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 진영 일각에서 그를 사상적 지주라고 치켜세우는 경우가 있다보니, 그에 따르는 반작용으로 요시다 쇼인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관점도 제기되는 중이다.

 

당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끄는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는데, 조슈 번의 라이벌이었던 사쓰마 번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에 비해 조슈 번이 내세울 만한 인물은 (과격한 양이운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다들 요절했고,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정신적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었다. 29세의 나이로 참수당한 동네 서당의 선생님이라 뭔가 대외적으론 크게 이룩한 업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위의 행적에서 드러나듯이 체계적인 근대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사상가라고 쳐주기에는 보여준 것도 딱히 없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고등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학문적 체계를 다진 후, 그 학문적 체계를 비판 혹은 개선하고자 하면서 이론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2017년경부터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