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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 모더니즘 건축 아버지, 아파트 창시자, 4평 오두막, 건축 5원칙

Jobs9 2024. 2. 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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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의 '건축 5원칙'이 모두 적용된 빌라 사보아

 

르코르뷔지에 (건축가, 1887~1965), 모더니즘 건축 아버지

프랑스에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현대 건축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되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과 함께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의 방식을 확립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본명보다 더 잘 알려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이름은 필명으로, 1920년에 외할아버지의 이름 르 코르베지에(Le Corbésier)를 약간 변형해 사용했다. 당시는 이렇게 필명이나 예명을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 파리 근교 푸아시에 있는 건축물 빌라 사보아는 르코르뷔지에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쏟아부은 작품이다. 이 건물은 하얀색 기둥 위에 직사각형 상자가 살포시 얹힌 형태다. 새하얀 외관과 군더더기 없는 형태 덕분에 미니멀리즘 예술품처럼 보인다. 빌라 사보아는 현대 건축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인류의 유산이다. 르코르뷔지에 이전까지 유럽 전통 집들은 벽이 모든 건물 무게를 지탱했다. 벽은 두꺼울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집 내부 공간은 협소해졌다. 창문도 크게 낼 수 없어 채광도 열악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5원칙'을 세웠다.

①필로티

②옥상정원 ③

자유로운 평면

④가로로 긴 창

⑤자유로운 입면.

 

빌라 사보아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적용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해 기둥(필로티)을 만들었다. 기둥 위에 건물을 얹었다. 기둥이 집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벽은 자유를 얻었다. 빌라 사보아 외벽은 간결하고 가볍다. 창문도 크게 냈다. 집에서도 햇볕을 넉넉히 맞게 됐다. 전통 주택의 넓은 마당은 옥상정원으로 대체했다.

빌라 사보아는 2차 세계대전 중 크게 파손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겨우 형태만 유지한 채 창고로 쓰였다. 1960년엔 재건축 바람이 불어 빌라 사보아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전 세계 건축가들이 빌라 사보아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청원을 넣었다. 결국 빌라 사보아는 재건됐고,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빌라 사보아 외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은 16개다.

 

르코르뷔지에의 후기작인 롱샹성당

르코르뷔지에는 시계 산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시계 장식을 배웠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라는 뜨거운 엔진을 달고 미래로 질주했다. 공예보다는 공업, 토목, 건축의 미래가 밝았다. 미술학교 교사는 르코르뷔지에 재능을 알아보고 건축을 권했다. 스승의 설득으로 르코르뷔지에는 전공을 건축으로 바꾸며 190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오귀스트 페레 건축사무소 인턴 자리를 얻었다. 페레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한 건축 양식을 개척한 인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스승의 영향으로 콘크리트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년간 인턴 생활을 마치고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긴 여행을 위해 짐을 싼다. 반년 동안 보헤미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터키, 그리스 등을 방문해 생경한 문화와 건축을 관찰했다. 그리스에서 결정적 순간을 맞았다. 투명한 빛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파르테논 신전은 르코르뷔지에의 삶을 바꿨다. 단순하지만 견고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위엄을 휘감은 파르테논 앞에서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이상을 본다. 그는 며칠이나 아테네에 머물며 파르테논을 찾았다. 자신만의 파르테논 신전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여행을 마친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가 건축 이론을 세우는 데 골몰했다. 30세가 되던 1917년 프랑스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1920년대 파리는 예술가들의 둥지였다. 르코르뷔지에는 화가들과 어울리며 스위스에 있을 때처럼 미학 이론에 매달렸다. '퓨리즘(Purism·순수주의)' 운동을 창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는데, 핵심은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퓨리즘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퓨리즘은 '기계 미학'으로도 불린다. 당시 유럽은 과학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할 때마다 세상도 변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기계의 효율성, 명확성에 매료됐다. 건축도 기계 시대에 보폭을 맞춰야 한다고 여겼다. 명확함, 간결함,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모더니즘 건축' 청사진을 견고하게 그렸다. 르코르뷔지에는 드디어 1922년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세계 최초의 아파트로 평가받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인 동시에 이론가, 철학자, 사상가, 정책자,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치열하게 건축 철학과 이론을 정리하고, 이상적인 도시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르코르뷔지에가 남긴 저서만 50여 권에 달한다. 그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했다. 집 역시 자동차, 비행기, 철도처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쑥대밭이 됐다. 산업화로 대도시만큼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시골 농부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려고 도시로 왔다. 파리 인구는 팽창했다. 주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도시 곳곳에 빈민촌이 형성됐다. 하층 계급 노동자들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견뎠다.

르코르뷔지에는 하층민을 위한 집과 도시 모델을 고안했다. 그는 수직 도시 청사진을 그렸다. 내용은 이렇다. 파리 구도심에 60층 고층 오피스 빌딩들을 세운다. 빌딩 숲 한가운데 교통센터를 구축해 기차역, 버스터미널을 만든다. 수직으로 솟은 빌딩 덕분에 절약된 용지엔 녹지를 조성한다. 상업지구 인근엔 시청, 법원 등 공공기관을 세운다. 더 바깥엔 실용적인 형태의 공동주택을 조성한다. 상업, 공공, 주거지구가 계획적으로 분리된 이 청사진은 오늘날 현대도시와 닮았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구상은 거절당했다. 도시 개발 결정권자들은 가난한 유대인, 상경한 농민, 하층 노동자를 위해 파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낙담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도시 계획안을 업데이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럽은 또 폐허가 됐다. 르코르뷔지에에게 도시 재건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그는 적은 용지에 많은 사람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주거지를 고안했다. 그렇게 1952년 마르세유에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세워졌다. 가로 137m, 높이 70m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337가구로 구성된 이곳엔 1600여 명이 살 수 있다. 건물 내부엔 상점, 세탁소 등 편의시설도 있다. 옥상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성인이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마련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로 평가받는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 서민들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아파트라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 도시계획처럼 유니테 다비타시옹 역시 거센 공격을 받았다. '빈민층이 모여 사는 곳'이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깎아내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미친 건물'로 취급하며 당국에 철거까지 요구했다. 결국 르코르뷔지에가 꿈꿨던 아파트 유토피아는 서유럽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가 머물렀던 4평 오두막

 

르코르뷔지에의 이상을 과감히 받아들인 나라는 한국이다. 1963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마포아파트가 준공했다. 한국 최초 단지형 아파트였다. 마포아파트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그대로 본떴다. 준공식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유력 인사가 참석했다. 아파트는 근대화 상징으로 위상을 떨쳤다. 마포아파트 이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현재,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서울에서 오히려 인간이 기계다. 평범한 사람이 기계처럼 일해도 내 집 마련 꿈을 이루긴 쉽지 않다. 주택청약은 로또가 됐고, 아파트는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됐고, 집값 잡기는 정부 숙원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아파트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기능적으로만 생각해보자. 인구밀도 높은 서울에서 아파트보다 나은 주거 형태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파트는 다른 형태 주거지보다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다. 매달 일정한 관리비만 지불하면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다. 주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고, 채광과 환기 시스템도 뛰어나다. 기능이 전부는 아니다. 웬만한 신축 아파트 단지에는 산책로, 공원, 독서실, 어린이집, 카페 등 정신을 고양하는 편의시설이 가득하다. 르코르뷔지에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하며 꿈꿨던 세계는 현재 서울 대단지 아파트와 얼추 비슷할 테다. 

한국 외에도 르코르뷔지에의 청사진을 받아들인 나라는 많다.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대규모 도시 개발로 국가 위상을 높이려 했다. 북서부 도시 찬디가르를 행정 도시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 임무를 르코르뷔지에에게 맡겼다. 1951년부터 10년 넘게 찬디가르 개발을 맡은 르코르뷔지에는 국회의사당, 종합청사, 대법원 등 굵직한 건물을 지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찬디가르 도시 전체를 디자인했다. 그는 인도 프로젝트를 마친 후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가 직접 지은 4평 오두막이 있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여름휴가 때마다 이 오두막에서 지냈다. 그는 오두막을 '나의 궁전'이라고 말했다. 지중해 나라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미래를 설계했던 그는 결국 지중해 품속에서 여정을 마쳤다. 4평짜리 궁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르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루브르궁에서 치러졌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해 싸웠다." 르코르뷔지에는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두 번의 폐허를 목격했다. "집은 기계"라고 선언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기계를 선물하려 했다. 그의 시도는 종종 오해받고 모욕당했다. 하지만 기계처럼 묵묵히 전진하고 할 일을 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꿋꿋이 폐허 위에 주춧돌을 놨다. 오늘날 우리는 그 주춧돌 위에 피어난 세계에 산다.

 

 

평가
20세기에 기능적이고 위생적이며 편안한 생활 공간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의 설계와 이론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건축은 비판 역시 받았다. 그가 죽고 한참 후에 기존 건축은 지루하다고 까던 '로버트 벤투리'에 의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 전체를 까기 시작한다.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 건축가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적인 명언 "Less is More"를 비꼬는 그의 명언 "Less is Bore(간결한 것(단순한 것)은 (이제)지루하다."에 잘 나타나있다.
코르뷔지에 역시 도시계획 등 여러 사상과 이론 부분에서 기능만능주의로, 비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받는다. 여기엔 당시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한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주거환경은 위생적, 기능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태였고, 전쟁과 도시인구급증으로 인해 주택의 공급이 수요를 도저히 뒷받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기능적인 주거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코르뷔지에는 집이 살기 위한 기계라 주장하며 기능이 중심이 된 건축을 지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후기 그의 건축물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거장으로서 심미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건물 또한 뛰어나게 설계한 사람이었다. 

이미 도시가 포화 상태에 이른 시점에서도 많은 건축가들이 단순히 많은 건물들을 싸고 편하게 짓기 위해 그의 이론과 양식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고 결국 오늘날 현대 도시가 갖고 있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비난받는 것이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코르뷔지에의 방법론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은 적다. 사실 이는 코르뷔지에 뿐 아니라 미스 반데어로에 등 도시형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비난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편견과 달리 코르뷔지에는 단독주택을 외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기한 시트로앙 주택과 사보아 빌라, 그리고 그가 말년을 보냈던 4평짜리 카바농 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코르뷔지에가 추방하고자 했던 것은 비실용적인 장식만 가득하고 실용성이 전무한 반근대적 건축물들, 즉 전통이란 보호막 아래에서 보호받던 전근대성이었다. 

결론적으로 코르뷔지에는 수많은 도시인들을 괴롭히던 시대의 문제점을 명쾌하게 해결했지만 동시에 층간소음 등을 비롯한 새로운 숙제를 남겨주었다고 보아야 옳다. 새 숙제를 푸는 것은 후대의 책임인 것이다. 도시 전역에 아파트가 가득한 서울과 평양에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유네스코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아서 일본의 국립서양미술관 같은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는 대륙을 넘는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Le Corbusier's Cabanon seaside cabin is his smallest building on the World Heritage List

 

Le Corbusier, who is one of the 20th century's most admired architects and a key member of the Modernist movement, designed the cabin as a seaside escape away from Parisian city life.

For 18 years Le Corbusier spent every August at the cabin, built in 1951 in Roquebrune-Cap-Martin – a small enclave between Monaco and Manton on the south coast.

Although the Cabanon resembles a traditional Canadian log cabin from the outside, it was carefully designed along modular principles developed by Le Corbusier.

Made from prefabricated parts, the design is based on the Modulor – an anthropometric scale of proportion developed by the architect in response to the movement of the human body.

The cabin contains a single 3.6 by 3.6-metre wood-lined room, with no kitchen or indoor washing facilities.

Instead, it was attached via an internal partition to the cafe next door, L'Etoile de Mer, which was owned by the Rebuto family. To pay for the land he built his cabin on, Le Corbusier also built five holiday homes for the family called Unités de Camping

 

Resembling a row of gypsy caravans in bright primary colours, these houses were more in keeping with Le Corbusier's Brutalist style, offering a greater contrast to the rustic log cabin next to them.

The cabin is the smallest of Le Corbusier's projects to be added to UNESCO's World Heritage List of internationally significant architecture. It is also the most tied to the architect's personal life.

Photograph by Flickr user ofhouses.com

It sits just to the east of the E-1027 house by Irish designer Eileen Gray, a crisp white Modernist building that Le Corbusier visited regularly as a guest of Gray's ex-lover Jean Badovici. Le Corbusier painted big, colourful murals on the white walls of the house, infuriating Gray. 

This act has been widely described as vandalism, and an example of misogyny in architecture. However, some commentators believe the reverence that Le Corbusier is held in has also helped with the preservation of Gray's design. It remain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moments in European Modernism. 

 

Le Corbusier also supposedly designed the chapel of Notre Dame du Haut in Ronchamp – one of his most famous buildings – while staying at the Cabanon, and died swimming off the coast nearby in 1965 at the age of 77. 

The Cabanon, Unités de Camping, and E-1027 were later collectively declared a "Site Moderne" – a designated area of cultural impor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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