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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饅頭), 오랑캐 머리, 교자(餃子), Dumpling, 딤섬(点心/點心), 餃子(자오쯔), 包子(바오쯔), 餃子(ギョウザ, ギョーザ / 교자),

Jobs 9 2024. 12. 25.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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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자만두

 

 

만두, 饅頭

 

 

만두(饅頭)라는 이름은 제갈공명이 지었다고 한다. 제갈공명이 촉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노수라는 강까지 왔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신에게 사람을 바쳐야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공명은 사람의 머리 대신 밀가루를 반죽해서 사람 머리를 본뜨고 그 속에 소와 양의 고기를 다져넣고는 오랑캐의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蠻頭)'라고 이름하였는데, 훗날에 너무 잔인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어 발음이 똑같은 '만두(饅頭)'로 고쳐 불렀고 현재 중국에서는 '교자(餃子)'라고 불린다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에 전래되었고 원래는 정초(正初)에만 먹는 계절 음식 



중국어
餃子(자오쯔), 包子(바오쯔), 燒賣(사오마이)
일본어
餃子(ギョウザ, ギョーザ / 교자), 肉まん(니쿠만)
영어
Dumpling, Potstickers

 


한국에서는 밀가루피에 고기, 두부, 채소 등 소를 넣어 조리한 모든 음식을 통칭해서 만두라고 부른다. 고기와 채소가 아닌 단팥 등을 넣은 것은 보통 찐빵이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교자(餃子)라고 부르며 만두(饅頭)와는 구별된다. 그리고 밀가루피에 소를 넣으면 거의 다 만두라고 부르는 한국과 달리 중국이나 일본에선 좀 더 세분화해서 분류하는 편이다. 

좁은 의미가 아닌, 넓은 의미의 만두는 한 가지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만두의 문화를 공유하는 동북아시아부터,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유럽, 남미까지, 만두에 대한 국가별 정의와 명칭은 실로 제각각인데, 왜냐하면 이미 고대에 이러한 요리 방법이 각국으로 전해진 이후 각 나라마다 독창적인 발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화 요리의 딤섬(点心/點心) 개념에서 이러한 요리를 많이 먹기 때문에 서구권 등에서는 딤섬이란 '만두류 음식을 총칭하는 말' 정도로 굳어진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딤섬은 사실 특정 요리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아침과 저녁 사이에 간단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말한다. 즉, 점심과 사실상 유래나 한자가 같다. 

고려 시대~조선 시대 발효한 밀가루피를 사용해 희고 둥글게 만든 음식을 부르는 명칭은 보통 상화(霜花)였다. 이는 중앙아시아 등에서 주로 먹는 삼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 이름은 아니었는지 기록에는 雙花, 雙下, 床花 등으로 혼재되지만 대략 상화병(霜花餠)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이라고 보면 된다. 발효하지 않은 피를 사용한 것은 대략 만두라고 했는데 이외에도 수고아나 병시가 있고 편식(扁食)이라는 단어가 들어와 조선후기에는 편수(片水)가 되었는데 지금은 사각 또는 삼각형의 개성만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영양 정보


가장 흔히 먹는 찐만두, 군만두, 물만두 세 종류의 영양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는 구체적 종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찐만두: 41kcal(172kJ), 탄수화물:단백질:지방 비율 약 35:43:22%
군만두: 77kcal(322kJ), 탄:단:지 비율 약 40:24:35%
물만두: 22kcal(92kJ), 탄:단:지 비율 약 66:11:23%

위의 정보는 만두 한 개에 대한 것이다. 물만두가 다른 만두에 비해 열량이 낮은 것도 물만두 한 개가 다른 만두보다 작기 때문이다.

 

 

만두 역사

 

메소포타미아 기원설


역사적으로 밀을 가장 먼저 재배했던 지역은 기원전 90세기 경 아나톨리아 반도이며, 기원전 30세기 경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대량 재배 한 것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밀가루를 물과 반죽한 뒤 뜨거운 돌 위에 넓게 펴서 '닌다'라는 이름의 빵을 만들어 먹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요리책에서 '푀겔헨' 이라는 요리가 발견 되는데, 이는 닌다 위에 다진 고기를 얹고, 다시 닌다를 얹은 후 익혀 먹는 음식이다. 현재 만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리법이다. 

요시파라

기원전 550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 자리에 번성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사각형으로 만든 무발효 밀반죽 위에 다진 고기와 양념을 속을 채워 먹는 요리인 '요시파라'라는 요리를 먹었다. 이 요시파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퍼져 시시바라, 추츠바라, 두시바라, 최츼라 등 다양한 만두 조리법의 어원이 된다.

당시 페르시아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한나라와 교역하고 있었고, 실크로드를 따라 만두가 중국으로 전래 된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한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서는 화덕에 굽거나 튀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이 음식을 '이민족의 밀가루 음식'이란 뜻의 후빙(胡餠) 이라고 불렀다. 이 후빙은 시간이 지나며 중원의 음식으로 정착, 중국 문화와 융합을 이루어 현재의 지엔빙(煎餅, 전병), 웨빙(月饼, 월병)이 되었다.

후빙은 중앙아시아의 굽는 방식에서 벗어나 물이 풍부한 중국 문화권의 삶고 찌는 조리법과 결합하게 된다. 찌는 방식은 만터우(饅頭)며, 삶는 방식은 탕빙(湯餅)이라 하였으나, 탕빙은 수제비, 만둣국 등 다양하게 추정 될 뿐 정확한 조리법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 탕빙을 길쭉하게 늘인 것이 수이인빙(水引餅)으로, 국수의 원형으로 추정 된다.

 

 

중국 기원설


문헌에 명확히 만두, 혹은 만두와 비슷한 음식이 등장한 것 자체가 A.D 200년대라 하며, 중국에 제분 기술 자체도 기원 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밀가루 식품인 국수가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측되며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시기에 전파 되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튀르키예의 만트, 러시아의 펠메니 등 많은 동유럽 지역 음식들이 중국의 만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이는 13세기에 몽골 제국이 동유럽,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만두의 전래는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된 초기 만두의 형태가 중국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만두로 변형되고 이후 중원을 정복한 몽골 제국이 중앙 아시아 및 동유럽으로 다시 전파했다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다만 중국 내에서는 본래는 민간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다가 후한 말에 폭발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걸로 추측된다.

 

 

제갈량 기원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서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는데, 남만인들과 맹획에게 묻자 49명의 머리를 바쳐서 남만 정벌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을 위로하여 수신을 달래야 한다고 하였고, 그러자 병사들과 신하들이 제갈량에게 인질로 잡은 오랑캐의 머리를 바치자고 하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미 희생이 크니, 제갈량은 사람의 머리를 대신해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그 안에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와 야채를 섞은 것을 넣고 싸서 그것을 공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면서 '강의 신'의 노여움을 달랬다고 하는 고사로부터 유래한다.

본래는 산 사람의 목을 쳐서 바쳐야 했는데, 제갈량은 "이미 남만을 정벌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어찌 또 죽인단 말인가?" 하고 반대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풍랑은 자연현상일 뿐인데 이를 막기 위해 사람의 머리를 바치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있던 풍습을 갑자기 없애면 반발이 심할 것이니 꾀를 내서 앞으로는 만두를 대신 바치도록 만들었다.'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남쪽 오랑캐의 남만(南蠻)의 머리, 즉 만두(蠻頭)로부터 기원했다는 내용이 송대의 사물기원(事物紀原)에 기록에 적혀있다. 그런데 막상 蠻頭(오랑캐의 머리)라고 쓰니까, 너무 직설적이라서 瞞頭(속이는 머리)라고 바꿔쓰다가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만두라고 직접 이름을 붙이고 기록에 처음으로 남겼다고 하는데, 사실 제갈량이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전에도 이미 다른 만두가 흔했다고 이야기가 있으니 그 전에도 만두를 만들어서 먹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제갈량은 원정 중에 이미 만두와 유사한 음식을 발견했고, 이를 제수용으로 쓰면서 본격적으로 중원에 보급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다만, 중국에서 만두, 만터우(饅頭)는 속이 없는 찐빵 덩어리 같은 것을 지칭하고 고기로 소를 만들어 넣은 제갈량의 만두는 바오쯔(包子)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다. 수호전 등의 소설을 보면 이때까지도 만두라고 지칭했으나, 좀 더 후세의 작품인 서유기에서는 포아(包儿)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니 대충 명나라 시기에 용어가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기를 넣어 만드는 만두를 서민들이 먹을 수 없으니 값싼 재료로 모양만 흉내내어 만들었다는 추측도 있으나, 고기가 없이 야채만을 넣는 만두도 존재한다는 점이 이를 반박한다.

이것은 '만터우'라는 용어의 용법이 시간에 따라 변화한 것을 설명해주는데, 원래는 소가 있든 없든 만터우라 불렀고, 송대에 들어서야 교자라는 단어가 들어섰다는 해석이 있다. 현재에도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등에서는 속이 있든 없든 만터우라고 부른다. 만터우 항목 참고. 현재는 용어가 분화되어, 이들을 한데 묶는 단어로 小麵糰(소면단)을 쓰고 있으며, 한국에서 만두는 小麵糰을 가리킨다.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타코야키, 경단, 뇨끼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표현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이전에도 만두와 유사한 병(餠)이라는 음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200년대 중반 사람이던 속석이 만두가 215년의 사건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한 것을 보아, 당시 사람들은 만두가 병(餠)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정사 삼국지에서는 만두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만두'라는 독음의 한자어 자체는 서진 시대의 문인 속석(束皙)이 자신이 지은 《병부(餠賦)》라는 요리책에서 당시 '증병(蒸餠)'으로 불리던 찐빵류의 음식을 曼頭(만두, '길쭉한 머리')라고 부른 사례가 최초의 기록 사례이다. 초봄 음양이 교차할 때 만두를 차려놓고 연회를 벌이면, 바람이 잔잔해지며 날씨가 평온해지기를 기원했다는 내용이 있다. 제갈량이 제사 음식으로 만두를 썼다는 전설은, 어쩌면 이 당시의 기록들을 일부 참고해서 지어낸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三春之初, 陰陽交際, 寒氣旣消, 溫不至熱. 於時享宴, 則曼頭宜設.
삼춘의 초기에는 음과 양이 교차되는데, 한기는 이미 사라졌어도 온기는 아직 한창에 이르지 못한 상태다. 이때에 연회를 차릴 경우라면 만두가 알맞다.
속석(束皙), 《병부(餠賦)》

농업 쪽으로 생각해보면 남만정벌의 전장이었던 남만 지역 및 촉나라의 대부분 지역은 밀이 아닌 벼농사를 했다는 맹점이 존재한다.

 

 

장중경 기원설


장중경(張仲景)은 후한(23~200년) 말기의 사람이다. 어렸을 때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의 이야기를 듣고 의술에 뜻을 품어 의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웠다. 후에 효행과 품행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는 효렴(孝廉)제도를 통해 하남성 장사 태수로 근무를 하였다. 

태수 일을 하며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왔으며, 황건적의 난, 역병 등에 시달려 권력보다는 백성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펼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서기 220년, 노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장중경은 추운 겨울 날씨에 전란으로 인해 집을 잃고 거적때기만 입은 난민들이 영양부족으로 황달에 걸리고 동상으로 귀가 얼어 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이에 장중경은 음식으로 영양도 보충하며 동상도 해결 할 수 있는 처방을 연구하게 된다. 

취한쟈오얼탕

이것이 취한자오얼탕(祛寒嬌耳湯, 거한교이탕)으로, 한자를 해석하면 '추위를 떨치고 귀를 아름답게 만드는 탕'이다. 장중경은 마을 광장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에 양고기, 약재, 고추 등을 넣고 탕을 끓였으며, 삶은 양고기로 만든 소를 밀가루 피에 싸서 탕에 넣고 끓였다. 그렇게 만든 음식은 귀 모양을 닮았으며 얼어있는 귀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하여 자오얼(嬌耳, 교이)이라 불렀다.

장중경은 이렇게 끓인 음식을 탕 한 공기에 자오얼 두 개씩을 넣어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탕을 먹은 사람들은 온 몸이 따뜻해지고 귀에도 열이 올랐으며, 두 번 다시 귀에 동상이 걸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통상 만두로 불리는 교자, "자오쯔(餃子)"의 유래이다

제갈량의 만터우는 225년, 장중경의 자오쯔는 220년이다. 어느 쪽이든 제대로 기록된 중국의 만두 역사는 후한 말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사서에 '만두'라는 단어가 등장한 시기를 근거로 제분술도 삼국시대 끝무렵에 들어온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종류

 

대한민국

한국의 만두가 주변 국가들의 만두와 차별화되는 점은 속재료에 두부와 당면과 숙주나물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두부는 개화기 한참 이전부터, 당면은 개화기 이후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시대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부족한 고기의 양을 불리려고 맛이 약한 재료들을 첨가하기 시작했던 건데, 이것이 한국식 만두만의 특색으로 자리잡힌 것.

대체로 그냥 만두라고 하면 자오쯔처럼 얇은 피로 감싼 만두를 뜻하고, 바오쯔 형태로 빵처럼 두꺼운 피는 보통 왕만두, 호빵으로 칭한다. 

떡볶이나 순대 만큼은 아니지만 길거리 음식으로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한 판에 2천-4천 원을 받고 파는 저가 만두집도 있다. 대개 고기만두와 김치만두 두 종류로 나뉘며, 여기에 가게에 따라 포자만두 식의 왕만두나 어묵을 피로 사용한 어묵만두, 만두는 아니지만 쪄서 만들 수 있는 감자떡 같은 것들도 옵션으로 판다. 하지만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맛은 그다지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길거리 분식집에서 파는 튀김만두엔 고기나 채소는 거의 없고 대부분 당면만 들어 있다. 찐 고기만두라고 하는것도 고기는 매우 적게 들어가고, 절인 무와 배추로 만든 속이 들어간다. 채소로 돼지고기 향과 질감을 내는 것이 기술이다. 

명절에 만들어 먹는 요리라는 점에서 송편과 비슷하지만, 대체로 만두는 설날 음식, 송편은 추석 음식으로 친다. 

만두 전문점이나 분식점만 아니라 칼국수 전문점에서도 함께 파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둘 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유명한 곳은 손만두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러면 칼국수만 파는 것보다 수익도 나고 하나만 먹기 아쉬운 사람은 같이 세트로 먹어 만족도를 높일 수 있기도 하다. 

또한 한국 만두의 특징이 있는데 보통 물고기 모양의 유선형의 모습을 한 해외의 다른 만두들과는 다르게 만두를 동그랗게 오므린다는 특징이 있다.

 

 

북부와 남부의 차이
한반도에서 원래 만두로 가장 유명했던 지역은 북한의 평양과 개성으로 이미 고려 시대부터 쌍화점 같은 만두가게가 성행했던 곳이다. 겨울이 되면 만두를 빚어 곳간에 걸어놓은 채반에 저장해 두고 먹었다고 한다. 개성은 서울과 불과 차로 1시간 거리밖에 안되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지만, 개성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먹었고, 서울에서는 떡국을 먹었다. 평양만두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평양냉면과 함께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평양만두는 보통 큼지막 하게 만들어 먹는게 특징이고 실제로 다른 지역 만두들에 비교하면 굉장히 크다 왕만두라고 지칭하면 보통 평양만두를 지칭할 정도. 요즘은 평양만두라고 불리기 보단 보통 평안도식 만두 라고 불리어 진다. 이렇게 황해도를 비롯한 현재 북한 지방에서는 만두가 명절 음식 취급을 받는다. 즉 남부는 떡국, 북부는 만둣국으로 명절 음식이 갈리는 것. 이를 뒷받침하듯 서울·경기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둘의 절충형인 떡만둣국을 해먹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개성 만두는 다른 경기도 만두와 맛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는 개성만두를 포함해 경기도식 만두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없어 진짜 개성 만두를 맛보긴 쉽지 않다.

편수라고 하는 개성식 만두도 있는데, 중국식 덤플링(바오쯔)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만두다. 보통은 애호박이나 오이를 물기를 최대한 짜낸 후 살짝 볶아 식힌 후, 다른 물기 없이 볶은 고기나 재료와 함께 만두피에 싸서 쪄먹는다. 특이하게 호박선이라고 하는 개성식 유사 만두도 있다. 애호박을 먹기 좋은 형태로 잘라 그 단면을 열십자로 가른 다음 돼지고기나 쇠고기로 채우고 찐 다음 진간장으로 간을 해서 숟가락으로 떠 먹는다. 만두피 대신 호박에 소를 넣어 만든 만두라고 보면 된다. 거의 사라진 음식이라 먹어본 사람은 극소수일 듯.

혼돈찜이라고 불리는 이름만으로도 특이한 북한식 만두도 있다. 이 만두는 한식대첩의 시즌3 3화에서 소개된 만두. 만드는 법. 혼돈은 훈툰 내지는 완탕이라고 하는 중국식 물만두의 명칭이다. 완탕은 부산광역시의 명물이기도 하며, 중국식 물만두 훈툰을 유래로 둔 만둣국으로 볼 수 있다. 흐물흐물하게 얇은 피에 조그맣게 들어있는 고깃덩어리, 맑고 개운한 육수가 특징.

경상도나 전라도 같은 남부 지방에서는 배추김치를 씻지 않고 넣어 속을 빚고, 서울을 포함한 중부와 북부지방은 고춧가루의 텁텁함을 없애기 위해 김치를 씻어서 넣는다. 두부와 고기의 배합비율도 중요한데, 두부를 너무 많이 넣으면 퍽퍽해진다.

평안도나 황해도 등 한국 북부 지방에서는 옛부터 설날 때 만두를 빚는 풍습이 있었는데, 남쪽으로 풍습이 퍼져서 남북분단 뒤의 남한에서도 설날에 만두를 빚는 풍습이 있다. 주된 원인은 남북이 분단되고 6.25 전쟁 이후 1.4 후퇴로 북부 지방 사람들이 피난을 위해서 월남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온난한 남부 지방에서는 이런 만두를 빚는 풍습이 적었다. 현대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냉장 기술이 부족한 과거에는 봄이나 여름에 속재료인 숙주나물, 두부나 돼지고기가 쉽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제분기술이 부족하여 밀가루 자체가 고급 식재료여서 중남부 지방은 메밀만두를 주로 소비했다. 즉 현재 남쪽 지방에서 먹는 만두는 실향민의 음식에서 온 것이지, 원래 흔히 먹던 것은 아니다. 또한 메밀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도 이용했는데 밀가루를 최대한 적게 쓰려고 만두 소를 밀가루에 굴려서 만드는 굴림만두, 배추, 상추같은 커다란 채소를 만두피로 사용하는 숭채만두 등이 있었고 쌀가루 같은 여러 곡물 가루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 제국 다데슈칼리안 공후도 "15분 후 생선, 고깃국, 달걀, 붉은 고추를 넣은 생선, 수수와 완두로 만든 고기만두, 말린 쇠고기, 설익은 밤, 쌀, 꿀, 다시마, 꽃 모양으로 예쁘게 자른 문어 등 14가지의 갖가지 요리가 담긴 상을 두 개나 받았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를 보면 수수가루, 완두가루로도 만두를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후의 영향 덕분에 북부 지방에서는 만두를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남부와 달리 크기도 큼직하고 속도 터질 듯 많이 넣는 것이 특징이다. 평양식을 예로 들면, 피의 지름이 12 cm 이상 되고, 다진 김치와 돼지고기, 데쳐서 다진 숙주, 두부로 만든 속[을 꽉꽉 채워 넣기 때문에 시중 설렁탕집 뚝배기만한 그릇에 3개에서 5개만 넣어도 그릇이 꽉 찬다. 피가 시중에서 파는 가장 큰 만두피보다 1.2~1.5배 더 크다. 남자 어른 한 사람도 5개면 배부르다. 당연히 그 큰 만두는 한 입에 넣기 힘들거나 불가능하므로,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서 국물과 함께 떠먹음이 정석이다.

 

중국집 군만두


군만두와 물만두는 대부분의 중국집에서 팔고 있으며, 중국집이 아닌 분식집에서도 팔기도 한다. 중국집에서는 탕수육을 시키면 서비스로 자주 나오는데, 중국집에서 주는 군만두는 엄연히 따지면 시중에서 파는 만두를 튀긴 것이다.

중국집 스타일 군만두는 볶음밥과 함께 중식당의 기본 메뉴이자 주방장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메뉴여서 영화 올드보이에서 중국집을 찾는 단서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중국집에서 만두 빚는 것을 번거로워해 공장에서 공급받게 되면서 주방장의 '튀김기술'만 알아보는 메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간혹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에 가면 직접 만든 만두를 맛볼 수도 있고, 차이나타운 같은 곳에서는 짜장면이나 볶음밥 같은 다른 음식 안하고 만두 종류만을 만들어 파는 식당도 있다. 연남동 같은 곳에도 만두가 별도의 메뉴로 한 접시에 만 원 좀 안되는 가격으로 팔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따로 파는 메뉴는 대개 그 집에서 빚는 수제만두이다. 이런 집들은 만두가 주 메뉴인 만큼 서비스 만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중국집 만두의 평가절하는 사실 '군만두는 서비스'라는 개념으로 퍼주다보니 만두가 싼 음식으로 취급된 탓도 있다. 어차피 서비스로 줄 음식이니 굳이 공을 들일 필요도 없고, 결국 악순환이 반복된 것.

제대로 된 만두를 먹어보려면 중국식 정통 만두 전문점을 찾아가 보자. 서울에서 중국식 자오쯔를 먹어볼 수 있는 가게로 홍대 '진만두', 이태원동 '쟈니덤플링' 등이 유명하다. 연남동 쪽에도 이품교자 등 만두 가게가 몇 군데 있다. 경기도 수원시에도 남문(팔달문) 근처에 '연밀'이라는 중국식 만두집이 있다. 이 집의 육즙만두는 한 번쯤 맛볼만 하다. 또한 팔달구청과 통닭거리 부근에 '수원'이라는 중국요리점도 군만두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왔던 부산역 화교거리에 위치한 '신발원'이라는 수제 만두가게는 매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다만, 만두를 아예 메뉴에서 빼버리고 코스 요리에서만 제공하는 곳들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중화요리 대가인 이연복 셰프가 직접 밝히기를 만두를 예약제로 함에도 무척 힘들고 손이 많이 가다보니 장정 여럿이 몇 시간을 달라붙어야 겨우 만들 수 있을만큼 중노동이기 때문에 결국 만두를 (독립 메뉴로는) 팔지 않게 됐다고 한다.

 

 

특이한 만두


절에서도 만두를 만들어 먹는데, 당연히 고기는 빠지고 들깨와 숙주나물, 버섯 등을 넣는다. 절에서 승려들이 모여서 공동노동을 하는 것을 '울력'이라고 하는데, 공동음식 준비도 울력에 들어간다. 만두 울력은 주로 젊은 승려들이 한다고 한다. 젊은 승려들이 하는 이유는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서 반죽을 하고 밀대로 미는 작업이 상당히 많은 힘이 들어가서 노스님들이 만두를 만들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밀가루피가 아닌 다른 재료를 만두피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떡피를 이용해 만드는 떡만두, 배춧잎이나 생선살, 얇게 저민 전복, 감자를 이용한 만두피 등이 쓰인다. 배춧잎을 사용한 만두는 숭채만두, 생선살을 쓴 만두는 어만두라고 부르며, 후자는 궁중요리에도 속한다. 이러한 특이한 피의 만두는 화교들이 정착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간간이 보인다. 타이완에는 닭날개의 뼈를 뽑아 그 속에 볶음밥을 넣어 만드는 닭날개 만두 샤오카오지츠빠오판(燒烤雞翅包飯)이라는 길거리 음식도 있다. 유부를 이용한 유부주머니도 유명하다.

만두 안에 만두를 넣는 보만두도 있다. 작은 만두 여러 개를 큰 만두피로 감싸 내놓는 형태. 대만두라고도 한다.

궁중요리 중에는 석류탕이 있는데 석류 모양으로 빚은 만두를 끓인 만두국의 일종으로 궁중요리로 많이 먹었다고 한다. 또한, 여름철에 주로 오르던 규아상(미만두) 라는 요리가 있는데 해삼 모양으로 오이와 각종 나물, 표고버섯, 소고기로 속을 채워 빚은 만두이다. CJ의 한식브랜드인 비비고에서 규아상을 모티브로 한 만두제품인 교자 시리즈가 출시되기도 하고 현 한식조리산업기사의 출제요리 중 하나인만큼 궁중요리 중에선 좀 더 친숙한 편.

과거 궁중에는 '난만두', '숭채만두'가 진상되었다고 한다. 만두소에 계란만을 써서 만두피처럼 활용한 요리와, 배춧잎을 싸서 만든 요리다.

남은 만두소로 피 없이 밀가루에 굴려 만든 굴림만두(이북 사람들은 굴만두라 부르기도 한다)도 있다.

만두를 만들 때 모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감자만두는 경주빵처럼 꽃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들며 군만두와 손만두 모양도 다르고 쑥이나 메밀로 만들 수 있다. 메밀만두는 메밀전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소도 달라지기도 하며 2020년 4월 12일 집사부일체에서는 임지호가 미니 쑥새우만두를 집사부 멤버와 같이 만들었으며 소는 새우와 달래이다. 

계란만두 라는 만두도 있는데 계란이 속 겸 피 역할을 한다. 삶은 당면을 자르고 파, 당근과 함께 계란물에 섞은 다음 프라이팬에 원 모양으로 부치고 뒤집지 않고 반으로 접어 만든다. 

대구에는 납작만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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