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시 시대
고대의 러시아 초원지대에는 사르마티아인, 고트족, 흉노족, 불가족, 아바르족, 카자르족 등이 차례로 잠시 머물기는 했으나 AD 8세기 경부터 유입된 동슬라브족이 등장한 이후에야 비로소 주류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후 서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바이킹족의 침략은 러시아 지방까지도 이어졌는데 이들은 단순한 약탈행위 뿐만 아니라 특유의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 및 이슬람 제국과도 교역을 활발히 벌이며 세력을 넓혔고 마침내 슬라브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후대의 러시아 연대기에 기록된 최초의 군주인 류리크도 바이킹의 일족이라고 한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류리크는 바이킹의 일족인 루스족의 수장으로 AD 862년 노브고로트 사람들의 요청으로 노브고로트공(公)이 되어 그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류리크는 러시아 역사(혹은 우크라이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군주이며 AD 1598년 표트르 1세 이후 혈통이 단절될 때까지 모든 러시아의 군주들을 배출한 류리크 왕조의 시조가 된다.
AD 879년 류리크가 죽고 그의 아들인 이고리가 너무 어려 동생인 올레크가 일족의 수장으로 후계자가 되었는데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하고 근거지를 노브고로트에서 키예프로 옮기면서 키예프 공국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루스 부족의 이름을 따서 키예프 루시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를 본격적인 러시아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AD 912년 올레크가 죽자 이고리가 정당한 후계자로서 새로운 군주가 되어 동슬라브족을 지배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차례나 침략하며 동로마 황제로부터 공납을 받아내었다. 이고리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재위 AD 945년 ~ 972년)에 이르러서는 동슬라브족을 완전히 통합하고 돈강과 볼가강 유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블라디미르 1세(재위 AD 980년 ~ 1015년) 대에 이르러 키예프 루시는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는 AD 988년 당시 비잔틴 영토인 크림의 헤르소네스를 점령하였고 동로마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 바실리우스 2세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한 것을 계기로 그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새로운 주교구 설립에 대한 허락을 받으면서 동방정교회를 국교로 제정하였다. 이 때문에 동방 정교회에선 성인으로 받아들여져 성공(聖公)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블라디미르 1세는 영토의 주요도시들을 12명이나 되던 아들들에게 순서대로 분배하며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키예프를 차지한 맏아들은 대공(velikiy knyaz)으로서 키예프 루시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였고 나머지 아들들은 공작(knyaz)이 되었다. 이로서 키예프 루시는 키예프 공국을 정점으로 각 도시들이 그 아래에 위한 위계구조를 지닌 연방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루시의 봉건제는 독특하게도 대공(velikiy knyaz)의 지위를 형제가 순차적으로 계승하면서 연쇄적으로 나머지 형제들이 차례로 지위가 이동되는 윤번제(로터제)가 실시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아들 중 투로프의 스뱌토폴크와 로스토프의 야로슬로프가 블라디미르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기 때문에 AD 1015년 임종시 이 둘을 모두 배제한 채 나중에 성인으로 추증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보리스와 글렙 형제를 대공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블리디미르 1세가 죽자 스뱌토폴크는 형제인 보리스와 글렙, 스비아토슬라프를 죽이고 키예프를 장악하였고 이후 노브고로트의 부섭정으로 있던 야로슬라프가 스뱌토폴크를 키예프 대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란을 일으켜 스뱌토폴크를 폴란드로 추방했다. AD 1018년 스뱌토폴크가 자신의 장인인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1세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를 탈환하고 키예프 루시의 대공이 되었으나 폴란드 군이 물러가자 AD 1019년 노브로고트에서 세력을 회복한 야로슬라프 1세가 스뱌토폴크를 물리치고 새로운 대공이 되었다.
야로슬라프 1세는 재위기간 동안 유목민족인 페체네그족을 정벌하고 영토를 발트해 연안까지 넓혔으며 인근 리투아니아인과 에스토니아인 그리고 핀란드 여러 부족들을 압박하면서 키예프 루시를 최전성기로 이끌었다.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 최고의 법전인 "야로슬라프 법전"을 편찬하고 그리스어로 된 종교서적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으며 화폐 제조 등을 통해 키예프 루시의 문화적 수준을 한차원 높혔다. 이 때문에 야로슬라프 1세에게 현명공(賢明公)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의 사후 다섯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하면서 4명 아들로 하여금 맏형인 이자슬라프에게 복종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AD 1054년 그가 죽자 곧바로 내란이 발생하고 말았다. 키예프 대공 지위는 항렬에 따른 윤번제에 의해 계속해서 계승되었으나 일부 도시들이 지정된 대공을 새로운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공위 상속자체가 무의미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AD 1097년 키예프 루시의 모든 제후들이 세습받은 토지를 영지로 분할하기로 결정하고 만다.
AD 1113년 야로슬라프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2세가 새롭게 키예프 루시의 대공이 되면서 분열된 키예프 루시를 다시 하나로 모으기 시작하였다. 블라디미르 2세는 어머니가 동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모노마흐의 딸이었으므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블라디미르 2세는 대공이 되기 이전 지위인 체르니고프공 시절부터 분열된 키예프 루시의 여러 도시간의 분쟁에 적극개입하여 그들 사이의 전쟁을 막아내면서 그들 사이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항렬에 의해 AD 1113년 정식으로 대공이 되자 본격적으로 각 도시들을 복종시켜 키예프 루시를 국가로서 재통합하였다. AD 1061년 이후에는 남쪽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인 폴로베츠족을 토벌하기도 하는 등 키예프 루시의 마지막 강력한 대공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블라디미르 2세는 클랴즈마 강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블라디미르 도시를 건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렵게 재통합된 키예프 루시였지만 AD 1125년 블라디미르 2세가 죽자 곧바로 다시 분열하였고 키예프의 종주권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갈리츠, 노브고로드, 수즈달 등의 도시들이 독자적인 통치권을 확립하며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AD 1169년 수즈달 공국의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가 키예프를 약탈하고 대공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한 키예프 루시의 연방체제는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이후 키예프를 대신하여 블라디미르가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자신이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어 최고 수장으로 군림하였다.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의 동생인 프세볼로트 3세가 AD 1176년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위를 이어받은 이후에는 더욱 강력한 군주제를 구축하며 키예프 루시 제후 중 가장 큰 세력을 갖게 되었는데 역사적으로는 이때부터를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키예프 공국을 대신하여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하였지만 그 영향력이 키예프 루시 전역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서부에서는 AD 1199년 볼리니아 공국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 공국을 병합하여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을 세우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북부에서는 고도인 노브고로드가 이미 AD 1019년 야로슬라프 1세 시절부터 부여받은 자치권을 바탕으로 시의회인 베체를 중심의 공화제를 성립시키며 북유럽과의 교역의 중심지로서서 번영하고 있었는데 키예프 공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AD 1136년 키예프 공국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하여 키예프 루시는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된 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갈리치-볼리니 공국,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살아가게 된다.
몽골지배(타타르의 멍에) 시기
중국 북부초원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몽골족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몽골제국 제2대 대칸인 오고타이 칸의 명령을 받아 유럽원정군을 이끌고 AD 1236년 볼가강을 건너 침입하면서 키예프 루시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중심지였던 키예프는 폐허가 되어 있었고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내분을 겪고 있었으며 북부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북유럽과의 통상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결국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만의 힘으로 몽골군을 상대해야 했지만 이미 13년전인 AD 1223년에 몽골군의 정찰대에게 칼가강 전투에서 대패한 적이 있었다. 다시 나타난 몽골군은 이전보다 더 큰 병력을 이끌고 왔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원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키예프 루시의 각 도시들은 이에 맞설 방법이 없었다. 결국 몽골군의 침략이 AD 1238년부터 AD 1240년까지 이어졌고 볼가리아, 랴잔, 로스토프, 수즈달 등의 키예프 루시 주요도시 대부분이 몽골군의 약탈과 파괴를 겪고 말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건설하게 되는 민다우가스가 몽골군의 서진을 막아내면서 키예프 루시 남서부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AD 1349년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분할되어 갈리치아는 폴란드에게 합병당하고 그 이외의 키예프 루시 남서부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북부의 노브고로드 공화국만은 외진 지형의 이점 덕분에 몽골군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AD 1240년 스웨덴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 이때 당대 블라디미르 대공인 야로슬라프 2세의 아들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군사지휘를 맡아 스웨덴군을 격파하였지만 오히려 귀족들의 시기를 받아 추방당했다. 그러나 AD 1241년 발트해 연안을 로마카톨릭교로 개종시키려는 튜튼기사단과이 진격해오자 이들과의 싸움을 위해 되돌아올 수 있었고 노브고로드 시민들의 기대대로 AD 1242년 추트스코예 호와 프스코프 호 사이의 좁은 수로에서 벌어진 '빙상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알렉사드르 넵스키 덕분에 이 지역의 동방정교회가 수호되었기에 그는 AD 1547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넵스키도 몽골의 지배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협력하였는데 그 덕분에 AD 1252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키예프 루시 제후들과 몽골 사이의 분쟁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으며 키예프 루시가 더이상의 몽골군의 파괴와 약탈을 겪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AD 1259년에 벌어진 노브고로드 시민의 반몽골반란에서는 오히려 그 진압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한편 키예프 루시 정복을 마무리한 바투는 동유럽까지 진출하여 헝가리와 폴란드를 유린하였으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면서 되돌와야했고 이후 몽골제국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킵차크 한국을 건국하였다. 바투는 키예프 루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통치하기보다는 기존 제후들의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신에 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했으나 키예프 루시 제후들이 그 지위를 후계자에게 넘기기 위해서는 몽골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했고 몽골의 종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철저한 응징을 했기 때문에 키예프 루시의 각 도시들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몽골의 지배는 약 250년간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유럽과 단절된 채 시대적 흐름이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데 러시아 역사에는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며 암흑기로 취급하게 된다.
AD 14세기말 모스크바 공작 드리트리 2세에 의해 키예프 루시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였다. 드리트리 2세는 킵차크 한국의 칸을 설득하여 수즈달 공국이 보유하였던 블라디미르 대공의 칭호를 넘겨받은 후 로스토프와 랴잔의 군주를 굴복시키고 칼리치와 스타로두프 군주를 폐위시키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이후 기회를 엿보던 드리트리 2세는 킵차크 한국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마침내 정기적으로 바치던 공물납부를 거부하고 AD 1378년 보자 강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 이에 대한 응징을 하고자 킵차크 한국의 서쪽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던 몽골장군 마마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AD 1380년 돈 강 근처에서 벌어진 쿨리코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몽골의 지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AD 1381년 마마이 장군을 물리치고 내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킵차크 한국의 토크타미시가 AD 1382년 침공하여 모스크바를 약탈하고 키예프 루시 전역을 유린하면서 다시 몽골의 지배를 다시 받고 만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러시아 통일
모스크바 대공국의 등장
몽골의 침략 때문에 많은 키예프 루시 도시들이 파괴당했으나 이 중에는 복구되어 다시 번창한 곳도 많았고 새롭게 기회를 얻어 번영을 이룬 곳도 있었다. 특히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도시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모스크바와 같이 그 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도 있었다.
모스크바는 수즈달 공국의 조그마한 정착촌이었으나 AD 13세기 후반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아들인 다닐이 이곳을 영지로 부여받으면서 공국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는 주요교역의 교차점으로서 상업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AD 1326년에는 동방정교회의 수도대주교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특히 대대로 모스크바 공국의 군주들이 킵차크 한국에게 협조한 대가로 블라디미르 대공의 칭호를 얻으면서 대공국으로 승격하였고 대공의 칭호를 바탕으로 킵차크 한국에게 바치는 키예프 루시의 공물들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며 경제적,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경제력을 앞세워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며 그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는데, 이 정책은 다닐의 뒤를 이은 유리와 이반 1세(재위 AD 1328년~1340년), 세묜(재위 AD 1341년~1353년), 이반 2세(재위 AD 1353년~1359년)로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드리트리 2세(재위 AD 1359년~1389년) 시설에는 킵차크 한국을 물리치고 일시적으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정도가 되기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몽골군의 반격을 받고 모스크바도 약탈의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통일
몽골의 재점령 이후 내전을 겪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세력확장이 일시적으로 주춤하였지만 이반 3세(재위 AD 1440년~1505년)가 새로운 모스크바 대공이 되면서 다시금 그 영토가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반 3세는 야로슬라블(AD 1463년)과 로스토프(AD 1474년), 트벨리(AD 1485년)를 차례로 합병시켰고 AD 1478년에는 북부의 강국이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마저 병합하였으며 나아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를 받던 남서부 지역까지 세력을 뻗치면서 러시아의 영토적 통일을 거의 완성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세력을 바탕으로 이반 3세는 AD 1480년 이미 쇄락해버린 킵차크 한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또한 AD 1472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스스로를 AD 1453년 멸망해버린 동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동방정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서 선언하면서 외교문서에 '차르(tsar)'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르는 로마제국의 '카이사르(Caesar)'로부터 유래한 말로 황제를 의미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잇는 제3의 로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의식 속에서 동로마 제국의 ‘쌍두의 독수리’ 문장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새 법전을 발표하고 동로마 제국의 의식을 도입하였으며 전제군주제를 확립하고 호화로운 궁전과 사원을 건립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이반 3세는 스스로를 독재자라고 칭하였지만 러시아 역사가들은 이반 3세에게 대제의 칭호를 선사하였다.
이반 3세의 정책은 그의 아들인 바실리 3세 시절에도 이어져 프스코프, 랴잔를 차례로 병합하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부터 스몰렌스크를 되찾아왔다. 이렇게 하여 흩어졌던 러시아를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작업이 완수되었으며 군주제 또한 대폭 강화되었다. 하지만 바실리 3세가 AD 1533년에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의 아들 이반 4세만을 남기고 사망하였고 어린 아들의 섭정을 맡았던 대공비 엘레나 또한 AD 1538년에 사망(독살 의혹이 있음)하면서 이러한 노력에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동안 위축되었던 대귀족(보야르)들이 권력을 장악한 채 어린 이반 4세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뇌제 이반 4세와 전제군주제의 성립
불우한 어린시절과 차르 즉위
AD 1530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와 대공비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반 4세는 AD 1533년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이 되어 대리통치하였으나 그녀마저 AD 1538년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반 4세는 8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또한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마저 수도원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비록 명목상 대공의 위치에 있었지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없이 외롭고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보야르들의 꼭두각시가 된 채 권력을 둘러싼 대귀족들의 암투를 여과없이 목격하였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성격은 비뚤어지고 포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야르들은 세습된 대토지를 바탕으로 주요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이반 4세의 존재자체를 무시하며 서로 권력을 장악하려 다투기만 하였다. 이렇게 대공의 존재가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10년간 혼란기를 거치자 역설적으로 통합된 국가권력에 대한 요구가 강해졌는데 중앙의 보야르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이반 4세의 존재가 필요했고 지방귀족(드보랸)들도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 줄 통치자를 원했다.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AD 1546년에 이반 4세는 공식적으로 친정에 임할 것을 선언했고 이듬해 1월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뤘다. 이때부터 이반 4세는 마카리 대주교의 조언에 따라 대공이란 칭호 대신 이반 3세 시절 이미 사용한 바 있는 '차르'라는 호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반 4세 이후로 모스크바 대공국을 '루스 차르국' 혹은 '모스크바 차르국'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반 4세는 같은해 2월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시아와 결혼하면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행복함을 맛보며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되었다.
통치 전반기
이반 4세는 AD 1549년 보야르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항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 상인과 도시자유민을 모두 소집한 전국의회(젬스키소보르)를 소집하였다. 이곳에서 이반 4세는 보야르들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였으나 이를 관대히 용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차르로써의 권위를 세우며 보야르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킵차크 한국의 후예 중 하나인 카잔 한국에 대하여 직접 총 3차례(AD 1547년, AD 1549년, 1552년)에 걸친 원정을 실시하여 병합하는데 성공하였고 AD 1556년에는 또다른 킵차크 한국의 후예인 아스트라한 한국마저 멸망시켰다. 이 덕분에 이반 4세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 오히려 타타르족을 대대적으로 정벌하고 볼가강 지배권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AD 1558년부터는 발트해 연안을 점령하기 위해 리보니아 전쟁을 시작하였다. 리보니아는 튜튼기사단 휘하의 리보니아 기사단(검의 형제 기사단)이 자치령으로 통치하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이반 4세에게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갔으나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트해 진출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스웨덴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가세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24년동안이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져갔다. 결국 아무런 실익없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국력만 소모시킨 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중재로 휴전을 체결해야만 했다. 또한 리보니아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탓에 남부의 크림한국과 동부의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역병과 기근이 이어지면서 이반 4세의 인기가 곧두박질치기 시작하면서 포악한 성격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후반기 공포정치
이반 4세는 AD 1553년 죽음까지 생각하며 생후 5개월된 아들 디미트리를 후계자로 내세울 정도로 중병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회복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가 이복형인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음을 알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들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하지는 않았지만 이후로 의심병이 생겨 걸핏하면 화를 나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AD 1560년 사랑하던 왕후 아나스티아시가 죽자 이반 4세는 거의 미치광이 수준까지 이르러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소리치고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반 4세에게 붙은 뇌제라는 별칭은 공포 혹은 잔혹으로 번역되는 '그로즈니'를 의역한 말인데 이때부터의 통치때문이었다.
이반 4세는 우선 AD 1553년 당시 쿠데타를 계획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 그리고 이복형 블라디미르를 비롯한 그 친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보야르와 드보랸을 가리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두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혹하지만 영민했던 이반 4세는 단순히 귀족들을 숙청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구축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반 4세는 AD 1564년 최측근만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떠나 알렉산드롭스키 성에 칩거하면서 보야르의 정권위협 때문에 더이상 통치하기 어렵다는 서한을 모스크바의 자유민과 성직자에게 보냈다. 이러한 이반 4세의 퇴위위협에 결국 보야르들이 굴복하면서 차르의 절대권을 승인받게 되었다.
모스크바로 되돌아온 이반 4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재판없이 사람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선포하고 러시아 북동부의 광활한 토지의 소유권을 일체 몰수하여 차르의 직할 영지인 '오프리치니나(oprichnina)'로 만들었다. 아울러 오프라치니나의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오프리치니키(oprichnik)'라는 이름의 군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들은 검은 옷과 검은말을 타고 다니며 이후 10여년 동안 이반 4세의 공포정치의 주역이 된다. 이들은 오직 이반 4세에게만 복종하며 이반 4세의 눈에 거슬리는 경우에는 귀족이건 농민이건 가리지 않고 약탈하고 학살했는데, 그 방법이 매우 잔인하여 사람들을 끓는 물에 삶거나 긴 꼬챙이로 꿰거나 기둥에 묶고는 통닭 굽듯 천천히 돌려가며 굽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프리치니키의 학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AD 1570년에 자행된 노브고로드 학살로 무려 1,500명의 보야르와 수많은 평민들이 살육당했다고 한다.
이반 4세의 공포정치는 그의 권력에 도전하는 귀족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성과도 있었지만 행정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를 초래하여 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농토를 찾아 이동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반 4세의 광기가 심해지면서 성격이 점점더 난폭해졌고 급기야는 AD 1581년 임신한 황태비가 얇은 옷을 입은 것을 보고는 복장이 경박하다며 마구 때려 유산시키기까지 하였다. 분노한 황태자 바실리가 아버지 침실로 뛰어들어 저주를 퍼붇자 부지깽이로 아들을 사정없이 내리다가 피투성이로 만들었고 이에 정신차린 이반 4세가 피흘리는 아들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지만 결국 3일 뒤 죽고 말았다.
(일리야 레핀의 AD 1885년작)
비록 이반 4세는 왕후인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얻었으나 맏아들 디미트리는 유모의 실수로 이미 익사한 상태였고 이번에는 둘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바실리마저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반 4세의 남은 아들은 셋째 표도르와 막내 드미트리가 남았지만 막내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도르가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몹시 병약했고 정신지체자라는 의심도 받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앞날은 먹구름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결국 시름에 잠긴 채 고독한 말년을 보낸 이반 4세는 황태자 바실리가 죽은 지 3년 뒤인 AD 1584년에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란시대와 로마노프 왕조의 탄생
연이은 가짜 드미트리 반란
이반 4세의 뒤를 이어 표도르가 즉위하여 표도르 1세가 되었으나 통치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처남이었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맡았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AD 1590년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대외무역을 증진시켰으며 많은 방어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는 등의 유능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표도르 1세의 이복동생인 드미트리가 AD 1591년에 살해당하고 AD 1598년 표도르 1세마저 후사없이 죽자 오랫동안 러시아를 다스렸던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었고 보리스 고두노프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가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 사람들을 추방하고 지나치게 관료(젠트리)와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많은 반발을 사고 말았다. 더욱이 AD 1601년부터 3년간 대기근이 몰아닥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자 곳곳에서 불만을 높아져 갔고 이에 따라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AD 1613년까지 이어지는 '동란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인기가 떨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류리크 왕가만이 진정한 지배자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반 4세의 막내아들 드미트리 왕자가 사실은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문을 믿기 시작하자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라는 수도사가 스스로를 드미트리 왕자라고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가짜 드미트리 왕자의 반란은 폴란드의 적극적인 지지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는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다. 이에 놀란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의 숙부를 데려와 그가 가짜임을 밝혔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를 지지하는 세력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 자신도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진짜 드미트리 왕자라고 믿었다고 한다. 오합지졸이 모인 것에 불과하였던 반란군이었기 때문에 보리스 고두노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하였지만 AD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급사하자 사태가 급변하여 모스크바는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는 귀족들의 추대로 차르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초창기 열광이 지나가자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의 무능한 통치에 실망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가짜라는 의심이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AD 1606년 모스크바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는 근위병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고리 오트레피에브가 죽은 이후 폭동의 주역이었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였지만 그 역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 있었음에도 모스크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진짜 드미트리가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계속되었고 이점을 이용한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 반란이 AD 1607년에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임은 물론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와도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역시 엄청난 사람들의 지지속에서 모스크바로 진격하였으나 바실리 슈이스키의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모스크바 근방의 츠시노로 물러난 후 자신만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츠시노의 찬탈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AD 1610년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도 암살당하면서 반란은 곧바로 종식되고 만다. AD 1611년에도 세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이반고르드에서 나타났고 프스코프에서 즉위하여 '프스코프의 찬탈자'라고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폴란드 개입 극복과 로마노프 왕조의 탄생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한 이유는 류리크 왕조가 단절된 이후 차르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와 바실리 슈이스키 모두 통치에 실패하여 러시아 사람들이 현 정부에 대해 깊은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가짜 드미트리 반란들이외에도 북부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독자적으로 이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스웨덴의 힘을 끌여들였고 이를 빌미로 폴란드왕 지그문트 3세도 러시아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3세는 두번째 드미트리의 반란이 한창이던 AD 1610년 폴란드 군을 파견하였다. 폴란드 군은 불과 4천명의 훗사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클루쉬노 전투(혹은 쿠쉰 전투)에서 약 48,000명에 달하는 바실리 슈이스키와 스웨덴 연합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다. 이에 놀란 모스크바 귀족들은 바실리 슈이스키를 폐위시키고 지그문트 3세의 아들인 부아디수아프를 새 차르로 지명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AD 1610년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암살당하자 지그문트 3세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자신이 모스크바를 직접통치할 것이고 이를 위해 폴란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분노한 모스크바 사람들이 단결하여 폴란드 군대에 대항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AD 1612년 폴란드 주둔군을 모스크바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인 AD 1613년에 전국회의(젬스키소보르)가 소집되었고 새로운 차르로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 출신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류리크 왕조 단절이후 벌어진 동란시대가 종식되고 새롭게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반 4세의 전제군주제를 계승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대공 중심의 연방제인 키예프 루시가 아닌 차르가 다스리는 진정한 통일국가로서의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